위대한 제국 후백제의 영토

소오강호 2014. 2. 4. 12:38
秦置甄城县,治今山东鄄城县北12公里旧镇,以古甄邑得名,属东郡。西汉改甄城县为鄄城县,属济阴郡。

 西汉改甄城县为鄄城县,属济阴郡

중국백과

진나라가 견성현을 설치했다. 지금 산동견성현북12km거리에 있다.

중국기록에 백제는 요동의 천리동쪽에 있다가 요서군까지 점령했다고 한다. 금나라기록에도 요하를 건너 활주를 침공했다고 하니 고대의 요하가 황하임을 알수 있다. 따라서 요동의 동쪽 천리는 대략 견성현일대가 맞다. 백제가 최대 서쪽진격지점은 상곡인데 상곡에 백제의 성인 진씨가 남아있다는 기록때문이다. 송나라기록에는 백제가 북평을 차지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북평은 지도상의 요하라고 쓴 곳의 서쪽 지금 섬서포성현일대이다.

남으로 금구현(金溝縣) 경계까지 38리,

본래 백제(百濟)의 완산(完山)이며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신라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완산주(完山州)를 두었다가 동왕 26년에 주를 폐지하고, 신문왕(神文王) 때 완산주(完山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 15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어 9주를 완비하였다. 효공왕(孝恭王) 때 견휜(甄萱)이 여기에 도읍을 세우고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고려 태조 19년에 신검(神劍)을 토벌하여 평정하고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하였다가 23년에 다시 전주(全州)라 하였다. 성종(成宗) 12년에 승화절도안무사(承化節度安撫使)라 하였고, 14년에 12주에 절도사를 두고 순의군(順義軍)이라 하여 강남도(江南道)에 예속시켰다. 현종(顯宗) 9년에 안남대도호부(安南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뒤에 다시 전주목(全州牧)으로 고쳤다

【군명】 견성(甄城)ㆍ완산(完山)ㆍ비사벌(比斯伐)ㆍ안남(安南)ㆍ승화(承化)ㆍ순의군(順義軍).

. 주 나라의 조상이 일어난 곳이요, 일도의 으뜸이다

만경대(萬景臺) 고덕산(高德山) 북쪽 기슭에 있다. 돌 봉우리가 우뚝 솟아 마치 층운(層雲)을 이룬 듯이 보이는데, 그 위에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사면으로 수목이 울창하며 석벽(石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서쪽으로 군산도(群山島)를 바라보며 북쪽으로는 기준성(箕準城)과 통한다. 동남쪽으로는 태산(太山)을 지고 있는데 기상이 천태만상이다.

 봉황암(鳳凰巖)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그 아래에 못이 있다

제남정(濟南亭) 성의 남쪽 시내 위에 있다.

전주부(全州府)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 전라도(全羅道) >

 

금구현에는 거야폐현이 있는데 거야현은 중국백과에 허저시의 동남쪽에 있는 거야현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공교롭게도 허저시의 동남쪽에는 태산이 지금도 있다. 泰와 太가 한자가 다르지만 고대에는 발음이 비슷하면 한자를 섞어 쓰기도 했다.

 

견성현일대에는 황성이라는 지명도 있고 서주, 봉황,기산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주나라의 시조는 직산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전주에 직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국유사에는 직산이 백제의 위례성이다라고 했다. 지금은 직산과 위례가 다른 곳인줄 알지만 원래 두 지명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지명조작을 하면서 고려후기에 직산과 전주가 분리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제남시(내가 조선전주라고 증명한 곳)의 고지도중에 직산이 그려진 것을 본적이 있다.

 

 

 금마산(金馬山) 견훤(甄萱)의 말에, “옛날에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나 대대로 발흥하였고, 진한과 변한이 뒤이어 일어났다.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 개국한 지 6백여 년이 된다.” 하였다. ○ 이제 생각하건대, 온조(溫祚)가 마한을 병합한 뒤 그 땅을 금마저(金馬渚)라 부르고, 금마산(金馬山)이라 부르지는 아니했다. 또 금마군은 백제의 서울이 된 일은 없다. 견훤의 말의 근거를 알 수가 없다. 기준성(箕準城)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기준(箕準)이 쌓은 것이기 때문에 그 이름을 땄다고 한다

