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영생과 神仙

조로아스터 2019. 1. 13. 09:09

하늘에 흰 눈이 내리면 어느새 땅에는 눈이 덮히고 

눈 덮힌 땅을 보면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새 하얀곳에 나홀로 

첫 발자국을 남기고픈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선도 경전엔 성을 다해 명을 이루는것이 성현의 가르침이란 말이 있읍니다. 

성을 다해 명을 이룬다는것에 대해 

얼핏 이해하기 어려운 면이 있어서 그렇다면 성명 쌍수는 무엇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을수가 있읍니다. 


여기서는 성을 다하여 ~ 에서 다한다는 말이 비의적인 말이 됩니다. 

즉 성을 다하면 그것이 진성(眞性)이 되고

명을 다하면 그것이 진명(眞命)이 되는것입니다. 


진성은 이미 그 자체에 명을 포함하고 있으며

진명은 이미 그 자체에 성을 포함하고 있어서 

성만으로도 이미 성명이며 명만으로도 이미 성명인것입니다. 


수행자는 경전을 공부하다가 이러한 내용에 접하고

그것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깊이 생각하게 되면 이것이 이런것이 아닐까 생각하거나 추측하는데 불과하다해도

그것이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자신만의 비젼을 보게 될수 있고 비젼을 간직할수 있게될수 있읍니다. 


그것으로 인해 이제까지 해오던 수행에 새로운 시각으로 노력하게 되거나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거나 할수 있게 되는것입니다. 


하늘에 흰 눈이 내리는것을 보면

아직 땅에는 흰 눈이 덮히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는것을 예상할수 있듯이

수행 정진하며 경전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비젼을 품어볼수 있게 하는것입니다. 


마침내 온 세상이 하얗게 덮히고 땅에도 흰 눈이 덮히면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땅에 나 홀로 발자국을 남겨보고 싶듯이

그러한 진성 진명의 길은 사람들이 쉽게 접하게 되기도 생각하기도 추측하기도 어려운 지식이자 단계입니다. 


그러한 지식은 세상에서 박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쉽게 이해할수 없고 생각할수 없는 

이미 출세간의 지식입니다. 

그러한 수행 상태 엮시 세상 사람들이 수행한다하여

쉽게 이루어지고 이해하고 수용하고 수긍하고 받아들일수 없는 전혀 별개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접한 사람들은 나 홀로 눈 덮힌 땅을 싫으나 좋으나 그러고 싶으나 말거나

그 길을 홀로 걸으며 홀로 향유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그러한 흰눈이 덮힌 땅을 밟아 보기 전의 수행 상태에 대한 많은것들이

가르쳐지거나 책으로 출판되거나 이야기되거나 회자되고 있지만

진법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진정한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것에 그치고 그것을 모든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것이 주의할 점입니다. 


수행하여 체험했다하여 일정 경지에 올랐다 하여도 

흰 눈이 덮힌 땅을 밟는것과는 무관할수 있읍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행 경지를 생각하여 자신의 경지만 믿는 나머지 자신의 체험이 옳고 

자신이 체험해보았으므로 

거꾸로 선도 경전에 있는 소리는 있을수 없는 공허한 이론만의 소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태는 성현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성현들보다도 자신의 경지가 높다는 교만에 지나지 않는것입니다. 


체험했다고는 하지만 눈 덮힌 땅은 본적도 걸어본적도 없는

그에 대해 이론적인것조차도 이해할수 없는 비젼 조차도 품어 볼수 없는 상태인것입니다. 


또한 눈 덮힌 땅을 걷는다 해도

눈 덮힌 땅 아무도 밟지 않은 새 하얀곳 나 홀로 발자국을 남긴다지만

이미 작년에도 제 작년에도 수 십년 전, 수 천년 전에도 

눈은 내렸고 땅이 눈에 덮힌적이 있었고 

그곳을 걸어간 수많은 선배 성현들께서 계셧던것입니다. 



  


 태산송(태山頌) 에 이르기를,


고소성(姑蘇城) 아래 한산사(寒山寺)에서,

야반(夜半)의 종소리가 저절로 울릴 때라네.

가을 달 봄 바람에 무한한 그 흥미는,

그 중에서 다만 자신만이 알게 한다네!


          

                       

성명쌍수(性命雙修)는 이것이 본래 신선되고 부처되고 성인되는 큰뜻(大旨)이라.

혹자는 이르되 불(佛)은 수성(修性)하고 선(仙)은 수명(修命)하고

유(儒)는 치세(治世)하니

문호를 나누었다 하니 대개 종지(宗旨)를 깊이 연구하지 않음이다.

 

내가 살펴보니 불(佛)이 성(性)을 중히 하나 그 중(中)에 실로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으니 명(命)이 있지 않음이 없다.

특히 비밀로 하신 말씀이라.

그 성공(性功)을 중히함은 대개 사람들로 성(性)을 따라 명을

세움이니 능히 성(性)의 국량이 넓고 커서 무변무제(無邊無際)의 십방(十方)세계를 비추게 함이며

선(仙)에서 명(命)을 중히함이나 그 중에 엮시 교내진전(敎內眞傳)이 있으니  성(性)을 말씀 아니함이 아니다.

