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최전성기영토

소오강호 2014. 3. 4. 18:11

【군명】 조선(朝鮮) 동쪽 해 뜨는 땅에 있기 때문에 조선이라 이름하였다. ○《사기(史記)》 주(注) 색은(索隱)에 이르기를, “조(朝)는 음이 조(潮)요, 선(鮮)은 음이 선(仙)이니 선수(汕水)가 있으므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검성(王儉城) 옛 기록에, 단군(檀君)은 이름이 왕검(王儉)이라고 하였다. 기성(箕城)ㆍ낙랑(樂浪)ㆍ장안(長安) 《당서(唐書)》에, “평양을 또한 장안이라 이른다.” 했다. 서경(西京)ㆍ서도(西都)ㆍ호경(鎬京)ㆍ유경(柳京) 최자(崔滋)의 〈삼도부(三都賦)〉에 있다.
【능묘】 기자묘(箕子墓) 부성(府城) 북쪽 토산(兎山) 위에 있다. ○ 원(元) 나라 곽영석(郭永錫)의 시에, “무슨 일로 거짓 미친 체 머리 풀어헤쳤나, 은(殷) 나라의 국운(國運)을 혼자 붙들려 하였네. 버리고 가면 오직 제 몸만 길이 깨끗해질 뿐, 간(諫)하다가 죽으면 누가 위태로워진 나라를 슬퍼하리. 노(魯) 나라 땅 한 언덕에 송백(松柏)이 있고, 충혼(忠魂)을 만고에 귀신이 아는구나. 저물녘에 조선(朝鮮)의 길가에 말[馬]을 세우니, 지금도 아직 맥수시(麥秀詩)가 들리는 듯하네.” 하였다

【고적】 기자궁(箕子宮) 유기(遺基)가 정양문(正陽門) 밖에 있다.
구제궁(九梯宮) 동명왕(東明王)의 궁

봉황대(鳳凰臺) 부 서남 10리 다경루(多景樓) 서쪽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 평안도(平安道) >평양부(平壤府)

 

 

 在曹县城西南10公里太行堤下沿郑庄乡王场村南,静静地躺着一位伟人,他就是古朝鲜第一代国王箕子,而朝鲜平壤的箕子墓,却是他的衣冠墓http://sdcxxcb.blog.163.com/blog/static/328717432011725526124/ 기자묘의 유래

조현성 서남 10km에 기자묘가 있다.  내용인즉슨 기자가 조선에 간뒤로도 은나라도읍지(하남성 상구시)를 무척 그리워하여 기자가 죽은 뒤에 은나라 도읍지와 조상의 무덤이 바라보이는 곳에 장사지냈다.

宋朝时,曹人柴成务奉命出使朝鲜,建议朝鲜国封立箕子衣冠冢,世称箕圣陵

송나라때 조인사가 사신으로 조선에 가서 조선국에 건의하길 기자의 의관으로 무덤을 세워달라고 하여 조선에서 허락했다. 사람들이 기성릉이라고 한다.

 

 

 

산동성 조현 서남쪽 10km 에 있는 기자묘 ( 무슨 왕의 무덤이 이렇게 초라한가? 혹시 이 무덤이 의관묘즉 옷이나 생전에 쓰던 관등을 넣은 묘가 아닌가?)

산동성서부 웨이산도에 미자의 묘가 있는데 그 크기가 왕릉이라 할만큼 거대하다. 그런데 위의 기자묘와 같은 크기의 미자묘가 또 상구시일대에 있다. 청나라때 건설되었다고 하는데  명과 청이  문물정리를 하면서 고대 기록에 나오는 묘를 당시의 지리위치에 다시 가묘를 설치한 것을 알수 있다. 실제로 1900년대 초에 심양에서 시무왕장서경 무왕을 서경에 장사지낸다라는 묘비와 함께 발해 무왕의 묘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발해 서경은 압록강에 있으니 청나라시기 압록강은 요하였고 그러니 심양에다 새로 발해 무왕묘를 건설했는데 3백년정도 지난뒤 다시 발굴된 것이다. 복양의 전욱성역시 발굴해보니 청나라때 새로 전욱성이라고 쓴 비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潞城市微子镇子北村中,有一个巨大的土堆,高两三丈,占地面积二亩有余,镇人自古至今称之为“箕子墓”。

http://blog.sina.com.cn/s/blog_4fdcd35a0102e4s7.html

로성시 미자진 북쪽촌중에 거대한 흙으로 된 무덤이 있는데 높이가 9m내외 바닥면적은 1200제곱미터(아마 가로 30m 세로40m?)

사람들이 기자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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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와 기자의 땅은 바로 근처였던 모양이다. 상구시의 기자묘관련 기록도 보면 미자가 기자를 상구시가 바라보이는 곳에 장사지내도록 했다라고 되어 있다. 위의 무덤은 아예 미자진즉 미자의 땅에 세워진 기자묘이다. 그런데 그 크기가 거대하니 실제 기자가 묻힌 옛 평양임을 알수 있다. 장치시일대의 지명을 찾아보면 려도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구려도읍지라는 것이다.

