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와 관심/역사·문화 이해

물과바람 2007. 2. 26. 20:26

그러나 뒤로 돌아설 수도 없는 일본 수병들은 악귀같이 달려들었고, 조선 함포를 피한 몇몇 돌격선들이 접근에 성공하여 배 위로 왜병들이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때서야 비로소 이순신 제독은 중군기(中軍旗)와 초요기(招搖旗)를 세워 중군장 김응함에게 자신의 기함을 엄호하도록 지시하였다. 기함의 명령을 받은 중군장과 거제 현령 안위가 즉각 그들의 함선을 몰아 일본 함대 속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그 동안 일본군의 공격에 수비로만 일관하던 조선 수군이 마침내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소극적인 전법으로 공방전을 벌이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나머지 9척의 전함들은 여전히 기함의 명령을 주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전면에 나섰던 20여 척의 선봉 전함들이 모조리 격파되자 드디어 적의 대장선이 노출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배에는 깃대 꼭대기에 새의 날개가 꽂혀 있었고 붉은 기가 매달려 있었으며, 누각 주위는 푸른 장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다고 한다. 적장은 다락방 위에서 선봉 돌격 함대를 지휘하였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이 그의 기함을 빠르게 몰아 접근한 후 집중 함포 사격을 퍼부으니 일본의 대장선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적의 대장은 바다에 떨어지고 말았다. 기함의 병사 김을손이 적장을 끌어올려 보니, 그는 붉은 문양이 그려져 있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였다.

 

미치후사의 목은 즉각 기함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렸고, 멀리서 이를 본 일본 병사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상대적으로 조선 수군의 사기는 하늘을 지를 듯 충천하였다. 12시경에 시작된 해전은 어느새 3시간 정도 계속되었고, 북쪽으로 흐르던 물살도 서서히 바뀌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니 차츰 빨라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전진하려는 일본 군함들이 배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써 노 젓는데 노력을 집중하는 반면, 조선 함대는 물길을 따라 흐르면서 마음껏 적선을 공략하는데만 열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순신이 기다리던 공격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한 서해를 돌아 진격하려던 작전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만 하였다.

 
 

명량 해협은 일본군의 패잔선과 시체들로 뒤덮였고 이를 바라보는 대제독의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로써 이순신은 그에게 주어진 구국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내었다. 조국을 침략한 왜적들은 이제 곧 물러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참의 지원 없는 북진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평양 철수를 통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경험했던 일이다.

명량대첩! 이것은 확실히 인류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첩 중의 대첩이었다. 이 대첩을 통해 조선군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수 있었고, 반면에 그 동안 승승장구하던 왜군들은 스스로 남쪽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혹자는 조.일 7년 전쟁의 3대 대첩으로 여러 전투를 꼽고 있지만, 그 어떤 대첩도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은 이 명량대첩과 비교될 수가 없다.

 

나는 조선 해군의 역사를 그리면서 명량 해전을 끝으로 장식하였다.
사실 조.일 7년 전쟁 중 명량 해전 이후 진정한 해전은 없었다. 명량 해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하여 일본군의 수륙 병진책은 무너졌고, 서울 침공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일본군은 명량 해전 4-5일 후, 서울에서 불과 200리 떨어진 직산과 보은 지방에서 남해안으로 총퇴각하였다(1597년 9월 20일경).

 

더욱이 불가사의한 것은 이 대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의 손실이 단 한 척도 없었다는 점이다. 일본측이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낸 데 비하여 우리측 희생자는 불과 34명이었다. 물론 이 해전 이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명량 해전에서의 참패 쇼크로 인하여 일본의 대추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이미 조선에 들어와 있던 왜군들이 다시 제 나라로 되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이었으므로 결국 독안에 든 쥐를 잡기 위한 소탕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때때로 왜군의 발악적인 저항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있었고, 또 비열한 왕 이연이 구걸하여 끌어들인 무능한 명군(明軍)들이 거드름 피우며 건방지게 전쟁의 초점을 흐리게 만들었으나, 그 모든 것도 역시 명량 해전 이후 조선 정복의 야욕을 포기하고 퇴각하려는 일본군의 탈출 기도와 그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조선군의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

 

혹자는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제독이 전사했다고도 하고 전사를 가장한 자살이라고도 하며, 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고도 하여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의 생사 여부는 그의 신비스러운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살피는 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명량 해전을 통해 이순신은 제독으로서의 역량을 훌륭히 발휘하였고, 또 조국을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해 내었다. 그 이후에 일어났던 사건들은 모두 명량 해전의 영향일 뿐이다. 나는 노량 해전 역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노량 해전 역시 조선을 탈출하려는 왜군들에 대한 소탕전이었지, 결코 적을 격파하고 승리를 쟁취하겠다는 해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트라팔가 해전의 영웅 넬슨을 이순신에 비교하기도 하나, 이 따위 망발은 진정한 제독 이순신을 모욕하는 행위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어떤 제독도 스스로 배와 무기를 제조하고, 군병들을 모아 훈련시키고, 나아가 손수 농사를 지어 군량미까지 조달하면서 싸워 한 나라 국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대함대를 전멸시킨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
그는 진정한 조선 해군의 대제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