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이용섭)

가우리민 2015. 10. 20. 21:45

 

[우리역사 72] 단군조선의 대외 관계사 - 35(삼신오제본기), 장승

장승신앙과 장승의 전래설에 대한 비판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5/09/30 [08:04]  최종편집: ⓒ 자주시보

 

우리역사 이야기 – 72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대외(對外) 관계사(關係史) - 35(三神五帝本紀), 장승(長丞)

 

장승신앙과 장승의 전래설에 대한 비판

 

이번주 연재는 지난 회(71)에 이어 금()나라에 대해 연재한다. 지난 연재를 보지 못한 독자들은《우리역사 이야기-71》회 연재를 보고 이번 연재를 보기 바란다.

 http://www.jajusibo.com/sub_read.html?uid=23720§ion=sc46§ion2=

 

고려(高麗) 예종(睿宗) 46월 동번(東蕃) 사신 뇨불사현(裊弗四顯) 등이 고려(高麗)에 와서 조회하고,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로 합하여 소속되는 것이 마땅하다 했고,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大邦)을 부모의 나라로 여기나이다.라고 하여 금()나라를 세웠고, 이끌어가는 영도집단(領導集團)이 배달겨레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나라가 세워진 땅이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이고 대진 발해의 땅이라면 금나라 영도집단뿐 아니라 금나라 백성들 역시 갑론을박 할 것도 없이 배달겨레임은 당연지사다.

 

이렇게 명백하게 금나라가 배달겨레의 나라라는 것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오늘 날 이 땅의 배달겨레 후손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세운 나라가 마치나 이민족의 나라인양 그 백성들이 우리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신단실기(神壇實記)에 기록된 사신 뇨불사현(裊弗四顯)의 고려조정(高麗朝廷)에 아뢰는 말을 보면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로 합하여 소속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이 말은 오늘 조선반도에 남과 북으로 갈라져 분단의 아픔을 가지고 사는 구성원들이 이제는 한 조상을 둔 후손들로서 마땅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말과 같다. 즉 분단 상황에 있는 현 남과 북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뇨불사현(裊弗四顯)은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大邦)을 부모의 나라로 여기나이다.”라고 고려조정에 금나라 임금의 의지를 전하고 있다. 즉 당시 금나라를 이끌고 있던 오아속(烏雅束)이 고려(高麗)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고 있다는 의중을 전하고 있다. 금나라가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라는 것을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기록이 어디에 더 있겠는가?

 

금나라는 고려조정에 계속해서 자신들의 나라가 고려와 같은 조상을 둔《형제나라》라는 것을 거듭 밝히고 있다.

고려 예종 123월에는 금나라의 아골타(阿骨打)가 아지(雅只)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거란(契丹)을 큰 나라이라 하고 고려(高麗)를 부모의 나라로 여기며 조심하여 섬겨왔습니다.하여 금나라가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여긴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기로 하자.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 9성에서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¹는 말하기를 〈우리의 조종은 대방(大邦, 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은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²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갑오 연간³에 이르러 궁한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가 태사의 지휘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한단고기. 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325,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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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첨자 주석

 

우첨자 주석은 우선 주역자의 주석을 올려주고 필요시 필자의 주석을 하도록 한다.

 

영가 : 여진 완안부의 추장 이름. 오고내의 아들. 금나라 건국 후에 목종으로 추증. 완안부가 역사 활동을 시작한 것은 오고내(烏古迺)때부터로 영가는 그의 뒤를 이어 국자가(局子街) 부근의 흘석열부(訖石烈部)의 추장인 아소(阿疏)를 요로 쫓고, 동남으로 진출하여 1102년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그 후 세력이 강해지자 간도(間島)지방을 점령하고 다시 남하하여 갈내전까지 세력을 뻗혔다. 일설에는 영가의 조상이 고려 사람이라 한다. 그의 생년은 ? ~ 1103년이다.

오아속 : 고려 때 여진 완안부의 추장. 여진 말로는 우야소. 영가의 조카로 뒤에 강종(康宗)으로 추존된다.

갑오 연간 : 이때 갑오년이면 A. D. 1054년인데, 예종 4년이면 1108년이니 잘못 된 것이요, 혹 갑신(1104)의 잘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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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한단고기(桓檀古記)의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우기 이전의 여진(女眞)시기에 고려에 사신을 보내 자신들은 고구려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밝히는 기록은 김교헌 선생의 신단실기의 내용과 똑같다. 중복되기는 하지만 기록의 내용이 사실인지 그 실체를 비교해보고 당시 있었다고 기록된 사건이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신단실기(神壇實記): 고려(高麗) 예종(睿宗) 46월에 동번(東蕃)의 사신 뇨불사현(裊弗四顯) 등이 고려에 와서 조회하고 아뢰기를,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 영가(盈哥)가 일찌기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로 합하여 소속되는 것이 마땅하다 했고,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大邦)을 부모의 나라로 여기나이다.

 

한단고기(환단고기)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 이보다 앞서 여진은 뇨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

 

“옛날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는 말하기를 〈우리의 조종은 대방(大邦, 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귀부하여야 옳은 것입니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신단실기의 기록과 한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내용이 정말 쌍둥이처럼 똑같다. 물론 약간 토씨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똑같다.

 

두 사서의 기록을 보면, 신단실기에 동번의 사신 〈뇨불사현〉이라고 하여 한 사람인 것처럼 오해를 할 수 있게 주역(註譯)되어있다. 반면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뇨불(裊佛)과 사현(四顯)이라고 사신이 두 사람이 파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두 사서의 기록을 놓고 보았을 때 한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이 더 정확하다.

신단실기의 원문을 보면,

 

高麗睿宗四年六月, 東蕃使, 裊弗四顯等이”

(고려예종46월에, 동번사, 뇨불사현등이”

 

라고 되어 있다. 즉 원문을 보면〈뇨불사현(裊弗四顯)〉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진의 동번에서 고려 예종 46월에 고려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기록의 원문을 보면 한단고기(桓檀古記)나 신단실기의 기록은 똑같다. 즉 고려 예종 46월에 여진(女眞)에서 뇨불(裊佛)과 사현(四顯) 두 사람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는 내용이다.

 

또 고려 예종 46월에 여진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뇨불과 사현을 파견했다는 시기를 보면

신단실기에는 정확하게

高麗睿宗四年六月에”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반면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그 시기가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그 파견시기가 언제인지 아예 파악을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을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기가 대략적으로는 파악을 할 수 있다.

 

“예종(睿宗) 문효대왕 4년 가을 7, 9성에서 여진의 옛 땅을 돌려줬다.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하여 가로대,라고 하여 사신이 고려에 파견이 된 시기를 알 수 있다. 또 여진에서 뇨불(裊佛)과 사현(四顯)을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하여 양자 간의 어떤 문제로 외교적 협상을 하였으며, 협상의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한단고기(桓檀古記)는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보면 여진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는 신단실기에 기록된 고려 예종 46월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예종(睿宗) 문효대왕 4년 가을 7…, 이보다 앞서 여진은 요불과 사현 등을 보내 상주”라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은 여진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한 시기는 예종 문효대왕 4년 가을 7월 이전이며, 외교적 문제가 해결된 예종 4년 가을 7월까지 상주를 했다는 내용이다.

