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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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미 클라인: 오피니언-자본주의 대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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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19.

 

- 아래의 글은 <<쇼크 독트린>>의 저자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이 2011년 11월 9일 <<더 네이션(The Nation)>>에 실은 기고문을 옮긴 것이다. 이 글에서 나오미 클라인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유의미한 대응은 자유시장과 자본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보수우파 자유시장주의자들은 '기후변화' 현상 자체를 거부하며, 그것이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그것을 어떤 종류의 생태사회주의로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트로이의 목마"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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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대 기후

 

 

네 번째 열의 한 신사가 질문 하나를 제기한다.

 

그는 리처드 로스차일드(Richard Rothschild)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는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는 정책들이 사실상 "미국의 중산층 자본주의에 대한 공격"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었기 때문에 메릴랜드 캐롤 카운티의 군 위원 선거에 출마했었다고 군중에게 말한다. 6월 말 워싱턴 DC의 메리어트 호텔에 모인 토론자들에 대한 그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느 정도까지 이 운동 전체가 그 내부는 적색의 마르크스주의 사회경제적 신조로 가득찬 녹색의 트로이 목마일 뿐입니까?"

 

인간 활동이 지구를 데우고 있다는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을 거부하는 데 헌신하는 사람들을 위한 최고의 모임인 하트랜드 연구소(Heartland Institute)의 제6차 기후변화에 관한 국제회의(ICCC)에서 이 질문은 하나의 수사적인 질문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독일의 중앙 은행가들의 모임에서 그리스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인지 묻는 것과 비슷하다. 역시, 토론자들은 그 질문자에게 그저 그가 얼마나 옳은지 말할 기회를 그냥 보내지 않을 것이다.

 

귀찮은 소송과 정보 조사의 자유로 기후과학자들을 길들이기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경쟁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인 크리스 호너(Chris Horner)는 테이블 마이크를 자신의 입에 맞춰 구부린다. "당신은 이것이 기후에 관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그는 음울하게 말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지만, 그것은 합당한 믿음이 아닙니다." 조숙하게 백발이 된 머리카락 때문에 우파 인사 앤더슨 쿠퍼(Anderson Cooper)처럼 보이는 호너는 사울 알린스키(Saul Alinsky)를 들먹이기를 좋아한다. "그 쟁점은 쟁점이 아닙니다." 명백히 쟁점은 "어떤 자유사회도 이 의제가 요구하는 것을 자체에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첫 번째 걸음은 계속 방해가 되는 이런 성가진 자유를 제거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기후변화가 미국의 자유를 훔치려는 책략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하트랜드 연구소의 기준에 의하면 상당히 온건하다. 이틀 동안 열리는 이 회의 기간 동안 나는 지역형 생물연료 정제기업들을 지원하겠다는 오바마의 공약이 실제로는 "만인의 뒷마당에 선철 용광로"를 설치하려는 "마오주의적" 계획과 흡사한 "녹색 공동체주의"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카토연구소의 패트릭 마이클스)을 알게 될 것이다. 기후변화가 "국가사회주의를 위한 위장"이라는 점(전직 공화당 상원위원이자 은퇴한 우주인 해리슨 슈미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환경주의자들은 신들을 달래고 날씨를 바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으로 바치는 아즈텍 성직자들과 같다는 점(거부주의자들이 기댈 수 있는 웹사티트 ClimateDepot.com의 편집자 마르크 모라노)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네 번째 열의 군 위원에 의해 표현된 의견―기후변화는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그것을 어떤 종류의 생태사회주의로 대체하기 위해 고안된 트로이의 목마이다―의 여러 판본들을 들을 것이다. 회의 대변인 래리 벨이 자신의 새 책 <<부패의 기후(Climate of Corruption)>>에서 간결하게 서술하듯이, 기후변화는 "환경의 상태와 거의 관계가 없으며 전지구적 부의 재분배를 위해 자본주의를 속박하고 미국식 생활방식을 변화시키는 것과 많은 관계가 있다."

 

그렇다. 확실히, 대표단이 기후과학을 거부하는 것은 자료에 대한 심각한 불일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부당한 주장이 있다. 그리고 회의 조직자들은 신뢰할 만한 과학 회의들을 어느 정도 흉내내려고 하는데, 그 모임을 "과학적 방법을 회복하기"라고 명명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세계의 선도적인 기구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한 자만 다른 ICCC를 조직의 두문자어로 삼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제시되는 과학 이론들은 낡았고 불신당한지 오래되었다. 게다가 각 연사가 그 다음 연사와 모순되는 듯 보이는 까닭을 설명하려는 어떤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온난화가 전혀 없는가, 또는 온난화가 있지만 문제가 되지 않는가? 그리고 온난화가 전혀 없다면, 온도 상승을 초래하는 태양 흑점들에 관한 이 모든 이야기는 무엇인가?)

