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영토

소오강호 2015. 5. 11. 17:57

우리기록과 중국의 기록은 백제가 요서군을 점령했다라는 것과 북위왕이 백제황제에게 동청주자사라는 작위를 올렸다라는 것, 그리고 백제와 북위가 여러번 수십만대군을 동원해 싸웠으나 북위가 패했다라는 것이다.

게다가 송나라때 고려에 온 사신 서긍은 전연을 백제가 멸망시켰다라고 기록했다.

 

 

 

 

德州德州本秦齊郡地。漢析置平原郡。東漢及魏晉。俱爲平原國。唐置德州。尋改平原郡。宋移治安德。大明初。省安德縣入州。尋廢舊治爲陵縣。而徙州屬濟南府。自平原八十里也。界東南。有陳公隄。宋陳堯佐守滑時築之。以障黃河。故以陳公名。西有衛河。本衛漳黃河諸水合流自東昌府武城縣界入境。北經河間府界入海。東南漕運。商賈賓旅。與凡外吏朝貢。皆由於此。元時開鑿。永樂時。又濬濁流一帶。廣可十餘丈。深可二三丈。來去舸艦。日夜迷津。南者北者。皆檣頭繫索曳之。永慶寺在西。永樂十年修。蘇祿國026_049d王墓在北。永樂中。王來朝。還至此卒。勑葬賜謚。西北之界。有接引十方寺。營搆彩餙。宏大侈麗。前有瀛海。先登之標。是景州。宋時爲瀛州軍。故界以別之

 소전집(少痊集) > (조선중기문집

덕주는 진나라때는 제군이라고 했다. 당나라때 덕주를 설치했다.  명나라는 제남부에 속하게 했다. 주의 동남쪽 경계에 진공제라는 것이 있는데 송나라때 진요좌가 활주에 있을때 건설한 것이다. 서쪽에 위하가 있고 본래 위하 장하 황하가 합류하여 흐르는 곳이다. 동창부 무성현경계로 들어간다.

 

据旧志载:宋时为防黄河西决,河南滑县陈尧佐筑之,故名陈公堤

바이두 백과

진공제는 송나라때 황하서쪽경계를 막던 곳인데 하남 활현지주인 진요좌가 건설했다.

 

위의 지도는 춘추전국시대 중국역사지도인데

현재 덕주 서남쪽에 무성현이 있는데 또다른 무성현을 지금의 화산서쪽 옛 정현동쪽에 표기했다.!!!!

 

자 여러분에게 상식을 묻겠다. 활주의 관리가 오지랖넓게  직선거리로도 거의 500KM나  떨어져 있는 덕주의 무성현에 제방을 건설한다라고 믿는 사람 있는가?

게다가 결정적으로 위하와 장하 황하가 만나는 곳이라고 했는데 현재 위하 장하 황하의 위치를 감안해도 현재의 덕주시 무성현과는 지리가 전혀 맞지 않다.

또한 분명히 진요좌라는 관리가 활주에 있을때 라고 기록했다. 즉 진공제라는 제방은 진요좌가 활주에 있을때 황하가 범람해서 활주주민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위해 활주경계에 설치한 것이지 500KM나 떨어진 그것도 현재의 덕주시 무성현에 제방설치한다고 활주주민들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 곳에다 거대한 제방을 쌓을 리가 있는가?

 

정강(靖康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1년(1126, 천회 4), 종망(宗望)이 요하(遼河)를 건너 활주(滑州)를 함락하고 도성(都城)에 육박하자, 제(흠종을 말한다)가 이체(李梲)를 보내어 화친을 제의했는데, 종망이 삼진(三鎭)의 땅을 떼어 줄 것과 세폐(歲幣)를 증가할 것과 백질(伯姪)이라고 일컬을 것을 요구하므로 강왕(康王) 구(構)와 소재(小宰) 장방창(張邦昌)을 볼모로 보내었다, 그 뒤 다시 우문허중(宇文虛中)을 보내어 숙왕(肅王) 추(樞)로 볼모를 바꾸므로 강왕과 장방창은 돌아왔다. 종망이 군사를 후퇴시켜 태원(太原)을 포위하고 머물다가 얼마 후 철수하였다
송사전(宋史筌) 금열전(金列傳)

 

 

게다가 금나라군의 정벌기록을 보면 더 분명해진다. 당시 요하를 건너 곧장 활주를 점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위와 같이 당시 요하가 현재의 황하 중앙부분이고 그 남쪽에 활주가 있었고 그 서쪽에 덕주 무성현이 있었던 것이다.

