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영토

소오강호 2014. 3. 3. 16:36

始祖東明王。姓高氏。諱朱蒙。都於卒本扶餘。卒本在遼東界 元帝建昭甲申年。至琉璃王。移都國內城。平帝元始三年癸亥 國原王增築平壤城。咸康八年壬寅。移都006_346c市城卽北都城也 長壽王移都平壤城。

이첨(李詹) 쌍매당협장집(雙梅堂篋藏集) >

시조 동명왕 고씨이고  졸본부여에 도읍했다. 졸본은 요동경계이다.유리왕때 국내성으로 도읍을 이동했고 342년 안시성으로 도읍을 옮겼고 북도성이라 했다. 장수왕때 평양성으로 옮겼다.

 

 

 

342년에 연왕 모용황이 침공하여  환도성을 노략질하고  도성을 불태웠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오환족기병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격파하고 수도 환도성을 함락했을때 성이 하도 험한곳에 있어서 오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342년의 고구려 환도성은 의외로 쉽게 점령했다. 즉 안시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시성은 봉황성과 같은 말로 우리 고대말에 봉황을 안시라고 불렀기 때문에 당태종과 싸운  난공불락의 성은 한자식표현으로 봉황성 ,순우리말로 안시성이다. 한나라의 안시현도 아니고 고구려 환도성도 아니다.

그러나 고려말 학자들사이에 이미 안시성은 환도성이고 고구려의 북쪽 도읍지라고 이미 각인이 된상태이다. 그러니 위와 같은 기록이 남은 것이다.

유리왕(琉璃王) 22년 계해(3)에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겨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모두 2백 6년 동안 도읍했다. ○ 《삼국사략(三國史略)》에는 국내성이 지금의 의주(義州)라 했고,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지금의 초산강(楚山江) 북쪽 올자산성(兀刺山城)이라고 했다. 산상왕(山上王) 2년 무인(198)에 환도성(丸都城)을 쌓았으며, 13년 기축에 도읍을 옮겼다. 모두 38년 동안 도읍했다. ○ 《고기(古記)》에 영원군(寧遠郡) 검산(劍山)이 옛 환도(丸都)라고 하였는데, 세속에서 검(劍)을 환도라고 한다. 《동사강목》에는 환도는 곧 요(遼)의 환주성(桓州城)이라고 했다

연려실기술 별집 제19권 > 역대전고(歷代典故) >

 

우리 학자들조차도 안시성은 환도성이고 요나라의 환주성이라고 알고 있으니 원나라학자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원나라는 난수의 북쪽 환주의 동쪽즉 요나라지리지에는 고구려의 중도성(중앙의 도읍지)이라 알려진 곳을 당태종을 꺽은 안시성으로 알고 수도를 새로 세우고 상도라고 불렀다.  그곳이 지금 평요고성인 것이다.

 

 

 

 

해자를 갖추고 흙으로 토대를 쌓았는데 5-6m 나 되고  돌로쌓은 부분은 12m 이다.

 

사방 수십km내외로 전부 평지여서  산에 의지한 성이 아니다. 즉 당태종이 안시성의 군대가 길을 끊을까봐 두려워했는데 평요고성에서 수십만이 나올리가 없고 기껏해야 3-4만인데 그병력으로 수십km가 넘는 저 거대한 분지를 끊는다고?

그런데 위의 지도를 보라  한단방면으로 진출하는 협곡사이는 2km내외의 공간인데 저곳에 매복을 치면  수십만 대군이라도 지나가기 어렵다. 게다가  대군이 지나간뒤에 협곡을 봉쇄하면 군량미 수송이 차단된다. 두 성중 어느것이 진짜 당태종을 물리친 안시성이겠는가?

 

추7월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平壤) 동황성(東黃城) 지금의 평양부 동쪽 4리에 있다. 목멱산(木覔山) 가운데 옛터가 있으며, 경성(絅城)이라고도 부른다. 으로 옮기었다.
계묘년 신라 흘해왕(訖解王) 34년,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 백제 비류왕(比流王) 40년(진(晉) 강제(康帝) 건원(建元) 원년, 343)동사강목 제2하 >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동황성이 서경에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동황성 서편에 거대한 도시인 석가좡시가 고려 서경이 아닌가 했다. 그런데 고려사와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평양성이 황폐화되서 사람이 거의 안사는 황무지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을 옮겨서 채웠다고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송사에는 고려에서 제일 인구가 많고 번화한 곳이라고 했다. 고려 바로 이전왕조인 신라에서 호수 18만호에 초거대 도시 경주는 발해가 점령하여 동경으로 바꾸었는데 원래 신라의 서원경이 바로 옆에 있었다. 모두 현재의 개봉시의 주변성곽들인데 이곳이 신라말에는 서원경혹은 서경이라고도 불렀는데 당시에 인구가 제일 많았던 것이다. 고려개국초기에 그대로 서경이라고 부르니 송나라에서 고려 서경이 개봉시일대로 착각한 것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t/78고려 전기의 서경은 송나라에서 진주라고 불렀던 청주로 원래 백제땅이며 개봉시서쪽의 랑성일대이다.

 

동황성은 당시 황성인 환도성의 동쪽에 있는 성이다.  이 성을 고려에서 고구려 평양성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김부식은 고려 서경에 있다라고 한 것이다.

 

 

신라의 초기 남쪽도읍인 지금 경주시에는 산성과 평지성등이 최대 10개가량된다. 물론 전부 작은 성이다.위의 안평현 동황성을 보면 불과 10km도 안되는 공간에 성이 무려 7개가 넘는다.

