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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바람 2007. 3. 1. 13:05

민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명칭을 바꾼다느니 만다느니 옥신각신한다는데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그다지 큰 의미는 없겠고. 요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과연 흘러간 옛날이야기가 되었느냐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족에 대한 지나친 부정은.. 민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마찬가지로 ‘근대주의’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낡은 발상이라는 거다.

미(美) 보다는 힘을 숭배하고, 가치보다는 능률을 지향하고, 개인의 존엄보다는 집단의 질서를 강조하고, 수평적 소통보다는 수직적 계몽을 앞세우는 20세기의 낡은 발상일 수 있다.

민족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지나친 부정.. 둘이 멱살 잡고 싸우는데 그 싸움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변발을 잡고 30분 동안 씩씩거리면서도 좀처럼 결말을 내지 못하는 阿Q와 小Don의 싸움처럼.

그것이 교착이다. 타개해야 한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상은 변한다. 힘보다는 미(美), 능률보다는 가치, 집단의 질서보다는 개인의 존엄, 수직적 계몽보다는 수평적 소통의 시대로 간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 새롭게 의미 부여된 새로운 민족 개념으로 재정립될 뿐이다. 권위와 질서와 집단과 패권의 민족주의가 아니라 가치와 존엄과 소통과 미학의 민족주의가 대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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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것은 혈통이 아니다. ‘민족=핏줄’이라는 낡은 관념을 깨부숴야 한다. 단일민족의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민족은.. 언어와 문자와 문화와 종교와 관습이 어우러진 것이며 그 본질은 공동체의 의사결정 구조다. 세상이 천만번 바뀌어도 공동체의 의사결정 단위로서의 어떤 구심점은 남아있다.

중화민족이라고 말은 하지만 순수한 중국인은 없어졌다. 소수민족인 객가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인이라는 설도 있다. 지금은 미국이 인종의 용광로라지만 예전에는 중국이 민족의 용광로였던 것이다.

수많은 혈통이 섞여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의사결정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그것을 민족이라고 부르겠지만 유전자 추적을 해보면 민족=혈통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드러난다.

민족의 진정한 의미는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있다. 그것이 작으면 개인이고 나아가면 가족이고 마찰하면 부족이 되고 전쟁하면 민족이 된다. 마찰하고 전쟁하는 이유는 집단의 의사결정에 실패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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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전쟁이다. 왜 전쟁하는가? 의사결정에 실패해서이다. 왜 집단의 의사결정에 실패하는가? 어떻게 하면 마찰과 분쟁을 줄이고 집단의 의사결정에 성공할 수 있는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현실적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고민이 존재하는 한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집단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는 언어와 문자와 관습과 종교와 인종과 이념과 사상과 기타 여러 가지 문화적 코드들이 있다. 그리고 문학은, 그리고 예술은 바로 그 마찰과 분쟁의 아슬아슬한 지점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본질을 간과했을 때 문학은 죽는다. 집단 간에 분쟁이 있고 마찰이 있고 의사소통의 장벽이 있기 때문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예술가는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가에게는 국경이 없으니까.

민족을 폐기할 때 예술은 폐기된다. 문화는 폐기되고 공동체는 해체된다. 문학도 예술도 종교도 사상도 이념도 철학도 결국은 집단의 의사결정에 기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은 더 나은 형태의 민족으로 진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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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한족(漢族)은 과연 하나의 민족일까? 인종의 용광로를 자처하는 미국은? 어쨌든 그 사회에 주류의 흐름이 있고 그 흐름이 민족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민족을 넘어서도 민족의 역할은 존재한다.

그것은 형태를 바꿀 뿐 사라지지 않는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절묘하다. 한국인들에게는 지정학적 선점효과가 있다. 그 효과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격상될수록 부각된다. 한국에 미국 시민권자 10만 명 있다. 중국인 다음으로 미국인이 많다.