 

사실상, 대체로 나이든 청중의 몇몇 구성원들은 온도 그래프들이 투사되는 동안 조는 듯 보인다. 그들은 그 운동의 유명인들―C-팀 과학자들이 아니라 모라노와 호너 같은 A-팀 이데올로기 전사들―이 무대에 나올 때만 활기를 띤다. 이것이 그 모임의 진정한 목적이다. 완강한 거부주의자들이 앞으로 몇 주 그리고 몇 달 동안 환경주의자들과 기후과학자들을 혼내줄 수사적 야구 방망이들을 수집하기 위한 포럼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먼저 시험된 논지들은 "기후변화" 또는 "지구온난화"라는 어구를 포함하는 모든 기사와 유튜브 비디오 아래에 있는 논평난을 가득 채울 것이다. 또한 그것들은 수백 명의 우파 논평가들과 정치가들―릭 페리와 미셸 바흐만 같은 공화당 대선 후보들부터 리처드 로스차일드 같은 군 위원들에까지 이르도록―의 입에서 나올 것이다. 회의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한 인터뷰에서 하트랜드연구소 소장인 조지프 배스트는, "이런 회의들 가운데 하나에 참석한 누군가에 의해 정보가 제공되거나 고무된...수천 개의 기사와 기명 논평과 연설들"에 대한 공로를 자랑스럽게 가로챈다.

 

"자유시장 해결책을 고무하기"에 헌신하는 시카고 소재 두뇌 집단인 하트랜드 연구소는 2008년 이래로 이런 간담회들을 개최하고 있는데, 가끔은 일 년에 두 번 개최한다. 그리고 그 전략은 작동하고 있는 듯 보인다. 첫 날 회의가 끝날 무렵에 모라노―그가 유명해진 유일한 이유는 존 케리의 2004년 대선 운동을 침몰시킨 진리를 위한 순찰정 참전용사들(Swift Boat Veterans for Truth) 이야기를 누설했다는 점이다―가 일련의 승리 찬가로 모임을 이끈다. 총량거래, 무효! 코펜하겐 정상회의에 참석한 오바마, 실패! 기후운동, 자살! 심지어 그는 (진보주의자들이 매우 잘 하듯이) 환경활동가들이 스스로를 호되게 때리는 몇 가지 표현들을 인용하며 청중에게 "경축합시다!"라고 권한다.

 

지붕에서 내려오는 풍선이나 종이 색종이는 하나도 없었지만, 있었던 편이 더 낫다.

 

***

 

중대한 사회적 쟁점들과 정치적 쟁점들에 관한 여론이 변할 때, 그 추세는 상대적으로 점진적인 경향이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닥칠 때,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극적인 사건들에 의해 촉진된다. 그래서 여론조사가들은 겨우 사 년 동안에 기후변화에 대한 인식에 일어난 일에 매우 놀랐다. 2007년 해리스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의 71%가 화석연료의 지속적인 연소 때문에 기후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2009년에는 그 숫자가 51%로 떨어졌다. 2011년 6월에는 동의하는 미국인들의 수가 44%―충분히 인구의 절반 아래―로 감소했다. 신문과 언론을 위한 퓨 연구센터의 조사연구 책임자 스콧 키터에 따르면, 이것은 "최근의 여론 역사에서 단기간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들 가운데" 속한다.

 