평지에서 그것도 성과 성사이거리가 500m 정도 밖에 안되면 당시 고구려의 궁병부대는 성과 성사이로 들어오는 적을 사방에서 화살을 날려 완전히 없앨수 있다. 정말 기발한 방어책이 아닐수 없다.동황성을 점령하려면 그 앞에 6개나 되는 성을 점령해야 하고 그것도 양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정말 획기적인 방어방법이다.

 

《신당서》 고구려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마자수가 있는데, 그 근원은 말갈(靺鞨)의 백산(白山)에서 나온다. 물의 빛깔이 마치 오리 머리와 같이 푸르므로 압록(鴨綠)이라고 부른다. 강물은 국내성(國內城)의 서쪽을 지나서 염난수와 합류한 다음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安市) -삼가 살펴보건대, 바로 안평(安平)의 잘못된 표기이다.- 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안시와 안평을 혼용해서 쓰기도 했는데  지금 동황성은 안평현에 있고 안시성이 곧 환도성이고 환도성동쪽이 동황성이고 고려에서는 서경이라 불렀기 때문에 모든 자료가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황성이라는 지명이 또 남은 곳이 있다. 바로 자금성동쪽이다. 혹시 그렇다면 베이징 북쪽 자금성 일대가 고려의 서경인 적이 있었다는 말일까?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 청나라고지도

开州城 【 辽阳城东二百六十里即今凤凰山堡四面石崖峭壁东北二门城随山铺砌可容十万众唐太宗驻跸于此今废】

전요지(명대지리지)

개주성은 요양성 동쪽2백60리에 있는데 지금 봉황산보이다. 당태종이 주필했던 곳이다. 사면석벽이고  가히 10만을 수용할수 있는 곳이다.

마침 연개소문이 주둔했다고 전해지는 고려영도 베이징동북쪽에 있다. 당태종이 전투를 벌였던 곳이 베이징북쪽 지금 거용관일대임을 알수 있다. 

 

명나라지리지는 거용관과 주변 장성을 일컬어 가히 10만을 수용할만하고 사면이 석벽이다라고 한 것이다. 실제 사진을 보니 과연 명나라기록과 일치함을 알수 있다. 명나라사신이 본 조선에서 안시성이라 부른 성이 바로 거용관일대임을 알수 있다. 높이가 과연 평요고성(높이 12m) 에 버금간다.

 

위의 조선고지도는 바로 이런 상황을 적은 것이다. 안시성즉 거용관일대의 성곽이 우리 것이고 그 남쪽 낙랑즉 평양성(지금 자금성동부일대)도 우리땅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황실에서는 지금 베이징성이 바로 고구려 평양성이다라고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내가 자금성이 고구려 국내성이다라고 했겠는가?

 

고구려의 북쪽 도읍이 안시(봉황성) ,환도성, 국내성중에 어느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지리로도 국내성이 제일 북쪽에 있다. 게다가 고려는 국내성과 압록강에서 부터 장성을 쌓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위의 통주에 장성이 그려져있고 실제 확인해보니 통주에 장성유적이 있었다. 통주장성바로 서쪽이 고려영즉 말그대로 고려군이 주둔한 곳인데  금나라기록을 읽어보면 국경지역에 신라산, 고려산 이런 지명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려영은 말그대로 고구려 군이 아니라 고려군이 주둔한 것이다. 장성을 쌓는곳 바로 앞에서 고려군이 요새를 만들고 지킨 것이다. 이것을 보고 요나라와 금나라에서 고려영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또한 조선후기연행기에도 자금성 동쪽 문앞에 거대한 토부즉 흙으로 쌓은 인공산이 있다고 했다. 이것은 동쪽의 군대가 성을 점령하기 위해 쌓은 것이지 서남쪽의 군대라면 당연히 남쪽 혹은 서쪽문앞에 토산을 쌓아야 한다.(그래서 석가좡남쪽에 지금도 토산촌이 있다. ) 만일 동쪽에 쌓는다면 정말 정신이 나간 것이다...

 

지금도 성질 꽤 하는 베이징 조폭들도 감히 동쪽으로 나아갈 생각을 못한다고 한다. 특히 하얼빈지역은 거의 모든 사람이 무슨 전사나 용사같다고 한다.  중국네티즌들의 글을 보면 거기 사람들은 언제나 화가 나있다.. 덩치도 크고..싸움을 잘한다. ....

 

즉 만일 당태종이 동쪽문에 토산을 쌓았다면 이것은 죽자는 것이다....동쪽에서 몰려올 고구려 동부군과 성안의 군대가 협공하면 그대로 전멸이 뻔한 것이다. 그러나 남쪽이나 서쪽이면 쉽게 도망갈수 있다. 동쪽에 토산을 쌓은 주체는 바로 백제, 신라군혹은 고려군이나 그 이전시기 동부여군일 것이다.

 

 

정료위가 초무하여 쌍성과 접경하게 하곤 / 定遼招撫接雙城
산천을 절단하여 대명에 속하게 하였다네 / 絶斷山川屬大明

 목은집(牧隱集) > 목은시고 제34권 >

정료위가 바로 고려영이라고 청나라기록에 나와있다. 고려말학자 이색은 당시 고려의 쌍성과 정료위가 바로 옆에 붙어있다라고 했다.  쌍성남쪽이 고려왕경이라고 원나라지리지에 나와있다. 왕경은 꼭 개경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왕이 있는 곳은 서경일수도 있고 남경일수도 있다. 물론 동경일수도 있고.. 여기서는 서경혹은 개경이라고 봐야한다. 즉 베이징일대특히 자금성동쪽일대가 고려말 평양성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성은 향하현이고 연남산의 비문에 자신이 포로로 잡힌 곳은 한성이라고 쓰여 있다. 즉 고구려 최후의 저항지는 향햐현일대로 고구려 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