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조로아스터 2017. 9. 28. 18:11

성묘교회 안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이 있고, 십자가에 매달린 곳이 있고, 십자가에서 내린 주검을 누인 곳도 있었다. 이뿐만 아니다. 예수가 묻혔다는 골고다의 동굴무덤도 그곳에 있었다. 사흘 만에 부활했다는 무덤 말이다. 그 앞에 기다란 줄이 있었다. 순례객들은 줄지어 서서 예수의 부활, 그 초월적 신비의 공간을 목격하고자 했다. 나도 그 줄에 섰다.

예수의 무덤동굴 앞에는 순례객들의 기다란 줄이 있었다. 다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차례를 기다렸다.


밖에서는 동굴이 보이지 않았다. 성지 중의 성지. 동굴을 안고 조그만 경당 같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그 안에 동굴무덤이 있었다. 안에서 한 사람이 나와야 그 다음 사람이 들어갈 수 있었다. 드디어 차례가 왔다. 건축물 안으로 들어서니 캄캄했다. 어둠 속에 촛불이 켜져 있었다.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돼 있었다.
무덤동굴을 품고서 작은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입구 위에는 부활한 예수의 성화가 걸려 있다.


공간은 무척 좁았다. 입구는 작고 낮았다. 그랬다. 2000년 전, 이곳에 예수의 주검이 있었다고 한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 구멍이 뚫린 채 피를 흘렸을 예수의 시신이 싸늘히 식은 채 여기에 눕혀져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예수의 동굴무덤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입구는 낮고 좁았다. 머리를 한껏 숙여야만 들어갈 수가 있었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금요일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질 무렵까지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금요일 오후 3시가 지나서 숨을 거두었다. 그렇다고 예수의 시신을 곧장 무덤으로 옮긴 건 아니었다. 사형수의 시신은 아무나 거둘 수가 없었다. 설령 가족이라 해도 말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을 수습하고자 애를 썼다. 잠시 후 해가 질 무렵이면 안식일이 시작될 참이었다. 상황은 다급했다. 안식일이 시작되면 시신을 들고 이리저리 다닐 수도 없었다.
루벤스 작 ‘무덤에 묻히는 예수’. 창에 찔린 예수의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당시 예수의 제자 중에 아리마태아 출신인 요셉이 있었다. 그는 유대 의회의 의원이었다. 꽤 힘을 쓰는 인물이었다. 요셉은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요청했다.(마가복음 15장42절) 빌라도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죽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박혀도 어떤 사형수는 고통 속에 1주일씩 버티기도 한다. 부하를 불러 예수의 죽음을 직접 확인한 빌라도는 시신을 내어주라고 명령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아마포로 감쌌다. 아마포(亞麻布)는 바람이 잘 통하는 여름용 직물이다. 리넨(Linen)으로도 부르는 ‘마’라고 보면 된다.
엘 그레코 작 ‘무덤에 묻히는 예수’.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을 안고 있고, 바닥에는 가시 면류관이 떨어져 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으로 옮겼다. 아마도 자신과 부인을 위해 미리 마련해 둔 무덤이었지 싶다. 예수의 시신을 옮길 당시 그곳은 ‘비어 있는 무덤’이었다. 성경에는 ‘요셉의 새 무덤’이라고 기록돼 있다. 요셉은 예수의 시신을 무덤에 넣고서 큰 돌로 입구를 막았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 예수의 제자들 중에 무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이는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이었다.
엘 그레코가 그린 또다른 작품 ‘무덤에 묻히는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돌로 된 석관이 보인다.


사실 ‘예수의 무덤이 진짜인가’는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다. 성묘교회 안에 있는 동굴무덤이 예수의 무덤이라는 과학적·역사적 근거는 약하다.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채택한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였다. 황제의 어머니 헬레라는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그녀는 그리스도교인이 된 뒤 유대 지역의 여러 성지를 순례했다. 그러다 지금의 성묘교회가 있는 자리를 둘러보다가 예수가 죽고 묻힌 곳이라 단정했다. 헬레나는 황제에게 청해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그것이 성묘교회다. 2세기에는 그 자리에 그리스신 아프로디테를 모시는 신전이 있었다고 한다.
성묘교회의 천장에 있는 돔을 내부에서 올려다 봤다. 이곳을 탈환하고자 유럽의 십자군과 이슬람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유대인 가이드는 “300년경에 이 일대에서 십자가 세 개가 발견됐다. 그 십자가들을 불치병에 걸린 여인에게 가져갔는데, 그 중 하나에 손을 대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래서 헬레나는 그 십자가를 예수의 십자가라고 봤다”고 말했다. 이 주위를 골고다 언덕이라고 판단한 것도 이런 식이었다. 그게 예수 사후 300년쯤의 일이다. 그러니 역사적ㆍ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지금의 성묘교회를 ‘예수의 무덤’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 밖에도 영국인 고든 장군이 발굴한 ‘동산 무덤(Garden Tomb)’이라는 곳이 예수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예루살렘 성 밖에 있는 ‘동산 무덤’에도 예수의 시신을 안치했다는 공간이 있다. 예수가 묻힌 곳은 정말 어디일까.
예수의 시신을 염했다고 전해지는 돌판. 순례객들은 그 앞에 엎드려 기도를 했다.


성묘교회 안에 있는 동굴무덤을 나왔다. 아르메니안 교회의 성직자들이 성가를 부르며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시신을 눕혔다는 돌 위에는 순례객들이 손을 얹거나 엎드려 기도하고 있었다. 과연 어디일까. 예수가 못 박힌 곳,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곳.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한 초월적 역사의 공간 말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물음이 올라왔다. ‘예수의 죽음은 무엇을 뜻하나. 예수의 부활은 또 무엇을 의미하나.’ 그 물음이 우리를 겨누고 있었다. 이제는 우리의 차례다. 거기에 답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가 여기에 묻히든, 저기에 묻히든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진정 어디일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가 묻힌 곳 말이다. 나는 그게 골고다라는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묻힌 곳, 그리고 되살아나는 곳. 그건 바로 ‘내 안’이다. 나의 가슴이다. 거기야말로 진정한 부활의 공간이다.
구스타브 도레 작 ‘무덤에 묻히는 예수’. 곁에서 여인들의 모습에서 슬픔이 묻어난다.


