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영토

소오강호 2009. 4. 13. 16:24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삼았으며,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홀한주(忽汗州)로 삼고는 영홀한주도독(領忽汗州都督)의 직을 더해 주었다. 이로부터 발해가 비로소 말갈의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칭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열전(渤海列傳

 

 

 

 

거란국지에 나타단 발해표기는 이상하게 난하동쪽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먼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발해시대 동전으로 추정되는 유물에서 그려진 서전과 남전으로 보라 남전의지도는 하북성에서 요녕성의 해안을 가리키는것 같고 서전은 요동반도가 아니라 훨씬 서쪽의 지역을 가리키는 것 같다.

위의 지도상의 난하하류에서 시작하는 해안지방이 동전의 남전즉 발해 남쪽부분이고 발해 서쪽은 요소즉 상간수일대를 말하는것 같다.

 

《구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는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월희말갈(越喜靺鞨)에서 동북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까지 이르며, 땅은 사방 2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다

 

초기의 발해는 사방2천리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발해는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지역을 차지하였는바,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남쪽으로는 신라와 접하여 이하(泥河)로써 경계를 삼았고, 동쪽은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은 거란과 접하였다. 땅은 사방 5000리이고, 호구는 10여 만 호이며,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는 여러 나라를 모두 차지하였다

 

그러나 전성기 발해는 5천리로 초나라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크다. 조선이라함은 요수즉 상간수에 있는 4군지역을 말한다. 이곳을 백제가 차지했다. 변한이라함은 대릉하 남부지역으로 역시 이곳을 발해가 차지했다. 

 

《요사(遼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태조(太祖)가 동쪽으로 발해를 병합하여 103개의 성읍을 차지하였다.

 

 고구려의 성이 170개가 넘으니 발해 말기에는 고구려보다 영토가 절반을 조금 넘었다.

 

 “영주(營州)에서 동쪽으로 180리를 가면 연군성(燕郡城)에 이른다. 또 요수(遼水)를 건너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까지는 500리인데, 안동도호부는 옛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다. 안동도호부에서 동북쪽으로 옛 개모성(蓋牟城)과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다시 발해의 장령부(長嶺府)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王城)에 이르는데, 왕성은 홀한하에 임해 있다. 왕성에서 서남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옛 숙신성(肅愼城)이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덕리진(德理鎭)을 경유해 가면 남쪽의 흑수말갈에 이르는데, 1000리이다

 신당서지리지

 

 기록의 내용과 지도를 비교하면  안동도호부와 한나라 양평성은 모두 요나라의 동경으로 난하의 동쪽이다. 그렇다면 신당서를 쓸때 영주가  그위치가 상당히 요수즉 상간수의 서쪽임을 알수 있다. 연군이라함은 태원에서 동쪽일테니 영주역시 태원일대임을알수 있다. 영주의 위치가 신당서를 쓸때와 거란지리도를 만들때가 서로 다른것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숙신(肅愼)의 옛 지역을 상경(上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용천부(龍泉府)라고 하였는데, 용주(龍州), 호주(湖州), 발주(渤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 천보(天寶) 말기에 대흠무(大欽茂)가 도성을 상경으로 옮겼는데, 옛 도성에서 300리 떨어진 홀한하(忽汗河)의 동쪽이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숙신의 옛 지역을 상경으로 삼았다. 그 남쪽을 중경 현덕부라고 하며, 노주(盧州), 현주(顯州), 철주(鐵州), 탕주(湯州), 영주(榮州), 흥주(興州)를 관할한다

 

 

 《요사》에서 중경 현덕부는 바로 평양성(平壤城)이라고 한 것

 