 

대명일통지에 영평부에 조선성이 있고 기자가 봉해진 지역이라고 전해져 오는데 조선후기 각종지리지에는 조선현(조선성이 있는곳)은 곳 평양이라고 했다 .대명일통지는 명나라초기 명나라가 강했을때 지어진 책인데 후에 천리정도 후퇴했다고 명사에  쓰여있다. 대명일통지상의 영평부가 장치시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하남성 주구시에는 기자대가 있고 대명일통지에도 명나라 개봉에 기자대가 있다고 했다. 즉 명나라의 개봉이 지금 주구시인것을 알수 있고 지금 북한 평양에는 기자대와 기자묘가 같이 있다. 이것은 지명을 이동할때 유적을 같이 이동시키는 점을 고려할때 기자대가 바로 기자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이곳이 바로 한서에 나오는 양국 몽현이다. 실제로 명나라지리지에도 명나라개봉바로 위가 양국이었다라고 적고 있다. 순임금이 밭을 간 력산이 최소 3군데이상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자묘역시 위치가 이동된 것이다. 그 후의 기자묘는 전부 가묘인 것이다. 조선후기의 기록중에는 광녕에서 타타르군이 거대한 무덤을 도굴하다 고려왕무덤이라는 것이 발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산해관에서는 마한의 땅이라는 비석도 발견되었고,, 발굴을 지금시대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에도 우연하게 했음을 알수 있다.

 

가묘즉 일반인의 무덤크기정도로 성의없이 지은 것은 후대에 특히 청나라때 유적정리를 하면서 만든 것이고 최소 수십m이상의 거대 고분이야 말로 진짜 무덤이거나 당시의 수도에 지은 것이다.

지금 개성시에 고려왕무덤중에 제대로 된것은 공민왕무덤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전부 일반백성의 무덤과 크기가 비슷하다. 전부 가묘임을 알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라 고려보다 훨씬 작은 신라왕의 무덤이 얼마나 거대한지 직접 본사람은 알것이다. 신라는 법흥왕이 백제에서 독립해서 건국할때 중국의 기록에 50개의 읍밖에 없다고 했다. 아마도 최대 인구100만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나라조차도 무덤크기하나는 장대하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조와 여러 왕들의 무덤크기를 한나라 황제릉의 절반정도 크기로 만든다는 기록도 있다. 한나라황제의 릉을 보라 무슨 거대한 산같지 않은가?  세조는 선대왕들의 무덤을 만드는데 수많은 백성이 동원되고 그중에 죽는 사람도 발생하자 내무덤주변에는 돌을 둘러치지 말라고 했다. 혹여나 무거운 돌에 사람이 다칠까 염려한 것이다. 그런데 돌로 주위를 세운 조선왕릉을 봐도 겨우 그정도 무덤 만드는데 수많은 사람이 동원되고 사람이 죽어나갈 정도는 절대 아닌 것 같다.

 

태종릉 겨우 요정도 크기 만드는데 사람이 엄청나게 동원될까?

 

 

한나라황제 고조유방의 무덤 저무덤의 절반정도 크기를 원래 조선왕조왕릉으로 하려고 했고 그렇게 건설했다. 그런데 지금 조선왕릉은 왜이렇게 초라하고 작은가? 게다가 너무 꺠끗하지 않은가? 마치 1-2백년전에 새로 만든 것처럼....관리를 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사책을 읽어보라 각왕조마다 전부 다른 왕조의 무덤까지 다 병사를 보내 지켜줬다. 고려사에도 역시 삼국의 왕릉을 보호했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진시황릉에 보물이 그렇게 많다는데 왜 지금까지 유지되었겠는가?

함부로 왕릉을 도굴하면 사형될수도 있는 시대였다.

《남사》 고구려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그 지방이 2천 리나 되는데 가운데에 요산(遼山)이 있어 요수(遼水)가 흘러나온다. 한(漢)ㆍ위(魏)의 시대에는 남쪽은 조선(朝鮮)ㆍ예(濊)ㆍ맥(貊)과 동쪽은 옥저(沃沮)와 북쪽은 부여와 접하였고 왕도(王都)는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있다. 땅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과 못이 없어서 백성이 의지해 살면서 시냇물을 마시고 토착(土著)함이 없다. 좋은 농토가 없기 때문에 그 풍속이 음식을 절약한다.

동사강목 제2하 >갑자년 신라 눌지왕 8년, 고구려 장수왕 12년, 백제 구이신왕 5년(북위 태무제(太武帝) 시광(始光) 원년, 송 문제(文帝) 원가(元嘉) 원년, 424

장치시일대가 졸본이나 현도는 아닐 것으로 본다. 고구려당시에 어느 시기에 평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그러니 기자묘가 저렇게 거대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고구려 평양성을 한개라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고려에서는 고구려의 동황성(지금 하북 안평현)을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생각했고 고려말기에는 베이징을 평양성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9백년역사의 고구려가 수도를 자주 변경한 것은 말할것도 없거니와 중도 북도 남도  서도 동도등 다양한 소경들도 존재했을 것이다.장치시동쪽에 지금도 소요수라는 지명이 남아 있었다. 요산도 남아있다.

 

구경왔어요.
유익한정보감사합니다.
좋은 포스팅이네요!
포스팅구경하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