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14. 3. 27. 17:49

조선이 아직도 천진시의 동쪽 영평부일대까지 장악한 고지도가 존재한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31

청나라고지도에 영주가  베이징남부라고 표기되어 있다.

 

【안】 당(唐)의 영주는 지금의 성경(盛京)인 금주(錦州)이다.

동사강목 부록 하권 >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동사강목에서 영주는 청나라 성경(수도)이고 당시 금주라고 했다. 금주는 곧 유성과 거의 비슷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또다른 청나라고지도에 유성이 염산현일대라고 했다. 그러면 천진고성일대가 바로 청나라 성경이자 금주였던 적이 있다는 말이 된다.

 

 

 천진고성은 높이가 12m내외이고 베이징고성과 비슷한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모양도 비슷하다.물론

 청나라시대에도 궁궐이 존재했다.

 

 

 

천진고성은 원래 태조이성계가 세운 조선 첫수도 한성이다. 옹성과 치성유적과 높이와 두꼐를 보면 수도급의 중요한 성임을 대번에 알수 있다.

 

광녕성 서쪽 40리 지점에 요궁(遼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달자(達字)의 영토가 되었다. 성의 서쪽 5리쯤에 야율초재(耶律楚材)의 무덤 이있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 물어 보았더니, 홍무(洪武) 황제가 오랑캐인 원 나라를 몰아낼 적에 그들의 종족을 따라서 오랑캐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월정만필(月汀漫筆) 윤근수(임진왜란때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조선사신)

 

자금성은 원래 고구려 국내성이고 고려역시 북도(북쪽도읍)으로 중시했으며 고려말에는 안시성으로 오인되기도 했다. 조선과 명은 자금성일대를 분할했으며 명나라초기 심양성이 자금성서남쪽에 있었다. 물론 명이 철수한이후에는 조선이 모두 관할했다.조선에서는 함흥관할에 붙였고 함흥을 북경으로 한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도 있다.  조선말기의 연행기에 보면 자금성 동쪽조양문밖에 거대한 토산이 있는데  전국시대 연나라 황금대 유적인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연나라가 황금대를 건설하려면 남쪽에서 오는 인재들이 볼수 있게 남쪽문앞에다 건설해야지 동쪽문앞에 건설한다는 것이 맞지 않고  고려때는 이 토산이 당태종이 쌓은 것이 아닐까 오인했다. 그러나 역시 당태종이 미치지 않고서야 고구려 동부군과 성안의 병사에 끼일 확률이 높은 동쪽문앞에다 토산을 설치할리가 없다. 남쪽문이나 서쪽문앞에 세워야지 불시에 기습할수 있는 고구려 동부군에게서 안전한 것이다. 이것은 동쪽의 군대가 성을 점령하기 위해 쌓은 토산이다. 고려가 요나라와 싸울때 혹은 그 이전 백제혹은 신라가 고구려와 싸울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청나라초기 청나라가 지금 베이징을 광녕성으로  천진고성을 금주성이자 성경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즉 자금성의 궁궐은 명나라가 만든 것이 아니다. 청나라가 만든 것이다.  이자성의 반란군이 명나라궁궐을 다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고  베이징 천수산의 명나라 황릉중 3개만 공개되고 나머지는 전부 공개되지 않는다. (먼가 구린게 있지 않고서야 )

그나마 공개된 것은 명나라 후기 전성기를 이끈 만력제의 무덤으로 만력제가 조선에 파병해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선조가 땅을 뗴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명릉은 전형적인 전방후원즉 앞은 사각형 뒤는 원형태의 백제식 무덤이다.  보통 한족왕조의 무덤은 그냥 산하나정도 크기로 흙을 쌓는 것이 아니던가?

 

 

  자금성을 그린 청나라고지도를 보면  이곳이 과연 명나라 수도였을까 하는 의문점이 든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x/290 베이징은 개주성으로 추정된다.

 

开州城 【 辽阳城东二百六十里即今凤凰山堡四面石崖峭壁东北二门城随山铺砌可容十万众唐太宗驻跸于此今废】

전요지(명대지리지)

개주성은 요양성 동쪽2백60리에 있는데 지금 봉황산보이다. 당태종이 주필했던 곳이다.

 

 개주성(開州城)은 함흥부의 서북쪽에 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경주(慶州)를 두었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가 되었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주(開州) 진국군(鎭國)이 되었으며, 요나라 말기에 고려에 편입되었다. 혹은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하는데, 《고려도경》을 보면 군(郡)은 개주의 동쪽에 있다《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능침(陵寢)의 보수법(步數法)을 정하였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삼가 역대의 능실을 살펴보니,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의 원릉산(原陵山)은 사방이 3백 23보(步)였습니다. 이를 반감(半減)하여 1백 61보로 하면, 사면(四面)이 각각 80보가 됩니다. 금조(今朝) 선대(先代)의 여러 산릉(山陵)의 능실(陵室) 보수(步數)를 원릉(原陵)의 예(例)에 따라 사방 각각 1백 61보로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국역조선왕조실록 > 태종 6년 병술(1406,영락 4) > 11월1일 (정사) >

그러니까 한면이 80보 약 100m를 넘는 다는 것인데 명릉을 구글로 측정했더니 보통 100-120m 내외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산릉(山陵)에 군정(軍丁) 수가 만 명이 넘으니 어찌 사망한 자가 없을 수 없으며, 또는 길가에 벼와 곡식도 반드시 손상되었을 것이니, 유사(有司)에게 명령하여 사망한 자는 부의하고, 손상된 것은 보상하여 주라.”

국역조선왕조실록 > 세종 2년 경자(1420,영락 18) > 8월25일 (신유) >

 

 

 

산릉의 예석군(曳石軍)에게 데운 술 5백 병과 해채(海菜) 1백 근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개석(蓋石)을 노원리(盧原里)에서 취하여 헌릉(獻陵)으로 수송하였다가 이 때에 이르러 건원릉(建元陵)으로 옮겼는데, 역부(役夫)가 거의 8천 명에 이르렀다. 마침 잇달은 비로 물이 불어서 건너가기가 쉽지 않아 사람들이 많이 목숨을 잃었다. 모든 읍리(邑吏)들로서 역부(役夫)가 적게 나왔다는 이유로 투옥(投獄)된 자도 또한 많았다

단종 즉위년 임신(1452,경태 3) > 8월16일 (병자) >

산릉의 주회(周回)가 넓어서 30호로서는 수호하기가 어렵고, 또 앞으로는 능(陵)을 모실 것이므로, 각 능에 50호씩이면 합계 백 호가 되는 것이니 어떠하오리까

국역조선왕조실록 > 세종 2년 경자(1420,영락 18) > 8월4일 (경자)

 

 

 

베이징명13릉은 크기와 모양에서 오히려 조선왕실의 원릉과 유사하다 게다가 이곳은 함흥부 관할이고 함흥부에 조선왕실의 선조무덤이 있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장안명13릉(장안에도 명나라왕들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모양이 전방후원이 아니다.)

송나라왕릉은 원나라가 모두 도굴했다고 한다. 명나라왕릉역시 이자성의 반란군이 도굴했다. 명나라는 청나라가 일어나자 그들 선조의 무덤인 금릉일대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를 끊기 위해서라나...그럼 청나라가 중원에 입성한후 과연 명나라왕릉을 그대로 보전해주었을까?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은 반란군이 황릉을 파헤치자 대성통곡하고 삼베옷에 고기와 술을 끊고 슬퍼했다고 한다. 금나라의 후손을 자칭하는 청나라황제들이 과연 명나라 황릉을 그대로 잘 보전해주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