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09. 5. 20. 15:53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5경 15부 62주가 있으니, 숙신의 옛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아 용천부(龍泉府)라 하고 용주(龍州)ㆍ호주(湖州)ㆍ발주(渤州)의 3주를 관할하였고, 그 남쪽에 중경(中京)이 있는데 현덕부(顯德府)라 하고 노주(盧州)ㆍ현주(顯州)ㆍ철주(鐵州)ㆍ탕주(湯州)ㆍ영주(榮州)ㆍ흥주(興州)의 6주를 관할하였고, 예맥의 옛땅으로 동경(東京)을 삼아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고 경주(慶州)ㆍ염주(鹽州)ㆍ목주(穆州)ㆍ하주(賀州)의 4주를 관할하였고, 옥저의 옛땅으로 남경(南京)을 삼아 남해부(南海府)라 하고 옥주(沃州)ㆍ정주(睛州)ㆍ초주(椒州)의 3주를 관할하였고, 고구려의 옛땅에 서경(西京)을 두어 압록부(鴨淥府)라 하고 신주(神州)ㆍ환주(桓州)ㆍ풍주(豊州)ㆍ정주(正州)의 4주를 관할하였으며

 

1.중경현덕부의 위치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본디 조선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이었다.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元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었는데 사신이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다. 요나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그 뒤에는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중종(中宗)이 도읍지에 홀한주(忽汗州)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바로 옛 평양성이다. 중경 현덕부라고 불렀다

요사지리지

 

발해의 땅을 뺏은 것은 요나라이니 중경현덕부의 위치도 요나라가 제일 잘알것이다. 고구려의 장수태왕때 평양성을 발해가 차지해서 중경이라 불렀고 요나라는 동경이라고 했다고 한다.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위성(位城)의 철(鐵)이다. 《신당서》
[주D-008]위성(位城)의 철(鐵) : 위성은 중경현덕부(中京賢德府)에 소속된 철주(鐵州)의 속현(屬縣

 

발해의 풍속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노성(盧城)의 벼[稻]이다. 《신당서》
[주D-003]노성(盧城) : 중경현덕부(中京賢德府)에 영속(領屬)된 노주(盧州)로 보이는데

 

벼가 잘자라려면 난하에서 요하일대에 광범위한 농경지가 아닐까  철이 많은 것도 거란지리도에 철주의 위치가 난하근처이니 발해의 중경은 난하근처로 보는것이 옳지 않을까

 

동쪽으로는 갑산부(甲山府) 경계까지 1백 25리이고, 남쪽으로는 함흥부(咸興府) 경계까지 3백 44리이며, 서쪽으로는 평안도의 고 무창군(古茂昌郡) 경계까지 1백 10리이며, 북쪽으로는 압록강(鴨綠江)까지 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천 5백 7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갑산군(甲山郡) 삼수보(三水堡)였는데, 본조 세종(世宗) 23년에 만호(萬戶)를 두어 적(賊)의 길목을 경비하도록 하였고, 28년에는 삼수군(三水郡)을 설치하였으며, 노산군(魯山君) 2년에 군을 혁파하고 다시 만호를 두었다. 세조(世祖) 7년에 다시 군으로 환원, 8년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10년에 이르러 다시 군으로 강등되었다

《대동지지(大東地志)》
【연혁】 본래 발해의 땅이며 현덕부(顯德府)의 경계이다. 뒤에 여진(女眞)이 점거하였고, 금 나라 때에 갈뢰리(曷懶里)에 예속되었다가 원 나라가 소유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9권함경도 삼수군

 

 

 

광녕현성(廣寧縣城)
곧 금주부(錦州府)의 속현(屬縣)으로 옛 요서(遼西)의 땅이다. 한대(漢代)에는 망평루현(望平絫縣)이라 하였고, 당대(唐代)에는 무려도호부(巫閭都護府)라 하였고, 발해(渤海) 때에는 현덕부(顯德府)라 하였고, 요(遼) 때에는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이라 하였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제2권도만(渡灣) ○ 계해년(1803, 순조 3) 12월[4일-24일]

 

조선의 기록에 의하면 삼수군이 현덕부인데 조선후기에는 요하바로 서쪽지금의 금주동쪽에 있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난하근처에 있었다. 대략보건데 현재의 난하바로 동쪽에 중경이 있엇는데 후대에 지금의 금주바로옆이 중경이라고 알려졌다.

