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공

소걸음 2009. 4. 1. 12:34

“우리가 손해를 본다 해도 회사를 차려볼 수는 있잖아. 일생에 한 번, 회사를 차려 보는 거야.” 후배 스티브(스티브 잡스)의 이 말에 선배 스티브(스티브 워즈니악)는 감동한 나머지 그렇게 하기로 했다. 선배 스티브가 만든 컴퓨터 설계도를 구경한 후배 스티브가 차라리 실물을 만들어 팔면 어떠냐고 제안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공짜 전화를 걸 수 있게 해 주는 ‘블루박스’라는 불법 기계장치를 만들어 유통시킨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일은 그보다 좀 더 복잡했다.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후배 스티브는 자기 자동차를, 선배 스티브는 (당시로선 상당히 고가의 장비였던) 자기 계산기를 팔았다. 그로부터 2주 뒤, 두 사람은 회사의 이름도 정했다. 바로 ‘애플’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두 사람의 동업에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선배 스티브의 아버지는 “네가 어째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아이’하고 50대 50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는 거냐”면서 후배 스티브를 향해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선배 스티브의 아내 역시 남편이 집안에 온통 전자부품을 늘어놓는 것에 진력이 나 있었고, 심지어 선배 스티브 본인도 이미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있는 상황에서 ‘투잡’을 벌이는 것을 부담스럽게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6년 4월 1일, 애플은 드디어 첫발을 내딛었다. 혹시 이날이 하필이면 ‘만우절’임을 근거로 이 회사의 앞날을 부정적으로 예측한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직 20대인 두 스티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티브 잡스는 1955년 2월 24일에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친부모는 당시 대학원생이고 미혼이었기 때문에 아이를 키울 수 없었고, 결국 그는 생후 몇 주 만에 양부모인 잡스 부부에게 입양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환각제와 신비주의에 열중했고, 나중에는 선불교의 신봉자가 되었다. 대학을 중퇴한 직후에는 컴퓨터 게임 회사인 아타리에 취직했지만, 사실상 전자공학이나 컴퓨터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탁월한 직관을 지닌 몽상가였고, 잔머리 굴리기에 능숙한 수완가였으며, 이런 성격은 훗날 그의 성공과 실패 모두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스티브 워즈니악, 일명 ‘워즈’는 1950년 8월 11일에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에서 태어났다. 록히드의 항공 기술자였던 아버지를 닮아 어려서부터 과학을 좋아했고, 특히 전자공학에 열렬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 남들이 불가능하다는 일을 궁리 끝에 해결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지능지수 200의 천재였지만, 워낙 천진난만하고 장난을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고등학교 때에는 가짜 폭탄을 만든 죄로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에 휴렛팩커드(HP)에 들어가 계산기 개발 업무를 담당하던 그는 우연히 동호회 모임에서 PC 제작에 관심을 갖게 되어 자작 PC를 만들었고, 이를 계기로 잡스와 컴퓨터 회사를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은 종종 ‘동갑내기 단짝 친구’로 오해를 받는데, 사실은 다섯 살 차이의 고등학교 선후배 지간이었다. 성격은 그야말로 대조적이었다. 워즈는 내향적이었지만, 잡스는 외향적이었다. 워즈는 주목 받기를 꺼렸지만, 잡스는 타고난 무대 체질이었다. 워즈는 실력이 있었지만, 잡스는 배짱이 있었다. 워즈는 발명가였지만, 잡스는 사업가였다. 물론 공통점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서 학창 시절 ‘왕따’를 당했다는 것,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하기를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애플 II’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종의 비싼 장난감 정도로만 여겨지던 PC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며 ‘애플 신화’를 일궈냈다. 창립 4년 뒤인 1980년, 애플은 PC 100만 대 판매라는 위업을 달성했고, 그 해 12월 주식 공모를 통해 투자자들을 벼락부자로 만들었다. 잡스는 원래의 자기 지분을 고스란히 보유한 까닭에 큰 이익을 얻었지만, 함께 고생한 옛 동료들에게 스톡옵션을 주지 않아 원성을 얻기도 했다. 반면 워즈는 이른바 ‘워즈 플랜’을 통해 자신의 지분 가운데 3분의 1 가량을 친구나 동료에게 헐값에 판매하거나 선물했다. 다시 한 번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이 드러난 사례였다.