 

또 한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을 보면 여진에서 고려에 왜 사신을 파견했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즉 고려 예종 문효대왕 46월 여진에서 뇨불(裊佛)과 사현(四顯)을 사신으로 고려에 파견하기 전에 고려측이 여진의 땅인 9성을 공격하여 점령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여진에서 고려에 뇨불과 사현을 사신으로 파견을 한 것을 고려에 빼앗긴 9성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여진에서 뇨불과 사현을 사신으로 파견해서 벌인 외교담판을 담은 기록이 곧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로 합하여 소속되는 것이 마땅하다 했고”라는 내용이다. 즉 고려와 여진은 한 핏줄을 이은 형제 나라이니, 고려에서 빼앗아간 9성을 되돌려주어야 형제의 의()를 지키는 것이요, 도리(道理)를 다 하는 것이라는 것을 고려에 파견된 여진의 사신들인 뇨불(裊佛)과 사현(四顯)이 고려 조정에 아뢰는 것이다.

 

고려에 빼앗긴 9성을 되찾기 위해서 외교적 협상을 벌이는 가운데 금나라 이전시기인 여진(女眞)에서 고려에 파견한 사신들이 여진(女眞)을 개국한 태조 영가가 한 말,

 

“옛날에 우리 태조(太祖) 영가(盈哥)가 일찌기 말하기를,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로 합하여,

지금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大邦)을 부모의 나라로 여기나이다.

라고 아뢰는 역사적 사실을 신단실기에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한단고기(桓檀古記)는 필자가 굳이 따로 해석이나 주석을 할 것이 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당시 여진이 고려에 뇨불과 사현을 파견하여 벌인 외교협상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아래에서 한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당시의 외교적 협상의 과정을 보기로 하자.

 

궁한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안정하려들지 않았는데 이는 본래가 태사의 지휘 밑에 있던 바가 아니었습니다. 국조가 죄를 앞세워 이들을 토벌하시더니 다시 수교를 허락하셨으므로 우리는 이를 믿고 조공을 끊이지 않았는데, 작년엔 크게 일어나서 우리의 모아를 죽이고 9성을 쌓아 외로이 남은 백성들로 하여금 떨게 하고 말려서 돌아가게 했습니다. 이에 태사는 우리를 보내어 땅을 되돌려 줄 것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여진이 고려에 9성을 빼앗기게 된 전후의 배경과 사신을 파견하게 된 사연을 상세하고도 구체적으로 정확히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록을 다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필자의 해석》

 

궁한촌(원문 : 弓漢村)에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고 이웃한 고려 땅을 넘나들며 고려 사람들을 괴롭히고 약탈 하였으나 본래 궁한촌 사람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고 고려 사람들을 약탈을 하였던 것은 여진의 태사(太師) 오아속(烏雅束)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죄를 징벌한다는 이유로 고려 임금(國朝)이 명령을 하여 궁한촌(弓漢村) 사람들을 토벌하였다. 이 사건이 벌어진 이후 고려에서 여진과 수교를 허락하였고, 여진에서는 고려와 수교를 한 행위를 믿고 (고려에) 끊이지 않고 조공을 해왔다. 하지만 고려 예종 3(원문 작년엔) 고려가 병사를 크게 일으켜 우리(여진)의 모예()를 죽이고 그 땅을 빼앗고 9성을 쌓음으로서 살아남은 여진의 백성들을 두려움과 공포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심지어 말라비틀어져 돌아가기(죽기)도 하였다. 이에 태사 오아속(烏雅束)은 우리(여진 사신. 뇨불裊佛과 사현四顯)를 보내 9성을 쌓은 땅을 되돌려 줄 것을 고려조정에 청하게 되었다.

 

결국 고려가 빼앗아간 9성의 땅을 되찾기 위해 여진에서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적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여진의 뿌리가 바로 고구려의 후예요 고려와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나라라는 것을 말 하고 있다. 아니 기록에는 고려를《부모나라》로 표현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단고기(桓檀古記)에도 신단실기와 똑같이

“옛날 우리 태사(太師) 영가(盈哥)는 말하기를 〈우리의 조종은 대방(大邦, 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

지금 태사 오아속(烏雅束)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고 있습니다.

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

 

신단실기와 한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된 고려에 파견된 여진의 사신들인 뇨불과 사현이 위와 같이 고려조정에 아뢴 내용은 역사적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금()의 이전 시대인 여진(女眞)은 재론의 여지없이 우리겨레임이 분명하고 또 여진을 이은 금() 역시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임은 명백하다.

 

 

()와 금()에 대한 또 다른 기록

 

우리가 지난 장에서 살펴본 위키백과사전에서 규정한 요와 금에 대한 내용을 보면 우리겨레와는 완전히 별개의 이민족(異民族)의 역사(歷史)처럼 되어 있다. 하지만 필자가 중고등학교 역사과정을 공부할 때 비록 강단사학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 시절만 해도 요()와 금()은 이민족(異民族)의 역사가 아닌 바로 우리겨레의 역사라고 배웠다. 물론 당시에 배울 때에도 우리겨레의 정통을 이은 고려와의 쟁투를 주로 다루기는 하였지만 요()와 금()의 건국과정과 그 민족구성원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겨레라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요와 금은 우리의 겨레가 아닌 듯이 겨레 구성원들에게 번져 지고 있다.

 

현대 우리겨레 구성원들에게 있어서 현재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신지씨의 후손들이 이주해간 땅에서 건국한 나라들 대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겨레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민족의 나라 혹은 여러 잡종민족들이 세운 혼족(混族)의 나라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일제가 왜곡 · 조작한 식민사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식민사관〉+〈동북공정〉=《우리민족 죽이기 역사》라고 정의를 한다. 현재 남쪽에 살고 있는 우리겨레 구성원들의 우리겨레의 발자취(歷史)를 대하는 사고로는 우리겨레는 존재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즉 자신들 조상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현재 우리겨레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은 모순이며, 결국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머저리로 전락을 해가고 있는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을 뿐이다.

 

하지만 불과 40여 년 전까지 생존을 했던 우리 역사가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를 보면 현재 우리겨레의 역사를 대하는 구성원들의 인식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럼 아래에서 요와 금에 대한 우리겨레와의 연관성을 안호상 박사의 저서와 윤치도 선생의 저서를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1) 배달 · 동이겨레의 한 옛 역사(배달·동이겨레는 동아문화의 창조자)

 

한 옛적 숙신나라의 위치와 경계선

우리는 우리 동이의 맨 처음 본고장과 중심 땅을 알기 위하여, 중국의 엣 책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단군 1세기에 우 나라 순임금의 신하인 백익(伯益), 혹은 단군 2세기 하나라 우()임금이 지었다는 책인 산해경을 보면, “불함산¹이 숙신나라에 있다”라 하였고, 또 진서(晉書)에서는 “숙신이 불함산 북쪽에 있는데, 이 불함산은 지금의 한밝산(장백산=태백산)²이다”라 하였다. 후한서는 말하기를, “옛 숙신 나라가 부여(夫餘) 동 · 북방 1000여리 밖에 있는데, 동쪽이 큰 바다에 닿았다”하였다.

 

우리가 숙신을 알기 위하여, 옛날엔 봉천성(奉天省)에 속하였다가 지금은 요령성에 속한 흥경부(興京府)를 잠간 살펴보기로 하자. 이 흥경부가 옛날 중국의 남북조(南北朝 : 2753 – 2922 : 420 – 589)와 수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고구려의 영토요, 또 그 뒤에는 우리 발해나라가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만주원류고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흥경부가 주나라(13세기 : 12세기) 앞 시대엔 숙신이 있었는데, 한나라와 진나라 때엔 읍루가 되었고, 남 · 북조와 수나라 때엔 말갈이 되었고, 당나라 때엔 발해의 정리부가 되었고, 요나라와 금나라와 원나라 때엔 심양땅이 되었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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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첨자 주석

 

불함산 : 불함산은 고갱이 우리말인 《밝뫼》를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한 것이다. 불함(不咸)은《밝》이고, ()은《뫼》이다. 따라서 불함산(不咸山)은 불함(不咸) + () = + = 《밝뫼》가 된다. 또 《밝뫼》는 밝=박〈 백 〈 배 · 애로 변천이 되었으며, = ()이 되었다. 따라서《밝뫼》= + 뫼 이며,《밝뫼》는 《박뫼》〈《백뫼》로 변천한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밝》이 되며《밝》은 이전 장들에서도 설명을 했듯이 “밝다, 환하다, 하늘, 성스럽다, 크다, 높다, 넓다, 위대하다, 근본, 원천, 머리, 대가리, 대구리, 몽고말 탱그리을 뜻한다. 즉 가장 위대하고 성스러우며 인간 삶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핵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또한 현재 우리가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보르는《뫼》가 곧《밝뫼》이다. 옛 우리 조상들은 현재 우리가 부르는 백두산(白頭山)을《밝뫼》로 불렀다고 북한 사회과학원에서 고증을 하였다.