왜 미국인들이 10만 명씩이나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을까?(물론 대부분 교포다.) 한국이 미국보다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실질적인 기대효과가 있는 한 한국의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13억 중국에서 소설가로 데뷔하여 노벨상을 기대하느니 4천만 한국에서 도전하는 것이 승산이 있다. 바둑을 두어도 4천만 한국이 13억 중국에 밀리지 않는 데서 보듯이 작은 나라의 이점이 있다.

반대로 큰 나라의 이점도 있다. 어쨌든 한국보다 중국이 먼저 우주선을 쏘아 올렸으니까. 중요한 것은 각 나라의 특징이 있고 장점이 있고 단점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족은 소멸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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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주의는 인간의 사고를 획일화시켰다. 획일화 하려다 보니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세계주의가 더 중요했다. 왜? 이 논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상층부 1퍼센트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그들 엘리트는 유럽과 미국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모택동이 ‘청년들이여 세계는 그대들의 것이다.’ 하고 선언했을 때 세계의 많은 젊은이가 이 말에 감명을 받아 신천지를 찾아 고향을 등졌지만.. 세계의 주인이 된 그 청년은 모택동 자신이었다.

모택동과 체 게바라 외에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은 없다. 얼마 후에는 거기서 모택동의 이름도 지워지고 체 게바라 한 사람의 이름만 남을 것이다. 요즘 세계화 논쟁도 마찬가지다.

한해 400만 명이 해외여행을 한다. 한국인 전체 숫자의 1/10이다. 상위 10퍼센트만 세계화 되어 있다. 세계주의는 상위 10퍼센트의 엘리트를 위한 것이다. 문제는 그 10퍼센트가 사회를 지배한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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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을 밥 먹듯이 드나드는 상층부 1퍼센트에게 결정권을 위임하면 당연히 세계주의를 선택하고 민족주의를 폐기한다. 그들에게 국적이라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처음에는 극소수의 엘리트가 논쟁을 주도하지만 지금은 상층부 30퍼센트가 가담하고 있다. 그들 30퍼센트는 밥 먹듯이 일본과 미국과 프랑스를 드나드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다시 민족의 의미가 중요해진다. 세계주의와 민족주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폐기할 필요는 없다. 역학적으로는 충돌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충돌하지 않는다. 근대주의의 경직된 관념에서 벗어나면 충돌은 없다.

상층부 1~10퍼센트는 세계주의를 하면 되고 상위 30퍼센트는 민족주의를 하면 되고 나머지 70퍼센트는 빌어먹을 지역주의를 하든지 부족주의를 하든지 가족주의를 하든지 각자 알아서 할 일이다.

하여간 일본 조폭들이 극우를 하는 이유는 해외로 나가봤자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어차피 지들이 할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주의는 극소수 엘리트를 위한 가치이며 민족주의는 적어도 상층부 30퍼센트가 참여할 수 있는 가치다. 그런데 국가 간 경쟁은 결국 상층부 30퍼센트의 경쟁력에 의해서 승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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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만 해도 조선과 일본은 대등했다. 단 상층부 1퍼센트를 비교할 때 난학을 배운 일본의 상위 1퍼센트가 조선의 상위 1퍼센트보다 우월했다. 나머지 99퍼센트는 조선이 더 앞서 있었다.

조선인의 문자해독률이 일본인보다 뒤떨어지지 않았다. 조선인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고 조선인의 키가 더 컸고 조선인이 더 많이 교육받았고 조선의 평민이 일본의 농노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가졌다.

조선은 상층부 1퍼센트의 경쟁에서 일본에 밀린 것이다.

무엇인가? 거대한 변혁의 시기에는 상층부 1퍼센트의 경쟁력이 나라의 흥망을 좌우한다. 그러나 그다음 신문명의 확산기가 되면 상위 30퍼센트의 경쟁력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의 상위 30퍼센트는 서프라이즈가 움직이려 한다. 하위 70퍼센트는 조중동의 지배하에 길들어져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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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의사결정이다. 의사결정의 속도가 국가의 경쟁력이다. 최근 중국이 공자를 재평가하며 일부 유교주의로 되돌아갈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도 유교관행을 이용하여 집단의 의사결정을 빠르게 해보자는 것이다.

