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09. 3. 18. 12:30

 무식한 국사학자님들과 짱개학자들이 평로를 대릉하의 조양시로 보는데 진정 조양시가 평로인지 알아보자 내가 보기에 조양시는 발해의 땅이었던 것같은데 어떤 무식한 학자가 발해가 조양시도 못차지했다고 생각하는지 한번 보자.

 

20년 무왕 14년 9월에 대무예가 그의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海賊)을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공격하게 하여 등주 자사 위준(韋俊)을 살해하였다. 이에 좌영군장군(左領軍將軍) 개복순(蓋福順)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구당서》
○ 21년 무왕 15년 정월 경신에 조서를 내려서 대문예를 파견하여 유주(幽州)로 가서 군사를 징발해 장문휴의 군사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어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신라로 가서 군사를 내어 발해의 남쪽 국경을 치게 하였다. 이때 산은 험하고 날씨는 추우며, 눈은 한 장 남짓이나 쌓여 얼어 죽은 군사가 반이 넘었으므로 마침내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해동역사중에서

 

장문휴가 등주를 공격했는데 뜬금없이 대문예가 유주의 군대를 징발해 장문휴와 싸우려 하고있다. 즉 발해군이 대규모 침공을 개시한 것으로 봐야한다. 발해군은 유주일대와 산둥성의 등주일대를 모두 장악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조양이 어떻게 발해땅이 아닌가 발해군이 이미 유주가있는 베이징까지 모두 석권했다고 위에 나와 있지 않은가

 

평로치청절도관찰사 해운압신라발해양번사 검교공부상서 청주자사(平盧淄靑節度觀察使海運押新羅渤海兩蕃使檢校工部尙書靑州刺史)로 삼고는 지금의 이정기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얼마 뒤에 우복야(右僕射)로 올리고 요양군왕(饒陽郡王)에 책봉하였다. 구당서중에서

 

요양은 하북성 안평현의 동쪽으로 그림에서 천진이남으로 보면 된다.

 

 

숙종(肅宗) 지덕(至德) 원년에 문왕 20년 평로유후(平盧留後) 서귀도(徐歸道)가 과의도위 유성현사부경략판관(果毅都尉柳城縣四府經畧判官) 장원간(張元簡)을 사신으로 보내어 발해에 고하기를,
“올 10월에 안녹산(安祿山)을 칠 것이니 왕은 모름지기 기병 4만 명을 출동시켜 와서 도우라.”

하였는데, 대흠무가 다른 변고가 있을까 염려하여 머뭇거렸다. 12월 병오에 서귀도가 과연 평로 절도사 유정신(劉正臣)을 북평(北平)에서 독살하고 몰래 안녹산과 유주 절도사(幽州節度使) 사사명(史思明)과 더불어서 내통하면서 모의하였다

해동역사중에서

 

평로절도사가 북평에 주둔하고 잇었다고 한다. 즉 당나라때의 북평의 위치를 찾아보자 송나라때 제작된 화이도에서 북평은 태원바로옆이다. 이는 윗글에서 유주절도사와 평로절도사가 서로 내통하는 것을 봐도 알수 있다. 당나라때의 유주와 평로는 바로 옆이다.즉 당나라때의 유주와 평로는 안평현의 동쪽에 있는 요양과가깝기에 이정기가 이곳의 직책을 부여받은 것이다.

 

안동도호(安東都護) 왕현지(王玄志)가 모의한 사실을 알아채고는 정병 6천 명을 이끌고 유성(柳城)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서귀도를 참수한 다음, 스스로 평로 절도사라고 칭하면서 북평에 주둔하였다. 그러고는 장군 왕진의(王進義)를 발해에 보내어 고하게 하였는데, 아뢰기를,

“천자가 이미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촉(蜀)에서 태상황(太上皇)을 맞이해 오고 별궁(別宮)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적도(賊徒)를 다 섬멸하였으므로 신을 보내어 고하게 한 것입니다.”

하였다. 대흠무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워서 왕진의를 억류하고서 별도로 사신을 보내어 들어가서 조알하게 하니, 숙종이 칙서를 내려 위로하였다

해동역사중에서

 

 

유성이 만일 대릉하의 유성이라면 북평과는 상당히 멀다. 이는 유성의 위치가 후대에 대릉하로 옮겨졋음을 추측케하는 대목이다. 발해가 건국후에 유주까지 진격하였기에 당은 유주를 발해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당연히 평로는 유주근처이다. 특히 평로절도사가 태원바로옆인 북평에 거주했으니 이곳이 바로 평로이다. 유성이란 후대에 옮겨진 지명일뿐 당대에는 평로즉 북평근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