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국 고려의 수도 개경

소오강호 2009. 7. 1. 17:59


왕경 개성부

본래 고구려의 부소갑(扶蘇岬)으로 신라가 송악군(松嶽郡)으로 고쳤다.

고려사지리지

 

갑이란 것은 아마도 마을 이름을 뜻하는 고대어일 것이다.지명에 무슨 갑이란 것이 자주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그럴 것이다.

사전적으로는 산과 산사이라고 한다. 산과 산사이가 마을이 있는 지형이니 아마 맞을 것이다. 그럼 중요한 것은 부소라는 지명이다. 개경의 근원은 바로 부소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서 交合하여 아들을 낳으니 康忠이라 하였다. 康忠은 體貌가 端正謹嚴하고 才藝가 많았는데 西江 永安村의 富者집 딸, 具置義라고 하는 處女에게 장가를 들어 五冠山 摩訶岬에서 살고 있었다. 그 때 新羅의 11)監干 八元이 12)風水術을 잘하여 扶蘇郡에 왔다가 郡이 扶蘇山 北쪽에 자리잡고 있어 山形은 좋으나 草木이 없음(13)童)을 보고 康忠에게 말하기를 ‘만약에 군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巖石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三韓을 統合하는 者가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이에 康忠이 郡人들과 함께 山의 南으로 옮겨 살며 소나무를 온 산에다 심고 인하여 松嶽郡이라고 改名하고

절에 三池와 九井이 있으니 三池가 맑아서 扶蘇山이 못 가운데 비치면 君臣의 마음이 받라저 大平을 이룰 것이요 九井은 九龍이 있는 곳인데 오래 막혀 있으니 不可不 파야할 것입니다」하는지라

고려사

 

 왕건의 시조에 관한 기록에서 부소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부소산 북쪽에 살았는데 성거산혹은 평나산(평주에 있다)에 가서 사냥하다 죽은 호경이라는 왕건의 조상이야기부터 등장한다. 부소산에서 소나무를 심어 송악이라 했다는 것이다. 기록을 보건데 원래 개경은 부소라는 지명에서 출발한 것이 맞고 원래 마을은 부소산의 북쪽에 있었다.

 

灤州,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

난주 영안군은 본래 황락성이다 난하가 돌고있고 노룡산이 남쪽에 있다. 제환공이 산융을 토벌할때  산신이 나타났다(?) 진나라는 우북평으로 했으며 한나라는 석성현으로 했다.

名海陽縣,漢水為公孫度所有。晉以後屈遼西。石晉割地,在平川之境。太祖以俘戶置。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

후에 해명현으로 개명했다. 공손도가 거처한 한수가 있다. (아싸 백제의 한수찾았다^^) 진나라는 요서라고 했단다. 평천의 경계에 있다. 난주부산이 하를 마주보고 있다. 중략 

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統縣三:義豐縣。本黃洛故城。黃洛水北出盧龍

부소천이 있다. 진나라 태자 부소가 장성을 쌓느라 머물렀다. 임유산이 있다.중략  황락수는 노룡산에서 나온다.

山,南流入於濡水。漢屬遼西郡,久廢。唐季入契丹,世宗置縣。戶四千。馬城縣。本盧龍縣地。唐開元二十八年析置縣,以通水

남으로 흘러 유수에 들어가고 한나라 요서군에 속한다. 세종이 현을 두었는데 마성현은 본래 노룡현으로 당나라개원28년에 현을 두었고 중략 주의 서남 40리에 있다.

運。東北有千金冶,東有茂鄉鎮。遼割隸灤州。在州西南四十里。戶三千。 石城縣。漢置,屬石北平郡,久廢。唐貞觀中於此置臨渝

중략 석성현은 한나라가 우북평군에 속하는데 당나라정관에 임유현을 두었다. 고성현으로 바꾸었다. 난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縣,萬歲通天元年改右城縣,在灤州南三十里,唐儀鳳石刻在焉。今縣又在其南五十里,遼徙置以就鹽官。戶三千

중략 지금 고성현은 남쪽 50리에 있다. 중략

요사

 

우리의 동족 거란족이 우리에게 그동안 의문이었던 한수와 부소라는 지명에 대해 알려주었다. 고마운일이다.요사의 난하는 지금의 영정하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293난하는 원래  영정하이다.

