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 유배지 남해 노도와 유배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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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가본 곳

2020. 5. 12.

4월 30일

우리나라에는 많은 섬이 있는데, 많은 섬들이 조선시대때 유배지였습니다. 경남 남해군은 대표적인 유배지로 유배문학관이 있기도 하며, 서포 김만중(1637년. 인조 15 ~ 1692년. 숙종 18)의 유배지인 노도는 남해 7경에 지정되어 있기도 합니다.

노도는 섬에서 바라보는 금산의 절경과 앵강만의 풍광 못지 않게 구운몽과 사씨남정기의 작가 서포 김만중이 56세의 일기로 유형의 삶을 마감했던 곳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노도로 가는 도선이 있는 벽련(碧蓮)마을은 이곳 사람들은 벽짝개라 부르지만 이정표는 벽련항이며 마을 바로 앞 삿갓처럼 생긴 섬이 바로 노도입니다.

노도는 경상남도 남해군 이동면에 딸린 섬으로, 면적 0.41km2, 해안선 길이 3.13km, 인구는 9가구 18명으로 남해군 상주면 벽련포구에서 1.2km 떨어진 섬으로 벽련항에서 도선으로 약 10분 정도 걸렸습니다.

노도는 예부터 배젖는 노(櫓)를 만드는데 쓰이던 목재를 많이 생산해서 노도(櫓島)라 유래되어서 노도(櫓島)라 부르며, 마치 삿갓이 바다에 떠있는 것 같다 하여 삿갓섬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노도에는 서포선생이 직접 팠다는 샘터와 초옥터, 그리고 허묘가 남아 그의 자리를 쓸쓸히 메우고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조선 후기 정치가, 문신, 효자로서, 소설가로서, 한글애호가로서 한시대를 풍미한 대문호로 고뇌스런 일생과 함께 서려 있는 남해의 작은 섬 노도는 유배문학의 산실이다라고 하지만 직접 가본 노도는 부분 넘치기도 했지만 미흡한 점도 있었습니다. 

 

남해는 서포 김만중 외에도 기묘사회로 유배당한 자암 김구 선생이 13년간의 기나긴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기도 하며, 조선 4대 서예가로 불리는 자암선생은 남해를 찬양하는 경기체가 '화전별곡'을 그의 배소 노량에서 지었습니다.

남해는 이 외에도 주로 금산을 노래한 한시를 많이 남긴 남구만, '남천잡록'의 저자 김용 등 많은 유배객이 다녀간 곳이기도 합니다.

서포밥상에서 식사를 든든히 한 후 도선을 탔습니다.

 

 

 

벽련마을이 멀어지며 노도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노도 선착장입니다. 노도 문학의 섬 조형물에는 한글이 새겨져 있었으며 서포 선생도 있었습니다.

노도 선착장은 섬의 북쪽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도 북쪽 구릉지에 형성되어 있는데 바람때문입니다.

 

 

 

선착장에 내리면 문학의 섬 비가 있고 몇 발자국 걸으면 서포 김만중 선생 유허비가 있으며, 그 옆으로 마을쉼터와 도선 대합실이 있습니다.

 

 

4월 마지막날이었지만 지지 못 한 동백이 붉게 달려 있었으며 유허비 주변에는 봄 들꽃이 흐드러졌습니다.

 

 

대합실옆의 경사로를 따라 걸으면 서포 초옥과 문학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경사로가 급했기에 벌써 숨이 찼지만 노도호에서 함께 도착한 일행(?)의 뒤를 열심히 쫒았습니다.

 

 

서포초옥 반대편으로 가면 작가창작실이 있다기에 혼자 가다 다시 뒤돌아 일행을 쫒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보는 식물과 들꽃에 마음을 빼앗겨 우리는 너무 멀어졌습니다.

 

 

 

9가구가 구릉에 형성되어 있다보니 밭도 경사가 심했지만 주민들은 알뜰히 농작물을 재배하고 있었습니다. 남해 본섬이 보이지만 육지인듯 섬인듯 알 수 없는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오래된 팽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가 한 그루 바다위에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 나무는 노도에서의 서포 선생의 생활을 기억할 수 있을 듯 했습니다.

 

 

산자락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은 황토색이었지만 진짜 황토는 아니었는데 황토시멘트 정도라고 할까요. 여느 여행지와 마찬가지로 옛 길을 현대가 씌웠습니다. 흙길도 좋고 자갈길이라도 좋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얼라아부지는 중간중간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또 금방 멀어졌습니다. 노도에서 자생하는 식물을 찍다보니 자꾸 멀어진 겁니다. 길에는 나뭇잎이 떨어져 있었으며 고라니의 흔적도 있었습니다.