예수는 금요일 오후에 죽었다. 토요일은 안식일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얼마나 초조했을까. 제대로 된 장례도 치르지 못했다. 예수의 주검이 놓인 무덤을 얼마나 찾아가고 싶었을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안식일 계명을 지켰다. 토요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았다. 요즘으로 따지면 일요일 아침이었다. 예수가 묻힌 위치를 아는 이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등이었다. 그들은 날이 밝자마자 향료를 가지고 예수의 무덤으로 달려갔다. 궁금했다. 그들이 무덤에 들어섰을 때 무엇을 보았을까.
에두아르 마네 작 ‘죽은 예수님을 부축하는 두 천사’. 두 손과 두 발, 옆구리에 난 상처가 선명하다. 바닥의 바윗돌 밑으로 뱀이 기어간다.


4복음서에는 그들이 목격한 무덤 속 광경이 기록돼 있다. 『마가복음』에는 무덤 속에 예수의 시신은 없고, 하얗고 긴 겉옷을 입은 한 젊은이가 앉아 있다고 적혀 있다. 그 젊은이는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고 말했다. 『마태복음』에는 무덤에 천사가 나타나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다”고 말했다. 『누가복음』에는 ‘눈 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나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라고 되물었다. 위의 세 복음서에는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하자마자 천사 혹은 천사로 보이는 ‘웬 젊은이’가 등장한다.
외젠 뷔르낭(1850~1921) 작 ‘부활의 새벽에 무덤으로 달려가는 베드로와 성 요한’. 베드로의 시선의 사각의 그림 밖을 쳐다보고 있다. 작품 속에 예수의 모습을 담지 않고서도, 화가는 베드로의 시선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부활한 예수’를 그림 밖에 그려 놓았다. 오르세 미술관 소장.


4복음서 가운데 가장 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은 조금 다르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간 첫날 아침 어둑어둑할 때 무덤을 찾아갔다. 입구를 막은 돌은 이미 치워져 있었다. 텅 빈 무덤을 본 마리아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요한복음 20장2절)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달려갔다.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아마포는 놓여 있었고, 예수의 얼굴을 덮었던 수건은 한쪽에 개어져 있었다. 제자들은 그걸 본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렘브란트 작 ‘부활한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무덤에는 두 천사도 보인다.


『요한복음』의 서술은 담담하다. 거기에는 ‘텅 빈 무덤’만 기록돼 있다.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이 무덤을 찾아갔을 때 천사를 만났다는 내용은 없다. 그들이 무덤에 갔을 때 그곳은 이미 텅 빈 상태였다고만 적혀 있다. 비어있는 무덤을 확인하고 제자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막달라 마리아만 그곳에 남았다. 그녀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울면서 무덤 안을 봤더니 두 천사가 앉아 있었다고 한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들과 좀 다르다. 천사의 등장에 약간의 시차가 있다.
이탈리아의 빼어난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1488~1576) 작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난 부활한 그리스도’.


나는 궁금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부활’을 어떻게 봤을까.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남긴 역사서에는 그에 대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죽음 후 부활을 이미 믿고 있었다. 예수의 죽음과 상관없이 말이다. 예수가 죽기도 전에 말이다. 반면 유대 성전의 사제들인 사두개인들은 달랐다. 그들은 현세적이었고, 사후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죽은 뒤에 육신이 땅에 묻히고, 원죄로 인해 일정한 기간 썩다가, 죽기 전의 몸과 동일한 원소로 이루어진 몸에 하느님이 생명을 불어넣는다’(요세푸스의 『음부론』)고 믿었다. 그게 예수 당시 바리새인들의 상식적 사후관(死後觀)이었다.
성묘교회의 예수 무덤에 그려져 있는 ‘부활한 예수’의 그림.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몸이 일종의 종자(씨앗)라고 여겼다. 몸이 썩어서 흙과 섞인 뒤에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음성으로 인해 싹이 트면 다시 일어나 불멸의 존재가 된다고 생각했다. 마치 녹았다가 ‘재형성되기 위해 도공의 화로에 던져진 것처럼’ ’(요세푸스의 『음부론』)말이다. 그게 당시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시선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은 그들에게 ‘예정된 일’이었을까. 더구나 예수는 생전에 스스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러니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하늘나라 사람이다.
놀랍게도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은 이러이러하고, 천국 사람은 저러저러하다’는 나름의 그림과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천국은 잠도 없고, 슬픔도 없고, 타락도 없고, 걱정도 없는 곳이다. 시간으로 재는 낮과 밤도 없다. 해도 없고 달도 없다. (북극지방을) 회전하는 곰자리 별도 없고, 오리온자리 별도 없다. 또 천국 사람들은 바다 위를 쉽게 걸어다닌다. 풍랑을 만나 바다에서 죽을 일도 없다. 하늘에는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고,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찾기도 불가능하지 않게 된다. 땅은 어디나 경작이 가능하고, 수많은 열매가 저절로 맺는다. 동물도 새끼를 낳지 않고, 사람도 출생을 하지 않는다. 의인의 수는 항상 고정적이며, 수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게 예수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하던 천국이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천국 사람들은 바다 위를 걸어다닌다고 믿었다. 그림은 물 위를 걷는 예수와 물에 빠진 베드로.


천국의 사람은 바다 위를 걷고, 천국의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갈릴리 호수 위를 걸었던 예수처럼 말이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예수의 부활은 논쟁거리다. 특히 예수의 부활이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혼의 부활’인가를 따질 때는 더욱 그렇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이들은 나중에 천국에서 우리의 육신도 그렇게 부활할 것이라 믿는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그렇게 ‘육신의 부활’을 믿었다. 반면 예수의 부활이 ‘영혼의 부활’이라고 믿는 이들은 물음을 제기한다. “예수의 육신이 천 번, 만 번 되살아났다고 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 그건 예수의 부활일 뿐이지, 나의 부활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예수의 부활이 육신이 아닌 영혼의 부활이라면 어찌 될까. 모든 게 달라진다. 예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매순간 ‘부활의 가능성’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윌리엄 아돌프부게로 작 ‘무덤을 찾은 여인들’.


