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최전성기영토

소오강호 2009. 1. 13. 14:23

  

 

 

 

 

八年戊戌 敎遣偏師 觀帛1)愼帛2)愼土谷 因便抄得莫△羅城 加太羅谷 男女三百餘人 自此以來 朝貢服3)

광개토호태왕비문에 적힌  글이다. 영락8년에 일부병력에 명령을  내려 토욕과 신부족을 두렵게 하고 비단을 뺏고 근처의 성을 노략질하고 남녀3백명을 잡아왔다. 이에 그들이 조공을 하고 복종하였다

 

永樂五年, 歲在乙未, 王以稗1)麗不△△△2), 躬率往3)討. 過富山負4)5), 至鹽水丘

영락5년에  패려가 복종치 않아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부산을 지나 염수에 다다랐다.

 

 

세종이 이르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장(上將)의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해외(海外)를 모두 제압하여 사나운 오랑캐인 구이(九夷)를 모두 정벌하였다

 

고구려 문자태왕13년 504년때 고구려사신 예실불이 북위에 갔을때 북위왕이 한 말중에서 후위서의 내용으로 북위 주변이 누구에게 복속되었는지 나타내고 있다.


요사(遼史)》에는, “개황(開皇) 8년에 거란(契丹)의 별부(別部)로 고구려에 붙어 살던 출복(出伏) 등이 백성들을 이끌고 내부(內附)하였다. 이에 앞서 원위(元魏) 말기에 기수(寄首)팔부(八部)가 고구려와 유유(蠕蠕)의 침입을 받아 겨우 1만여 구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제나라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로부터 세 갈래로 나누어 쳐들어와 남녀 10여 만 구(口)를 포로로 잡아갔다. 계속해서 돌궐(突厥)의 핍박을 받아 고구려로 도망쳐 가 붙어산 자가 1만 호에 불과하였으며, 부락이 흩어져서 다시는 옛날의 팔부(八部)가 되지 못하였다. 개황 말기에 여러 부족들이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자, 출복 등이 고구려를 두려워해 내부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갈해나안(渴奚那顔)의 북쪽에 이들을 머물게 한 것이다.” 하였다. 해동역사중에서

 

고구려군이 출정할때 유유즉 유연군대가 같이 나아갔다. 이는 고구려군에 복속된 나라가 유연임을 암시하고 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기록된 "고구려(高句麗), 백제가 강병 100만을 보유하고 북의 유연제노(幽燕齊魯)와 남으로 오월(吳越)을 침략하여 중부국가에 큰 좀이 되었다

유연이 누구에게 복속이 되었는지 신라학자 최치원이 설명해주었다.

 

 

중원고구려비

 

賜寐錦之衣服建立處

[출처] 겨울비 내린 후 [국원성] 중원고구려비 원문|작성자 인드라망

신라왕매금에게 고구려태왕께서 의복을 하사했다. 고대에 다른나라의 관복을 그나라왕이 입는다는것은 사실상 다른나라에 속해있다는 증거이다. 돌궐이 수나라의 상전이었으나 패망하여 수나라문제에게 귀순할때 문제가 수나라관복을 입으라고 돌궐의 칸에게 명령했으나 그것만은 못하겠다며 버틴기록도 있다. 신라는 중국기록에 원래 백제의 제후국이었으나 고구려광개토호태왕때 고구려에 복속된후 고구려가 약해진틈을 타서 독립했다.이후 백제가 종속관계를 요구하며 핍박하자 당나라에 속국이 되길 원한다며 당나라관복을 선덕여왕때 착용했다. 즉 신라가 당에 귀순했으니 백제가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백제는 당과 신라를 무시하고 신라를 또 공격한다.  

 

호태왕때 고구려는 서로는 위구르와 토욕까지 동으로 동해 남으로 일본까지 서남으로 황하까지 진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