 

 

한구비를 넘은 것 같습니다. 건너편에 또 섬인듯 육지인듯 한 산이 나타났으며 마을이 보였습니다.

 

 

동백나무 군락을 따라 아랫길로 갔습니다. 동백은 오래된 동백이 있는가하며 수령이 얼마되지 않은 동백도 있었습니다. 문학의 섬으로 꾸미면서 식재한 모양입니다.

 

 

동백군락 끝에는 갯바위가 나타났습니다. 어쩌면 서포 선생이 낚시를 즐겼다면 여기즘에서 낚시를 했을만한 풍경이었습니다.

 

 

되돌아 올라오니 언덕위에 김만중 문학관이 있었으며 가는 길에 이팝나무꽃이 하얗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화살나무가 울타리로 식재되어 있었습니다. 화살나무의 꽃은 연두색이며 열매는 붉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이었다보니 문학관의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아쉬웠습니다.

 

 

문학관 앞쪽에 우물이 있었습니다만 우물은 관리가 되지 않아 낙엽과 도롱뇽알이 엉겨있었습니다. 남해도 물이 귀했을 것이며 더 먼 노도는 물이 더 귀했을 겁니다. 서포선생이 계시다면 이렇게 두고 있지는 않았겠지요.

 

 

정스런 이가 밟히지 않도록 동백꽃을 바위위에 올려 두었습니다. 동백꽃은 통으로 떨어지다보니 동백꽃이 핀 곳에 가면 대부분 이런 풍경을 만날수 있지만 선뜻 나서서 만들지는 못 하는 풍경입니다.

 

 

서포초옥입니다. 드라마 세트장같았기에 당황했습니다.

자로 잰 듯 그린 듯 그랬습니다.

나보다 더 까칠한 얼라아부지가 막 뭐라고 했습니다. 복원을 제대로 한 게 맞긴 맞냐면서요.

 

 

 

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가지고 온 서포초옥의 옛모습입니다. 남해 유배문학관 마당에 있는 초옥과 비슷합니다. 돌길과 자갈마당이 정겨운데 지금은 영 아닌듯 했습니다.

 

 

도선에 약 20여명이 탔었으며 노도 주민이 있기도 했으니 15명 정도가 노도 여행객이었을 겁니다. 모두 앞서가고 얼라아부지가 저를 기다려 가끔 함께 걸었지만 또 벌어지고 있습니다.

중간중간 이정표가 있었지만 노도를 다 둘러보려니 땀이 자꾸 났습니다.

 

 

이제 거의 정상에 다 온 듯 했습니다. 생태연못이 있으며 구운몽, 사씨남정기 야외전시장 부근입니다.

 

 

생태연못 주변에는 수국이 식재되어 있었으며 붓꽃이 꽃잎을 열고 있었고 발아래 잔디는 씨앗을 맺고 있었습니다.

구운몽 전시장입니다.

김만중은 그의 생애 중 세 번에 걸쳐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강원도 금성과 평안도 선천에 이어 노도가 그의 마지막 유배지였습니다. 구운몽은 그가 선천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작품이라고 하며, 사씨남정기는 마지막 유배지인 남해 노도에서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서포 선생은 귀양지 선천에서 어머니의 소일거리로 '구운몽'을 지어 보냈습니다. 서포 선생은 유배지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들었습니다.

그는 유복자였으니 유배지에서 들은 모친상에 가슴이 미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어머님이 그립다는 말을 쓰려고 하니/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이미 흥건하구나"라며, '어머니를 그리면서'라는 시를 썼습니다. '서포'라는 그의 호는 이때 귀양 가서 지낸 곳의 지명에서 딴 것이라고 합니다.

한글을 사랑했고 지극한 효자인 서포의 구운몽은 한문본과 한글본이 모두 전하는데,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아직도 학계에서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구운몽 야외전시장에는 구운몽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설명이 있었습니다.

* 구운몽 줄거리는 검색을 해 보셔요. 

 

 

 

생태연못 윗쪽에는 사씨남정기 야외전시장과 정자가 있습니다.

