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말기영토

소오강호 2014. 3. 3. 12:35

 

 

평요고성 높이 12m

 

평요고성은 원나라의 상도이다.평요고성남쪽에서 이릉대가 발견되었다고 현지 문물국에서 발표했는데  이릉대는 원나라 상도에 있다는 고려의 기록때문에 확신하게 되었다. 게다가 저렇게 거대한 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수도급의 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원나라의 기록은 난수의 북쪽 환주의 동쪽 용강에 상도를 건설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의 여지승람에는 용강은 황룡국이며 안시성이라고 했다.

 

다시 동쪽으로 백암성(白巖城)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비로소 안시성이르렀습니다. 만약 안시성이 과연 개모성 70리 근방에 있었다면, 그가 백암성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벌써 2백 리 밖이 됩니다. 그가 꼭 건안(建安)을 공격하지 않고서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려 한 것은 안시성이 그들의 뒤를 차단시켜버릴까 두려워서였습니다. 가령 안시성이 본래 백암성 서쪽에 있었다면, 비록 건안을 공격하지 않더라도 안시성이 진작 그들의 뒤를 차단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시성이 백암성 동쪽에 있다는 것이 어찌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한다면, 당(唐) 나라 시대의 안시성과 한(漢) 나라 시대의 안시성이 똑같지 않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둘째입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 ‘안시성은 일명(一名) 환도성(丸都城)이라고도 한다.’ 하였는데, 환도는 지금 강계부(江界府) 북쪽 강 건너 지역에 있었습니다. 고구려 산상왕(山上王) 시대에 일찍이 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것이 안시 문제의 셋째입니다. 신이 또 여지서(輿地書)를 살펴보건대, 용강현(龍岡縣)에도 안시 옛성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렇게 말한다면 안시는 넷이나 있는 셈이요, 셋뿐이 아닙니다.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다산시문집 제8권 > 대책(對策

안시성을 다른말로 봉황성이라고 한다. 왜냐면 고대우리말에 안시가 곧 봉황이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안시현이 당나라때 고구려의 안시성이 아님은 조선후기에도 알고 있었다. 당군이 고구려사람에게 저성 이름이 머냐 물으니 고구려사람이 필시 안시성이라고 했을 것이다. 안시가 순우리말이고 봉황은 한자이다. 그러니 당나라군은 아 저 성이 옛날 한나라 안시현의 안시성이구나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지리지에 안시성이 일명 환도성즉 고구려의 수도였던 적이 있다라고 했는데 그것이 제일 맞는 말이다.

 

 

청나라고지도를 보면 김부식이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 알수있다. 송양은 비류국왕으로 당연히 고구려 도읍지 환도성이 근처에 있다. 우선 석가좡시의 서쪽에 검산즉 환도산이 있고 봉황산도 있으며 환산군성도 있고 결정적으로 토산이 있다.(당태종이 안시성밖에 토산을 쌓았다) 실제로 아직도 저곳은 토산촌이라고 부르고 있다.

 

龙凤山 【 城东南四百里大虫江出焉】 凤凰山 【 城东南三百六十里上有垒石古城可容十万众唐太宗征高丽尝驻跸于此即古开州】

명대전요지(명때지리지)

용봉산은 요양성동남4백리에 대충강이 나오는 곳이고 봉황산은 요양성동남360리에 당태종이 주필하던 곳으로 옛 개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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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宋史)》에, “고려왕이 개주(開州) 촉막군(蜀莫郡)에 살아 이곳을 개성부라고 하는데, 산을 의지해서 궁실을 짓고, 성벽을 세워서 그 산을 신숭산(神嵩山)이라 하였다.” 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묘승이란 중 가운데 애꾸눈을 가진 중이다. 이곳에서 말하는 개주는 고려에서 설치한 것으로, 평양(平壤)의 동쪽에 있다. 지금은 고려에서 국도(國都)로 삼아 개성부(開城府)라고 하며, 또한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그 지형은 왼쪽에 시내가 있고, 오른쪽에 산이 있다.” 하였다. 국호를 태봉(太封)이라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좌량위(佐良尉) 김입기(金立奇)를 파견하여 오(吳)에 조공하였다. 《자치통감》

호삼성은 원나라때 사람인데 청나라기록에 보면 개주진국군과 개주촉막군은 같은 지역이다라고 나온다. 신숭산이 있는 곳이 고려의 개성이 아니라 신숭산은 개주에 있는 산이니 청나라에서 원나라와  명나라쪽 기록을 바탕으로 그려넣은 것이고 당시 개경은 지금 덕주시서부일대였다.  당시에 고구려 평양으로 알고 있던 형태시에서 덕주시남부는 동쪽이니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w/76고려의 2번째 개경은 백제의 사비성이었던 산둥성 덕주시일대이다.그후에 하북성 청현으로 이동한다.|

 

 

순덕부 형태시에 개원사가 있다. 그런데 조선전기 연행기등에 보면 영평부에 개원사가 있다고 나온다. 영평부에는 조선성이 있다고 대명일통지에 나오고 조선후기의 기록에는 조선성은 고구려 평양이다라고 나온다. 위의지도에 극성이 나오는데 극성은 유성과 조양 창려근처로 즉 영평부에 있어야 하는 지명이다.