 

 

 


1982년 새해에 잡스는 20대의 거부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며 명성이 절정에 달했지만, 역사상 가장 수지맞았던 ‘사과’는 속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물론 애플의 핵심은 잡스와 워즈였지만,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외부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도 불가피했다. 잡스의 성공 요인이었던 특유의 오만과 고집은 이제 내실을 기해야 하는 애플에는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애플 II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매출은 점차 떨어졌다. 야심작 매킨토시를 내놓았지만, 당시에는 구매자의 요구를 파악하기보다는 그저 외양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1983년에 이르러 애플은 PC 시장에서 IBM에게 추월 당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권력 다툼으로 인해 축출 위기를 맞은 잡스는 1985년에 이르러 애플을 떠난다. 잡스는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설립해 새로운 PC를 내놓지만, 개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바로 그때, 오래 전부터 잡스의 소유였지만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던 컴퓨터 그래픽 업체 픽사(Pixar)가 디즈니와 제휴해 만든 <토이 스토리>가 대박을 터트린다. 연이은 픽사 제작 애니메이션의 히트 행진에 잡스는 드디어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다. 당시 애플의 상태는 그야말로 바닥이었고, 잡스의 넥스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교섭 끝에 양측은 애플이 넥스트를 인수하고, 그 소유주인 잡스가 애플의 고위직으로 복귀하는 극적인 타결에 이른다.

 

굴욕의 퇴진을 당한 지 13년 만에 ‘왕의 귀환’을 이룬 잡스는 임시 최고경영자(iCEO)로서 활동하며 단돈 1달러를 연봉으로 받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주목을 받는다. 이후 애플은 아이맥을 내놓아 건재함을 과시했고, 특히 mp3 재생기 아이팟은 세계적인 열풍과 함께 잡스를 다시 한 번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물론 잡스는 지금껏 한 번도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낸 적은 없었고, 매킨토시나 픽사의 경우에서처럼 남의 공로를 가로채다시피 하는 바람에 곧잘 구설수에 오른 것도 사실이다. 아이팟 역시 개발자는 따로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잡스의 직관과 애플의 기술이 조화되어 탄생시킨 걸작품이라고 입을 모은다. “원래 좋은 물건을 훨씬 더 좋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잡스만의 능력이 아닐까.

 

 

잡스만큼의 부침(浮沈)은 없었지만, 워즈 역시 애플로 인해 백만장자가 된 직후 적잖이 파란만장한 세월을 겪었다. 1981년에는 경비행기 추락 사고를 당해 머리를 크게 다치고 한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렸다. 완쾌 이후, 10년 만에 대학으로 돌아가 공부를 마무리하고 회사로 복귀한 워즈는 애플이 이미 과거와 같은 활력을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크게 실망한다. 당시 매킨토시와 애플 III 같은 신제품이 평가에서나 판매에서나 명백한 실패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스테디셀러였던 애플 II를 홀대하고 신제품 홍보에만 몰두하는 현실이 그로선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까닭이었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말했다.

 

워즈는 애플의 일선에서 물러나 통합형 리모콘 제작에 뛰어들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간 탓인지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결국 그는 사업을 접고 현재는 학교 컴퓨터 보급 및 컴퓨터 교육 같은 자원봉사에 전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워즈는 자서전에서 “모든 것을 통제하며 사는 사람보다는 웃으며 사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말한 바 있다. 혹시 잡스를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 애플 창립 당시에도 워즈는 사업에 관여하지 않고 오로지 ‘기술’ 분야에 남기를, 즉 최고 관리자가 되기보다는 말단 기술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아무런 꿈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는 예나 지금이나 ‘자기만의 꿈’을 성실하게 쫓을 뿐이니까.