한밝산 :《한밝산》역시 주석, 1에서 고증한 불함산을 말한다. 한밝산 = + + 산이 된다. 또한 한 = 밝이다. 따라서 한밝산은《밝》을 강조하기 위해서 겹쓰인 것이다. 물론 화하족이 남긴 사서 진서에 “지금의 한밝산(장백산=태백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기록의 내용을 분석해보면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불함산=밝뫼》에서《한밝산=장백산, 태백산》으로 변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불함산=한밝산=장백산=태백산=백두산은 모두 성스러운 뫼를 가리키는《밝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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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안호상 선생이 고증한 인용문은 이미 우리가 앞 장들에서 살펴본 내용들과 같다. 뒤에서 또 다시 안호상 선생의 논증을 인용을 하여《숙신》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인용문에 대해서는 특별히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다만《숙신》이라는 나라가 어느 땅에서 발흥이 되었는지를 논증하는 내용임을 알기만 하면 될 듯하다. 그러나 인용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숙신》이라는 나라가 발흥을 한 땅이《불함산=한밝산=밝뫼》라는 점이다.《불함산=한밝산=밝뫼》는 바로 우리겨레가 신성시한 산을 말하며, 그 고갱이 말이 우리겨레가 부르던 이름이라는 것이다. 절대 이민족이 붙였던 산 이름이 아니라 우리조상들이 붙여 부르던 뫼 이름이라는 점이다.

 

또 화하족(華夏族)들이 시대의 변천에 따라 숙신(肅愼)이라는 나라 이름을 어떻게 불렀는지 논증을 한 것이다. 이미 앞 장들에서 신단실기(神壇實記)와 규원사화(揆園史話), 한단고기(桓檀古記) 등을 통해서 논증을 하였다. 안호상 선생 역시 화하족들의 사서를 통해서 앞선 사서들과 똑같이 고증을 하고 있다.

 

안호상 선생이 화하족들의 사서를 통해 “주나라(13세기 : 12세기) 앞 시대엔 숙신이 있었는데, 한나라와 진나라 때엔 읍루가 되었고, 남 · 북조와 수나라 때엔 말갈이 되었고, 당나라 때엔 발해의 정리부가 되었고, 요나라와 금나라와 원나라 때엔 심양 땅이 되었다.고 고증을 하였다. 이를 도식으로 다시 정리해 보면

 

()이전 : 숙신(肅愼)

한 · 진( · ) : 읍루(挹婁)

남 · 북조( · 北朝), () : 말갈(靺鞨)

() : 대진 발해 정리부

요 · 금 · 청( · · ) : 심양 땅

 

결국 숙신, 읍루, 말갈 등은 화하족들이 자신들의 왕조의 변천에 따라 달리 부른 이름일 뿐이지 우리겨레의 역사이며, 동일한 지역과 나라, 민족 이름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전 장들에서 상세히 고증과 논증을 했다.

 

금나라( : 3448 – 3556 : 1115 – 1223)의 시조가 처음 고구려로부터 왔다 하나, 사실은 신라(新羅)에서 왔음이 틀림이 없다. 마침내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 사람인 까닭에, 그 성이 신라 임금의 성인 김씨를 따르고 또 나라 이름을 “금”이라 하였다.

 

조선(朝鮮)이 곧 숙신(肅愼)임은, 숙신의 발전역사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길림 땅(吉林地)이 주나라 앞 시대에는 숙신 땅이 되었고, 한 나라 뒤에는 읍루와 말갈에 속하였고, 당나라 첫 무렵에는 신라의 계림주가 되었다가, 뒤에는 발해에 속하였고, ()나라는 길림성(吉琳省) 송화강(松花江)의 왼쪽과 오른쪽에 빈주와 영강주를 두었고, 또 조금 서쪽으로 황룡부(黃龍府)를 삼았고, 끝으로 금()나라는 이 송화강의 왼쪽과 오른쪽에 조주(肇州), 용주 및 신주를 두고, 강의 서쪽을 솔빈로(率濱路)로 삼았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0 ~ 51)

 

인용문에는 금나라의 시조가 고구려에서 온 것이 아니고 신라에서 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김교헌 선생이 쓴 신단실기나 한단고기(桓檀古記)에는 “대방(大邦)” 즉 당시 우리겨레의 정통을 잇고 있는 “고려”에서 나왔다고 여진 태사 영가가 고려에 파견된 사신 뇨불과 사현을 통해 전하고 있다. 여진과 금나라의 임금이 고구려 태생이냐 신라 태생이냐는 본질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신단실기나 한단고기에 기록된 “우리의 조종은 대방(大邦, 고려)에서 나와 자손에 이르렀다”(한단고기), “우리 조종(祖宗)이 대방(大邦)¹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신단실기)라고 고려조정에 아뢴 것은 곧 이전의 나라들이 고구려이건 신라이건 그건 곧 우리겨레의 나라들이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큰 틀에서 보면 그들의 조종이 우리겨레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물론《고려(高麗)》라는 나라 이름이《고구려(高句麗)》와 같기에 고려가 마치나 모든 면에서 고구려의 정통만을 이은 듯이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전 장들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겨레는 역사시기만 해도 적어도 1만여 년 선사시기까지 하면 1백만 년 이상을 피를 섞으며 함께 살아온 한 핏줄이다. 한 핏줄을 이은 한 집안에서 큰 형님, 작은 형님등이 분가하여 가정을 이루었다고 해서 그들이 형제가 아닌 것이 아니듯이 한 핏줄을 이은 우리겨레가 각각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 여진()… 등등의 나라를 세웠다고 해서 이민족(異民族)이 결코 아니다. 따라서 본 문제는 바로 큰 틀에서 고구려나 신라나 모두 우리겨레들이 세운 나라들이기에 여진의 조종이 “대방(大邦, 高麗)”에서 나왔다고 고려에 파견된 사신들이 고려조정에 아뢴 것이다. 즉 당시 고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등 우리겨레가 세운 모든 나라의 정통을 잇고 있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요()나라와 여진(女眞)과 그를 이은 금()나라 모두 숙신(肅愼) → 읍루(挹婁) → 말갈(靺鞨)이라 불리던 곳에 나라를 세워 국가를 경영하던 땅에 존재했었다는 점이다. 또 그 땅은 바로 고구려와 발해가 세워져 국가를 경영하던 중요한 땅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요, 여진, 금나라가 세워진 땅은 우리겨레가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세워 경영하던 땅이었으며, 그 나라를 이끌어가던 영도자(領導者)들 또한 고구려태생이건 신라태생이건 모두 우리겨레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사실이 위 인용문이 전하고자 하는 중요한 내용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또 여러 가지 옛 책들과 역사책들을 두루 참고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숙신의 강토의 범위가 후한서(後漢書)와 진서(晉書)에 적혀 있는데, 숙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아서, 그 땅 넓이가 여러 천리가 된다. 간략히 말해서, 숙신이 바로 지금의 길림성 영고탑¹에 있었는데, 흥룡강(黑龍江)의 경계로 하였고, 또 서쪽으로는 구만한나라(寇漫汗國)²에 닿았었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발해나라가 숙신의 옛 땅을 윗서울(上京)로 삼았는데, 그것이 용천부, 영롱호 및 발 3주들이다. 송막기문(松漢紀聞)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 숙신성이 발해 도읍으로부터 30리쯤에 있다. 발해가 처음 홀한주(忽汗州)에 도읍하없(), 이것은 홀한하수(忽汗下水)의 이름을 따라 되었는데, 이것을 지금은 이합하(爾合河)라고 부른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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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첨자 주석

 

영고탑(寧古塔) :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먼저 보자.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16세 단군(檀君) 위나(尉那) 무술 28(B. C. 1583) 구한의 여러 한()들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여 삼신(三神)과 상제(上帝)에게 제사 지냈으니 한인(桓因), 한웅(桓雄), 치우(蚩尤) 및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모시었다.