 

특히 집약해서 말함이다. 그 명(命)을 중히 함은

대개 사람들로 명(命)에 즉하여 요성(了性)하게 하니 능히

명근(命根)으로 하여금 길이 굳게 하여 만겁을 지나 무진무궁하게 함이라.

 

만약 성공원만(性功圓滿)함으로 하여금 밖으로 명(命)을 세우는 수련이 없으면 곧 진성(眞性)을

보존하기 어려워 마침내 공적(空寂)에 속할것이니 또 어찌 능히

법신이 항사(恒沙) 세계에 두루하리요!

 

만약 명공주도(命功周到)로 하여금 안으로 성(性)을 다하는 수련이 없다면 곧 진명(眞命)을

지키기 어려워 한갓 색신(色身)만 보존함이라. 또 어찌 능히 신(神)이 삼계(三界)를 통하겠는가!

 

오직 불(佛)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이 있어 곧 성(性)을 따라 입명(立命)하니

극락지지(極樂之地) 더욱 공명(空明)을 보고

오직 선(仙)은 교내진전(敎內眞傳) 있어 곧 진명요성(眞命了性)하니 대라지천(大羅之天)이

더욱 초탈해 보인다.

이렇게 선(仙) 불(佛) 성(聖) 들이 쌍수(雙修)하시고 단수(單修)가 아니었다.

 

고로 석가가 선정에 이르러 관정천슬(貫頂穿膝)의 증험이 있고 가섭이 진실한 뜻을 말하되

찰간을 넘어뜨리라 한 기특함이 있었다. 시험삼아 어떤 뜻인가 생각해 보라.

 

여조운, 단지 성(性)만 닦고 명(命)을 닦지 않으면 이것이 수행의 제일 병이다 하였고

자양운, 그대가 넉넉히 진여성(眞如性)을 요오(了悟)했더라도 이 몸 던져 저 몸에 듦을 면치 못하리!

어찌하든 다시 대약(大藥)을 겸수하여 문득 무루(無漏) 초월한 진인을 지으라.

 

간단히 한 모퉁이를 들면 가히 유추하리라. 행심반야(行深般若) 오온개공(五蘊皆空)

단숙대환(丹熟大還) 십년면벽(十年面壁) 육십이순(六十耳順) 칠십종심(七十從心) 등등

대개 뒤에 성명(性命)을 쌍요(雙了)하여

공겁을 초월한 경지에 함께 올라 선(仙), 불(佛), 성(聖)을 이룸이다.

고로 달마초조의 요도가(了道歌)에 이르되 삼가(三家)의 법(法)이 일반이라.

두 모양으로 보지 말라.

 

성명(性命)은 쌍수(雙修)함을 요하니 건곤(乾坤)이 불후(不朽)하듯 하리 하였다.

사람이 또 하필 시비하랴

또 다시 말하길 삼교(三敎)가 이어감을 다 능히 알 수 없는데 알면 반드시 서로 찌를것이 아니라

다만 각자 그 도(道)를 찾아 돌아갈것이라 하나 이제 대도주인이 이에 삼교(三敎)를 위해 설법하시되

대저 삼교(三敎)는 우리 도(道)의 세 기둥이니 나누어 셋(三)이 되고 합하며 일(一) 이 되는것이라.

 

도(道)는 능히 나툴 수 없고 변화할 수 없고 능히 합해서 그 극을 세우니

불도(佛道)에는 성(性)을 말하고 명(命)은 묵언하며

선도(仙道)에는 명(命)을 전하고 성(性)은 묵전하였으며

유도는 세법을 짊어지기를 간절히 하고 성을 말함을 듣기 어렵고 명(命)도 또한 듣기 드물었으나

성명(性命)을 아울러 묵수(默修)하다.

 

드디어 삼가(三家)의 후예들이 각각 조파(祖派)에 나아가 전문으로 나누어 천지를 진동하듯

시비를 강설하여 가없는 경계를 열어 나오게 되었다.

불(佛)이 선도(仙道)를 공격하여 번공축기의 묘상이 있고 선(仙)이 불(佛)을 공격한즉

답실지진(踏實指陳)적 신사(神思)가 있고 

유(儒)가 불(佛)과 선(仙)을 공격함에 번란불궁적 문장이 있게 되었으니 좁은 속에 흘러 쉬지 않고

희롱하는 아이들이 어찌 모두 도(道)가 이미 삼분(三分)으로 되니

그 중에 어찌 지류에서 다른 점이 없으랴

사정(邪正)의 같지 않은 자  어찌 그 근본은 생각지 않고 그 끝만 말할까!

 

대개 성(性)을 겸하는 일맥이 됨과 성명(性命)을 섞어서 일맥을 삼는 자 이 삼파도 다 도의 맥이다.

그 무(無)에 돌아가서는 일(一)이다.

노래하니 밝은 등불 불어 끄고 희롱하는 자 누가 알랴.

제몸 제가 때림을 내 말 듣고 다툰자는 꽃을 날려 너의 몸에 붙게 되리라.

 (꽃이 붙음은 유마경에 성문제자들 집착 때문에 꽃을 뗄수 없었다.)       [道竅談]



                                                           ㅡ 선가본경 명문당 

 

        

            





출처 : 천부동(天符洞)
글쓴이 : pinix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