 

 

드라마 장희빈을 보면 김춘택이 남해에서 사씨남정기를 도성에 반입하여 인현왕후의 복위를 꾀하며 미나리요 민요를 아이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숙종도 사씨남정기를 읽고 자신이 희빈 장씨에게 눈이 멀어 인현왕후를 대궐 밖으로 쫓아낸 일을 후회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중전으로 복위되었습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일세
철을 잃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으니
제 철 가면 어이 놀까
제 철 가면 어이 놀까.

 

사씨남정기 야외전시장에도 조형물과 설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덜꿩나무에 발목이 잡혀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 덜꿩나무는 나중에 따로 올릴 예정입니다.

 

 

벽련항에서 아득하더니 소치도가 발아래에 있었는데 노도에서 보니 조금 가까워졌습니다.

 

 

사씨남정기 야외전시장을 오르다 아래를 보면 생태연못과 주변의 바다가 보이며 역시 소치도가 보입니다.

 

 

문제의 덜꿩나무 꽃인데 울타리로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전망정자에서 본 앵강만을 사이에 두고 남해 본섬이 보이며 산허리에 도로가 있습니다.

 

 

정자에서 잠시 쉬었다 돌아 오는 길입니다. 저 하얀꽃이 무슨 꽃일까?

텃밭 울 너머에 있는 꽃같다고 했습니다. 하얀 꽃은 비슷한 가막살이나 덜꿩나무의 꽃인데 울을 너머 가서 만난적이 없기에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함께 노도로 왔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포 초옥을 지나면서 또 복원이 잘못되었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고은의 그꽃처럼 올라갈때 못 본 서포의 허묘 안내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얼라아부지는 문학관으로 가는 길에 들렸는데 아무것도 볼게 없으니 그냥 가자고 했지만 200여개의 돌계단을 기어코 올랐습니다.

 

 

돌계단은 이렇게 두 개였습니다.

숨이 턱에 닿았습니다.

 

 

허묘는 돌을 둥글게 놓아두었으며 앞쪽에 남해 청년회의소에서 세웠다는 안내가 있었습니다. 남해 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가묘가 있습니다. 그 가묘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형태가 있을 줄 알았는데 허무했습니다.

 

 

 

끝도 보이지 않는 계단을 다시 내려 왔습니다. 때로는 뛰고 때로는 앉아 들꽃과 눈맞춤도 했지요.

 

 

오를 때 못 간 작가창작실이 멀리 보였습니다. 가까운 듯 하지만 걸으려고 하니 멀었기에 그만두었는데 역시 그만두었습니다. 오를 때 보이지 않던 마을 주민들이 보였습니다.

 

 

울안인지 울밖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텃밭에는 하얀완두콩이 피어 있었으며, 참다래나무도 많이 있었습니다.

 

 

대합실앞에서 노도호 선장님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타기로 한 2시 도선이 노도를 떠나 벽련항으로 갔다가 다시 노도로 들어 왔다고 했습니다.

오후 2시 45분이라고 했습니다. 휴대폰을 바구니에 담아 두었더니 섬을 일주하면서 시간을 한 번도 확인을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된 줄 몰랐습니다. 1시간 15분 후에 노도호가 노도를 출발합니다.

 

 

오후 4시 도선을 타고 나와 물건리로 가자는 걸 유배문학관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남해 유배문학관 출입구앞에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있으며, 구운몽호와 서포초옥도 있습니다.

문학관은 코로나19로 임시 휴관이었습니다.

서포 김만중 선생 양쪽으로 남해로 유배 온 이이명과 남구만의 약력도 있습니다.

 

 

 

 

노도에서 만난 서포초옥과 다른 서포초옥입니다. 남해군 문화관광과에서 가지고 온 사진의 초옥과 비슷합니다. 젊은이가 서포선생과 사진을 찍고 있었기에 저도 함께 찍었습니다.

초옥 마당에는 역시 남해로 유배온 이이명 선생을 기리는 비가 있습니다.

 

 

 

2013년 10월 5일의 풍경입니다.

유배문학관 뜰에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초옥과 구운몽호가 있기도 합니다.

 

 

 

당시 문화해설사께서 설명을 해 주었는데, 갱블 팸투어였으며, 현 박종훈 경남 교육감은 이동도서관 버스를 유배문학관 뜰에서 운영하다가 우리와 함께 설명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19로 문학관 관람이 불가하지만 유배문학관에는 남해의 섬생활과 유배에 관한 많은 것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형벌 등의 체험이 가능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육지에서 남해로 가는 다리가 여럿 있지만 당시에는 외딴섬으로 경남에서는 남해가 가장 먼 유배지였던 모양입니다. 많은 분들이 남해로 유배를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