 

戊戌 二十八年 (무술 이십팔년 )

會九桓諸汗干寧古塔(회구환제한간영고탑)

祭三神上帝配桓因桓雄蚩尤及檀君王儉 (제삼신상제배환인환웅치우급단군왕검)

 

20세 단군 고홀(固忽) 병신(B. C. 1345) 36년 영고탑(寧古塔)을 개축하고 별궁(別宮)을 지었다.

 

丙申三十六年(병신삼십육년)

修築寧古塔作離宮(수축영고탑작이궁)

 

단기고사(檀奇古史):

 

20세 고홀(固忽) 36년에 이궁(離宮 : 別宮)을 영고탑(寧古塔)에 두었다.

 

16세 위나(尉那) 28년에 만국의 제후들을 영고탑에 모이게 하여 회의를 하였다.

 

위 한단고기(桓檀古記)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기록을 보면 두 사서가 영고탑(寧古塔)에 대한 내용이 동일하다. 후박달나라(단군조선)시대에 영고탑(寧古塔)이 매우 중요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또 영고탑이 있는 곳에 별궁을 지을 정도이니 그 지역이 매우 중요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후일 영고탑으로 도읍지를 옮겼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또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영고탑은 단순히 탑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는 삼신께 제를 지내고 한인, 한웅, 치우, 단군왕검(檀君王儉. 박달임금)을 모시는 신성한 탑이자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영고탑은 대소도 즉 대단군이 제사에 참여하여 제주로서 삼신께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영고탑이 있었던 곳이 어디인가? 이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다음은 영고탑에 대한 여러 설들을 보기로 하자.

 

1: 한단고기 주역자인 임승국은 영고탑이 만주 길림성 명안현에 있다고 고증을 하고 있다. “영고탑 : 만주 길림성 명안현에 있다. 영고특(), 영고대()라고도 한다. 발해 당시 오경(五京)의 하나로 발해 유물의 보고(寶庫)라고 고증을 하였다.

 

2: 단기고사를 주역한 고동영은 “영고탑(寧古塔) : 만주 목단강 밑에 있는 영안(寧安). 고조선 역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되는 지명중의 하나. 이궁을 세웠다가 제 25세 단군때(B. C. 1112) 도읍을 그 곳에 옮겨 단군조선의 수도가 되었다. 발해 상경 현덕부도 이 곳이다.라고 고증을 하고 있다.

 

3: 대륙에서 8600년 반도에서 600년의 저자 이병화는 “진한과 진조선은 장당경(藏唐京 : 감숙성 평량시)과 영고탑(寧古塔 : 섬서성 동천시)이 도읍지였고 해성(海城 : 섬서성 부풍시)과 상춘(常春 : 섬서성 순읍현)에 이궁(離宮)이 있었다.고 고증을 하고 있다.

 

필자의 설 : 필자는 위 세 가지의 설 가운데 제 3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이는 이미 지난 장들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서들에는 박달나라(神市)시기 고시씨의 후손들은 동남지방으로 이주를 했고, 치우씨의 후손들은 서남지역으로 이주를 했으며, 신지씨의 후손들은 동북방으로 이주를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다.

 

만약 제 1, 2설이 옳다고 한다면 고시씨의 후손들이 이주한 땅은 동남방이 되어 일본열도 북쪽을 지나 서태평양상 북방이 된다. 그리고 치우씨의 후손들은 서남지방으로 이주를 했다고 하니 요령성이나 하북성이 되는데 이 역시 사서들에 기록된 내용과 배치가 된다. 묘족이 치우씨의 후손이고 그들이 차지하고 살았던 지역을 중국학자 무봉림은 “중국학자 무 봉림(繆鳳林)은 자기의 지은 책 “중국통사”에서 대개 저 같이 말하였다. 염제 신롱과 황제 헌원의 시대에 동이겨레의 갈래인 여 · 묘( · 苗族묘족)가 중국의 남부땅을 차지하였었다. 대저 한 옛적에 강 · 한(江漢 · 양자강과 협서성의 漢水한수)의 지역이 모두 여의 땅(黎境려경)의 땅이었다. 왕 동령(王棟齡)은 말하기를, 묘겨레가 벌써 4000년 앞 시대()에 중국의 남부인 호북성, 호남성 및 강서성 등을 점령하고 살았었다.고 고증을 하고 있는데 영고탑이 있었던 땅이라고 주장을 하는 제 1, 2 설과는 완전히 모순이 되는 설이다. 따라서 필자는 제 3설인 이병화의 주장이 가장 옳다고 본다.

 

2. 구만한나라(寇漫汗國) : 구만한국(寇漫汗國)에 대한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三聖紀全) 하편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파나류산 밑에 한님의 나라가 있으니 천해 동쪽의 땅이다. 파나류의 나라라고도 하는데 그 땅이 넓이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 리니 통틀어 말하면 한국이요 갈라서 말하면, 비리국(卑離國), 양운국(養雲國), 구막한국(寇莫汗國), 구다천국(句茶川國), 일군국(一群國), 우루국(虞婁國. 혹은 필나국筆那國), 객현한국(客賢汗國), 구모액국(句牟額國), 매구여국(賣句餘國. 혹은 직구다국稷臼多國), 사납아국(斯納阿國), 선비국(鮮卑國), 수밀이국(須密爾國)이니 합해서 12국이다. 천해는 지금 북해라한다. 7세에 전하여 역년 3,301, 혹은 63,182년이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한단고기. 계연수 찬. 임승국 주역. 정신세계사. 2010325. 26~27)

 

인용문에서 보이는 구만한국(寇漫汗國)은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전 하편의 구막한국(寇莫汗國)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기전 하편에 기록된 나라들은 화하족들의 사서들에도 기록된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친다. 후일 상세할 것이다.

