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양 반구대(盤龜臺) 옛길의 휴식같은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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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2019. 7. 11.

7월 7일

티비 시청을 몰아서 하는 편입니다. 한국기행을 시청하는데 울주편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 얼라아부지도 한국기행 울주편을 시청하고 있었기에 다시 한 번 시청했습니다. 언양 장날이 2일과 7일이었기에 얼라아부지에게 7일날 울주에 가자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마음에 품고 있었던 반구대 암각화를 만나러 가며, 시간이 허락한다면 새해 일출의 명소인 강양항 낮 풍경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언양 시장도 당연히 가야지요.

 

아침 차릴까?

가면서 한 그릇 묵고 가지 뭐.

내비에 입력을 하니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습니다만 1시간 30분 정도는 되는 거리였습니다. 가본적이 있는 듯도 하며 첫길 같기도 한 도로를 달려 언양에 닿았습니다. 언양시장을 지나 반구대로를 달려 우회전을 하니 산길로 접어 들었습니다. 반구대는 넓은 하천에 있었는데 왜 산길로 갈까? 내비에 다시 입력을 했습니다. '반구대 주차장', 맞습니다.

 

주차장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주차차량 하나 없었으며 산중에 우리만 있는 듯 했습니다.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화장실 건물조차 이상하게 보여 바로 들어 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화장실 뒤로 건물이 한 채 있기도 했으며 주차장입구에는 안내소가 있었는데 작은 간판이 떨어져 나가긴 했지만 버스 정류장이 있기는 했습니다.

닫힌 문을 열고 화장실로 들어 가니 센스등이 켜졌으며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왜 마치 나가는 집마냥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두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반구대 암각화 주변 안내도입니다. 칡넝쿨을 뒤집어 썼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여기저기서 꽃을 피운 자귀나무였습니다. 자귀나무는 나무가 높아 꽃을 제대로 찍을 수 없는데 이건 어느 곳이나 비슷합니다.

 

 

마치 버스가 두 번호가 다니는 듯 하지만 304번을 왕복으로 표시해 두었습니다. 이런 버스정류장은 처음입니다. 율리에서 대곡박물관까지 운행합니다.

도로를 가만히 지켜보니 차량이 안쪽으로 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까지 거리가 먼 모양입니다. 주변을 봐도 물이 없었으니 더 깊은 곳으로 가야 川가 나올 모양입니다. 반구대에 가기까지 반구대 검색을 전혀 하지 않았는데 공영주차장에서 반구대 암각화까지 약 2.7km였습니다.

우리도 차를 타고 산길을 달렸습니다. 도로는 좁은 편이었으며 고요했고, '반구대 옛집'이라는 민박집인 듯 한 정원이 예쁜 집이 있기도 했지만 도로에 주차를 할 처지가 못 되었기에 반구대안길 마을에 주차를 했습니다.

 

 

마을 입구 좁은 공간에 주차를 한 후 걸었습니다. 마늘 석 접이 반겨주었습니다. 이어 몇 발자국을 더 걸으니 휴식같은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대곡천을 끼고 달렸을 수도 있겠지만 계곡은 아래에 있다보니 수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대곡천 위로 반고서원 유허비가 있으며, 옛길에는 반구서원과 집창정이 있습니다. 그 옛날 이 길은 장삿길, 과거길, 여행길이었을 겁니다.

장마철이지만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다보니 대곡천은 걸어서 건널 정도의 수량이었습니다. 혼자이고 싶었습니다.

 

 

아래를 보니 또 다른 풍경이었습니다. 첩첩산중에 완만한 계곡은 완만했으며 우리가 걷는 길은 반구대 옛길입니다.

 

 

산 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이 하천은 대곡천으로 '한국의 아름다운 100대 하천'에 이름을 올린 하천입니다.

 

 

반구서원(盤龜書院)입니다.

외삼문인 지의문(知義門)을 들어서면 '반구서원'이라는 편액이 걸린 강당이 있다고 하는데 문이 걸려 있어 까치발을 하여 담장안을 봤습니다.