2000년 전의 예수, 지금의 예수, 2000년 후의 예수. 이 셋을 나는 달리 보지 않는다. 그들 예수는 모두 하나의 예수다. 왜 그럴까. 예수의 정체성은 육신이 아니라 속성에 있기 때문이다. 설령 골고다 언덕의 무덤 속에서 예수의 육신이 모조리 썩어버렸다고 하면 어떨까. 그럼 예수는 없어지는 걸까. 예수의 정체성도 덩달아 썩어버리는 걸까. 아니다. 예수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했다. 예수의 본질은 ‘신의 속성’이다. ‘신의 속성’은 소멸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더 정확하게 말한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 1장4~5절) 그렇다. 예수 안에는 빛이 있다. 그 빛이 바로 ‘신의 속성’이다. 그게 예수 안에 흐르는 생명이다. 그건 무너질 수가 없다. 소멸할 수도 없다. 그런 속성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우리들의 가슴, 그 아득한 내면에서 빛난다.
렘브란트 작 ‘엠마오의 저녁식사’.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있다. 제자들은 처음에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타까운 건 우리가 품은 어둠이다. 그로 인해 빛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도 빛은 꺼진 적이 없다. 단 한 순간도 말이다. 다만 우리 안의 어둠이 빛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그렇게 빛을 모르는 어둠이 따진다. “예수의 부활은 육신의 부활인가, 아니면 영혼의 부활인가.” 빛은 꺼진 적이 없는데도 우리만 그렇게 따진다. 어둠만 그렇게 따진다.
예수가 죽은 뒤에 제자들을 이 동굴에 모여 있었다. 문을 잠갔는데도 그들 앞에 부활한 예수가 나타났다. 지금은 이곳에 작은 교회가 세워져 있다.


예루살렘 성과 올리브 산의 중간쯤에 조그만 동굴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작은 경당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진 후에 제자들이 이 동굴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여기에 모여서 혹시 자신들을 잡으러 올지도 모르는 로마의 군인들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았을까. 또한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숨진 자신들의 스승 예수에 대한 죄책감과 연민으로 괴로워하고 있지 않았을까. 제자들은 문을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방에 예수가 들어왔다.(요한복음 20장19절) 예수의 첫 마디는 이랬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Peace to you!)”.
로버트 쥔트의 1877년 작 ‘엠마오 길을 걸으시다’.


부활하기 전에도, 부활한 뒤에도 예수는 변함이 없다. 똑같은 것을 제자들에게 건넸다. 다름 아닌 ‘평화’다. 두려움과 불안과 죄책감으로 파도치고 요동치는 제자들의 마음을 촤악 가라앉히는 한 마디. 그건 바로 ‘평화’다. 하느님 나라의 속성이다. 부활한 예수는 그 평화를 이루는 방법도 일러주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복음 20장23절)
그 자리에 예수의 제자 도마(토마스)는 없었다. 다른 제자들이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라고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카라바지오 작 ‘도마의 불신’.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던 도마가 직접 상처를 만져보고 있다.


여드레가 지났다. 제자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는데 예수가 들어왔다. 첫 마디는 똑같았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한 예수는 도마에게 말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말을 들은 도마가 말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가 도마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헨드릭 테르브루그헨 작 ‘의심하는 도마’.


비단 도마만 그럴까. 예수의 손에 뚫린 못 자국을 앞뒤로 살펴보고, 창에 찔렸던 옆구리에 깊숙이 손을 넣어보고 싶은 마음. 그게 비단 도마의 마음일까.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마음이다. 우리 안에서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의심이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도마에게 예수는 말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렇게 손을 넣고 나서야, 예수의 상처를 직접 만지고 나서야 도마는 의심을 무너뜨렸다. 그렇게 자신을 무너뜨렸다.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던 동굴 옆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무덤이 있다. 그곳에도 교회가 세워져 있다. 마리아가 묻혔던 석관이다. 관 위에 세워진 그림에는 죽은 마리아 주위에 서 있는 사도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는 늘 잡고 싶어한다. 붙들고 싶어한다. 거머쥐고 싶어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필요하다. 손에 잡히는 게 필요하다. 그렇게 꽉 거머쥘 때 우리는 비로소 “있다!”라고 말한다. “가졌다!”라고 말한다.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다르다. 그리스도는 다르다. 거머쥐면 거머쥘수록 멀어진다. 사라진다. 왜 그럴까. 거머쥐고자 하는 자체가 나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의심하고자 하는 자체가 나의 욕망인 까닭이다. 그런 욕망을 통해 예수를 만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나를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보지 않게 된다.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제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제임스 티소 작.


부활한 예수는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갔다. 호숫가에 숯불을 피우고 배에서 내리는 제자들을 위해 물고기를 구웠다. 나는 거기서 ‘기다리는 예수’를 본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모락모락 숯불을 피우며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예수다. 그건 우리 안의 어둠, 그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는 ‘신의 속성’이다.
올리브 산에서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며 파노라마 사진을 찍었다. 거기에는 역사 속의 예수, 성경 속의 예수가 있었다.


<끝>

그동안 애독해 주신 독자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 드립니다.

여러분의 성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지난해 1월부터 올해 2월초까지 연재한 ‘백성호의 현문우답/예수를 만나다’ 시리즈는 42회로 막을 내립니다.

3월부터는 ‘예수를 만나다’ 시리즈의 후속작으로 ‘붓다를 만나다’ 연재를 시작합니다.

“예수에 이어 ‘붓다를 만나다’를 읽고 싶다”는 독자분들의 요청이 많았습니다.