 

3. 송막기문(松漢紀聞) : 북송의 마지막 두 황제 휘종과 흠종이 금으로 끌려간 후, 북송은 멸망한다. 남송의 홍호(洪皓)가 금()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휘종과 흠종의 반환을 교섭하였지만 교섭이 성사가 되지 않아서 금에서 15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것들을 <송막기문>이라는 견문록 형식으로 집필하였다. <송막기문>은 홍호가 죽은 후 아들 홍적(洪適)이 교간(校刊)하고 홍준(洪遵)이 보유(補遺/보태어 채움)해오다가 1156년 간행하였다. <송막기문>에는 맨 처음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松漠紀聞

 

女眞即古肅愼國也東漢謂之挹婁元魏謂之勿吉隋唐謂之靺鞨

“여진즉고숙신국야, 동한위지읍루, 원위위지물길, 수당위지말갈”

 

“여진은 옛 숙신국이다. 동한은 그를 읍루라 불렀고 원위는 물길이라 불렀으며 수당은 말갈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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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문에 대한 해석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미 우 첨자 주석을 통해서 인용문에 대한 해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진, 금나라 역시 고구려 땅에서 세워진 것만이 아니고 발해가 세워졌던 땅에서 동일하게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아 여진이나 금나라 후일 청나라를 세운 세력들은 바로 우리겨레라는 것이 증명이 되고 있다. 물론 따로 살아 온지 오래 되다 보니 생활습성이나 언어 등에서 많은 차이를 가져왔지만 아무리 생활습성이 변하고 언어가 변했다 해도 적어도 9천여 년 이상을 피를 섞고 살아온 민족이야 어디 가겠는가? 참 역설적이게도 중세 이후 배달겨레의 정통을 이은 현 조선반도에 사는 구성원들을 가장 괴롭힌 왜()마저도 화하족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사서들을 보면 우리겨레들에게서 갈라져 나간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이에 대해 후일 보기로 한다.

 

사기의 순임금 편에서는 저같이 말하였다. 북쪽에는 산융인 발식신(發息愼)이 있고, 이 “식신”을 “숙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동북이(東北夷). 그리고 이 책 하나라 우 임금의 편에서는 말하기를, 조이(鳥夷)는 동 · 북녘백성인데, 새 · 짐승을 잡아먹고 산다. 괄지지에 이르되, 말갈나라는 옛 숙신나라인데, 서울로부터 동 · 북 만리 밖에 있고, 동쪽과 북쪽이 큰 바다에 닿았다. 그 나라 남쪽에 밝산(白山=한밝산)이 있는데, 이 산에는 새 · 짐승들과 풀 · 나무들이 모두 희(). 그 나라 사람들이 산과 숲 속에서 사는데, 기후가 몹시 추워서 굴속에서 살며, 굴이 깊은 것을 귀히 여긴다. 그들이 용감하고 힘에 세어서 활을 잘 쏜다. 활의 길이가 4자요, 화살은 싸리낡(-싸리나무)으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18치요, 활촉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었다.

 

중국 춘추좌전을 보면, 9(九夷 나라)가 숙신이 되었는데, 그것이 본시 동이라고 공자(孔子)도 일찍 말하였다. 단기 26세기(24) 우리나라 순임금으로부터 단기 13세기(12세기) 주나라 무임금에 이르기까지 서융(西戎)은 흰 옥고리를, 또 동이는 숙신활(숙신궁肅愼弓 = 맥궁貊弓)을 가져왔다. 공자 가어에서는 주나라 무임금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매, 숙신이 싸리채 화살을 가져왔다고 하였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2 ~ 53)

 

그 동안 수도 없이 강조해왔지만 숙신(肅愼), 식신(息愼), 직신(稷愼), 주신(珠申) 등은 모두《조선(朝鮮)》을 화하족(華夏族)들이 자신들 멋대로 지어 부르던 나라 이름이었다고 단재 선생이 고증을 하였다.《조선(朝鮮)》은《아사달》을 뜻글자를 빌어 우리 조상들이 이두식으로 표기했던 이름이다. 이《조선(朝鮮)》을 화하족들의 왕조가 바뀌면서 부르던 나라 이름도 다르게 표기를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신단실기 숙신 편을 분석할 때 고증을 하였다.

 

이를 증명해주는 것이 사기(史記) 순임금 편에서는 “북쪽에는 산융인 발식신(發息愼)이 있고” “이 ‘식신’을 ‘숙신’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동북이(東北夷).라고 하는 기록이다. 즉 화하족 왕조가 바뀜에 따라 《조선(朝鮮)》을 달리해서 불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다.

 

“그들이 용감하고 힘에 세어서 활을 잘 쏜다. 활의 길이가 4자요, 화살은 싸리낡(-싸리나무)으로 만들었는데, 길이가 18치요, 활촉은 청석(靑石)으로 만들었다. “동이는 숙신활(숙신궁肅愼弓 = 맥궁貊弓)을 가져왔다. 공자 가어에서는 주나라 무임금이 은나라를 멸망시키매, 숙신이 싸리채 화살을 가져왔다고 하였다.는 문장은 우리가 지나간 장에서 살펴본 신단실기의 기록내용과 똑같다.

 

신단실기 숙신(肅愼) 편에 그 나라 동쪽에서 석노(-돌로 만든 화살촉)가 나고, 피골갑(皮骨甲-짐승 가죽으로 만든 갑옷) · 단궁(檀弓-박달나무로 만든 활) · 고시(-싸리나무로 만든 화살)가 있으니, 단궁(檀弓)35치이며, 고시()18치이다. 이 활과 화살이 우순(虞舜)과 하우(夏禹) · 주무왕(周武王)의 세상에 까지 통용되었으니, 대개 중국 사람들이 동쪽 사람을 가리켜 “이()”라고 하는 것은 이()가 대궁(大弓)인 까닭이다.

 

( 또 과 했는데, 설문說文 따라서 동방東方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것은 숙신(肅愼)에서 큰 활(大弓)이 난다고 해서 이를 지은 것이다.(신단실기. 김교헌 지음, 이민수 주역. 한뿌리. 1994320. 34~35)

 

안호상 선생이 화하족들의 사서를 인용해서 고증을 한 내용과 김교헌 선생이 지은 신단실기의 내용이 똑같다. 물론 두 기록이 모두 화하족들이 남긴 사서를 참고로 해서 써졌기에 똑같을 수밖에 없다. 필자가 굳이 두 사서의 내용을 동시에 올려주는 것은 지금까지 소위 재야사학에서 주장해온 역사적 실체가 결코 허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현 강단사학에서는 김교헌 선생, 신채호 선생, 박은식 선생, 정인보 선생등에 대해 일제강점기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해 근거도 없이 위서를 쓴 것 인양 몰아붙이고 있으며, 선생들께서 남긴 사서를 토대로 새로운 역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발표를 해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위서 운운하는데 이 땅의 사학계의 고질적인 문제이자 근본적인 제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화하족들이 남긴 사서들과 우리 조상들이 남긴 사서 그리고 위에서 열거한 사학자들이 남긴 사서들을 동시에 비교분석을 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위 인용문의 안호상 선생과 김교헌 선생의 신단실기의 내용은 토씨정도만 다르지 기본 내용에서는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인용문의 역사적 내용이나 신단실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실재했던 역사적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제 끌어 쓴 글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동아의 동 · 북방에 있는 동 · 북이(東北夷)가 곧 동이요, 또 이 동이가 곧 숙신(肅愼)이다. 다시 말하면, 숙신의 사람과 땅이 곧 동이의 사람과 땅이요, 또 이것이 곧 동 · 북이의 사람과 땅이다.

 

둘째로 동이 사람의 맨 처음 근거지가 동아의 동 · 북 땅인 숙신나라요, 또 이 나라에는 한밝산이 있다는 것이다. 한밝산이 있는 숙신이 한옛적에 동이의 본고장이었던 것을, 한번 더 밝히기 위하여, 우리는 숙신과 한밝산에 대한 동이의 관계를 잠간 살펴보기로 하자.