반구서원은 1712년(숙종 38)에 언양지역 사림들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3현을 제향하기 위해 언양의 반구대 아래에 창건한 서원입니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현재의 서원은 1965년에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언양읍지(彦陽邑誌)에 따르면, 언양의 반구대는 고려 말 정몽주가 유배 온 곳이고, 조선조에 이언적이 경상도관찰사 재임 시 이곳에 머문 적이 있으며, 정구는 이곳에 이거하여 정착할 계획을 세운 곳이라 하여, 1712년에 언양 사림 이위, 김영하, 김지, 정태구, 박문상 등이 중심이 되어 반구대 아래에 반고서원(般皐書院)을 짓고, 이듬해 3현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반고(般皐)'라는 명칭은 정구가 간찰에 쓴 "언덕에 집을 지어 은거한다.[考槃在阿]"에서 따온 것인데, 반고서원은 후일 '반구서원(盤龜書院)'으로 개칭되었습니다.

 

 

 

 

반구대입니다.

흔히들 반구대 암각화라고들 하는데 반구대에는 암각화가 없으며, 암각화는 반구대에서 조금 더 밑에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라는 이름은 암각화가 반구대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편의상 그렇게 불린 것인데 고유명사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대곡리 암각화가 맞는 이름이라고 합니다.

반구대(盤龜臺)는 산세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정몽주는 울산의 산수 중 반구대와 작괘천을 최고로 쳤다고 하는데, 정몽주는 반구대 풍경에 반해 반구대 바위에 '포은대'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반구대를 포은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반구대를 지나 30분 정도 걸어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 반구대 암각화가 있습니다.

소나무속의 비각은 반고서원 유허비로, 서원이 훼철되자 1901년(광무 5)에 반구서원유허비를 세웠으며, 1905년에 비각(碑閣)을 지었는데 1965년에 사연댐이 축조되면서 서원이 수몰되자 유허비 등을 반구대 건너편으로 옮기고 서원은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되었다고 합니다.

 

 

 

반구서원옆에는 정자 집청정(集淸亭)이 있습니다.

문은 닫혀 있었으나 정자에는 남자 서너 명이 보였습니다.

집청정은 맑음을 모은다는 뜻이며, 18세기 조선 영조 때 운암 최신기가 지은 경주 최씨 문중의 정자입니다. 지금은 이 곳을 지역문인의 창작과 소통의 장, 그리고 예와 도를 배우는 장소로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한옥펜션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운암 최신기는 포은이 이곳을 찾음으로써 이름이 알려진 이곳의 명승이 천년토록 깊이 감추어진 것을 애석히 여겨서 이곳에 정자를 지어 別業과 학문을 갈고 닦을 장소로 확보했으며 집청정을 지은 뒤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습니다. 300년 전통의 한옥 집청청에서는 민박뿐만 아니라 어린이 전통예절학습, 전통염색체험등 다양한 학습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를 최초로 발견한 한학자 최경환 선생의 생가이기도 합니다.

 

 

 

 

반구서원과 집청정에서 내다보면 반구대와 함께 아래로 대곡천이 흐르고, 반구대를 잇는 풍광 또한 뛰어 나기에 옛사람이 아니더라도 마음에 오래 간직할 수 있는 풍경을 담아 올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왔던 길을 되돌아 조금 더 가면 반구대 갤러리가 있습니다.

갤러리 앞에는 서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돼 최종 등재를 앞두고 있는데, 반구대 암각화는 하류에 설치된 사연댐 영향으로 물에 잠겨 훼손이 심해지자 보존 방안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에 5만톤 시민댐 건설을 희망하는 서명운동입니다.

또 울산은 세계유산 등재 기원을 위해 유네스코 시민단(이하 시민단)을 꾸려 운영에 나서기로 했다고 합니다.
시민단은 총 250명으로 구성되며 대곡천 암각화의 유네스코 등재를 기원하는 울산시민이면 누구든지 동참 가능한데, 주요 역할은 대곡천 암각화군(천전리 각석~반구대 암각화)홍보 활동과 대곡천 암각화군 주변 환경 정화활동, 모니터링 등입니다.

울산시는 17일~26일까지 반구대암각화팀, 천전리각석팀, 역사사랑팀 등 3개 분야로 나눠 시민단을 공개모집한다고 합니다.