 

 

역사상의 탁월한 인물 가운데에는 혼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기억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루이스와 클라크’라든지, ‘왓슨과 크릭’ 등이 그렇다. 상보적인 능력을 지닌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일종의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기 때문이다. ‘잡스와 워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일부에서는 잡스가 워즈를 “이용해 먹었다”고 주장한다.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말하자면, 애플의 창립 당시에 잡스가 기여한 바는 그 ‘이름’을 만든 것밖에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자면 워즈가 오히려 잡스 덕분에 “떴다”고 할 수도 있으리라. 워즈는 분명히 천재적인 기술자였지만, 만약 잡스가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본격적으로 사업 제안을 하지 않았더라면 끝내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얻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워즈 본인도 HP가 뒤늦게야 PC 사업에 뛰어들면서도, 당시 사원이었던 자신을 그 프로젝트에서 고의로 배제했다는 사실을 두고두고 서운해 했다. 그로선 애플 못지않게 HP에 대한 애정도 상당했지만, HP는 그의 실력을 인정하지도, 제대로 써먹지도 않았던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잡스가 워즈를 일방적으로 “이용해 먹었다”는 주장은 지나치다. 오히려 둘의 관계는 더도 덜도 아닌 ‘상보적인’ 관계였다고 해야 정확하리라.

 

‘황금 알을 낳은 사과’의 겉과 속을 상징하는 잡스와 워즈는 모두 1980년대에 애플을 떠났다가 2000년대에 CEO와 고문으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워즈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리모콘 사업을 시작했을 때에도 서류상으로는 여전히 애플의 직원이었고 월급도 꼬박꼬박 받았다. 즉 그의 일부분은 항상 애플에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잡스는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을 듯 애플과 요란하게 결별한 이후, 넥스트와 픽사라는 ‘지옥과 천국’을 두루 거쳐 결국 애플로 돌아오는 극적인 행보를 펼쳤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대조적인 성격은 애플과의 시작뿐 아니라 애플과의 결별에서도 그렇게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스티브 잡스에 관한 책은 그가 애플로 복귀해 아이팟으로 대박을 터트린 직후에 우후죽순 격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전기로는 제프리 영과 윌리엄 사이먼 공저의 <iCon 스티브 잡스>(임재서 옮김, 민음사, 2005)를 들 수 있겠다. 지금까지 잡스의 인생 여정을 ‘애플 창업’, ‘넥스트/픽사’, ‘애플 복귀’의 세 가지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면, 영과 사이먼의 책은 이 세 시기를 두루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위의 내용도 이 책에서 많은 부분을 참고했다.


iCon 스티브 잡스못말리는 CEO 스티브 잡스스티브 워즈니악
 

이 가운데 첫 번째 시기는 리 부처의 <Apple & 스티브 잡스>(양천주 옮김, 비앤씨, 1993)에서, 두 번째 시기는 앨런 도이치먼의 <(못말리는 CEO) 스티브 잡스>(안진환 옮김, 영진Biz.com, 2001)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진다. 부처의 책은 잡스의 애플 창업에서부터 회사 내의 권력 투쟁과 축출, 그리고 넥스트 창업에 이르기까지, 잡스의 성공과 몰락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그려낸다. 반면 도이치먼의 책은 넥스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픽사의 성공으로 애플에 복귀한 잡스의 인생 역전을 비교적 호의적으로 그려낸다. 매우 상반되는 관점의 전기들이긴 하지만, 잡스라는 카리스마적이면서도 복잡한 인물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스티브 워즈니악에 관한 단행본 형태의 자료는 사실상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잡스의 전기 한구석에 잠시 언급되는 것밖에는 없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히 최근에 그가 지나 스미스와 공저한 자서전 <스티브 워즈니악>(장석훈 옮김, 청림출판, 2008)이 번역되었다. 잡스의 ‘롤러코스터 인생’을 서술한 전기를 읽은 독자라면, 워즈의 자서전이 대부분 그의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의 일화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약간은 아쉬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이나 리처드 파인만의 어린 시절 이야기 못지않게 기발하고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듬뿍 담겨 있는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잡스의 현란한 카리스마와는 상반되는 워즈의 수수한 인간적 매력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출처: http://navercast.naver.com/worldcelebrity/history/269

글: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