 

동이겨레가 맨처음 근거지로 한 땅을 숙신이라 하고, 또 이로부터 동이의 여러 천년 역사가 변천해 왔다는 것은, 청나라 건융임금(乾隆王) 때에 엮은 책인 “만주원류고”에서도 잘 밝혀 두었다. 이 책 첫머리에서 만주족의 근원이 분명히 동이족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숙신이 부여, 3(三韓),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女眞) 등 여러 나라로 변천해 온 연혁을 증거댈 수 있으며, 또 회남자(淮南子)가 동방에 군자의 나라들이 많다는 것이 믿어지므로, 숙신으로부터 시작했음을 잘 판단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말할 것은, 여진의 땅이 옛 날에는 송화강과 한밝산의 지역에 있었는데, 그것이 밝산 · 흑수란 것이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3 ~ 54)

 

참고로 만주원류고의 원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肅愼 扶餘 三韓 靺鞨 百濟 新羅 渤海 女眞 諸國 沿革可徵 淮南子 東方 多君子之國 信矣……自肅愼爲始而仍變 : 欽定滿洲原流考, 卷一, 部族一.

“숙신 부여 삼한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 제국 연혁가징 회남자 운 동방 다군자지국 신의……자숙신위시이잉변 : 흠정만주원류고, 권일, 부족일”

 

〈해석〉

“숙신이 부여, 3(三韓),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女眞) 등 여러 나라로 변천해 온 연혁을 증거댈 수 있으며, 또 회남자(淮南子)가 동방에 군자의 나라들이 많다는 것이 믿어지므로, 숙신으로부터 시작했다.

 

生女眞地 有混同江 長白山 所謂 白山黑水也 : 滿洲原流考, 卷七, 部族七, 完顔

“생여진지 유혼동강 장백산 소위 백산흑수야 : 만주원류고, 권칠, 부족칠, 완안”

 

〈해석〉

“여진의 땅이 옛 날에는 송화강과 한밝산의 지역에 있었는데, 그것이 밝산 · 흑수란 것이다.

 

인용문의 내용과 같은 언어 해석은 지난 장들에서도 이루어졌다. 위 인용문에서는 언어 해석을 넘어 숙신(肅愼)이 나라를 세웠던 땅에 대해서도 고증을 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인용문에서는 숙신의 땅이 만주지역이었던 것처럼 묘사를 하였지만 실제 역사를 연구하는 재야사학자들과 화하족들이 남긴 많은 사서들을 세밀하게 분석해보면 인용문에서와 같이 배달겨레가 나라를 세웠던 땅이 결코 만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고로 아래에서 금나라의

 

물론 인용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숙신 즉 조선의 맥을 이은 나라들이 “부여, 3(三韓), 말갈, 백제, 신라, 발해, 여진(女眞) 등 여러 나라로 변천해 온 연혁을 증거 댈 수 있으며”라고 한 것처럼 배달겨레의 모든 나라들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인용문에서는 누락이 되었지만 고구려나 가라 역시 조선의 맥을 이었음은 예외가 아니다.

 

 

〈그림.1〉 금태조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올출의 묘비

 

위 묘비는 금나라 태조 완안 아골타의 넷째 아들 완안() 올출의 묘비이다. 완안() 올출의 묘비는 현 감숙성 경안현에 있으며, 이 곳에는 완안성씨의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만들어 살고 있다.

 

위 묘비가 감숙성 경안현에 있으며 그 곳에는 완안()씨 성을 가진 여진족들이 동족촌을 이루어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들이 금나라가 망하면서 감숙성으로 피난가서 만들어진 동족촌이라고 하는데, 만약 안호상 선생이나 여타의 학자들이 분석하는 것처럼 금나라의 강역이 만주에만 머물렀다면 과연 여진인들이 금나라가 무너질 때 머나먼 감숙성까지 피난이 가능했겠는가 하는 데는 의문이 많다.

 

우리가 영고탑의 위치에 대해서 제 1설부터 이병화의 제 3설까지 살펴보았다. 이병화의 제 3설은 “진한과 진조선은 장당경(藏唐京 : 감숙성 평량시)과 영고탑(寧古塔 : 섬서성 동천시)이 도읍지였고 해성(海城 : 섬서성 부풍시)과 상춘(常春 : 섬서성 순읍현)에 이궁(離宮)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병화의 설을 정설이라고 보았을 때 고대 고구려나, 발해, 그리고 이를 이은 여진과 금나라의 강역이 그저 만주지역에만 머무르지 않았으며 만주를 포함하는 대륙의 북부 전 지역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고구려와 발해, 여진과 금의 강역이 만주에만 머물렀다고 한다면, 금이 무너질 때 금나라의 후손들인 여진인들이 감숙성 경안현까지 피난을 할 수 있었겠는가? 필자의 분석으로는 고구려, 발해, 여진, 금나라의 강역이 결코 만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고 본다.

 

 

숙신(肅愼)과 조선(朝鮮)은 같은 이름

 

동이의 처음 근거지를 숙신이라 하였으니, 이 숙신의 음()이 구을러 변하여 식신(息愼), 직신(稷愼), 주신(珠愼) 등으로 적혀지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시조인 성인 금()을 주리진(朱里眞)이라 하였는데, 북방의 음으로는 ()()라 읽고, ()()는 같은 ()이며, 里眞(리진)의 두 글자가 합쳐 ()에 가까우므로, 주리진(朱里眞)이 수신의 굴은 음(轉音)이 되었다. 금나라의 본 이름이 주리진(朱里眞)인데, 뒷날에 이것을 그릇하여 女眞(여진) 혹은 려진(慮眞)이라 하였다. 숙신인 이 여진은 숙신의 후손으로서 발해의 별족(別族)이다.

 

나라 이름 “만주(滿洲)”를 말하더라도, 그것을 옛날에는 주신(珠申)이라 하였는데, 이 “주신”과 그 “주리진”의 음이 서로 가까운 것으로서, 그들은 모두가 “숙신”의 음을 따라 적은 한 가지의 명칭이다. 다른 곳에서는 말하기를, 만주 말로써 맨 처음 만주를 “불만주(佛滿洲=발숙신)”라 일컬었는데, 이것은 “옛 만주”라는 말이다. 여기서 미리 한 가지 말할 것은, 불만주의 “불”은 불함산의 “불” 곧 한밝산의 “밝(~)”을 따라 붙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잇따른 고찰에서 잘 밝혀질 것이다.(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4 ~ 55)

 

인용문에는 그 동안 앞 선 장들, 단재 신채호 선생이 고증한 이두와 조선(朝鮮)에 대한 고증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본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고증과 논증을 하고 있다. 더 나아가 여진(女眞) 혹은 려진(慮眞) 역시 주리진(朱里眞)에서 온 것이며 주리진(朱里眞)은 바로 수신 즉 숙신(肅愼)에서 온 말이라고 고증을 하고 있다. 또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을 부르는 같은 이름이자 다른 글자라고 고증을 하고 있다. 위 인용문은 대단히 우리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현재 우리가 분석하고 있는 박달나라(神市) 시기 신지씨(神誌氏)의 후손들이 동북방으로 이주를 하였다는 사서들의 기록을 고증하고 논증하는 나라들 모두 결국 숙신, 즉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이나 종족이름들이 그 뿌리와 줄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이라는 말은 앞선 장들에서도 수도 없이 강조하였지만 바로 고갱이 우리 말 “아사달”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를 한 것이다. 따라서 읍루, 말갈, 거란, 여진, , 금 등은 모두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들이며 그 나라들을 화하족들이 왕조를 달리하고 세대를 달리하면서 각기 다르게 부른 같은 이름이자 다르게 표기한 나라들이다.

 

인용문에서 고증하고 있는 내용을 간단히 도식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朝鮮)=숙신(肅愼)=(===)가 된다.

() + () = ()이다.

③ ①+② =주리진(朱里眞)=주신(珠申)=숙신(肅愼)=조선(朝鮮)이다.

주리진(朱里眞)=여진(女眞)=숙신(肅愼)=조선(朝鮮)이다.