 

 

 

가을 7월에 내시 이백전(李百全)을 보내어 왕의 옷을 남경(南京)의 가궐(假闕)에 봉안하였다. 어떤 중이 도참에 의거하여 말하기를, “부소산(扶蘇山)에서 갈려 나온 것이 좌소(左蘇)로서 그것을 아사달(阿思達)이라 하였으니 옛날의 양주(楊洲) 땅입니다. 만약 이 땅에 궁궐을 짓고 거처하면 나라의 운세가 8백 년까지 연장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한 것이다

갑오 21년(1234), 송 단평(端平) 원년ㆍ금 천흥 3년ㆍ몽고 태종 6년

 

아사달은 단군의 수도가 아닌가 한자는 다르지만 우리발음이 같기에 아사달은 단군의 수도가 맞다. 이곳이 바로 부소산에서 좌소즉 동쪽에 있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地理志)에,

“문화현(文化縣) 장장평(庄庄坪)은 단군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지는데, 곧 당장경(唐莊京) 《삼국유사》에는 장당경(藏堂京)으로 되어 있다.

 

그 뒤에 단군은 당장(唐藏) 땅에 옮겨 살다가 중국 상(商) 나라 무정(武丁) 8년에 이르러 죽었다. 송양(松壤) 서쪽에 단군총(檀君塚)이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단군은 아사달로 들어갔다.”

기언(記言) 제32권 원집(原集) 외편 단군세가

 

. 유주(幽州)에 당장경(唐臧京)이 있었으니 《고려사(高麗史)》에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
기언(記言) 제48권 속집(續集)관서지

 

유주에 있는 당장경이 바로 아사달로 단군의 수도이다. 단군의 수도 아사달은 개경즉 부소산에서 동쪽에 있다. 즉 개경역시 유주일대에 있음을 알수있다.또한 고려사지리지에 따르면 문화현은 풍주에 속하는데 개경이 옆에 있는 서해도에 속한다. 결국 부소라는 개경의 근원지명의 동쪽에 아사달이라는 단군의 수도가 있었다.는 것이 후대에도 계속 전해진 것이다.

 

 

[주D-002]바위 …… 일은 : 고려 태조 왕건의 시조(始祖)인 호경(虎景)이란 사람이 일찍이 부소산(扶蘇山)에 살면서 사냥을 업(業)으로 삼았는데, 하루는 같은 마을 사람 9인과 함께 성거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해가 저물어 바위 굴 속에 들어가 자려던 차에 바위 앞에서 범이 크게 포효하므로, 호경이 그 범과 싸우려고 밖으로 나가자, 범은 이내 보이지 않고 갑자기 그 바위굴이 무너져서 나머지 9인이 모두 압사(壓死)당하고 호경만이 살아 나오게 되었다는 설화에서 온 말이다

 

부소산이 바로 송악이며 고구려땅이었다가 진나라 태자 부소가 머문곳이다. 이곳에 왕건의 시조가 살았던 것이다. 왕건의 시조가 성거산이 있는 평주로 사냥을 갔으니 지리상으로 개경의 동쪽에 유주와  평주가 있다는 내 주장이 맞다는 것이다.

 

청구가 수기(秀氣) 배태해 황하에 응하면서 / 靑丘孕秀應黃河
온왕이 동명의 가문에서 탄생하였나니 / 溫王生自東明家
부소산 아래로 옮겨 와 나라를 세울 적에 / 扶蘇山下徙立國
부여 회고(扶餘懷古)가정집 제14권

 

부여는 우리 상식으로는 충청도이고 개경부소산은 경기도인데 부여에서 시를 지었는데 부소산이 있다고 한다. 즉 지명조작이 있었음을 알수있다. 원래 부여라는 지명은 부소산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다. 부소산 북쪽은 고구려땅이요 그 동남쪽은 백제땅이라는 것이다.

 

바다 속의 화개산은 하늘에 치솟았는데 / 海中華蓋揷靑天
산 위의 옛 사당은 언제 지은지 모르겠네 / 上有荒祠不記年
제사 뒤에 한 잔 마시고 북쪽을 바라보니 / 奠罷一杯時北望
부소산 빛은 더욱 푸르기만 하구나 / 扶蘇山色轉蒼然
교동(喬桐)

목은시고(牧隱詩藁) 제6권

 

목은이색은 고려말 사람으로 고려때 지명을 잘안다. 그가 말하길 교동에서 부소산이 보인다고 한다.

 

교동별초(喬桐別抄)가 평주성(平州城) 밖에 복병하였다가 밤에 몽고군의 진에 들어가서 쳐 죽인 것이 매우 많았다

계축 40년(1253), 송 보우(寶祐) 원년ㆍ몽고 헌종 3년고려사절요 제17권

 

교동은 평주와 가깝다.  

