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후기영토

소오강호 2014. 8. 6. 12:59

1.배설의 죽음

 

그때 배설이 열 두 척 병선으로 물러나 진도 벽파정(碧波亭)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순신이 그 곳으로 달려갔다. 《일월록》
배설이, “지금은 일이 급하니 배를 버리고 뭍에 올라서 호남 군진에 의탁하여 싸움에 조력하여 공을 세우는 것이 낫다.” 하였으나, 순신이 듣지 않았는데, 배설은 과연 배를 버리고 가버렸다

그때 배설은 교만하고 패려하여 버릇을 고치지 않았으며 제 마음대로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여 성주 본 집으로 돌아갔다. 순신이 사유를 갖추어 장계를 올렸더니 뒤에 잡혀서 죽임을 당하였다. 《일월록》

배설은 기록에서 보듯이 나중에 잡혀서 목이 베였다. 그가 한산의 패전에서 구한 8척의  배가 나중에 이순신장군의 13척의 전함의 주춧돌이 된다.

 

 

만력 말기에 나는 영남 여러 고을에 벼슬살이하는 아버지를 수종하다가 거타(居陀 거창(居昌)) 객관(客館)에서 처음 공을 알게 되었다. 공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엄격하고 재물을 주고받음이 올바르며 군자의 풍도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나는 마음속으로 존경하였다

 “나는 죽어도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 하였다. 공이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지 몇 해 뒤에 내가 영남 지방에 피난해 있으면서 그곳의 어른들로부터 전에는 들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더욱 많이 듣게 되었다. 그 뒤로 매번 공을 찾아가 연로하고 덕이 있는 분으로 섬겼는데, 지난해에 공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침문(寢門) 밖에서 곡하였으며, 장사 때에도 공을 위하여 애사(哀詞)를 지었었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젊어서는 한강 선생을 사사하여 군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공은 힘써 배워서 여러 번 과거에 급제하였지만 불행히도 선장군(先將軍)이 비명에 작고하자 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았으며, 이름을 숨기고 세상에 나오지 않고서 농사를 지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린 아우가 하나 있었는데, 공이 마음에 더욱 안쓰러워 가르치고 훈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아, 잘못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종아리를 때렸으므로 학업이 날로 성취하여 남쪽 지방에 이름이 알려졌으니, 이 사람이 바로 계장(季章) 배상호(裵尙虎)이다. 그는 성균관에 들어갔지만 박복하여 요절하였다. 공은 매우 애통해한 나머지 더욱 세상사를 싫어하여 무흘산(武屹山) 골짜기로 들어가 노년을 보내며, 별호를 등암이라 하였다. 간혹 그의 어짊을 천거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공은 돌아보려 하지 않았으므로 끝내 추천하는 자를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공은 평생 선행을 매우 좋아하였으며, 남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마치 자신에게 그 잘못이 있는 것처럼 부끄러워하였다. 그 독실한 행실은 친족을 친애하고 사랑하는 것에서부터 소원한 관계에까지 넓혀갔으므로 일가가 모두 권면되었다. 집안사람을 가르칠 때는 엄하면서도 은정이 있었으며, 소중히 여긴 것은 관혼상제(冠婚喪祭)였다.
공의 휘는 상룡(尙龍), 자는 자장(子章), 성은 배씨(裵氏)이며,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조부는 사재감 정(司宰監正) 덕문(德文)이고, 아버지는 영남 수군절도사(嶺南水軍節度使) 설(楔)인데, 두 분 다 호조 참판에 추서되었다

등암 처사(藤庵處士) 묘명기언 제19권 중편 > 구묘(丘墓) 3

 

배설에 과한 기록이 대부분 그를 폄하하는 것인데 그의 아들에 관한 칭찬이 여러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우의정을 지낸 허목이 지은 배설의 아들 배상룡의 묘비를 보면 배상룡은 부친과 달리 신의가 있고 평생 선행을 하며 군자의 도를 갖춘 훌륭한 인물임을 알수 있다. 부친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겨 과거에 급제해도 벼슬을 하지 않았고 등암처사라고 하며 숨어지냈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이면 우의정이 존경한다라고 묘비에까지 썼겠는가..(부친이 친일하여 동족을 핍박했음에도 여태 국회의원하며 얼굴두껍게 지내는 놈들 김00,신00 ,유00 과는 차원이 다르다.)

