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14. 2. 5. 17:01

自遼陽東南行千二百里至建州 「千」原作「程」

거란국지

요양에서 동남쪽으로 대략2백리를 가면 건주에 이른다.(천자는 원문에 정자로 쓰여 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t/72 요나라건주위치 개봉시 북쪽

 

 

 崇州,隆安軍,刺史。本漢長岑縣地。渤海置州,故縣三:崇山、溈水、綠城,皆廢。戶五百。在京東北一百五十裏。統縣一:

崇信縣。

요사

숭주 융안군은 본래 한나라 장잠현이다.발해가 주를 설치했는데 옛현이 3개이다. 숭산 규수 녹성인데 모두 폐지했다.동경동북쪽150리에 있다. 현이 1개인데 숭신현이다

.

2백리면 대략 직선거리로 80km-90km정도 요나라건주에서 서쪽으로 80-90km인지점을 찾아보니 제원시와 맹주시가 유력했다.

150리면 대략 직선거리로 60km내외 숭주에서 서쪽으로 60km내외는 역시 맹주시와 제원시가 나왔다.

 

《성경지》에는 《요사(遼史)》를 인용하여, “요양현(遼陽縣)은 한(漢)의 패수현(浿水縣) 북쪽에 있다. 패수는 어니하 ( 淤泥河 )라고도 하고 점우락(蔪芋濼)이라고도 한다.”

동사강목...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패수는 또한 이하(泥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물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http://blog.daum.net/sabul358/11985382 1850년 청나라고지도

 

1850년대의 청나라고지도에도 니하가 표기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제원과 맹주시근처이다.

 

 

1700년대 청나라고지도에는 제원이 니하의 북쪽에 있다. 현재 지도를 확인해보니 도시가 커져서 강의 남북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청나라의 기록에 패수즉 니하의 북쪽이 요양이라고 했으니 제원시가 요나라때의 발해 요양현인 것이다.

그런데 금나라때  쓰여진 거란국지에는  요나라가 발해 부여성을 동경으로 바꾸었다고 쓰여져있다.

왜냐면 부여성에서 요나라태조 야율아보기가 죽었기 떄문이다.

원나라 승상 탈탈이 쓴 요사지리지에는 요나라가 발해 요양현을 남경으로 했다가 다시 동경으로 바꾸었다라고 나온다.요사지리지 통주안원군에는 발해 부여성이라고 하는데 옜날 부여왕이 살던 왕성이라고 했다. 기록을 종합해볼때 발해 요양현과 발해 부여성 ,요나라 통주안원군은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던 모양이다. 그러니 전부 요나라의 동경이라고 기록된 것이다.

 

설인귀는 고구려의 군사를 금산(金山)에서 격파하고, 승세(勝勢)를 이용하여 3천 인을 거느리고 부여성을 격파하려 하자 여러 장수들이 군사 적은 것을 가지고 말리니 인귀가,
“군사는 많다고 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
하고, 드디어 전봉(前鋒)이 되어 나아가서 고구려와 싸워 크게 격파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1만여 인이었다. 마침내 부여성이 함락되니 부여천(扶餘川) 주변의 40여 성이 모두 풍문만 듣고 바람에 쓸리듯 항복을 청하였다.

무진년 신라 문무왕 8년, 고구려 왕 장 27년 ○ 이해에 고구려가 망하였다(당 고종 총장(總章) 원년, 668)동사강목 제4상 >

 

 

실제로 금산이  제원시와 맹주시 앞에 있었다. 고지도에도 나오지만 두 도시의 앞에는 큰 산이 지금도 있다.

게다가 중국학자들이 제원에서 시작하는 장성을 찾았는데 북제장성이라고 이름붙였다. 그런데 고구려말기 연개소문이 쌓은 장성이 공교롭게도 부여성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장성유적으로 현재 지명으로도 요나라의 지리지기록으로도 모두 제원시는 발해의 부여성이며 요나라의 동경성이며 고구려의 요양현이며 고대 부여의 왕성임을 알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