 

양광도(楊廣道)의 부평(富平)․강화(江華)․교동(喬桐)․김포(金浦)․통진(通津)

고려사지리지

 

 양광도즉 광주와 양주가 있는곳인데 위에서 양주가 아사달산이 있는 곳이라는 기록과 함께 아사달이 개경의 동쪽임을 증명했다. 광주가 있는 교동역시 평주근처이다.

 매국노들의 주장에 따라 지리를 구성하면 경기도 광주근처의 교동이 뜬금없이 황해도 일대에 존재하고 (평주를 매국노는 황해도라고 한다)충청도의 부여가 졸지에 개경근처라는 것이 된다.

 

 

 

 

위의 지도처럼 하면 몽골군이 평주성에 오자 교동의 군대가 이를 저지했다는것이 이치에 맞고 부여가 개경에 가깝다는 기록도 맞게 된다. 당시 유주가  요나라 남경과 그동남쪽을 포함하니 아사달이 유주에 있고 개경의 동쪽에 있다는 것도 지리상 맞게 된다.

 

 

 

 

 

 (중국 구역수령도(九域守令圖)상의 수성)

진나라 태자 부소가 장성을 쌓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딴 지명을 남긴것을 위에서 입증했다. 그러니 부소라는 지명은 장성남쪽에 있는것으로 진나라 장성이 끝나는 부분을 알면 개경의 위치도 대략 짐작할수 있다.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하는 곳이라는 기록이 있으니 중국 고지도에서 찾아낸 수성현의 위치를 보면 대략 저 일대가 부소라는 지명과 가까움을 알수있다.

 

 

 

 

 

 

 

  

 우공구주산천지도에도 비슷한 내용이 그려져 있다. 즉 거란지리도상의 갈석산은 후대에 이동된것으로 보이며 원래 갈석산은 좀더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아마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평정하고 장성을 동쪽으로 연장한 것같다.

 

 

 

 

짱개와 우리학계가 표기한 중국장성에서 그장성이 끝나는 부분이 바로 부소라는 지명이 존재할 것이다. 아마 위의 그림에 나온 중국북쪽장성이 진나라가 설치한 것에 제일 가까울 것이다. 고구려땅이 가깝고 하간에 가까움을 알수있다. 즉 개경은 저 장성이  끝나는 부분에 있었고 단군의 수도는 개경의 동북쪽에 있었다.

 

 

 

 

 

 

 짱개가 진장성이라 주장하는 장성은 실제로는 명때쌓은것과 고구려 고려 조선이 쌓은것이 서로 혼합된 것이다. 실제 진나라장성은 바로 연장성이라 주장하는 곳이다. 원래 이것도 내가 보기에 한나라가 쌓은 것같다. 진장성은 산서성북쪽에서 멈추었을 것이다. 이후 한나라가 연장하여 하간근처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진나라 태자 부소는 하간근처로 왔던 것 같다. 그러니 부소라는 지명이 그일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매국노들은 어쩌면 진나라 태자 부소가 한반도 황해도에 왔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야 개성이 고려의 수도가 되기 때문이다. 책좀 읽고 살아라 매국노 국사학계여!!!!!!!!!

 

 

 

 

 

 

 

 

 

 

 

 

 

 

 

 

 

 

 

 

 

 

 

 

 

 

 

 

 

 

 

 

 

 

부소갑을 진시황의 아들 부소와 연관 시킨 것은 중국 사람들의 착각일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부소갑은 단군왕검의 네 아들 중 둘째인 부소에서 유래된 지명이 아니었을까요?
지금의 난하중 반가구수고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고려사 기록으로는 처음 접해봅니다. 한데 부소와 관련하여 요사 지리지 중경도 기록 중에서 진시황 첫아들 부소가 장성 쌓는 감독을 하면서 거주한 곳이라는 기록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렇지만 고려의 개경이나 단군왕검의 둘째아들과 연관이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은 너무 거리가 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나라 태자 부소에서 부소산 부소갑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좀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 단군의 아들이 부소라는것은 저는 몰랐습니다. 안파견이라는 단군의 이름을 땃는지 야율아보기가 이름을 안파견이라고 했다고 요사에 있던데 진나라역시 동이족의 나라이니 단군의 아들이름을 태자에게 붙였을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소라는 지명이 요사에 기록되었고 그 유래까지 있으니 부소갑이라는 개경의 근본지명도 분명 진나라 태자부소와 연관되지 않았겠습니까 ?
저는 증거를 최소 수십개 동시에 제시하니 한가지만 보시지 말고 여러가지를 다읽어보시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십시오 ^^
제가 실수했네요.
요사 지리지 동경도가 아니라 남경도 란주 설명에 있습니다. 扶蘇泉이 있는데 아주 달고 맛있었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진시황 태자 扶蘇가 장성 쌓는 것을 감독인지? 구경인지 말을 세운적이 있다네요.
맛있고 시원한 부소천 물도 떠먹었겠지요.