 발해의 중경이 고구려의 평양성즉 조양혹은 난하동쪽일대임을 알수 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예(穢), 맥(貊)의 옛 지역을 동경(東京)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龍原府)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柵城府)라고도 하였는데, 경주(慶州), 염주(鹽州), 목주(穆州), 하주(賀州)를 관할하였다. ○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 대흠무(大欽茂)가 정원(貞元) 연간에 도성을 동남쪽에 있는 동경(東京)으로 옮겼다. 대화서(大華嶼)가 왕이 된 후 다시 도성을 상경(上京)으로 옮겼다

 

 예,맥의 땅은 고구려의 땅으로 요수즉 상간수남쪽에서부터 요하일대까지를 말한다. 발해의동경은 바로 난하근처에 있었던 것이다.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국의 남해부(南海府), 압록부(鴨綠府), 부여부(扶餘府), 책성부(柵城府)는 본디 고구려의 옛 지역이다.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에서 책성부까지는 39개의 역(驛)이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인용하였다.

 

 후위서(後魏書)》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동쪽은 책성까지 이른다

 

책성은 아마도 북한 압록강근처로 생각된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옥저의 옛 지역을 남경(南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남해부라고 하였는데, 옥주(沃州), 정주(睛州), 초주(椒州)를 관할하였다. ○ 남해(南海)는 신라도(新羅道)이다.

 

신라도라고 하여 전부 북한지역을 생각한 것이 바보였다. 발해의 남해부는 대릉하남부지역을 말한 것으로원래 백제땅인데 이곳을 발해가 차지한 것이다. 그러니 백제땅을 발해와 신라가 차지했다고 기록에 있는 것이다.

 

《신당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발해열전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지역을 서경(西京)으로 삼고 부의 이름을 압록부(鴨綠府)라고 하였는데, 신주(神州), 풍주(豐州), 환주(桓州), 정주(正州)를 관할하였다.” 하였다

 

심양에서 발해 무왕의 무덤이 발견되고 거기에 서경에 장사지낸다고 써있었다. 즉 발해의 서경은 심양이다.

 

  정주는 본디 비류왕(沸流王)의 옛 지역인데, 나라가 공손강(公孫康)에게 병합되었다. 발해 때에는 비류군(沸流郡)을 설치하였다. 비류수(沸流水)가 있다. 녹주(淥州)에 예속되었다

요사지리지

 

 요나라 녹주는 대릉하와 요하사이이다.거란지리도에 그렇게 써있다.

 

《신당서》 발해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구려의 옛 지역을 장령부라고 하였는데, 하주(瑕州)와 하주(河州)를 관할한다. ○ 장령은 영주도(營州道)이다

 가탐(賈耽)이 이르기를, “안동도호부  에서 동북쪽으로 개모성(蓋牟城), 신성(新城)을 경유하고, 또 발해의 장령부를 경유해 1500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이른다.

 

발해의 장령부가 영주근처라는 것이다.즉 요수즉 상간수의 남쪽에도 발해 땅이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은 본디 부여국의 왕성이다. 발해 때에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太祖)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聖宗)이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통할하는 현은 넷인데, 통원현(通遠縣)은 본디 발해의 부여현(扶餘縣)이었다  용주 황룡부(黃龍府)는 본디 발해의 부여부이다. 태조가 발해를 평정하고서 돌아오다가 이곳에 이르러 붕어(崩御)하자 황룡이 나타난 일이 있으므로 이름을 고쳤다.

 

부여성을 우리가 요하동쪽이라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다. 한나라기록에도 부여가 장성이북이라 했는데 무작정 요하동쪽에만 부여땅이 있다고 생각했으니 부여국의 왕성은 난하동쪽에 있다. 황룡부역시 난하동쪽이다.

 

 개원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처음 나온다. 을미년(1235)에 개원 만호부(開元萬戶府)와 남경 만호부(南京萬戶府)를 설치하였는데, 치소는 황룡부(黃龍府)였다. 지원(至元) 23년(1286)에 이르러서 개원로로 고쳤다

 《원사》 지리지

 

 

원나라의 남경이 황룡부즉 난하동쪽이다. 이곳이 개원로이다. 명나라기록에 개원로가 평안도이다 하니 조선의 평안도는 바로 난하동쪽을 말하는 것이다.