인도를 배경으로 붓다의 생애가 펼쳐집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조로아스터 2017. 9. 28. 18:09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는 빌라도 총독의 관저를 나섰다. 좁다란 골목길. 양옆에는 예수의 재판을 지켜보던 유대인들이 길을 가득 메웠을 터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예수를 향해 야유와 멸시를 쏟아냈다. 그 사이를 예수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십자가의 무게는 약 70㎏. 어른 한 사람 무게를 감당하기에 예수의 몸은 이미 상해 있었다. 동물의 뼈와 쇳조각이 달린 채찍이 몸에 박힐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갔을 터이다. 그런 피투성이 몸으로 예수는 십자가의 길을 떠났다.

안드레아 다 피렌체 작 ‘갈보리(골고다)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갈보리는 ‘골고다’를 뜻하는 라틴어의 영어식 표현이다.


나는 빌라도 총독의 관저 앞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발 밑의 돌들. ‘예수는 이 돌의 어딘가를 디뎠겠지. 한걸음, 또 한걸음. 그렇게 비틀대면서 걸었겠지.’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는 총독 관저 앞 골목의 모퉁이를 돌았다. 거기서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그가 누구였을까.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그녀는 10대의 나이에 예수를 가졌다. 성령의 힘으로 잉태하는 초월적 사건을 온몸으로 뚫고 왔다. 이제 그녀의 눈 앞에, 자신의 몸으로 낳은 자식이 서 있다. 아들의 어깨에는 십자가가 얹혀 있었다. 한두 시간만 흘러도 자식은 그 십자가에 매달릴 터이다. 사형장을 향해 걸어가는 아들. 그녀의 눈 앞에는 감당하기 힘든 비극적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어머니 마리아와 마주친 곳은 십자가의 길 제4처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울었겠지. 나는 ‘마리아의 눈물’을 묵상했다. 동양의 어머니든, 서양의 어머니든 똑같지 않을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사형장을 향해 발을 떼는 자식을 두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의 심정 말이다. 마리아의 어깨는 얼마나 들썩였을까. 마리아의 얼굴은 눈물로 젖었겠지. 그녀의 몸과 마음, 어디 하나 피눈물이 솟구치지 않는 곳이 있었을까.
당시 유대 여자들은 초경을 하는 나이가 되면 결혼을 했다. 마리아도 결혼적령기 때 배 속에 예수를 가졌다. 그러니 13~15세쯤 되지 않았을까.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30대 초반의 나이였다면 마리아는 40대 중반쯤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젊은 엄마’다. 그러니 미켈란젤로의 조각상 ‘피에타’에서 그려낸 젊은 마리아가 비현실적이라고만 말할 수도 없다. 40대 중반의 엄마가 십자가를 짊어진 30대 초반의 아들을 바라본다. 나는 골목 어귀에 서서 ‘그들의 눈’을 생각했다. 예수를 바라보는 마리아의 눈. 그런 마리아를 바라보는 예수의 눈. 서로의 눈에서 둘은 무엇을 읽었을까.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를 짊어진 아들 예수의 손을 잡고 있다.


예수는 말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마리아는 그런 예수를 이해하고 있었을까. 예수가 말하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그걸 깊이 깨닫고 있었을까. 그래서 간장을 끊어내는 아픔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아니면 마리아는 남들과 똑같은 엄마였을까. 자식의 죽음을 가슴에 묻어야 하는 엄마였을까. 사실 예수의 제자들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예수의 나라’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나는 마리아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비록 성령으로 잉태한 신비를 겪었다해도 말이다. 만약 마리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예수의 나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면, 성경에는 그에 대한 마리아의 말들이 몇 마디라도 기록돼 있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리아의 ‘평범한 아픔’에 더욱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 그럴까. 그런 아픔은 우리 모두가 갖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흘리는 눈물이고, 우리 모두가 토하는 비명이다. 그 모두를 우리와 공유하는 마리아가 내게는 더 살갑게 다가온다. 그래서 죽으러 가는 자식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가 내게는 ‘더 큰 마리아’로 다가온다.
예수의 주검을 안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술가들이 자주 다루었던 소재다. 미켈란젤로 작 ‘피에타’.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에는 모두 14처가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빌라도 법정이 제1처,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짊어진 곳이 제2처, 예수가 처음 쓰러진 곳이 제3처다. 그런 식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가 일화를 하나씩 남긴 곳마다 ‘처(處)’가 남아 있다.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십자가의 길’을 찾아왔다. 그리고 14처마다 걸음을 멈추고 기도를 했다.
손과 발, 옆구리에 상처가 있는 예수의 주검을 안고 있는 마리아.


예수가 마리아를 만났던 장소는 제4처다. 그 장소에는 아르메니안 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교회 지하층에는 모자이크로 된 신발이 있다. 마리아가 그곳에 서서 예수를 기다렸다는 일화가 전해내려온다. 교회 정문 위에는 예수와 마리아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를 짊어진 채 죽으러 가는 예수와 그런 자식의 손을 잡고서 무언가 말을 하려는 마리아다. 아무리 봐도 애틋하다. 나는 그 아래 서서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예수는 눈을 감고 있고, 마리아는 눈을 뜨고 있다. 예수는 가고 있고, 마리아는 붙들고 있다. 예수는 고요하고, 마리아는 요동친다.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슴도 요동친다.
불과 800m였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곳에서 못 박혀 숨진 곳까지 말이다. 직선거리는 고작 800m였다. 건장한 젊은이라면 한달음에 달려갈 거리였다. 그러나 그 길은 짧지 않았다. 14처 중에서 어느 한 곳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자신의 가슴을 무너뜨리지 않고서 지나칠 수 있는 곳은 없었다. 800m. 오히려 아득한 거리였다. 그건 ‘순간’에서 ‘영원’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진 채 걸어갔던 길. 오르막길 양옆에 팔레스타인 가게들이 있다.