 

 

2.동경용원부

 

봉황산 서쪽 5, 6리에 조그마한 성이 있는데, 봉황성이라 한다. 《대명일통지(一統志)》에,

“봉황성은 본래 예맥 땅인데, 발해(渤海)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를 삼았고, 요(遼) 나라에서는 개주 진국군(開州鎭國軍)이라 하였으며, 원 나라에서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시켰다.”

 연원직지(燕轅直指) 제1권출강록(出疆錄) ○ 임진년(1832, 순조 32) 11월

 

 

현재 남아있는 봉황산은 2개 봉황성도 2개이다. 둘중 한곳이 발해의 동경용원부이다. 조선후기에는 요령성의 봉황성이 발해의 동경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명일통지의 기록은 하북성의 봉황성이 동경이라고 한다.

 

 

 

 

위의 지도는 원나라때 고지도이다 분명히 원나라의 동경은 구만리장성끝부분에 있고 여기서 동녕로가 시작되는 요동반도가 발해의 동경이 절대 아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穢), 맥(貊)의 옛 지역을 동경(東京)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龍原府)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를 관할하였다. ○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 대흠무(大欽茂)가 정원(貞元) 연간에 도성을 동남쪽에 있는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염주가 여러군데 있기 때문에 어디라고 말하기 힘들다.

 

《요사》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개주(開州) 진국군(鎭國軍) 절도(節度)는 본디 예(濊), 맥(貊)의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東京龍原府)였는데, 통할하는 현은 하나이다. 개원현(開遠縣)은 본디 책성(柵城)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용원현(龍原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그대로 답습하였다

 

개주의 위치는 조선초기의 기록으로 바로 증명이 된다. 즉 하북성 봉황성에 멀지 않다.

 

 호참장(胡參將)과 왕지휘(王指揮)도 또한 개주(開州)에 도착하여 뒤쫓아 싸웠으며, 또 송참장(宋參將)과 주참장(朱參將)도 군사를 거느리고 이만주(李滿住)가 거주하는 곳에 곧바로 도착하여 이만주를 잡아서 그 아들들이 있는 곳을 묻고는 이내 관할(管轄)하는 3둔(屯)을 공격하여 죽이고, 이만주와 그 가속(家屬)을 호참장(胡參將)과 왕지휘(王指揮)가 있는 곳으로 묶어 왔습니다.」고 합니다

 세조 12년 병술(1466, 성화 2)

 

 서쪽 지방 요양(遼陽)으로부터 동쪽 지방 개주(開州)에 이르기까지 남쪽 지방 해주(海州)·개주(蓋州)의 여러 고을에 이르기까지 취락(聚落)이 서로 연속하였으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에서 급급(汲汲)히 진려(軫慮)할 것입니다

 세조 10년 갑신(1464, 천순 8)

 