 

恩州,下,清河郡,军事。唐贝州,晋永清军节度,周为防御。宋初,复为节度。庆历八年,改州名,罢节度。崇宁户五万一千三百四十二,口八万五千九百八十六。贡绢、白毯。县三:清河,望。端拱元年,徙治永宁镇。淳化五年徙今治。熙宁四年,省清阳县入焉。

  武城,望。

  历亭。紧。至和元年,废漳南县入焉。

송사

은주는 청하군이며 당나라 패주이다. 중략

무성현이 있다.

 

패주라는 명칭은 주로 국경에서 등장하는 명칭이다. 요하를 사이에 두고 고구려가 당과 결전을 벌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금나라가 저곳을 요하라고 불렀으니 그럼 고구려때 당과 전쟁을 벌이던 요하가 바로 저곳에 있음을 알수 있다.

 

 

恩州,懷德軍,下,刺史。本漢新安平縣地。太宗建州。開泰中,以渤海戶實之。初隸永興宮,後屬中京。統縣一:

  恩化縣。開泰中渤海人戶置。

요사

은주 회덕군은 자사를 두며 본래 한나라 신안평현이다. 태종이 주를 세웠고 개태중에 발해백성을 채웠다. 중경에 속한다. 중략 은화현이 있는데 개태중에 발해백성을 두고 설치했다.

 

송나라때 무성현은 은주에 속했는데 마침 요나라에도 은주라는 지명이 있다. 동일한 지역인가 우연의 일치인가?

 

遼西郡,秦置。有小水四十八,並行三千四十六裏。屬幽州。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縣十四:且慮,有高廟。莽曰鉏慮。海陽,龍鮮水東入封大水。封大水,緩虛水皆南入海。有鹽官。新安平。夷水東入塞外。柳城,馬首山在西南。參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令支,有孤竹城。莽曰令氏亭。肥如,玄水東入濡水。濡水南入海陽。又有盧水,南入玄。莽曰肥而。賓從,莽曰勉武。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東部都尉治。莽曰禽虜。陽樂,狐蘇,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虜。臨渝,渝水首受白狼,東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莽曰馮德。□。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賓水,皆南入官。莽曰選武。

전한서

요서군은 진나라가 설치하고 유주에 속한다. 현이 14개있다. 신안평현이 있다. 중략

유성현에는 마수산이 서남쪽에 있다.  영지현에는 고죽성이 있다.

 

 

신안평현은 요서군에 속하고 따라서 고죽성(고죽국)이 있고 수산도 있어야 한다.

 

대청광여도인데 청나라는 고지도에 옛 고적을 표기했다.

 

그런데 백이숙제묘(고죽국의 수양산에 있다)가 바로 무성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게다가 수산이란 명칭도 존재하고 또한 력산(제남부에 있다.)도 있다.

처음글에서 내가 조선시대 지리지를 인용풀이하면서 명나라 덕주가 제남부에 속했다라고 적었다. ...

 

결국 모든 기록과 지리가 일치하게 된다. 지금 산서성의 서남쪽에 고죽국의 백이숙제묘가 그려져 있고 력산과 수산이 그려진 위의 청나라고지도는 바로 명나라시기의 지리상황을 인용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명나라에서 요동이라 부른 곳이 지금 산서성과 하북성 서부일대였음을 알수 있다. 그런데 그 땅은 고구려때부터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명나라고지도를 보던중에 요동에 대한 설명에서 동서 천리 남북 1600리 라고 쓴 기록을 보고 의아해 했는데

 

 

청나라기록으로는 베이징에서 개봉까지 1500~1600리 내외이고 장안에서 낙양까지 900~1천리라서 화산에서 개봉까지가 거의 천리정도 된다.

 

명나라기록에는 북벌을 해서  요동을 일시 점령했다가  올량합등 여진족의 공격으로 천리를 후퇴했다고 적고 있다.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에,

“제 환공(齊桓公)이 산융(山戎)을 치려 할 때에 관중(管仲)의 말에 따라 요수(遼水)를 건넜다

동사강목(東史綱目) >

 

우리 태조는 천운을 받아 개국하면서부터 국내를 정돈하고 외적을 물리치니 당시의 야인들이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사모하였다. 태종의 위엄과 덕은 섬오랑캐들에게 널리 입혀졌고 산융(山戎)도 모두 신하가 되어 복종하였다

국조보감 제6권 > 세종조 2

 

 

춘추전국시대의 지리개념과 명나라때 지리개념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위에서 확인할수 있다. 중국어느학자도 제나라가 지금 요동반도 요하를 돌파했다고 믿는 바보는 없다.

조선과 명이 산융이라고 보는 지역이 바로 요수를 건너면 도착하는 곳으로 지금 산서성의 서쪽에서 섬서성 남쪽일대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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