 본래 마한국(馬韓國)이다. 후조선(後朝鮮)의 임금 기준(箕準)은 기자의 41대 손인데,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에 떠서 남으로 내려가, 한지(韓地)에 가서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하였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이곳을 병합하고, 이후부터 금마저(金馬渚)라 불렀다. 신라의 신문왕(神文王)이 금마군(金馬郡)으로 고치고, 고려조에 와서 전주(全州)에 부속시켰다. 충혜왕(忠惠王) 뒤 5년에 원(元) 나라 순제(順帝)의 황후 기씨(寄氏)의 외향(外鄕)이라 하여, 승격시켜 익주(益州)라 하였는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만들었다

익산군(益山郡)신증동국여지승람 제33권 > 전라도(全羅道)

 

견휜이 후백제를 개국하면서 수도를 백제의 옛 도읍에 건설하고 전주라고 했는데 이를 두고 왜놈의 똘마니 국사학자들은 전라도 전주는 온조왕의 개국지 위례성이 아닌데 왜 견휜이 그와 같은 말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다.

견휜의 말을 근거로 하면 한반도 전주가 아닌 허저시 견성현일대가 원래 마한제국의 도성이다. 즉 황성인 것이다. 지금도 견성현에 황성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기자의 자손 기준이 기자조선의 태왕이었는데 위만이 반란을 일으켜 기준은 수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한땅으로 도피한다. 그리고 원래 마한제국의 황제가 있던 황성을 점령하고 내쫓는다. (조양에서 고대 유물이 많이 발굴되고 조선후기에 산해관에서 이곳이 마한땅이라는 비석이 발굴되었다는 기록을 보아  쫓겨난 마한황제는 조양일대에서 나라를 새로 세운 것 같다.)

 

기준은 사후에 시호가 무강왕이 되는데 공교롭게도 신라 선화공주와 결혼한 백제 무왕역시 시호가 무강왕으로 불렸기에 후대에 서로 혼동이 되었다. 아무튼 온조왕은 마한제국의 옛 황성을 점령한후 도읍을 그곳으로 옮긴 것이다.

 마한제국의 황성-기준성즉 기자의후손 기준의 도읍- 백제 온조왕의 도읍

옛 백제 온조왕의 새도읍지바로 남쪽에 견휜은 새로 도읍을 건설하였다. 그곳이 바로 허저시 견성현인 것이다.

 

거란지리도에서 환주는 건주의 서쪽에 있고 건주의 동북쪽에 고주가 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t/72요나라의 건주는 개봉시의 서북쪽

또다른 증거가 있는데 바로 요나라의 고지도에서 건주의 동북쪽 고주의 남쪽에 전주가 있다라고 그린 것이다.

 

 

요나라고지도상으로는 당시의전주가 지금 허저시일대가 된다.

당시에 고려역시 견휜의 도읍을 전주라고 불렀다. 게다가 청나라고지도상에는 허저시일대가 력산(순임금이 밭갈던곳)이 있는 곳으로 력산은 제남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제남정이라는 고적이 전주에 있다고 여지승람에 기록된 것이다.

 

하남즉 옛 황하의 남쪽에 건설했다는 백제의위례성과 그 바로 근처에 있던 마한제국의 황성의 위치가 모두 저곳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백제왕의 정식명칭은 백제 성왕의 3남 임성태자의 후손이 가진 족보첫머리에 백제국 마한황제 제(齊)왕인 것이다.

 

백제가 마한을 통일하고 전국시대 제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것을 내세우기 위해 족보에서조차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三韓遼伐高麗,遷馬韓、辰韓、弁韓三國民為縣,置高州。太祖天輔七年以高州置節度使,皇統三年廢為縣,承安三年複升為高州,置刺史,為全州支郡,分武平、松山、靜封三縣隸焉。泰和四年廢。有落馬河,塗河。

금사

삼한현은 요나라가 고려를 정벌하여 마한 진한 변한 삼국의 백성을 옮겨서 현으로 만들고 고주를 설치했다. 1198년 고주로 승격복위시키고 자사를 두고 전주에 속한 관할군으로 삼았다.

결국 고주근처에 전주가 있는 것이 지리상 맞으며 그 전주는 바로 요나라 금나라 고려가 공통적으로 부르던 견휜의 도읍 전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