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제국 후백제의 영토

소오강호 2011. 5. 21. 11:18

진도군(珍島郡)은 본래 백제의 인진도군(因珍島郡)이었는데, 신라에서 진도(珍島)로 고쳐서 무안(務安)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나주(羅州)의 임내(壬內)로 하였다. 해남현(海南縣)은 본래 백제의 색금현(塞琴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침명현(浸溟縣)으로 고쳐서 양무(陽武)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해남(海南)으로 고쳐서 영암(靈巖)의 임내(任內)로 하였는데, 충정왕(忠定王) 2년 경인에【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10년.】 진도는 왜구(倭寇)로 인하여 육지로 옮겼다. 태종(太宗) 9년 기축에 이르러 해남현을 합하여 해진군(海珍郡)으로 하였고, 12년 임진에 또 군(郡)을 영암(靈岩)의 속현(屬縣) 옥산(玉山)의 땅으로 옮겨 읍(邑)을 만들었다. 진도(珍島)의 속현이 2이니, 가흥(嘉興)은 본래 백제의 도산현(徒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뇌산군(牢山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가흥현으로 고쳐서 진도의 임내(任內)로 삼았으며, 임회현(臨淮縣)은 본래 백제의 매구리현(買仇里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첨탐현(瞻耽縣)으로 고쳐서 뇌산(牢山)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임회로 고쳐서 진도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향(鄕)이 1이니, 의신(義新)이요, 소(所)가 4이니, 생강(生薑)·구향다 염전(仇向茶鹽田)·포보 염전(浦保鹽田)·대재 염전(大材鹽田)이다. 해남(海南)의 속현이 2이니, 죽산(竹山)은 본래 백제의 고서이현(古西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안현(固安縣)으로 고쳐서【고(固)가 어떤 데에는 동(同)으로 되어 있다.】 양무군(陽武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죽산으로 고쳐서 영암(靈岩)의 임내(任內)로 하였다.

세종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해진군

 

 

전라도 나주목에 대한 지리설명에서 뜻밖의 지명을 찾았다 바로 임회현이다. 지금 중국지명에서 임회현을 검색하면 위의 지도로 나온다. 구당서지리지를 검색해봐도 임해현은 해주근처에서 회수근처사이에 있다고 되어 있다.

 

 

연번로속집(演繁露續集)》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의 속군(屬郡)에 강주(康州)가 있는데, 고려에서 남쪽으로 5000리 되는 곳에 있으면서 명주(明州)와 마주 보고 있다. 강주의 이웃 군을 무주(武州)라고 한다. 귤과 유자가 생산된다

[주D-007]명주(明州) : 중국 절강성(浙江省)의 영파부(寧波府)이다

 

 

설마 아직도 한반도 전라도 나주가 절강성 영파부와 마주본다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는 없기를 바란다. 한반도 나주가 한반도 개성에서 5천리나 떨어져 있지도 않거니와 귤이 생산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북성 청현에서 절상성영파부 바로 맞은편까지 고대에 5천리라고 불렸으며 지금도 귤이 생산된다.

 

 이 때 용삭(龍朔) 초년에 초주(楚州) 용흥사(龍興寺)에 이름을 걸고 있다가, 후에 사주 임회현 신의방(泗州臨淮縣信義坊)에 토지를 구하여 표를 세웠다

삼각산 중수 승가굴기(三角山重修僧伽崛記)

 

임회현은 사주에 속한다.

 

 

중국역사지도 당나라편에서 사주와 월주의 위치

 

역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백제땅이 바다건너 월주에 닿았다는 중국기록을 알것이다. 아직도 어리석은 학자들이 또 한반도 전라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말기에도 백제지리지에 월왕의 옛수도를 둘러싼 땅이 다 백제땅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백제땅 사주임회현은  백제가 망한뒤 당나라가 설치한  5도독부에 소속되었다. 그 기록중에 고사주즉 옛 사주라는 지명이 있었다. 그러나 곧 신라에 의해 병합되었던 모양이다.임회란 말그대로 회수에 임해있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지명추적이 쉽다. 세종지리지대로라면 고려역시 물려받았다.

