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영토

소오강호 2009. 3. 19. 11:12

폐4군(廢四郡)이란 무창ㆍ여연ㆍ우예ㆍ자성이다. 네 고을의 지역이 거의 천 리가 넘어서 지금 황해도와 비교하여도 곱절이 넘는다. 비록 고을 관아는 없으나 또한 인민은 섞여서 살고 있다. 네 고을을 회복하지 않을 수가 없으나 남쪽으로 평양과의 거리가 거의 몇천 리여서, 감사가 멀리까지 통제할 수가 없다.  군현분예(郡縣分隸)

 

우리나라 무식한 국사학자님들이 4군을 북한 압록강이라 하는데 어째서 4군에서 평양까지 몇천리인가? 천리도 안된다. 인조이후 조선은 사군천리지역을 호인(청나라)에게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조선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지고 4군지역을 넘겨주었다.  4군의 위치는 요하서쪽으로 추정된다.

 

 

강인(疆人) 수천 명이 4군 지역을 차지하여 북쪽으로 갈파(葛坡) 길을 끊고, 서쪽으로 건주(建州) 곡식을 통하면서, 남쪽을 향해 우리를 호령한다면    군현분예(郡縣分隸)

 

건주는 북한 압록강이북이 아니고 난하의 동쪽이다. 1536년작성된 대명여지도에 건주가 난하의 동쪽에 기록되어 있다. 즉 4군의 서쪽에 건주가 있다고 하니 요하유역에 4군을 설치한 것이다.

 

11월. 상이 경연에 거둥하였다. 검토관 양성지(梁誠之)가 주달하기를,

"평안도 장성(長城)의 역사를 비록 파하기는 하였지만 여연(閭延)ㆍ무창(茂昌)ㆍ우예(虞芮) 등의 군(郡)이 강변에 닿아 있기 때문에 남도의 군사들이 큰 재를 넘어와서 수역(戍役)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인마(人馬)가 모두 고역을 견디지 못하여 대부분 전토와 재산을 팔고 요동과 심양 등지로 도망해 간다고 합니다. 지금 이 세 고을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큰 강이 한계로 되어 있으므로 국토는 여전히 그대로 있게 됩니다   국조보감 제9권  단종 1년(계유, 1453)

 

평안도 장성이란 요동반도에 있는 고구려와 고려가 쌓은 천리장성을 말함이다. 장성 너머에 4군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큰강이 경계가 되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즉 이 큰강이 타타르와 조선의 경계였다. 후대의 조선학자들은 이강이 어디인지 몰라 해석을 포기했다. 흑룡강도 아니고 요하도 아니고 압록강도 아니고 이름이 없는 큰강이다. 몽골지도를 펼쳐보면 당시에 흑룡강의 원류가 되는 큰강이 몽골내로 흐르고 있음을 알수있다. 바로 이강이 조선과 타타르의 경계였다.

 

 4군의 대안(對岸)에 올량합(兀良哈)ㆍ홀라온(忽剌溫) 등 부락들이 더욱 함부로 날뛰며 아침저녁으로 몰래 나와 살생과 약탈을 계속하였으나, 그때에 조정에서는 영토를 확장하려고 인민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지 아니했으므로[不欲] 이 ‘네 군’을 버리고 점유하지 아니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아니합니다. 강의 북쪽 1,000여리 밖에 도둑의 그림자가 얼씬거리지 않은지 이미 4ㆍ50년입니다

남구만의 상소중에서

 

올량합은 대명여지도에 서요하의 서북에 산다. 중국역사지도는 바이칼호에서 고비사막까지로 표기한다. 즉  4군의 바로 옆에 올량합이 있으니 조선의 4군은  서요하의 서북지역이다. 강의 북쪽 1천리안에 올량합이 오지 못했다고 하니 서요하에서 1천리 북쪽까지 조선군이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세조 원년 을해에 경차관(敬差官) 양성지의 상소에 아뢰기를, “여연ㆍ무창ㆍ우예 등 읍이 압록강 가로 벌려 있었는데, 지금 3개 읍은 폐지되고 자성군 하나만 의 요충에 맞서고 있습니다.” 하였다   군정편  자성 폐군

 

 

명나라지도 구변도에 요하를 압록강이라 동시표기했다. 즉 당시에도 요하는 압록강이라 불렸다.  즉 모든기록이 일치한다. 4군은 서요하의 서북지역에 설치했다.조선은 직계관할로 4군을 설치하고 주변 올량합부족의 입조와 충성을 받았다. 즉 바이칼호까지 조선의 영토였다. 

 

 천하 무적 우리 육진의 군사 / 六鎭兵無敵
흉노가 날고뛴들 어떻게 해 보리요 / 匈奴技不如
기재의 손 안에 들어온 이상 / 奇才入彀率
승리는 우리의 것 오랑캐를 압도하리 / 勝氣壓穹廬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북쪽 변방의 군사를 검열하러 어사로 떠나는 이여성을 전송하며

 

흉노의 위치는 지금도 그러하고 과거도 그러하고 전부 현재의 몽골땅이다. 6진이 설치된 곳이 바로 흉노의 땅이자 몽골의 땅임을 알수 있다. 

 

 

 우리 세종(世宗)과 세조(世祖) 때에 와서 마천령(摩天嶺) 이북으로 천 리나 개척하여 육진(六鎭)을 바둑돌처럼 설치했고, 밖으로 창해(滄海)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요동은 끝내 수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논(論)하는 사람은 이를 유감으로 여기고 있다명(明) 나라가 이미 북경(北京)에 도읍을 정하여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의 사람들이 기내(畿內)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를 엿보아도 진실로 차지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쨌든 서쪽으로 요동을 획득하고 동쪽으로 여진을 평정, 북쪽으로는 국경을 넓혀 위로 흑룡강(黑龍江)의 근원까지 올라가고 오른쪽으로 몽고와 버틴다면, 충분히 큰 나라가 될 수 있으니, 이 또한 하나의 통쾌한 일이라 하겠다다산시문집

 

원래 태조는 나라를 개국할때 그 영토가 이미 몽골중앙까지였다. 그런데 태종이 형제들을 죽이고 내쫓아내자 태조가 여진과 타타르 군대를 이끌고 징벌하려 했다. 결국 태종이 이겼지만 여진과 타타르 부족중 조선에게서 통치를 받지 않는 부족이 생겻다. 이를 세종과 세조가 다 회복했다. 창해는 사기에 보면 연제의 바다라고 했다. 즉 발해만 남쪽지역을 창해라고 한다. 그곳까지 조선이 차지했다.  다산 정약용은 조선이 다시 흑룡강의 근원인 몽골내부로까지 진격하고 요양과 심양을 회복해야한다고 역설했다. 나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전쟁을 해서 빼앗을 생각을 하면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