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14. 2. 10. 18:20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동병산(東屛山)은 복주(復州)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 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가 장사 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复州卫 【 在辽阳城南四百二十里晋隋以前同海州唐置州五代归契丹为迁民县属黄龙府后又置复州怀德军属县二曰横山化成后改县曰永宁金改永宁曰永康元州县并废及平章刘益归附始仍州治本朝洪武十年革州县十四年设卫领四千户所】

전요지(명때지리지)

복주위는 요양성남쪽420리에 있다. 진과 수이전에는 해주와 같고 당나라때 주를 설치했다. 거란때는 황룡부에 속했다. 후에 복주 회덕군을 설치하고 현이 2개인데 황산현과 화성현이다.후에 영녕현으로 개명했다. 금나라는 영녕을 영강현으로 개명했다. 원나라떄는 폐지했다.

 

○复州卫

 

  明山 【 城东七里】

 전요지(명때지리지)

복주위 명산은 성동쪽7리에 있다.

 

  

明王山在辽阳县东三十里契丹地志云夫余王东明葬于此因以为名

대원일통지(원나라지리지)

명왕산은 요양현동쪽30리에 있는데 거란지리지에는 부여왕 동명을 장사지낸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나라의 요양현동쪽30리지점은 명나라 복주위 동쪽10리와 같다 왜냐 둘다 명왕산이 있기 떄문이다.

 

 

 

 

거리상으로 패주시북쪽의 동안현에서 420리는 형수시를 근처로해서 좌우로 혹은 그남북쪽을 말한다.

 

 

 

 

청나라고지도를 보다가 형수시의 서쪽에서 당조릉이라는 지명을 발견했다. 이곳의 지명은 요성, 요산 이렇게 불린다.

한자는 다르지만 요양도 사실 요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양근처에 요산은 당연히 있어야 하는 법이고..

이곳의 요성 요산 요대에 관해 중국백과에서 찾아보니  요임금이 처음 나라를 다스린 도읍지였다고 하며 나중에 순임금에게 나라를 넘긴 곳이라고 한다.

헐 그러면 산서성 임분시의 평양은 무엇인고?  섬서성에 있는 요임금왕도라는 곳은 무엇인고?

 

게다가 더 황당한 것은 당조릉에 대해 찾아봤더니 당나라 고조황제 이연의 4대조가 묻힌 곳이라서 조릉즉 시조릉이라고 한다나?

 

당서첫머리에 이연의 조상은 한나라 서역근처 지금 감숙성서쪽 서량일대에 살던 사람들로 선비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훈족이 섞인 혼혈로 보인다.   짱개들이 조작하려고 하면 제대로 해야지 어찌 당나라시조릉을 하북성에다 만드나? 차라리 섬서성이나 감숙성에 만들것이지.

 

 

 

 

 

 비석이 없으니 지들 멋대로 새로 비석을 세우고 당나라 시조릉이라고 해버렸다.

 

 

 왜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는거지 무슨 비밀이 있나?

 

 

 

 

 

 

 

발굴기록을 읽어보니 당나라시대에 만든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그러니 확실히 당나라시조릉이 맞다 이런식으로 썼더라.그러면서 비문이나 명문같은 구체적인 증거는 찾을 수가 없었다. 유골도 없고

 

이건 내가 보기에 가묘이다. 동명왕주몽은 졸본이나 국내성에 장사지냈을 것이다. 고구려가 수도를 옮기면서 시조릉을 파헤처 가지고 왔을 가능성이 높은데 왜냐면 조선시대개국초기에 조선 평양에 단군묘 기자묘 주몽묘를 건설하고 우리의 뿌리즉 조상으로 여기고 소중히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역시 수도를 옮기면 단군 기자 주몽묘를 같이 이동시켰는데 급하게 옮기다 보니 기자묘의 경우 요녕성 북진시에 세우고는 철수하면서 청나라에서 기자묘가 광녕(당시 요녕성 북진시)에 있다라고 기록해버렸고 단군묘는 지금 평양시에 남아있다. 주몽의 묘는 조선후기에 타타르군이 명나라를 침공하기 위해 남하해서 베이징근처에서 거대한 묘를 파헤치니 그곳에 고려왕 묘라고 비석이세워져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왕조의 묘는 공민왕묘를 제외하고는 전부 일반 백성무덤크기로 개성시에 남아있다. 아마도 태조 이성계가 유훈으로 자신을 등용해준 공민왕에 대한 예우를 잊지 말라고 한것 같다. (고려사에는 고려가 강화로 천도할때 모든 왕릉을 파헤쳐서 이동시켰다고 되어있다. 수도를 회복한뒤 다시 왕릉을 옮겼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