만주(滿洲)=주신(珠申)=주리진(朱里眞)=숙신(肅愼)=조선(朝鮮)

⑥ ①~⑤=조선(朝鮮)=숙신(肅愼)=주리진(朱里眞)=여진(女眞)=만주(滿洲)=주신(珠申)

 

이에 대해 인용문에서도 “《만주(滿洲)》를 말하더라도, 그것을 옛날에는 《주신(珠申)》이라 하였는데, 이 《주신》과 그 《주리진》의 음이 서로 가까운 것으로서, 그들은 모두가 《숙신》의 음을 따라 적은 한 가지의 명칭이다”라고 논증을 하고 있다. 이에 대한 만주운류고의 원문을 보면 아래와 같다.

 

大金國志. 金國本名朱里眞. . 本朝舊稱滿洲所屬曰珠申 與朱里眞 音相近 但微有緩急之異 實皆肅愼之轉音也 : 滿洲原流考. 卷七. 完顔五代

 

“대금국지. 금국본명주리진. . 본조구칭만주소속왈주신 여주리진 음상근 단미유완급지이 실개숙신지전음야 : 만주원류고. 권칠. 완안오대”

 

“대금국지에서 금나라 본래 이름은 주리진이다.

주에서 말하기를 만주의 옛 이름은 주신이라 하였다.

이 주신과 주리진의 소리가 서로 가깝다.

단 그 것들(주신과 주리진)은 서로 다르지 않고 그것들은 숙신(肅愼)의 말이 구른(굴러서 변한) 소리들이다.

 

나라 이름 조선(朝鮮)을 옛날에는 식신(息愼), 숙신(肅愼), 직신(稷愼), 주신(珠愼), 조신(鳥愼), 주신(珠申) 적었다는 것을 정인보님은 다음과 같이 고증하였다.

 

“조선”이라는 말의 옛음이 중국의 옛글에는 식신(息愼), 숙신(肅愼), 조선(朝鮮), 직신(稷愼), 등으로 쓰여졌으나, 이것은 모두가 한 가지 말의 여러 가지 번역이요, 또 관자의 發朝鮮(발조선), 사기의 發息愼(발식신), 대재 례의 발숙신이 모두 다 같은 한 가지 말이다. 식신과 숙신이 나라 이름인 “조선”의 음적음(音表記)이라는 것을 안재홍님도 중국의 여러 옛 책들을 들어서 다음과 같이 잘 밝혀 두었다.

 

肅愼(숙신)朝鮮(조선)의 같은 말에 대한 다른 글자임은, 이제 이미 학계의 일반 상식이다……竹書紀年(죽서기년)息愼(식신), 史記(사기)肅愼(숙신)發息愼(발식신), (급몽) 周書(주서) 王會解(왕회해)稷愼(직신), 吳越春秋(오월춘추)州愼(주신), 其他(기타) 鳥愼(조신)數侲(수진)女眞(여진)原型(원형)朱里眞(주리진)은 모두 朝鮮(조선)과 함께 사신(賜原義.사원의)에서 구울러 된 것으로 볼 것이요, 辰韓(진한) 十二國中(십이국중)에도 州鮮國(주선국)이 있어 역시 同一語音(동일어음)으로 되어 있다. 滿洲原流考(만주원류고)肅愼(숙신)朱里眞(주리진)轉音(전음)이오, 珠申(주신)滿洲語(만주어)에 “所屬(소속)”이니 () 管領(관령)”이라, 우리 今語(금어)에 “주신”의 “()하신”의 뜻됨이 흥미있는 자이지만, 어찌하였든 神市天降(신시천강)民俗信仰(민속신앙)을 갖게 된 古代(고대)震人(진인)이 그 管領(관령)을 “주신”의 朝鮮(조선)으로 일커러서, 肅愼(숙신) 息愼(식신) 稷愼(직신) 鳥愼(조신) 州愼(주신) 혹은 數愼等(수신등)文字(문자)를 보이게 된자, 故肅愼城(고숙신성)이 즉 古朝鮮城(고조선성)됨을 의심할 바 없다.

 

최동님이 또한 조선(朝鮮. 자우신)과 숙신(肅愼. 시우신)은 같은 말에 대한 다른 글자라 하였다.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 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530. 55 ~ 56)

 

인용문은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는 좀 난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이해하고 나면 이미 위에서 분석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용문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식신, 숙신, 발식신, 직신, 주신, 조신, 수진 등은 모두 화하족들이 왕조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조선”이라는 한 말()을 달리하여 표기를 한 것일 뿐이다. 즉 화하족들의 사서에 조선에 대해 기록된 모든 표기들이 각각 다르다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표기 방법을 달리해서 기록한 것일 뿐이지 우리겨레가 살아가고 있는 땅 이름인 “아사달” 즉 “朝鮮(조선)”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 여진(女眞) 역시 주리진(朱里眞)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에 대해 안재홍 선생은 女眞(여진)原型(원형)朱里眞(주리진)은 모두 朝鮮(조선)과 함께 사신(賜原義.사원의)에서 구울러 된 것으로 볼 것이요,라고 고증을 하고 있다. 물론 안재홍 선생 역시 이미 위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만주원류고”를 인용하여 고증을 하였다. 따라서 여진은 의심할 바 없이 주리진에서 유래를 한 것이며, 주리진(朱里眞)은 또한 숙신(肅愼)이 전음이 되어 불린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조선(朝鮮)=숙신(肅愼)=주리진(朱里眞)=여진(女眞)의 관계가 성립이 된다.

결론은 그 표기방법이 어떠하든 모두 우리겨레가 살고 있는 땅

“조선(朝鮮)=아사달“을 이르는 말이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진(女眞)과 그 후신인 금() 역시 우리겨레가 일 만년 이상 살아온 땅 즉 조선(朝鮮)에서 세워진 나라들이며 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세운 나라 이름을 “여진(女眞)” “금()=주리진(朱里眞)”이라고 지어 불렀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우리겨레가 살아온 땅에 세운 나라들이다. 결국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우리겨레의 역사만이 아니라 마치나 이민족의 역사인양 왜곡되어 알고 있었던 읍루(挹婁), 말갈(靺鞨), 물길(勿吉), 거란(契丹), (), 여진(女眞), (), 금을 이은 청()나라의 역사가 우리겨레의 역사라는 것을 화하족들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 조상들 역시 우리겨레의 역사라고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윤치도 선생은 그의 저서《민족정사(民族正史)》에서 요사(遼史)와 금사(金史)를 우리조상들의 역사로 고증을 하고 있다. 윤치도 선생은 아예 당시 우리겨레의 역사를 남사 북사로 분류를 하여 요사(遼史)와 거란(契丹), 여진(女眞) · 금사(金史)를 북사로 정의를 하고 있다. 여기서 남사는 고려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하게 분석을 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 가라의 역사 이외에 읍루(挹婁), 말갈(靺鞨), 물길(勿吉), 거란(契丹), (), 여진(女眞), (), 금을 이은 청()나라의 역사도 우리겨레의 역사요, 우리겨레가 세운 이 나라들은 모두《박달나라(神市)》시기 신지씨(神誌氏)의 후손들이 후박달나라(神市)의《가우리(中心)》에서 동북지방으로 옮겨가서 세운 나라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인 내용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단기 4348817(서기 2015929)

 

이 용 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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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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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00주년기념논집(論集), 단재 신채호와 민족사관(단재 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형설출판사. 198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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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기행 중 풀어낸 비밀 속의 우리문화2

고조선 력사개관(허종호 외. 사회과학원 출판사, 도서출판 중심. 200135)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1(유홍준. 창작과 비평사. 199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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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위비백과사전 인용.