 

 삼만위는 발해 때에는 부여부(扶餘府)라 하였고, 요나라 때에는 황룡부(黃龍府)라 하였고, 금나라 때에는 회령부라 하였고, 원나라 때에는 개원로라 하였는데, 사실은 같은 곳이다

해동역사

 

 전요지(全遼志)》에 나오는 ‘함평(咸平)이 개원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다’

 

《원사(元史)》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咸平府)는 옛 조선의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속하였으며, 고구려가 그 지역을 침입하여 차지하였다

 

《금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함평부(咸平府)는 본디 고구려의 동산현 지역으로, 요나라 때에는 함주였다

 

함평부를 해동역사에서는 심양일대라고 했으나 함주의 위치가 난하동쪽이므로 함평부는 서요하와 난하사이의 공간이다

개원이 난하인근이거나 명나라때 함평과 개원에 대해 잘못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요지는 명나라후기에 쓰여진책이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東京) 요양부(遼陽府)는 본디 조선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사군(四郡)이었다. 진(晉)나라 때에는 고구려를 함락하였다. 원위(元魏)의 태무제(太武帝)가 사신을 보내었는데 사신이 고구려 왕이 사는 평양성(平壤城)에 이르렀다. 요나라의 동경은 본래 이곳이다. 당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 뒤에는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중종(中宗)이 도읍지에 홀한주(忽汗州)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는데, 바로 옛 평양성이다. 중경 현덕부라고 불렀다 당나라 원화(元和) 연간에 발해 왕 대인수(大仁秀)가 남쪽으로 신라를 평정하고 북쪽으로 여러 부(部)를 침략하여 군읍(郡邑)을 개설하면서 드디어 지금의 이름으로 정하였다

 

 발해의 중경이 고구려의 옛 평양성인 요나라의 동경이다. 즉 발해가 난하일대를 중심으로 중경을 설치한 것이다.

 

 -《오대사(五代史)》에는 이르기를, “유주(幽州)로부터 10여 일을 가서 평산(平山)을 지나고 유관(楡關)을 나가 사적(沙磧) 가운데를 지나 7, 8일을 가면 금주(錦州)에 이른다. 또다시 5, 6일을 가면 해북주(海北州)를 지나고 다시 10여 일을 가면 요수(遼水)를 건너서 발해국의 철주(鐵州)에 이른다.” 하였다.-

 

 

거란지리도에 금주는 난하의 서남쪽에 있다.  평산은 평주에 있는것으로 역시 난하에서 한참 서남쪽이다.  오대사의 요수는 소요수즉 난하를 말함이다. 난하를 건너면 발해국의 철주이다라는 것이다.

 

 금주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평정하고서 설치하였는데, 뒤에 발해의 삼로군에 속하였다

해동역사 

 

금주역시 발해땅이다. 즉 발해와 당은 유주일대를 서로 국경으로 했는데 그증거가 되기도 한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가 경주를 설치하였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하였다. 요나라 때에는 개봉부(開封府) 개원군(開遠軍)을 설치하였으며, 요나라 말기에는 고려에 편입되었는데, 혹 촉막군(蜀莫郡)이라고도 한다

 

요나라가 고려의 개주를 촉막군이라고 한다. 즉 송나라가 생각한 고려의 수도는 개주 촉막군에 있다고 했는데 개주는 조양일대를 말한다고 조선의 기록은 증명해주고 있으니 송나라가 생각하고 요나라가 생각한 고려의 국도는 고려입장에서 서경이라 불리는 조양일대이다.

 

 요사》 지리지를 보면, 개주 진국군은 본디 예, 맥 지역으로, 고구려 때에는 경주고, 발해 때에는 동경 용원부였다

 

발해의 남경은 대릉하남부이고 서경은 심양이며 중경은 난하동쪽이며 동경은 개주즉 조양일대이다.