평지가 아니었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걸었던 길 말이다. 골고다 언덕을 향해 약간씩 경사가 높아지는 오르막길이었다. 70㎏의 십자가를 짊어지면 경사는 더 가파르게 느껴졌을 터이다. 지금은 그 길이 예루살렘 성 안의 시장통을 통과한다. 길 양옆에 온갖 잡화를 파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그런 십자가의 길 중간중간 예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가 쓰러진 곳에 조그만 교회가 있다. 제단에는 쓰러진 예수의 모습과 이를 안타까이 지켜보는 천사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얼마나 무거웠을까. 지칠 대로 지친 예수는 ‘쿵!’하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직후의 장면이 누가복음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가다가, 시골에서 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어떤 키레네 사람을 붙잡아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님을 뒤따르게 하였다.’(누가복음 23장26절) 예수는 기진맥진했다. 로마의 병사가 아무리 채찍을 내려쳐도 다시 일어나 십자가를 짊어질 기력이 없었을 터이다. 결국 병사들은 시몬이라는 사람에게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게 했다. 예수는 그 뒤에서 비틀거리며 걸었으리라. 자신이 못박힐 나무 십자가를 앞세운 채 말이다. 그때가 아침이었다.
15세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예수가 향하던 목적지는 골고다 언덕이었다. ‘골고다’는 ‘해골터’라는 뜻이다. 당시 예루살렘의 사형장과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다. 이윽고 예수는 골고다에 도착했다. 로마 병사들은 예수에게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건넸다. 일종의 진통제였다. 예수는 맛만 본 뒤 이를 거절했다. 병사들은 땅바닥의 십자가 위에 예수를 눕혔다. 그리고 못을 박았다. 두 손과 두 발. ‘쾅! 쾅! 쾅!’ 못이 살을 관통할 때마다 예수는 고통에 겨워 이를 악물었으리라. 유대인 가이드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는 알몸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에 처해 지는 죄수의 옷을 모두 벗겼다. 예수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후대의 화가들이 차마 속옷도 걸치지 않은 예수의 알몸을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제임스 티소 작 ‘몰약과 담즙을 넣은 항아리’.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 예수는 진통제인 몰약과 담즙의 맛을 잠깐 보고서 마시기를 거절했다.


바로 그 장소에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스도교 성지 중의 성지다. 이 교회를 차지하려는 명분으로 유럽과 이슬람이 전쟁을 벌였다. 그게 십자군 전쟁이다. 나는 골고다 언덕 위에 선 성묘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예수의 손과 발에 못을 박은 장소가 나왔다. 바로 옆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곳이었다. 그곳에는 십자가 예수상이 있었다. 순례객들은 줄지어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땅은 모두 유리로 덮여 있었다. 오직 한 군데, 십자가 예수 앞에만 바닥에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그 구멍으로 깊숙이 손을 넣었다. 마치 내 안의 심연으로 두레박을 던지듯이 말이다. 그러자 땅이 만져졌다. 예수가 매달렸던 십자가의 땅, 2000년 전의 그 숨결이 손가락끝에 닿았다.
성묘교회 안에 있는 제단. 바로 이곳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렸고, 숨을 거두었다. 제단에는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상이 서 있다. 순례객들은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세계 각국에서 온 순례객들이 십자가상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가방에 있던 조그만 성경을 꺼내서 펼쳤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시각은 오전 9시였다. 마가복음(15장25절)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때는 아침 아홉 시였다’고 정확한 시각이 기록돼 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땅바닥에 있던 십자가가 똑바로 세워졌다. 그 순간 자신의 체중으로 인해 박힌 못이 손과 발의 뼈를 짓누른다. 때로는 뼈가 부러지기도 한다. 십자가형을 받는 이의 고통은 수십 배, 수백 배로 증폭된다.
플랑드르 화가 데니스 반 알스루트 작 ‘십자가 위의 예수’.


그런 고통을 겪으며 1주일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기도 한다. 그렇다고 쉬이 죽지도 못한다. 십자가 형에는 그 모든 고통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받은 날은 안식일 하루 전날이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보낸다. 안식일 당일에 십자가에 시신이 매달려 있는 것은 부정타는 일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가 일찍 숨을 거두게끔 다리를 부러뜨리기도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지 무려 여섯 시간이 흘렀다.
루벤스의 1627년 작 ‘십자가 위의 예수’. 예수는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박혀 있었다.


오후 3시쯤이었다. 예수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예수가 사용했던 언어, 아람어였다. 성경에는 이 대목이 아람어로 기록돼 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란 뜻이다. 그건 구약의 시편 22편에 등장하는 어구이기도 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듯이 예수는 시편을 줄줄 외우고 있었을 터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 대목을 읊었을까. 그것도 절규하듯이 큰 소리로 외쳤을까. 혹자는 거기서 ‘원망’을 읽는다. 하늘을 향해 예수가 원망을 토해낸 것이라 말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오히려 거기서 ‘신을 품은 인간’을 본다. 그러한 ‘인간 예수’를 본다. 그런 절규는 비단 예수의 것만이 아니다. 우리도 하루에 수십 번씩 내뱉고 있는 외침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제임스 티소 작 ‘우리의 구세주가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 본 것’. 십자가의 예수를 다루었지만 정작 십자가와 예수는 등장하지 않는다. 예수의 관점에서 골고다 언덕을 그린 독특한 작품이다.


마더 데레사 수녀도 그랬다. 그녀가 생전에 썼던 편지에는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 ‘당신의 사랑이었던 저는 지금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저의 신앙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의 부름에 맹종한 저는 진정 실수를 한 것일까요’라는 구절이 담겨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더 데레사 수녀가 신을 부정했다”고 공격하기도 했다. 그게 아니다. “주여, 당신이 버리신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은 신의 속성과 하나됨을 체험한 이들이 내뱉는 고백이다. 그런 하나됨이 지속되지 않을 때 토해내는 아쉬움이다. 뒤집어 말하면 마더 데레사가 그만큼 ‘신의 속성’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는 반증이다. 하나됨에서 버림받음, 다시 버림받음에서 하나됨을 되풀이하는 이들이 쏟아내는 일종의 절규이자 찬사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런 절규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일까. 아니다. 굳이 하나됨을 붙들지 않아도 항상 하나임을 깨닫는다면 그런 ‘절규’조차 사라진다. 내가 눈을 감는 순간에도, 내가 눈을 뜨는 순간에도 ‘신의 속성’이 언제나 내 안에 거함을 깨닫는다면 말이다.
제임스 티소 작 ‘예수의 죽음’.