그런데 개경에 대하여는 동의할 수 없겠네요. 또 진장성의 동쪽 끝이 하간이라는 것은 근거 기록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정설은 양평, 수성,요동이라고 하였고, 이곳 역시 부소산, 부소천이 있는 란주와 노룡산,갈석산,임유산,난수, 그리고 임유관이 있는 지금의 난하 최하류 좌우측이 확실하다고 봅니다.
임유란 지명은 1800년대 지도인 당토주군명승도회에도 난하에 표기되어 있는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명나라지도 연산도와 여러지도를 보시면 당시의 요하는 바로 난하임을 알수있습니다. 그러니 그당시 영정하가 난하라는 것이지요 원래 임유관이란 지명은 당시의 난하 즉 지금의 영정하에 있다가 현재의 난하로 위치가 옮겨진 것입니다. 송사에 조하는 역수와 합쳐져 바다로 들어간다 명사에 유수의 남쪽에 역수가 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조하역시 현재의 위치가 아님을 난하의 다른이름인 유수가 역수바로위임을 알수있습니다.
님의 글을 읽다가 느낀 점은 우선 한가지를 조속히 합의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록에 보이는 濡水가 지금의 난하인가? 영정하인가?
이거 의견 통일 못하면 제자리라고 봅니다.

집중토의 제안합니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308 여기 읽어보세요
국어사전에 "부르돋다"를 찾아보세요.
"돋다"는 "솟다"와 같은 말이죠.

이 뒤에 땅을 뜻하는 "라"를 붙이면

"부르솟라"...扶蘇樑
아주 드높은 곳으로서 신령한 땅이라는 말입니다.

일반적인 지명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聖地를 그렇게 부른겁니다.

신지비사의 "부소량 칭간, 백아강 칭추, 오덕지 칭그릇"
고려는 이런 고대사상에 따라 도읍을 정하였기에 단군조선과 비슷한 지명이 나오는거죠.

고려의 부소와 단군조선의 부소...
같은 곳이 아닙니다.
부르솟라 아마 부소를 당시에 이렇게 불렀는 모양이지요 이름 좋은데요
용어해설

출처 해양용어사전 | 곶 갑이라고도 하지만 표준어는 곶이다. 세면이 물로 둘러싸인 땅을 의미하며, 바다 또는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육지의 끝을 곶이라 한다. 곶은 반도(peninsula)보다 작은 개념이다. 육지의 일부가 침강하면 산골짜기에 바닷물이 침입하여 입강 또는 좁은 만이 되고 그 사이에 있던 산줄기는 곶으로 남게 된다.
외국어 표기 串(한자), cape(영어), point(영어)

동의어 갑( 岬, point)


출처 자연지리학사전 | 갑 바다로 돌출한 육지의 선단부를 말한다. 갑은 산지가 침수하여 산각(山脚)이 바다와 접하거나, 경암으로 이루어져서 파랑의 침식에 강하여 돌출되는 경우에 형성된다. 사취 등의 퇴적지형에서도 바다로 돌출한 부분에 대해서는 갑의 명칭을 사용한다.
외국어 표기 岬(한자), cape(영어), headland(영어), point(영어), promontory(영어)


출처 과학용어사전 | 곶 바다 또는 호수의 수역에 뾰족하게 내민 육지의 끝, 또는 반도보다 작은 육지. 갑(岬)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관(串), 갑각(岬角), 지각(地角)으로 통한다.
외국어 표기 串(한자), cape(영어), headland(영어), mule(영어), foreland(영어)


출처 해양과학용어사전 | 곶 지형상 소규모의 돌출부나 해안에서 돌출된 모래나 자갈의 융기선(ridge) 또는 곶 모양으로 돌출된 형상의 구조물.
외국어 표기 串(한자), headland(영어), foreland(영어), cape(영어), promontory(영어)

동의어 갑(岬)


출처 한국고전용어사전 | 곶 바다 쪽으로 돌출된 육지 부분. 곶이.
외국어 표기 串(한자)

용례 물속으로 쑥 들어간 땅을 세속에서 곶이라 한다. ; 斗入水內之地 俗謂之串 [세종실록 권제39, 1장 앞쪽, 세종 10년 1월 4일(정해)]


출처 농업용어사전: 농촌진흥청 | 갑 반도(半島)처럼 바다 또는 호수로 뾰족하게 내민 작은 땅.
외국어 표기 cape(영어), 岬(한자), みさき(일본어)

[네이버 지식백과] 곶 (용어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