 

청나라고지도를 보면 원과 명 청시대에 2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하나는 그림대로 백암산이 있는 순덕부 형태시를 고구려 백암성으로 생각하고 토산이 있는 석가좡시를 고구려 안시성으로 생각했다는 것과  순덕부가 평양성이니 당연히 안시성과 백암성은 그 남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곽】 안시성(安市城) 오석산에 있는데 현의 치소(治所)와의 거리는 5리이며 험하고 견고하기가 비할 데 없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만 2천 5백 80척이며 안에는 샘 열 개가 있으며 합쳐 흐른다. 군창(軍倉)이 있는데 세상에서, “이 성을 당 태종이 친히 치려 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한다. ○ 진가유(陳嘉猶)의 시에, “성루(城樓) 백 척(尺)이나 솟아 맑은 구름 스치고, 이 땅에서 옛날에 천자의 군사가 머물렀네. 어가(御駕)는 험한 길을 마다 않고, 백포(白袍) 입은 설인귀(薛仁貴)는 누차 공훈 세웠구나. 아득한 옛 일은 물따라 흘러가고, 적적한 봄산은 석양(夕陽)을 보내누나. 사해(四海)가 한 집으로 성한 정치 만났으니, 원하거니 충성을 닦아 요(堯) 임금에 답하리.” 하였다. ○ 지금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를 살펴보면, 안시 폐현(安市廢縣)은 개주위(蓋州衛) 동북쪽 70리에 있는데, 한(漢)이 세웠으며 당나라 태종이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설인귀가 백의(白衣)로 올랐었다는 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에서는 철주(鐵州)를 세웠고, 금(金) 나라 때는 탕지현(湯池縣)이라 고치고 개주(蓋州)에 내속시켰다 

【묘전】 기자전(箕子殿) 경종(景宗) 신축년에 건축하고 영종 을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기자(箕子).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2권 > 평안도(平安道) 용강현(龍岡縣)

 

명나라사신 진가유는 안시성의 성벽높이가 백척 약23m나 된다고 들은 모양이다. 백만대군이 함락시키지 못할 정도라면 그정도는 되야하지 않을까?

 

처음에는 나도 석가좡시가 안시성인가라고 생각했다. 지명이 너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성지도와 현지의 고성을 아무리 봐도 높이가 23m나 되는 고성이 없을 뿐 아니라 산에 의지한 형태도 아니었고 ..

그런데  봉황산과 기산이 석가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산서성 요주 현재 좌권현에도 있다. 게다가 당태종이 안시성과 건안성을 놓고 의논을 하는데 안시성을 버려두면 안시성의 군사가 나와서 퇴로가 막힌다라고 하며 드라마 대조영을 봐도 안시성은 평양으로 가는 길목이 아니라 굳이 점령할 필요가 없는 성이었다.

게다가 마릉관은 제나라30만대군이 손빈의 지휘하에 방연의 위나라30만대군을 격파하고 대국 제나라가 출범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장소인데  대청광여도에는 마릉이 2개 나와있고 둘다 손빈이 이긴 곳이라 하며 현재 중국학계는 산서성 요주일대가 아니라 지금 복양동쪽일대로 보고있다.

 

청나라고지도는 산서성 요주근처에서 고대에 수십만 대군이 전투를 한 곳임을 알고 표기한 것인데 그렇다면 30만대군이 격돌한 전투가 과연 몇개나 될까? 수나라때 30만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그때는 유관전투였다. 마릉관일대에는 장성유적이 없으니 그것은 아닐것이고 당태종과 연개소문이 싸울때 양군이 수십만을 동원했으니 바로 그전투장소였을 가능성도 높은 것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02 1780년 제작된 산서 유사현지

기산에 대해 기자가 처음 봉해진곳 ,마릉관에 대해 손빈이 적을 부순곳이라는 설명이 있다.