 

2.먼저 적진에 돌진한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안위다.

 

그때 아침 조수가 막 밀려 나가는 중이라 항구에는 물결이 사나웠다. 거제 현령 안위(安衛)가 조수를 타고 내려갔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배가 화살처럼 나아갔다. 바로 적진 앞에서 충돌하니 적은 사면으로 에워쌌으나 안위는 죽음을 무릅쓰고 돌진하여 싸웠다.
○ 순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안위의 뒤를 잇대어서 먼저 적선 삼십 일 척을 격파하니 적이 조금 퇴각하였다. 순신은 돛대를 치며 군사를 맹세하고 이긴 기세를 타고 전진하였다. 적은 죽도록 대들었으나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군사를 다 몰아서 도망쳤다.

연려실기술 제17권 >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영화에서는 이순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순신이 먼저 치고 나간 것처럼 되어 있는데 여러 기록을 읽어보니 이순신이 안위에게 제일큰 전함을 주고 (대략 30m내외 일본최고전함 아다케부네보다 더큰 것을 주었을 것으로 보임) 썰물을 따라서 적선을 격파하도록 시켰다.

 

 

가운데 전함이 일본에서 제일큰 전함 아다케부네인데 저것보다 몇m는 더 큰 전함을 안위에게 주고 정면돌파를 명령한 것이다. 아마도 거북선이 전멸해서 거북선의 중앙돌파역학을 안위에게 시킨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거대한 배가 바로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옆에 부딪친 일본전함의 배가 넘는 크기임을 알수 있다. 아마도 대장선을 안위에게 준것으로 보인다.

안위에게 달려드는  왜군전함을 먼거리에서 남은 12척의 배에서 함포와 신기전으로 엄호사격하여 초반에 30척이 넘는 배를 격파하면서 승기를 잡은 것이다. 이순신장군의 전법은 수와 화력에서 우위인 입장에서 왜군을 유인하여 포위공격하는 방식인데  이런 전술은 군의 중앙에서  총사령관이 지휘를 잘해야 한다. 아무렴 총사령관이 직접 미끼가 되어 돌진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자신이 죽으면 남은 군대는 도망갈게 뻔한데 어찌 돌격대를 총사령관이 자처할까..

 

3.화공이 주요 승리원인이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적은 우리 군사의 형세가 약한 것을 보고 다투어 와서 덮쳐 둘러싸고 바싹 가까이 와서 싸웠다. 갑자기 장군의 배에서 태평소를 불고 깃발이 일제히 일어나며, 바람을 따라 불을 놓으니 불이 적의 여러 배에 옮겨 붙었다. 순신은 드디어 이긴 기세를 타고 공격하니 죽는 자가 삼대 쓰러지듯 하였다.먼저 뇌도수의 머리를 베어서 돛대 위에 걸어 놓으니 장졸들은 용기를 뽐내고 의기가 백배나 되어 달아나는 자를 쫓아서 수백여 명을 베어 죽였는데,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셀 수없이 많았다. 적군은 겨우 십여 척으로 도망갔고 우리 배는 모두 탈이 없었다. 그 뒤에 적이 싸움을 말할 때마다 반드시 명량(울돌목) 전투를 말하였다. 《일월록》

 

영화에서는 울돌목의 물살이 주요승리원인이라고 하지만 의외로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장군은 썰물을 따라 진격했다고는 하지만 물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기록이 별로 안보인다. 오히려 바람의 방향을 고려해서 일부러 조선수군의 등쪽에서 바람이 불때 적군과 교전한 것이다. 그러면 화공을 하면 불이 적군쪽으로 쉽게 옮겨지고 우리가 쏜 화살은 더 멀리 날아간다. 즉 왜군이 수적으로 너무 우세한 것을 믿고 병법에서 바람을 정면으로 향하지 않는 기본적인 것도 무시하고 진격한 것이다.  적장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의 함선을 공격해서 목을 벤 함선은 이순신의 배가 맞다. 아마도 적장은 처음 안위의 배를 보고 이순신의 대장선이라 생각하고 공격했다가 수십척의 배만 잃고 한참뒤에 이순신의 모함을 찾아낸 모양이다.  구루지마도 이순신을 베고 싶었는지 직접 쳐들어오다가 오히려 화공에 당해 결국 지 목만 날아갔다.