예수의 외침을 듣고서 유대인들은 말했다. “저것 봐! 엘리야를 부르네”(마가복음 15장35절) 주위에 있던 병사들이 해면에 신포도주를 적셔서 예수에게 마시게 했다. 옆에 있던 사람은 그 순간에도 예수를 시험했다. “가만,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해 주나 봅시다.”(마태복음 27장49절) 신포도주를 마신 예수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지상에서 육신을 가진 예수가 던진 마지막 한마디였다. “다 이루어졌다.”(요한복음 19장30절) 이 말끝에 예수의 고개는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마지막 한 마디였다. 어찌보면 예수의 유언이다. “다 이루어졌다.”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teleo(텔레오)’라는 단어를 썼다. ‘마치다(finish)’ ‘이룩하다(accomplish)’란 뜻도 있고, ‘정착하다, 자리를 잡다(settle)’란 뜻도 있다. 흔히 이 구절을 예수가 이 땅에 와서 주어진 사명을 완수한 의미로 풀이한다. 나는 그런 해석에 동의한다. 동시에 ‘settle(정착하다)’이란 뜻에도 각별히 주목한다. 예수가 “텔레오”라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며 정착한 곳은 어디일까. 그렇게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린 곳은 어디일까. 나는 거기서 예수가 신을 품는 광경, 또한 신이 예수를 품는 광경을 본다. 신의 속성. 그 영원한 평화, 창조의 근원으로 자리를 잡는 예수를 본다.
골고다 언덕에 있는 성묘교회. 예수는 그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끝없이 뻗는 가로와 끝없이 뻗는 세로. 영원히 만날 것 같지 않은 둘이 만난다. 딱 한 번 만난다. 거기가 바로 십자가다. 신과 인간도 그렇게 만난다. 예수가 못박힌 곳.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신과 인간이 만난다. 인간과 신이 만난다. 둘이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럼 우리도 그렇게 사형을 당해야 하나? 그래야만 우리도 신을 만날 수 있나?” 그게 아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다. 그리하지 않는 이는 자신의 제자가 아니라고 했다. 십자가가 뭘까. 그게 과연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 위에만 있는 것일까. 아니다. 소소하고 번잡한 우리의 일상 속에 그런 십자가가 숨어 있다. 내가 꺾지 못하는 나의 고집, 나의 잣대, 나의 욕망이 바로 내가 짊어질 십자가다.
성묘교회 지붕 위의 십자가. 2000년 전 이곳에 예수의 십자가가 있었다.


고집이 뭔가. 꺾고 싶지 않은 나의 욕망이다. 잣대가 뭔가. 꺾고 싶지 않은 나의 틀이다. 누구도 원치 않는다. 그게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 고집이 무너지고, 잣대가 무너지면 마치 내가 죽을 것만 같다. 그래서 싫다. 죽도록 싫다. 그게 바로 십자가다. 내가 짊어질 십자가다. 그래서 쉽지 않다.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이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예수는 왜 십자가를 짊어졌을까. 그건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무엇을 통과해야 하는지 길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 길을 통해 사람들은 비로소 자신의 고집을 녹이고, 잣대를 녹이고, 욕망을 녹인다. 그게 바로 ‘죄사함’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 거기에는 대전제가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처럼 못박히는 ‘나의 십자가 죽음’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래야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된다. 나와 예수가 하나가 된다. 요즘은 이 과정이 종종 생략된다. 예수만 죽고 나는 산다. 예수가 죽었으니 나는 굳이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에게만 십자가가 필요하지, 내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고 말한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이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
엘 그레코 작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지금도 예수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의미를 묻는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성경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고 기록돼 있다. 로마 병사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의 죽음을 확인했다. 예수 양옆에 매달린 죄수들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가 이미 숨진 것을 확인한 병사는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 대신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성묘교회의 바닥에는 붉은 돌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이 무릎을 꿇고 그 돌에 손을 얹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눕혔던 돌이다. 2000년 전 바로 이 돌 위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예수의 주검이 놓였다고 한다. 나는 순례객들 틈에 끼어서 무릎을 꿇었다. 그 돌에 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숨이 끓어진 예수의 육신도 이처럼 차가웠을까. 그렇게 차가워진 예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마리아는 또 한번 눈물을 흘렸을까.
루벤스 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예수 당시 유대인의 장례풍습에는 일종의 ‘상여’가 있었다. 시신을 들것 위에 노출된 채로 놓거나 관에 넣어 뚜껑을 연 채로 운반했다. 여인들이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섰다. 유대인들은 선악과를 먹은 이브가 이 세상에 죽음을 처음으로 끌어들였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례 행렬의 선두에도 여자들이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상여를 매는 일을 큰 덕을 쌓는 것이라 여겼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상여를 맬 수 있도록 자주 교체했다.
예수의 죽음에는 그런 상여도 없었다. 신을 모독한 죄수의 죽음이기에 더욱 그랬다. 예수의 제자 중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있었다. 그는 부유했다. 그가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청한 뒤 허락을 받았다. 제자들은 시신을 아마포로 감싼 뒤 바위동굴 무덤으로 옮겼다. 무덤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았다. 성전 경비병들이 그 앞을 지켰다. 생전에 “내가 죽은 후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겠다”고 장담했던 예수의 말 때문이었다. 유대의 수석사제들과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내고서 되살아났다고 기만할 수 있다”며 무덤을 지키게 했다.
틴토레토 작 ‘그리스도의 매장’. 제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으로 옮기고 있다.