 

12월에 왜적이 하동현(河東縣)을 침범하고 또 진주를 침범하니, 도순문사 배극렴이 사주(泗州)까지 추격하여 20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절요 제30권무오신우 4년(1378), 대명 홍무 11년

 

임회현이 속한 사주가 역시 고려의 땅이었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명나라지리지에는 산둥성 남부에 있는 전횡도가 자기땅이라고 써있다. 그러나 역시 조선의 지리지에도 전횡도가 자기땅이라고 써있다 송나라지리지에도 사주와 임회군이 자기땅이라고 했지만 조선과 명의 기록을 보듯이 임회지역일부는 고려땅으로 남았던 것이다.

http://blog.daum.net/manjumongol/967 조선의 진주는 산둥성 태안 서쪽

 

고려말과 조선의 초의 지리는 당연히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조선 진주의 위치만 이해한다면 충분히 고려말 왜구를 잡기위해 진주에서 사주로 군대를 보낸 것을 이해할수 있을 것이다.

 

 

 

왜가 사주(泗州)의 각산(角山)지금의 진주부(晉州府) 남쪽 76리에 있다. 에 침구하였다

 동사강목 제14하 경자년 공민왕 9년(원 순제 지정 20, 1360)

 

동사강목의 저자가 무슨 기록을 근거로 사주가 진주 남쪽 76리에 있다라고 적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의 지리지를 근거로 하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최소한 5백리 이상 떨어진 진주와 사주가 조선시대에는 거의 바로 옆으로 인식되어던 것이다. 즉 고려가 원나라에 예속되면서 고려가 상당한 영토를 상실했는데 축소된 영토를 그대로 고려말 조선초에 계승되었다면 5백리정도 떨어졌을 두 지명이 거의 바로 옆으로 이동한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장군은 사주(泗州)를 본래 팽문(彭門 서주〈徐州〉)에 예속하였는데, 내가 망령되이 점령하여 구호하였다 하나 이것은 필연코 교활한 꾀를 자세히 알지 못하고 혹 뜬소문을 채납(採納)한 것입니다

사빈(泗濱)은 변로(汴路)를 막아 끊었다.”고 일컫겠습니까. 또 임회(臨准)는 성(城)이 고립되고 기세(氣勢)가 미약하여 겨우 잔약하게 보존하는데, 팽문(彭門)은 땅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여 광패(狂悖)하게 방자하며, 이로써 짐작하더라도 가히 단서를 볼 수가 있고, 더구나 제도(諸道)의 배는 일찍이 사주(泗州) 본로(本路)로 지나던 것이 지금은 모두 이 도적으로 인하여 제도의 배들이 지체되어 가깝게는 절동(浙東)ㆍ절서(浙西)와 멀리는 용부(容府) 광부(廣府)까지 가도 양식을 수송하였음을 듣지 못하였는데, 어찌 급란(急難)을 구제하겠습니까

답 양양 극장군 서(答襄陽郄將軍書)최치원(崔致遠)


최치원의 군대가 사주를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원래 백제의 땅이었다가 신라와 당이 나누어 가지고 당나라말기에 혼란상태에서 지방에 있던 신라출신 관리 최치원이 임회를 점령해버렸다. 이후 최치원은 신라에 귀국했다. 구오대사를 보니 회이즉 후백제견휜으로 추정되는 세력이 이 일대를 점거하고 호북성과 개봉까지 포위하면서 위세를 떨쳤다고 되어있다.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진다. 왕건의 후백제 점령시기와 거의 맞물려 있었다. 송사지리지를 본다면 후백제의 땅 전부를 왕건이 차지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랬다면 왜 사주 임회군이 송나라땅이라고 나오겠는가 사주의 일부는 고려가 차지하고 일부는 후백제 귀족이 송에 투항한 것이 아닌가 한다.

 

위의 기록을 토대로하면 유구에 고려후손이 나라를 세운 것이 이해가 될수 있다. 원나라에 고려가 항복하던 시절 삼별초는 위에 기록된 진도로 도망했다가 탐라즉 지금 대만으로 도망했다. 그리고 남은 무리는 유구 즉 지금 오키나와로 이동했는데 지금도 오키나와에 고려기와와 당시의 유물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