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14. 10. 27. 22:43

 

십오국풍지도라는 고지도인데 이 지도의 최종작성연대는 알수 없으나 이 지도가 어떤 시대의 지도를 참고하고 그렸는지는 알수 있다. 바로 거란즉 요나라와 북송의 시대인 것이다. 원나라와 명나라지도는 원의 수도인 개평이나 상도등의 지명이 나오는데 위의 지도는 그런 내용이 없으니 참고로 한 시대가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가 아니라 바로 요나라시대임을 정확히 알수 있다.

 

초구에 대해서 단주에 있다고 써있다.

 

대청광여도(청나라시기고지도)

 

거란군은 단주를 함락하고 개봉을 위협하여 전연의 맹(전자는 단으로도 읽힌다.)을 북송과 체결하고 막대한 공물을 받게 된다.

그런데 십오국풍지도는 초구가 단주(전주)의 북쪽에 있어 거란과의 최접경이라고 나온다. 그럼 상식적으로 대청광여도에서 단주의 남쪽에 초구가 있는 것도 잘못되었고 단주의 동쪽에 초구가 있는것도 잘못되었음을 알수 있다.

 

게다가 보통 휴전협약을 체결하면 양군대가 최후전투를 벌인곳이 국경이 되는데 어찌하여 개봉바로 북쪽까지 진격한 거란군이 국경을 무려 수백km나 후퇴하여 베이징바로 남쪽까지 퇴각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전연의 맹을 체결한 단주일대가 바로 거란과 북송의 경계가 되어야함이 바람직하고 실제로 십오국풍지도는 초구즉 단주위남현일대가 국경임을 표시했다.!!!!!!!!!!!1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x/288명나라때 북경성은 하남성 주구시

 

고대의 제왕인 신농의 도읍지 근처가 바로 명나라 개봉성이자 초기 북경이며 그곳근처에 북송의 도읍지 개봉성도 있었던 것이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s/196 북송의 등주는 회양현일대

 

금나라가 북송을 침공했을때 수도 개봉성을 탈출한 송나라왕은 등주로 도망한다. 상식적으로 지금 개봉시와 등주인 현재 산둥반도 북쪽은 수백km 나 되고  북송의 왕이 배를 타고 한반도로 도망할 계획이 없다면 산둥반도 북쪽으로 도망가는 것은 어리석기 그지없는 일이다.

 

 

당신이 북송의 왕이라면 산둥반도 북쪽으로 도망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배를 타고 한반도로 도망할 목적인가?

 

북송의 등주는 북송의 개봉에서 멀지 않았고 남쪽으로 도망하는 길목에 있어서 당연하게 등주방향으로 도망했던 것이다.

포청천이라는 드라마를 보면 포청이 등주를 시찰하면서 고려가 언제 침공할지 모르니 대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한다.  만일 북송의 등주가 산둥반도 북쪽이라면 포청은 지리개념도 모르는 사람이다..우리가 배운대로 고려가 한반도 남부만 장악했다면 북송을 공격하려면 수백km나되는 바다를 가로질러 가야하는데 당시 기술력으로 아마 출발한 군대의 반은 풍랑에 의해 바다에 수장되었을 것이다.게다가 건너와봤자 전부 지쳐서 제대로 싸우기나 하겠는가?

 

 

십오국풍지도에서 초구의 북쪽에 바로 장성유적이 있음을 알수 있다.

 

 

거란의 강력한 기병을 막는 장성이라면 당연히 그 성곽이 웅장했을 것이다. 우선 제장성은 현재의 초구위치를 감안해도 십오국풍지도의 초구북쪽 장성은 절대 아니다.  또한 한단남쪽 장성은 확인해보니 토성으로 굉장히 무력한 장성유적이었다. 반면 지금까지 남아있는 위장성은 그 끝지점이 마침 북송개봉과도 멀지 않고 단단한 장성이니 바로 위장성이 십오국풍지도의 북송 개봉과 북송초구의 북쪽에 있는 장성이다.

 

 

신농도읍북쪽에 완구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바로 초구였을 것으로 보인다.

 

명나라시대의 지리지에 분명히 기자의 무덤과 연관된 기자대라는 지명이 서화즉 신농의 도읍지인 명나라 개봉성근처에 있다고 나오는데 청나라는 뜬금없이 기자의 무덤을 가묘형태로 하남성 상구시북쪽에 건설해 버린다. 게다가 명나라기록에 명나라광녕에 기자묘가 있다는 또다른 기록이 있는데 산서성 로성시에 지금도 거대한 기자묘가 남아있다. 게다가 그 근처에는 기자가 은나라주왕의 핍박을 피해 도망하여 숨은 곳이라는 전설과 주나라 무왕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는 곳도 현지 전설로 남아 있다.

 

기자는 조선으로 도망한 뒤에도 고국인 은나라(상나라)를 그리워했기에 그의 무덤은 당연히 상나라의 수도가 보이는 곳에 세웠을 것이다. 바로 그곳이 당시 조선과 주나라의 국경인 것이다. 그러니 신농도읍지에서 수십km내외에 이미 조선땅이 있었고 기자대라는 기자의 무덤이 남을수 있었던 것이다. 산서성 로성시의 거대한 기자묘는 의관묘즉 기자가 살아있을때 입은 옷을 넣어서 만든 무덤일 것이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우리나라 국사학자들은 기자묘조차 분석하지 않으니 참 ........

 

 

거란군이 초구바로 앞까지 차지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이전시기 발해가 이미  북송개봉성보다 더 남쪽인 등주를 점령해서 다스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거란이 발해보다 덜 남쪽으로 내려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