 

 《전요지》를 보면, 개주성은 요양성에서 동쪽으로 36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봉황산보(鳳凰山堡)이다

 

 

요양성은 난하바로동쪽에 있으며 거기서 360리는 조양일대이다.

 

 《후한서》에는, “예, 맥은 고구려, 옥저와 더불어 남쪽으로 진한(辰韓)과 접하였으며,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낙랑에 이르렀다

 

진한이 변한과 더불어 대릉하남부에서 하북 산둥강소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당서》에는, “발해는 예, 맥의 옛 지역을 동경으로 삼고는 부의 이름을 용원부라고 하였으며, 또한 책성부라고도 하였는데, 경주, 염주, 목주, 하주를 관할하였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용원부의 동남쪽 바닷가는 일본도(日本道)이다.”

 

 요동반도에 있는 장성이 신라를 막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위에서 설득력을 가진다. 책성이 고구려의 동쪽 경계성인데 예 맥의 지역이라 했으니 북한 압록강의 서쪽지역이고 이는 곳이 책성밖에 신라가 있고 책성이 요동반도임을 암시한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해주(海州) 남해군(南海軍)은 본디 옥저국 지역이다. 고구려 때에는 사비성(沙卑城)이었으며, 당나라 이세적(李世勣)이 일찍이 이곳을 공격하였다. 발해 때에는 남경 남해부라고 불렀다. 돌을 포개 쌓아 성을 축조하였으며, 폭이 9리이다

 

 요나라 해주는 난하 동남쪽에 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심주(瀋州) 소덕군(昭德軍)은 본디 읍루국 지역이며, 발해에서 심주를 세웠다. 옛 현은 9개인데 모두 폐지하였다가 태종(太宗)이 흥료군(興遼軍)을 설치하였으며, 뒤에 이름을 바꾸었다

 

심주는 난하의 중류지방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신주(信州) 창성군(彰聖軍)은 본디 월희말갈(越喜靺鞨)의 옛 성이다. 발해 때에는 회원부(懷遠府)를 설치하였으며, 지금은 폐지되었다. 성종(聖宗)이 그 지역이 고려와 인접하였다는 이유로 개태(開泰) 1년(1012)에 주를 설치하였다

 

발해의 초기 경계인 월희말갈이 어디인지 가르쳐주고 있다. 즉 난하 상류동쪽이 월희말갈이다.그리고 여기서 고려의 경계가 시작된다. 즉 고려가 발해땅 상당부분을 차지했다는 근거이다. 그래서 요나라가 여진족을 공격할때 고려땅을 지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 진주(辰州) 봉국군(奉國軍)은 본디 고구려의 개모성(蓋牟城)이다. 당나라 태종이 이세적(李世勣)과 함께 공격해 격파한 개모성이 바로 이 성이다. 발해 때에는 고쳐서 개주(蓋州)로 삼았다가 또다시 진주(辰州)로 고쳤는데, 진한(辰韓)으로 인해 진주라 한 것이다

 

개모성은 난하와 대릉하 사이이다. 역시 이곳이 진한과 변한이 섞여 살던 곳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는

건주(乾州) 광덕군(廣德軍) 사농현(司農縣)은 본디 발해의 녹군현(麓郡縣)으로, 녹파현(麓波縣)과 운천현(雲川縣)을 아울러서 편입시켰다 

 

발해땅이 소요수즉 난하이남으로도 있엇다는 증거이다. 건주는  난하 서남쪽에 있다.

 

 집주(集州) 회중군(懷衆軍)은 옛 비리군(陴離郡) 지역으로, 한나라 때에는 험독현(險瀆縣)에 속하였고, 고구려 때에는 상암현(霜巖縣)이었고, 발해 때에는 주(州)를 설치하였다. 통할하는 현은 1개로 봉집현(奉集縣)인데, 발해에서 설치하였다

요사지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