 

 

기성이라고 검색하면 중국지도에서 2군데가 나오는데 하나는 하남성 주구시인데 대명일통지에 기자대가 있다는 바로 그곳이며 하나는 좌권현서쪽의 유사현인데 지금 중국백과는 기자가 유배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청나라기록은 기자가 처음 봉해진곳으로 나오며 산서성 릉천현지에는 기자가 도망한 땅이 바로 이곳이라고 쓰여있다. (기자는 은나라말에 조선으로 도망했고 주무왕이 기자를 그대로 조선에 봉했다라고 되어있다.)

 중국학계에서 제원에서 택주남쪽 양성에 이르는 장성을 발견했는데 북제의 장성이라고 한다. (북제의 서쪽변경을 중국학계는 산서성과 섬서성사이라고 하는데 저곳에다 장성을 세우면 도대체 누구를 방어하는 것인가? 장성서쪽은 다 포기하나? 저 장성이 어떻게 북주를 방어하는 장성인가?남북으로 되어있으니 남서쪽에서 오는 적을 막으려는 것인데 북제가 아니라 고구려가 쌓은 장성일 가능성이 더 높다.)

제원에서 택주까지 장성을 쌓으면 지도상에서 보듯이 남서쪽의 군대는 험준한 산악지대를 우회하거나 고대의 바다인 황하를 수군으로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

 

고구려의 안시성근처에는 기자와 연관된 지명이 있어야 하고 실제로 지금도 기산과 기성이 존재한다.

 

 

. 《남사》 고구려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지방이 2천 리나 되는데 가운데에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흘러나온다. 한(漢)ㆍ위(魏)의 시대에는 남쪽은 조선(朝鮮)ㆍ예(濊)ㆍ맥(貊)과 동쪽은 옥저(沃沮)와 북쪽은 부여와 접하였고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있다. 땅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과 못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면서 시냇물을 마시고 토착(土著)함이 없다. 좋은 농토가 없기 때문에 그 풍속이 음식을 절약한다. 동사강목 제2하 >갑자년 신라 눌지왕 8년, 고구려 장수왕 12년, 백제 구이신왕 5년(북위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 원년,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원년, 424

424년경 고구려의 수도는 환도산즉 검산아래에 있는 지금 석가좡시를 말하는 것이다. 좌권현의 원래이름은 요산현이다. 즉 지금 산서성좌권현에서 석가좡시일대가 모두 고구려의 중심즉 중앙지역으로 당태종의 공격로가 어디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산서 요현성즉 요산성혹은 요양성이라 불린 고성인데 바닥에서 흙으로 약12m 그위에 다시 돌로 18m를 쌓은 난공불락의 성이다.비록 무너진기했지만 두께를 봐도 어림 10m 는 되어 보인다.

 

 

북경고성은 흙으로된 기단이 약 7-8m내외  돌로쌓은 성벽은 평요고성과 같은 12m이다. 높이로 봐서 평요고성처럼 원나라당시에 쌓은 성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사신 진가유는 안시성이 높이가 백척 23m나 된다는 조선사람들의 말을 듣고 저런 시를 지은 것이다.  하북과 산서지역의 고성사진을 제아무리 검색해도 산서성 요현성즉 요양성보다 더 높고 튼튼한 성은 못보았다.

당태종이 제아무리 충차와 발석차를 동원해서 성을 깨려고 해도 깨지못한 산을 의지해 쌓은 거대한 성은 바로 산서성 요현성인 것이다. 이 성을 옛 사람들은 요동성이라 생각한 듯하다 그래서 성이름도 요양성이고 근처에 요양산이 있다. 요동성역시 수나라 120만대군이 제아무리 공격해도 점령하지 못한 성인데 그 성은 평지가운데 있다고 했으므로 다른 성인 것이다.

낙양에서 출발한 당태종은 정주북평을 거쳐 고구려 요동성을 함락하고 북진하다 백암성을 점령하고 다음 진로로 고구려 평양성으로 가야하는데 북쪽에 안시성이 자신들의 뒤를 끊을까봐 두려워 어쩔수없이 안시성으로 진격했다.  즉 한단일대로 나아가려니 좌권현의 안시성군대가 당태종의 후속부대와 군량공급을 막아버리면 위험지니 어쩔수 없이 안시성으로 간 것이다.

 

원나라는 용강에 안시성이 있다는 고기록을 보고 당시의 용강인 산서성 평요고성일대에 성을 짓고 상도로 삼은 것이다.(요사지리지로는 고구려의 중도성) 그런데 평요고성은 산을 배경으로 지은 성이 아니라 고구려의 안시성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중에 내가 찾은 요현성(요양성)보다 더 높고 두터운 성 ,산을 의지한 성을 찾으신 분은 사진을 올려주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