봉건사회는 두 가지 질서가 있었다. 하나는 사제계급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세계의 질서이고 하나는 귀족계급을 위주로 한 전제군주의 질서였다. 여기에 평민계급을 위주로 한 제3의 질서가 싹튼 것이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때로 반동적으로 혹은 패권적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그 반대로 저항적으로 혹은 진보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민족주의라는 버스는 그저 존재할 뿐인데 그 버스의 운전석을 진보가 차지하면 진보가 되고 수구가 차지하면 반동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물리적으로 실재하기 때문에 단지 이름을 바꾼다든가 혹은 형태를 변화시킬지언정 그 본질은 그대로 간다는 것이다.

그 본질은 무엇인가? 공동체의 의사결정구조다. 누구든 민족이라는 이름을 빌려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려는 것이다. 진보는 진보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수구는 수구대로 민족의 이름을 빌려 의사소통을 용이하게 하려고 한다.

그 이름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어떤 결정을 하든 민족이라는 이름은 그 의사소통의 속도를 앞당기는데 기여한다. 문제의 핵심을 바로 찔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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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만화가들이 만화를 그릴 때는 극우적인 내용을 담지 않는다. 자신의 만화가 아시아 각국에 번역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국 만화가들은 그 반대다. 어차피 일본에서 출판될 일은 없으니까.

이렇듯 민족의 문제는 구체적인 이해관계로 실재한다. 최근의 한류붐도 그렇다. 민족 간 기질의 차이가 없다면 한류는 애초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민족에 집착하면 반한류를 불러일으킨다.

선종불교와 신도 영향을 받은 일본은 소재가 다양하지만 대신 결말이 허무하다. 유교영향을 받은 한국은 진지하지만 대신 사고가 획일적이다. 도교 영향을 받은 중국은 스케일이 크지만 대신 황당하다.

일본이 아이디어를 내고 한국이 거기에 무게를 싣고 중국이 그 화려한 색채를 더하여 아시아 각국에서 상품화하는 구조는 계속된다.(주몽의 의상이 지나치게 화려해진 것도 중국의 영향이 아닐까. 어쨌든 황후화의 화려함은 연개소문 기죽이려는 의도처럼 보여진다.)

민족이 있기에 가능하다. 한국, 일본, 중국의 역할분담구조.. 이것이 민족문제의 역학적 교착을 미학적 소통으로 타개해 나가는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일본의 독도도발이 그렇고 중국의 동북공정이 그렇고 북한의 핵도발이 그렇듯이 민족단위의 문제가 실제로 존재한다. 현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하여간 버젓이 있는 것을 없다고 우겨서 안 된다.

민족.. 그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를 어떻게 잘 ‘제어’할 것이냐다. 제어의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 한다. 제어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지나친 집착 아니면 지나친 부정으로 흐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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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진지하고 일본은 허무하고 중국은 황당하고 미국은 썩었고 독일은 답답하고 영국은 싱겁고 프랑스는 알맹이가 빠졌고 이탈리아는 너절하고 스페인은 혼자 놀고 러시아는 머리와 몸통이 따로 논다.

당신이 이 말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마다 최적화된 형태의 의사결정 구조가 존재하며.. 거기에는 언어, 문자, 종교, 관습, 인구규모, 사상, 예술, 기질이 영향을 미치며 그 구조는 끝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통이다. 완성되지 않으면 소통되지 않는다. 각자 제 위치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한국은 한국풍을 완성하고 일본은 일본풍을 완성하고 중국은 중국풍을 완성할 때 진정한 소통은 가능하다.


ⓒ 김동렬 출처 : 서프라이즈   등록일 2007-2-27 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