나는 그 무덤을 찾아갔다. 성묘교회 안에 그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는 기다란 순례객들의 줄이 있었다. 무덤 안은 대체 어떤 곳일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한 물리적 공간. 그 안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예수 부활에 담긴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앞에 늘어선 줄이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내 가슴도 덩달아 쿵닥거렸다.
성묘교회의 십자가상 앞에서 순례객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마지막회인 42회에서 계속됩니다>

 
 
 

백성호의 현문우답

조로아스터 2017. 9. 28. 18:07

예수는 제사장 가야파의 관저에서 심문을 받았다.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는 죽을 죄를 뒤집어 씌웠다. 사형선고였다. 그들은 예수를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고 갔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선고하고 집행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빌라도 총독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갔다. 그곳은 예루살렘 성의 동쪽 문인 다윗 게이트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좁다란 골목길, 바닥에는 돌들이 박혀 있었다. 2000년 전 로마 시대에 마차가 다녔던 길이었다.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1881년작 ‘이 사람을 보라’. 문카치가 그린 ‘예수 3부작’ 중 하나. ‘예수 3부작’은 1995년에서야 일반에 공개됐다.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유대를 다스리는 지사였다. 시리아 총독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군인 출신인 빌라도는 서기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의 행정장관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별로 없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56?~120?)가 쓴 연대기에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에게 처형당했다’는 대목이 남아 있다. 빌라도와 예수의 이름이 한 문장에 등장한다. 로마 시대에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군인들이 식민지의 총독이나 지사 등으로 부임하는 일이 흔했다.
빌라도는 평소 예루살렘에서 살지는 않았다. 사마리아 북서쪽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Caesarea)에 머물렀다. 유대 지사들이 주로 그랬다. 유월절을 맞아 마침 예루살렘의 관저에 내려와 있던 참이었다. 처음 취임할 때만 해도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정서를 무시했다. 유일신을 믿는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를 금한다.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은 황제를 종종 신으로 추대했다. 빌라도는 취임 후에 로마 황제의 얼굴을 그려넣은 깃발을 예루살렘 성 안으로 들여오는 문제로 큰 충돌을 빚었다. 유대인들에게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계명을 깨는 일이었다. 하느님을 만나는 신성한 성전이 있는 곳에 우상을 그린 깃발을 들여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항거했지만 결국 깃발은 성 안으로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빌라도는 기세등등했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화가 안토니오 치세리의 1871년작 ‘이 사람을 보라’.


예수가 끌려왔을 때는 사정이 좀 달랐다. 로마에 있던 빌라도의 정치적 후견인인 세야누스가 실각한 상태였다. 빌라도는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잡음’이 생기는 걸 바라지 않았다. 직속상관인 시리아 총독에게 시끄러운 일이 보고되는 것도 곤란했다. 제사장 가야파는 빌라도의 이런 처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빌라도의 관저 앞에서 눈을 감았다. 꼭 2000년 전이었다. 유월절 밤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예수는 올리브 산으로 이동했다가 체포됐다. 밤에 끌려와 새벽 내내 심문을 당했고, 이윽고 닭이 우는 아침이 됐다. 그러니 예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꼬박 밤을 새웠다. 더구나 가야파의 저택에서 극심한 조롱에 주먹질까지 당했다. 그러니 예수는 기진맥진한 상태였을 터이다. 빌라도 총독의 관저는 아침이 돼야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렸다. 복음서에는 ‘아침이 되자’(마태복음 27장1~2절) 예수를 결박해서 끌고 가 빌라도 총독에 넘겼다고 기록돼 있다.
골목 오른편이 빌라도 총독의 관저가 있던 곳이다. 골목길 왼편에는 예수가 재판을 받았던 빌라도 법정이 있었다.


유월절은 ‘모든 재앙이 지나가는’ 절기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부정 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유대교를 믿지 않는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일은 대표적으로 부정 타는 일이었다. 로마인 빌라도의 관저도 이방인의 집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만 빌라도 앞으로 들여보내고, 그들은 밖에서 빌라도를 응대했을 터이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섰다. 빌라도가 물었다.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마태복음 27장11절)
헝가리 화가 문카치의 ‘빌라도 앞에 선 예수’.


예수는 왜 그렇게 답했을까.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왜 ‘그건 너의 말’이라고 했을까. 그들의 생각과 예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는 ‘왕국’과 예수가 보는 ‘왕국’은 달랐다.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답변이 더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당신이 유대인들의 왕이오?”라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말해 준 것이냐?”(요한복음 18장34절)

이 말을 들은 빌라도의 표정이 어땠을까. 예수가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고 여기지 않았을까. 빌라도는 솔직하게 말했다. “나야 유대인이 아니지 않나? 당신의 동족과 수석 사제들이 당신을 나에게 넘긴 것이다. 당신은 무슨 일을 저질렀나?” 이 말을 듣고서 예수는 비로소 자신의 왕국과 빌라도가 묻는 왕국이 다름을 역설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대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복음 18장36절)
이탈리아 시에나 대성당의 제단화가였던 두초 디부오닌세냐(1255~1319)의 작품.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예수의 말을 빌라도 총독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 말이 빌라도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빌라도는 보지 못했다. ‘예수의 나라’를 보지 못했다. 그의 내면에 가득 찬 ‘신의 속성’을 보지 못했다. 빌라도의 눈에는 그저 초라하고 왜소한 갈릴리 출신의 한 젊은이가 서 있을 뿐이었다. 빌라도의 눈에는 이 땅의 왕국이 중요했다. 예수의 눈은 다르다. 이 땅의 왕국은 잠시 존재하다 사라질 뿐이다. 제아무리 큰 제국이라고 해도 결국 소멸하게 마련이다. 로마도 마찬가지다. 그런 왕국은 예수에게 속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수의 나라는 사라지려야 사라질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게 태초 이전부터 있었던 신의 속성이다.
빌라도는 초조해졌을까. 아니면 궁금해졌을까.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무튼 당신이 왕이라는 말 아니오?” 이 말을 듣고 예수는 자신이 이 땅에 온 이유를 설했다.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요한복음 18장37절)
예수는 빌라도의 면전에서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다”고 말했다.