 

 

왜선이 330척이나 되는데 아무렴 앞의 전함 백척가량이 박살났다고 퇴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들이 퇴각할수밖에 없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순신에게 그동안 당한 공포도 명량의 물살도 아닌 바로 좁은 구역안에서 번진 불때문이었다.  바람을 타고 불이 빠르게 여러 배로 번지고 당시 신기전은 사정거리가 무려 400m 에 이르렀다. 조총이 겨우 50m가 넘는 사정거리였으니 당시 왜군의 전함에 불지르는 것은 무척 쉬운일이었던 것이다.  영화에서는 왜군의 조총이 먼저 발사되고 신기전이 나중에 발사되었지만 실제는 정반대이다. 왜군의 전함에서 조총을 발사하려고 가까이 오기전에 이미 그들의 배에는 불이 번지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명량근처는 바로 왕건이 견휜의 수군 수백척을 화공으로 무찌른 곳이다. 이순신장군역시 역사기록을 토대로 화공을 해보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4.허장성세도 왜군을 주늑들게 한 원인이다.

 

○ 9월에 적의 괴수 뇌도수(耒島守)가 병선 수백 척을 거느리고 먼저 진도에 도착하였는데, 이순신은 명량(鳴梁)에 머물며 진을 치고 피난선 백여척을 모아서 가짜로 성세를 이루었다. 적이 이르니 순신은 거짓으로 싸우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순신이 군사를 돌려서 우수영 명량 앞바다에 있는데 날이 밝아오자 적선 5, 6백 척이 바다를 가리우고 왔다. 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본래 수전을 잘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걱정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때 호남 백성들이 배를 타고 피난가던 자가 모두 진 아래 모여서 순신을 의지하여 생명을 보전하고 있었다. 순신은 먼저 피난선에 명령하여 차례로 물러나서 차례로 늘어서 진을 쳐서 가짜 군사를 만들어 바다 가운데를 들락날락하게 하고,

《일월록》

 

이순신장군은 매 해전마다 민간의 선박을 많이 동원했다. 일종의 눈속임 허장성세이다. 멀리서 보면 다 전함으로 보이니

왜군입장에서는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몇척밖에 없다고 하더니 멀리서 백척은 더 보이니 좀 당황했을 것이다.

 

 

보통 압도적인 전력이라면 연약한 적군의 중앙을 정면돌파한뒤  뒤로 돌아서 포위하는 전법을 쓴다. (나폴레옹이 잘쓴 전법이다.)

그런데 왜군들은 그리하지 못했다. 멀리 백척이 넘는 적선이 보이니 이순신장군이 주로 쓰던 전법이 생각난 것이다.

 

즉 전쟁초반 10척이하의 배로 먼저 왜군을 공격해서 화를 나게 한뒤 왜군이 반격하면서 쫓아오면  멀리 달아나다가 매복한 백척가까운 전함들이 한꺼번에 포위해서 왜군을 포위격멸하던 전략이 생각난 것이다. 그러니 왜군들은 조선수군의 중앙돌파를 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가까이서 조총을 쏘거나 이순신을 잡기위해 배를 가까이 대는 수준에서 그친 것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왜군의 전함중에는 조선의 피난선과 크기가 비슷한 소형전함도 꽤 많았다. 조선의 함포는 오늘날 대포처럼 거대한 것이 아니어서 저렇게 작은 배에도 몇개의 함포정도는 실을수 있다.

 

 

작은 총통의 경우  2-3개는 충분히 실을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