 

 

정선의 그림속 반구대와 현재의 반구대 비교입니다.

 

 

위에 있지만 반구대 사진을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반구대와 반구대 암각화가 다르다는 걸 이 글을 기록하면서 알게 되었으며 마침 풍경이 좋아 여러장의 사진을 가로와 세로로 찍었는데 이 바위가 반구대입니다.

 

 

반구대 옛길은 태화강 100리길이기도 합니다. 반구대암각화까지 1.2km 남았습니다.

 

 

대곡천은 탑골샘에서 발원하는 태화강 중상류의 일부이며, 대곡천변은 거대한 역사문화박물관입니다.13곳의 중생대 공룡발자국 화석은 지질시대의 유산이고,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의 유적이며, '울주 천전리각석'의 암각화와 명문은 선사유적과 신라 왕실 사람들과 화랑들의 기록들이며, 물에 잠긴 대곡호에서는 청동기시대부터 형성되었던 천여 기의 고분에서 수많은 유물들을 수습하기도 했습니다. 암각화 주변 안내도를 보면 여러 기의 가마터 유적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사연댐 건설로 울산의 오지가 된 한실마을이 있습니다.

 

울주 '대곡리 연로개수기(大谷里 硯路改修記)'입니다.

대곡천(大谷川) 가장자리의 바위 면에 새겨진 일종의 마애기(磨崖記)로 훼손이 심한 편입니다.

'연로개수기'는 벼랑길을 드나들던 옛사람들의 기록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남긴 자국들입니다. 지금보다 거친 삶이었겠지만 옛사람에게는 향기가 납니다.

연로(硯路)는 벼루길이라는 뜻으로 1655년 이전에 이 곳 길이 개설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이 일대 바위는 슬레이트처럼 편편하게 갈라져 벼루의 재료로도 쓰이는 점판암이라고 하니 벼룻길이라는 옛 이름이 우연은 아닌 듯 합니다.

바위에 새긴 낙서같은 이것들은 연대와 당시의 문화를 미래인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낯선 들꽃을 만나기도 했고 가끔은 하늘을 보기도 하며 걷다보니 배롱나무꽃이 막 피기시작하는 곳에 나무 다리가 있었습니다. 현재와 과거를 이어주는 다리는 초록터널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다리를 건너면 곧 반구대 암각화가 나올 듯 했는데 대나무숲 아래에는 공룡박자국이 있었습니다.

 

 

이곳의 공룡발자국 화석은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살았던 공룡들의 흔적으로 보인다고 하며,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13호입니다.

 

 

 

공룡발자국 바위에서 하천을 보니 수려함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이제 400m남았습니다.

 

 

대곡천의 산수도 좋았지만 조용히 흔들리는 개망초가 끌었습니다. 이곳은 집터인 듯 자주달개비가 피어 있었습니다. 자주달개비는 야생이 아닌걸로 알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많은 방사선에 노출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자주달개비는 방사선에 민감하여 일정량 이상의 방사선에 노출되면 돌연변이가 일어나 꽃잎 또는 수술이 분홍색으로 변하게 된다고 합니다. 식물체를 통해 환경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는 식물을 지표식물이라고 하는데 자주달개비가 방사선에 대한 지표식물입니다.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고개는 연신 좌우를 살폈습니다. 무덤주변에도 개망초가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개망초꽃은 꽃의 생김도 얌전하지만 흔들리는 모습도 얌전하며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얼라아부지도 개망초꽃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버드나무군락입니다.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수목의 생명을 죄는 칡도 많았습니다.

 

 

초록단풍나무 아래를 지나니 헐벗은 나무가 있었습니다. 벼락맞은 나무랍니다.

 

 

벼락맞은 나무에 생명이 둘러쳐집니다. 등나무였는데 이 숲에는 등나무가 유독 많았습니다. 등꽃이 피는 봄에 이 길을 걷노라면 향기와 풍경에 걸음이 많이 느려질 것 같았습니다.

 

 

공룡화석에서의 400m 끝, 반구대 암각화가 펼쳐져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