누구나 ‘삶의 이유’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사는 이유를 간결하게 풀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I come into the world, that I should be testifying to the truth.)” 그랬다. 예수가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우리가 사는 땅으로 걸어 들어온 이유는 하나였다.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진리(眞理)가 뭘까. 진실한 이치다. 그걸 예수는 증언하고 증명했다.
몸이 묶인 채 재판을 받기 위해 끌려가는 예수를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예수의 증언은 세례 요한의 증언과 다르다. 세례 요한은 나침반이었다. 지팡이를 들어 진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예수는 달랐다. 자신의 가슴에서 진리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그게 왜 가능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예수 안에 진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내면이 ‘신의 속성’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그걸 꺼내서 보여주었다. 이어서 예수는 말했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듣는다.” 진리에 속한 이는 누구이고, 속하지 않은 이는 누구일까.
성경을 읽다 보면 간혹 갑갑할 때가 있다. 무언가 한 발짝 더 들어갈 필요를 느낄 때다. 예수가 말한 정확한 ‘워딩’이 궁금해질 때다. 그럴 때면 나는 종종 묵상을 했다. 그도 아니면 그리스어 성경을 펼쳤다. 성경은 처음에 그리스어로 기록됐다. 번역 과정을 덜 거친 예수의 ‘워딩’이 거기 어딘가 남아있으리라 보기 때문이다. ‘진리에 속한 이’는 그리스어로 ‘pas ho on ek tes aletheias’이다. 영어로는 ‘every the one-being out of the truth’다. 진리로부터 나온 모든 존재들이다.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이어지는 도로. 바닥에 보이는 큼직한 돌이 보인다. 로마 시대에 만든 마차가 다니던 주요 도로다.


요한복음의 첫 장은 말한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장3절) 모든 존재는 진리로부터 나왔다. 진리에서 나오지 않은 존재는 없다. 다시 말해 모든 존재는 ‘신의 속성’으로부터 나왔다. ‘신의 속성’에서 나오지 않은 존재는 없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실은 ‘진리에 속한 이들’이다. 그럼에도 빌라도는 몰랐다. 예수를 끌고 온 유대인들도 몰랐다. 그들이 진리에 속해 있음을 몰랐다. 왜 그랬을까. 그들은 왜 그걸 몰랐을까. 그들이 영원한 왕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사라지는 왕국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매몰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왕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빌라도는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오?” 일본의 가톨릭 문학가 엔도 슈사쿠는 소설 『예수의 생애』에서 빌라도의 이 물음을 조롱이나 비꼼으로 해석했다. 나는 달리 본다. 설사 그 말이 빌라도의 조롱일지라도, 그 속에는 빌라도의 절규가 녹아 있다. 그건 진리가 앞에 있어도 진리를 보지 못하는 이의 절규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비명’이다.
마네(1831-1883)의 작품 ‘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예수’.


그런 빌라도의 물음은 우리의 가슴에 박힌다. 고양이를 앞에 두고서도 “고양이가 무엇이오?”라고 묻고, 코끼리를 앞에 두고서도 “코끼리가 무엇이오?”라고 묻는 식이다. 우리는 교회에 가고, 성당에 가고, 성경을 펼쳐서 예수의 메시지를 만나다. 그러면서도 묻는다. “예수가 무엇이오?” “지금 어디에 있소?” 빌라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묻는다. 지금도 그렇게 묻는다.
유월절은 유대인에게 큰 절기다. 그런 축제 때마다 내려오는 하나의 풍습이 있었다. 군중이 원하는 죄수를 한 사람 풀어주는 일이었다. 일종의 특별 사면이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라빠라는 죄수가 있었다. 역사학자들은 바라빠를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해 로마에 맞서 싸우다 체포된 정치범으로 추정한다. 단순 강도가 아니었다. 빌라도는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 예수와 바라빠. 둘 중 하나는 살고, 나머지 하나는 죽어야 했다. “내가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오? 바라빠요? 아니면 메시아라고 하는 예수요?” 군중은 소리쳤다. “바라빠요!”
독일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마티스 그뤼네발트 작 ‘채찍질 당하는 예수’.


빌라도가 예수를 어떻게 할지를 묻자 군중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다. 나는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한 법정의 정문 앞 계단에 앉았다. 눈을 감았다. 2000년 전 아침 찬 공기를 뚫고 군중의 외침이 바로 이 자리에서 울렸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사람들은 손을 높이 쳐들고 그 말을 외쳤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왕국’을 택했다. ‘사라지는 왕국’을 택했다. ‘영원한 왕국’을 설했던 예수는 죽어야 했다. 서른이 갓 넘었을 나이. 갈릴리와 유대광야와 예루살렘을 누비며 아직도 ‘하느님 나라의 비밀과 신비’에 대해 풀어놓을 게 숱하게 많았을 사람. 참으로 귀한 사람이 그렇게 죽어야 했다.
빌라도 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고 있다. 카라바조 작.


빌라도의 법정 맞은편에 총독의 관저가 있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데리고 총독의 관저로 갔다. 거기서 예수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머리에는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씌웠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들게 했다. 왕의 옷과 왕의 관, 왕의 지팡이를 든 유대의 왕. 로마 군인들은 예수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예수의 머리를 때렸다. 십자가를 짊어지기 직전에 예수는 채찍질을 당했다. 채찍의 끝에는 동물의 뼈나 쇳조각이 달려 있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졌을 터이다.
로마의 군인들에 의해 예수가 채찍질을 당하는 장면을 그린 제임스 티소의 작품.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십자가의 길’이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곳을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라고 부른다. 세계 각국에서 순례객들이 찾아오는 슬픔의 길이다. 예수의 눈 앞에는 그 길이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이 찾아가는 빌라도 총독 관저의 뜰에는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하나 놓여 있었다. 무게는 약 70㎏이었다. 예수 당시에 사용하던 십자가의 무게라고 했다.
저걸 직접 짊어지면 어떤 느낌일까. 나는 허리를 숙이고 그 십자가를 짊어졌다. 무거웠다. 어른 한 사람을 업었을 때처럼 등이 눌렸다. 밤새 한숨도 못 자고, 신문과 재판을 받고, 조롱과 채찍질을 당한 예수였다. 그런 예수에게도 십자가 무게가 단지 70㎏이었을까. 아니다. 십자가에는 예수를 향한 유대인의 멸시와 조롱, 하느님 나라를 향한 세상의 외면. 그 외면으로 인한 예수의 고독이 함께 실렸을 터이다. 예수는 그토록 가혹한 무게를 짊어진 채 비틀거리며 총독의 관저를 나섰다. 나도 그 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뗐다.
‘비아 돌로로사’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짊어진 장소에서부터 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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