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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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청춘에 충성/군인이야기

2014. 11. 24.

 

가장 먼저 적고 싶었던 한마디, ‘나는 다시 찾았다!’ 바로 1년 전까지만 해도 힘없이 늘어진 손바닥에

눈물만을 받아내던 나였다. 그랬던 내가 자신감, 용기 그리고 타인에 대한 믿음을 지금 두 손에

꼭 쥘 수 있음은 군대가 나의 친형같은 멘토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나는 학교 창가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다. 많은 친구들이 달려와 나의 상태를 보며 수군거렸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선생님께서 나의 손을 잡아주면서 아무 일 없을 것이라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말에

기대어 큰 사고가 아닐 것이라 믿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사고 당시 보았던 친구들의 심상치 않은

반응으로 불안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병원에 도착해서야 확인한 나의 상태는 심각했다.

나의 다리는 대수술과 2년이라는 장기간의 재활을 받아야 했다. 나는 좋아했던 뜀박질을 다시는 못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조금 무리를 해서 예정보다 일찍 학교로 돌아갔지만 ‘장애인, 다리병신’이라며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친했다고 생각했던 녀석들조차 도와주기는 커녕 나를 일부러 피해 다녔다. 말할

기회와 함께 말수도 줄어들었고, 점점 사람들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사람들과 만나기도 대화하기도

싫어졌다. 나는 부모님의 끊임없는 설득과 노력으로 간신히 졸업요건만 채워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 고등학생 시절 머릿속 깊숙이 박힌 학교에 대한 안좋은 인식으로 나는 대학진학을 일찍이 포기하고 바로

사회로 발걸음을 돌렸다. 잘해보자고 다짐하며 일주일에도 몇 번씩 공장과 회사를 오가며 면접을 보았다.

그렇지만 학교생활을 하며 굳어진 나의 소심함과 불편한 다리는 수없이 걸림돌이 되며 나의 다짐을 배신했다.

 

사회는 가혹했고 나는 조금씩 단단히 나와 사회를 닫아걸었다. 혼자 술을 마시러 다니면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꽤나 오랫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기만 했다. 내가 보기에도 한심해보였다. 더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애써 자기합리화하며 집에만 틀어박혀있는 나의 모습은 ‘넌 장애인이니까 아무것도 못해’라고 했던

말들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진짜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 같았다.

 

내가 나로 남아있을 수있기 위해 달라져야만 하는 시기가 찾아 온 것이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달라질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듣던 말 군대를 다녀오면 사람이 바뀐다. ‘진짜 남자가 되어 돌아온다.’

사람이 된다. 나는 진심으로 바뀌고 싶었다. 마음이 다치기 전의 나를 되찾고 싶었다.

 

‘그래! 군대에 가자.’ 하지만 나의 다리는 또 한 번 내 발목을 잡았다. 병무청에서 받은 신체검사에서 나는

현역복무 불가판정을 받았다. 대한민국의 남자로 태어나 군대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는데, 다친

다리 때문에 군대도 못 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나는 어떻게든 현역으로 군복무를 하고 싶었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던 사람들에게 현역 군인이 되어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다고

당당히 말해주고 싶었다.

 

2년간 자신을 엄격히 관리해가며 계속해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 나는 현역으로 입대 할 수 있는 2급

판정을 받게 되었고 병무청을 나서며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신체검사 이후, 모든 일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이전처럼 의도적으로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드디어

입영날짜가 다가왔다. 가지 못한다고 했을 때는 그렇게 가기를 바라던 군대였지만, 입대 3일 전부터는 괜한

일을 했다는 생각이 들고 불안감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내가 직접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피하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로 부모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소에서 생활을 할 때에도 나의

다리는 역시나 문제를 일으켰다. 제식을 하거나, 훈련장으로 걸어갈 때, 완전군장 행군을 할 때도 다른

전우들과 달리 잘 걷지도, 오래 걷지도 못하는 나는 남들과는 다른 미운오리새끼였다. 동기전우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처음에는 나를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던 동기들도 훈련이 고되어지고, 내가

자꾸 훈련에서 열외가 되면서, 나를 언제고 좋게 봐주지는 않는 듯 했다. 변해가는 동기전우들의 시선에 나는

다시 움츠러들었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군대에 대한 믿음이 싹튼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사회와는 달리 내 말을 들어주고 챙겨주는 소대장님과

분대장님이 있었다. 내가 어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또한 어려움을 스스로 극복해 나갈 수 있도록

남모르게 많이 배려 해주고 필요할 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 두 분이 있었기에 나는 무사히 군에 적응하고

훈련을 수료할 수 있었다. 수료식 날, 부모님이 달아준 이등병 약장을 보며, 주위의 놀림과 무시 그로 인한

상처를 극복해냈다는 생각에 환희의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과 함께 과거의 아픔을 흘려내고, 앞으로는

울지 않는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고 부모님 앞에서 다짐했다. ‘부모님과 함께 눈물 흘린 이 날을 절대 잊지

않겠다.’

 

배치 받은 30사단은 내가 살고 있는 부천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제 내가 20개월 동안 지낼, 또

훈련소와는 달리 선임들과의 함께 생활을 하게 될 자대로 가게 되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난 잘 할 수 있을까?’

하면서도 ‘이제 제대로 된 군 생활을 하게 되는 구나’ 했다. 사단 신병교육대를 거쳐 지금의 내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자대에 도착해서 주임원사님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 대대장님과 간담회를 마친 후에 내가

배치받은 3중대에 처음 발을 들였다. 자대는 절대 훈련소보다 만만치 않았다. 기계화보병중대로 전입을

왔지만 대대의 자랑거리인 뜀걸음도 못하고 각개전투와 전술훈련 또한 받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자 ‘나는

나라를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왜 굳이 현역으로 입대해서 아무것도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을까?’ ‘애초에 나는 현역입대 할 자격조차 없었던 건가?’ 나 자신의 대한 회의감에 밥도 먹기

싫어졌고, 생활관을 같이 쓰는 동기들과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군대에 온 것이 많이 후회됐고, 자살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깜빡였다.

 

나는 중대장님과 행정보급관님께 도움을 요청했고, 몇 차례 면담을 나누고 ‘그린캠프’에 참가 하게 되었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차서 그린캠프에 참가 하는 것조차 꺼려했었다. 하지만 그

곳에 있는 사람들과 프로그램을 같이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며칠을 지내다 보니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군대에 적응하기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시 입대전의

마인드를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린캠프를 다녀오고 나서 나의 군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중대 전투력을 깍아 내린다고 생각할 때와는 달리 항상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군 생활을 하게

되었다. 중대원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 다른 중대원들 모르게 먼저 나서서

중대 작업들을 처리했다. 그 결과, 중대의 업무 중 안 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간단한 중대 작업부터

중대원들의 머리를 깍아주는 이발병, 추운겨울날 중대원들이 따뜻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주는 보일러병

여름날 풀뽑아야 하는 애초병 업무까지, 조금이라도 중대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군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나는 지금 일병 7호봉으로, 곧 상병진급을 앞두고 있다. 이등병 때 멘탈 문제로

말썽이 조금 있었지만 이제는 선임들과 동기들도 내 노력을 알아주고 나를 인정해준다. 군대가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았다면 여기까지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제 군인이 다 됐다. 군대의 일원인 군인으로서 군대가 지켜주고 보살펴주는 ‘국민’이라는 단어 안에는

구성원인 군인 개개인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내가 군인으로서 후임들과 다른 전우들에게

두움을 주고자 생활하고 있다. 나 또한 믿음직한 군의 믿음직한 일원이 되고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