이만주는 건주여진으로 대명여지도에 난하상류가 건주여진으로 나와있다. 그러니 개주는 하북성봉황산과 가깝다. 또한 명나라의 해주 개주(蓋州)는 모두 요양의 남쪽지명인데 명나라의 요양은 요나라의 동경과 동일하다. 즉 역시 봉황성근처 개주가 난하근처임을 알수있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가 경주를 설치하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봉부(開封府) 개원군(開遠軍)을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말기에는 고려에 편입되었는데, 혹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김연이 급히 보고하기를, “금 나라 군사가 요 나라의 개주(開州 봉황성)를 쳐서 차지하고 내원성(來遠城)을 습격하여 대부ㆍ걸타(乞打)ㆍ유백(柳白) 세 군영을 함락하고 전함을 모두 불태웠는데, 통군 야율녕(耶律寧)이 내원성의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 등과 함께 그 무리를 인솔하여 배 1백 40척에 싣고 어구에 나와 정박하면서, 우리나라 영덕성(寧德城 평북 의주)에 통첩을 보내어, 내원ㆍ포주(抱州 평북 의주) 두 성을 우리나라에 돌려 보내준다고 하면서 드디어 해상으로 도망하였습니다

 정유 12년(1117), 송 정화 7년ㆍ요 천경 7년ㆍ금 천보(天輔) 원년고려사절요

 

 결정적으로 거란지리도를 보면 압록옆에 대릉하가 있고 보주가 있고 내원성이 있다. 즉 명나라지도 연산도처럼 압록이 서요하이고 내원성이 그근처라는 것이다.  결국 발해의 동경은 지금 하북성 봉황성근처에 있다.다른기록에 봉황을 안시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으니 발해의 동경이 고구려의 안시성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3.남경남해부

 

 동쪽으로는 홍원현(洪原縣) 경계까지 70리, 남쪽으로는 정평부(定平府) 경계까지 27리, 서쪽으로는 평안도 강계부(江界府) 경계까지 2백 80리, 북쪽으로는 삼수군(三水郡) 경계까지 2백 10리, 북청부(北靑府) 경계까지 1백 7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8백 68리이다

  본래는 고구려의 옛 땅으로 오랫동안 동여진(東女眞)에게 점거(占據)되었는데, 고려 예종 2년에 윤관 등에게 명하여 여진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3년에 함주 대도독부(咸州大都督府)를 설치하여 진동군(鎭東軍)이라 일컫고 성을 쌓아 남계(南界)의 정호(丁戶) 1천 9백 48호를 옮겨 채웠다가, 4년에 성을 철거하고 그 땅을 여진으로 돌려주었는데, 뒤에 원 나라에 함몰되어 합란부(哈蘭府)라 일컬어져 쌍성에 속해 있었다.

대동지지 당(唐) 나라 중종(中宗) 때 발해국(渤海國)을 남경(南京)에다 두고 남해부(南海府)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함경도 함흥부

 

 

조선초기에는 함흥부가 함주즉 구만리장성북쪽부근에 있었다. 그러다가 광해군때는 삼수군즉 요하서쪽 금주바로옆에서 210리 남쪽에 있었다. 현재의 요동반도중앙정도이다. 조선이 초기의 함흥부를 남해부로 생각했는지 아니면 광해군때 옮겨진 함흥을 남해부로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의 땅으로, 발해(渤海)에서는 남경 남해부(南京南海府)라고 불렀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의 옛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남해부라고 하였는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관할하였다. ○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고구려 때 사비성이었다.
《대명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해주위(海州衛)는 요동도사성(遼東都司城)에서 남쪽으로 12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디는 개모성(蓋牟城)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이었고, 발해 때에는 남해부(南海府)였으며, 요나라 때에는 해주 남해군이었다. 금나라 천덕(天德) 초기에 징주(澄州)로 고쳤으며, 원나라 때에는 폐지했다가 본조(本朝) 홍무(洪武) 1년(1368)에 해주위를 설치하였다

 

 거란지리도에 해주의 위치가 표시된다. 요사지리지에 사비성은 비사성의 오기가 아닌가 한다. 발해의 남경은 현재 난하의 하류지방으로 추측된다.

 

4.서경압록부

서경은 심양근처에서 발해 무왕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묘지석에 이곳이 서경이라고 쓰여있다.

 

5.상경용천부

국사책에 나온 상경에서 발해 도성유적지가 나왔으니 거기가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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