배달·동이겨레의 옛 역사(안호상. 배달문화 연구원. 1971 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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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이용섭)

가우리민 2015. 9. 24. 09:24

 

[우리역사71] 단군조선의 대외 관계사-34(삼신오제본기), 장승

일제강점기 천재사학자 단재 신채호

이용섭 역사연구가

 

기사입력: 2015/09/23 [07:41] 최종편집: ⓒ 자주시보

우리역사 이야기 – 71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천재사학자(天才史學者)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신채호(申采浩) 선생(先生)의 상‧‧고대사에 대한 인식.

단군조선(檀君朝鮮)의 대외(對外) 관계사(關係史) - 34(三神五帝本紀), 장승(長丞)

장승신앙(長丞信仰)과 장승(長丞)의 전래설(傳來說)에 대한 비판(批判)

()

() 역시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이다. 물론 그 동안 우리는 학교라는 공간과 언론 출판을 통해서 요()가 마치나 다른 민족이고 그 시대 우리겨레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듯 요()와 전쟁을 하는 장면들에 대해 묘사를 하였다.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우리겨레의 발자취를 심히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낸 역사라고 본다. 물론 같은 피를 나눈 겨레라고 해도 나라를 각기 달리 하다 보면 쟁투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쟁투를 했다고 하여 같은 피를 나눈 민족이 이민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재 다루고 있는 신지씨(神誌氏)의 후손들이 이주하여 세운 나라들은 모두 우리겨레들이다. 이러한 인식은 근세조선(近世朝鮮) ()까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자신들의 조선강점을 정당화하고 역구화하기 위해 악랄하게 왜곡과 조작을 한 이후부터는 서서히 수천 년 지속되어오던 같은 겨레라는 인식에 파열구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즉 쟁투만 지나치게 부각이 되면서 동질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쟁투마저도 마치나 이민족(異民族)간의 이전투구인양 묘사를 함으로서 같은 피를 타고났지만 후박달나라(檀國. 檀君朝鮮)가 붕괴된 후 분리되기 시작한 나라들이 나라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겨레가 아닌 이민족(異民族)인 것으로 주입이 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왜곡 조작된 우리겨레의 발자취를 주입하기 시작한 세월이 어언 백여 년이 되다 보니 이젠 남쪽의 구성원 대부분은 현재 우리가 다루고 있는 나라의 구성원들을 이민족으로 인식을 하고 있다. 결국 고갱이 우리겨레는 조선반도(朝鮮半島)라는 좁디좁은 땅에서 살아온 구성원들만 이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그나마도 조선반도 남쪽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느니, 조선반도 북쪽에 사는 사람들은 시베리아와 대륙에서 유입이 된 사람들이라느니 하는 황당한 주장을 역사교과서에 기술을 하여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주입을 시킨 적도 있었다. 현재는 어떻게 기술이 되어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건국신화(建國神話) 내지는 탄생설화(誕生說話) 등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와 같은 터무니없고 황당한 주장을 여전히 주입을 시키고 있을 것이다.

()나라나 금()나라 역시 위에서 말한 틀에서 조금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서들을 비교분석(比較分析)해보면 현재 다루고 있는 나라들은 모두 우리겨레들이 분리하여 세운 나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확한 실재(實在)했던 역사적(歷史的) 사실들이다. 이에 대한 기록은 비단 우리 조상들이 남긴 사서들뿐 아니라 우리겨레와 수천 년 쟁투를 벌여온 화하족(華夏族)이 남긴 사서들 역시 똑같은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럼 김교헌(金敎獻) 선생(先生)이 지은 신단실기(神壇實記)에 기록된 요()에 대해서 보기로 하자.

()의 조상은 고구려에서 나왔으니, 단군(檀君)의 자손이다. ()의 태조(太祖) 신망() 원년에 영주(永州) 목엽산(木葉山)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 10월에 예화악(豫和樂)을 써서 친히 제사지냈다. 또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존경하여 출입할 때 반드시 제사지냈다. (신단실기. 김교헌 지음. 이민수 주역. 한뿌리. 1994320. 37)

인용문은 김교헌(金敎獻) 선생(先生)이 지은 신단실기(神壇實記)에 나와 있는 요에 대한 짤막한 기록이다. 기록을 보면 요()나라가 고구려(高句麗)에서 나왔으며 단군(檀君)의 자손이라고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따라서 ()나라는 부인할 수 없는 우리겨레가 세운 나라이다.

()나라가 우리겨레라는 사실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요()의 태조(太祖) 신망() 원년에 영주(永州) 목엽산(木葉山)에 사당을 세우고 매년10에 예화악(豫和樂)을 써서 친히 제사지냈다. 또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존경하여 충입할 때 반드시 제사지냈다.는 기록이다. ()나라가 10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은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이 배달겨레라는 것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이다. 10월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요()나라의 조상인 박달임금(檀君)을 기리는 것이다.

왜 배달겨레 구성원들이라며 또 그 구성원들이 세운 나라들이라면 예외 없이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10월에 제천행사를 지냈다. 그럼 왜 배달겨레 구성원 모두, 또 배달겨레가 발을 디디고 선 땅 모든 곳에서 10월 정확히 103(절대 양력이 아니고 음력임) 온 나라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제천행사를 하였는지에 대해 간략히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해서눈 후일 후 박달나라(檀國, 檀君朝鮮)을 다룰 때 상세할 예정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의 기록과 단기고사(檀奇古史) 1세 단군왕검(檀君王儉)¹편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 1세 박달임금(檀君)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개천 1565년 상월(上月-음력 10월이 상달 이다)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² 왕검(任儉)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또 맹렬하였으니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 했다.(한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 제1세 왕검任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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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첨자 해석

단군왕검(檀君王儉):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표기를 한 것은 엄밀히 말해 잘못된 표기이다. 이미 단군(檀君)이라는 말이 박달 임금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檀君)이라고만 표기를 해도 박달 나라 임금이 된다. 임금, 임검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를 한 왕검(王儉)을 뒤에 붙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단군왕검(檀君王儉)임금, 임검이라는 말이 중복된 표기이므로 잘 못되었다. 즉 단군왕검(檀君王儉)을 고갱이 우리말로 풀어서 보면 박달나라 임금 임검이라는 우스꽝스러운 표기가 되는 것이다.

신인(神人) : 신인(神人)이라 하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나 박달 임금(檀君)이 사람이 아니고 선계(仙界)에 사는 신선(神仙)을 말하는 것으로 잘 못 인식을 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이 잘못된 인식들이 우리의 신성(神聖)한 고대국가(古代國家)후 박달나라(檀國. 檀君朝鮮)를 신화(神話)로 받아들이면서 실재했던 역사가 아닌 허구의 건국신화(建國神話) 내지는 건국설화(建國說話)로 잘 못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인(神人)은 고갱이 우리말인선배를 뜻글자를 빌어 신인(神人)으로 표기를 한 것이다. ()은 고갱이 우리말인 을 뜻글자를 빌어 이두로 표기를 한 것 이고, ()은 옛날에는 고갱이 우리말 로 읽었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증을 하였다. 따라서 신인(神人)은 고갱이 우리말인 선배를 뜻글자를 빌어 표기를 한 것이다. 여기서 선배는 군장(君長) 및 제사장(祭司長)의 직책(職責)을 가리키는 고갱이 우리말이다. 나라를 이끌어가는 총체적 령수로서의 직책 이름은 임금, 임검이다.

신인(神人)이라는 단어나 말을 잘 못 해석하면서 후 박달나라(檀國, 檀君朝鮮)을 이끌어가던 임금, 임검들을 사람이 아닌 신적(神的)인 존재로서 받아들이면서 실재했 던 후 박달나라(檀國, 檀君朝鮮)의 역사를 신화(神話)요 허구(虛構)요 하면서 건국신화 (建國神話) 내지 건국설화(建國說話)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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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단기고사(檀奇古史) 1세 단군왕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