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문단

섬집아기 2020. 3. 18. 22:05

그 남자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았다. 카운터 제일 안쪽 의자. 물론 먼저 앉은 손님이 없다면 그렇다는 얘기지만 그 자리는 거의 예외 없이 비어 있었다. 애당초 손님이 많지 않은 가게인데다 그곳은 가장 눈에 띄지 않는, 그리고 그리 편하다고 할 수 없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뒤에 계단이 있어서 천장이 비스듬하게 내려와 있다. 일어날 때는 머리를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남자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 비좁은 자리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기노> 20. 1. 15. 수.

눈을 떴을 때, 그는 침대 위에서 그레고르 잠자로 변신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안의 어둠침침함에 눈이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보아하니 그것은 어디에나 흔히 있는 지극히 평범한 천장이었다. 원래는 흰색이나 연한 크림색 계열로 칠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이 몰고 온 먼지와 때 탓에 이제는 상해가는 우유를 떠올리게 하는 색으로 변했다. 장식도 없고 이렇다 할 특징도 없다. 주장도 메시지도 없다. 천장으로서의 구조적인 역할은 일단 무난하게 해내고 있으나, 그 이상의 의욕은 찾아볼 수 없다.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사랑하는 잠자> 20. 1. 15. 수.

한밤중 한시가 넘어 걸려온 전화가 나를 깨운다. 한밤중의 전화벨은 언제나 거칠다. 누군가가 흉포한 쇠붙이로 세상을 깨부수려는 것만 같다. 인류의 일원으로서 나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그래서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가서 수화기를 든다.
나지막한 남자 목소리가 내게 전한다. 한 여자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음을. 목소리 주인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적어도 그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그리고 말했다. 아내가 지난주 수요일에 자살했습니다. 뭐가 어찌됐건 알려드려야겠다 싶어서, 라고 그는 말했다. 뭐가 어찌됐건. 내가 들은 한, 그의 말투에는 한 방울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마치 전보를 치려고 쓴 문장 같았다. 말과 말 사이에 스페이스가 거의 없었다. 순수한 알림. 수식 없는 사실. 피리어드.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중 <여자 없는 남자들> 20. 1. 15.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