훨씬 더 놀랍게도, 이 변화는 정치적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어났다. 최근 2008년(뉴트 깅그리치가 낸시 펠로시와 함께 기후변화 TV 특별 프로그램을 진행한 해)만 해도 여전히 그 쟁점은 미국에서 외관상 초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런 시절은 확실히 끝났다. 오늘날, 자칭 민주당 지지자들과 진보파의 70-75%가 인간들이 기후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고 있는데, 그 비율은 지난 십 년 동안 안정적이거나 약간 오른 수준이다. 이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공화당 지지자들, 특히 티파티 구성원들은 과학적 합의를 거부하기로 압도적으로 선택했다. 몇몇 지역들에서는 자칭 공화당 지지자들의 대략 20%만이 과학을 받아들인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정서적 강도의 변화였다. 기후변화는 거의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모두가 그렇게 많이는 아니지만―고 말하는 것이었다. 미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치적 관심사에 우선순위를 매기도록 요청했을 때, 기후변화는 확실히 마지막에 위치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기후변화에 관해 열정적으로, 심지어 강박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공화당 지지자들의 유의미한 집단이 있는데,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는 기후변화를 자신들로 하여금 강제로 전구를 바꾸고, 소비에트 양식의 주택에서 거주하며, SUV 차량을 포기하도록 하기 위해 진보파가 침투시키고 있는 하나의 "사기"로 폭로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런 우파 인사들의 경우에, 기후변화에 대한 반대는 낮은 세금, 총기 소유, 그리고 낙태 반대만큼이나 그들의 세계관에 핵심적인 것이 되었다. 많은 기후과학자들이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고하는데, 에너지 보존처럼 명백히 무해한 주제들에 관한 기사들의 저자들도 그렇다. (공기 냉난방 시설에 비판적인 책의 저자인 스탠 콕스가 받은 한 편지에서 서술되어 있듯이, "당신은 내가 죽은 후에야 내 온도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문화전쟁의 격렬함은 모든 것 가운데 최악의 뉴스인데, 여러분이 어떤 사람의 정체성에 핵심적인 쟁점에 관한 그 사람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할 때 사실들과 논증들은 후속 공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어 쉽사리 왜곡되기 때문이다. (거부자들은, 부분적으로는 코흐 형제로부터 연구비 지원을 받으며 "회의주의적" 입장에 공감하는 한 과학자가 이끈, 지구온난화의 실재성을 확인한 새로운 연구를 일축하는 방식도 찾아내었다.)

 

이런 정서적 격렬함의 효과는 공화당을 이끌기 위한 경선에서 전모가 드러났다. 대통령 경선에 뛰어든지 며칠 후에 자신의 고향 주가 들불로 문자 그대로 타오르고 있을 때, 텍사스 주지사 릭 페리는 기후과학자들이 "자신들의 과제들에 연구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데이터를 조작하고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지지자들을 기쁘게 했다. 한편, 기후과학을 일관되게 옹호한 유일한 후보자인 존 헌츠먼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사망한 환자와 같았다. 미트 롬니의 운동을 구한 것의 일부는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합의를 지지하는 이전의 진술들을 취소한 점이었다.

 

그런데 우파의 기후 음모론 주장의 효과는 공화당을 넘어 멀리 미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무당파로부터 소원해지기를 원치 않아서 그 주제에 관해 대체로 침묵하게 되었다. 그리고 매체와 문화 기업들이 뒤를 따랐다. 오 년 전에 명사들은 하이브리드 차량을 타고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고, <<배니티 페어(Vanity Fair)>> 잡지는 환경 연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2007년에 미합중국의 3대 메이저 네트워크는 기후변화에 관해 147개의 기사를 방송했다. 2010년에 그 네트워크들은 겨우 32개의 기후변화 기사를 방송했고, 아카데미 시상식에 리무진이 다시 유행하게 되었으며, <<배니티 페어>>의 환경 "연간"지는 2008년 이래로 발행되지 않았다.

 

이런 불편한 침묵은 역사 기록에서 가장 더운 십 년의 마지막 해와 전세계적으로 이상한 자연 재해들과 기록적인 더위가 나타난 또 하나의 여름에 걸쳐 지속되었다. 한편, 화석연료 산업은 대륙의 가장 더럽고 가장 위험한 원천들 가운데 일부에서 석유, 천연가스, 그리고 석탄을 채굴하기 위한 새로운 기반 시설에 수십 억 달러를 서둘러 투자를 하고 있다(70억 달러의 키스톤 XL 송유관은 가장 눈에 띄는 사례일 뿐이다). 앨버타 타르 사막에서, 뷰포트 해에서, 펜실바니아주의 가스전과 와이오밍주와 몬타나주의 탄전에서 그 산업은 기후운동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크게 확신하고 있다.

 

이런 계획들이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탄소가 대기로 배출되면 파국적인 기후변화를 촉발할 확률은 극적으로 증가할 것이다(앨버타 타르 사막에서만 석유를 채굴하더라도 기후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게임 오버"일 것이라고 NASA의 제임스 핸슨은 말한다).

 

이 모든 것은 기후운동이 정말 회복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좌파가 우파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거부주의자들은 기후를 경제와 관련시킴으로써 탄력을 받았는데, 그들은 기후 행동이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일자리를 없애며, 물가를 치솟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평소의 정상적인 자본주의 자체가 실업과 채무 노예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에 동의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증가하는 이 시기에 우파로부터 경제적 영역을 빼앗을 유일한 기회가 있다. 이것은, 기후 위기에 대한 진정한 해결책들이 훨씬 더 계몽된 경제 체계―뿌리 깊은 불평등을 종식하고, 공공 영역을 강화하고 변화시켜며, 풍부한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며, 기업 권력을 본원적으로 제어하는―를 확립하고자 하는 우리의 최고 희망이기도 하다는 설득력 있는 변론을 세우기를 요구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기후 행동이 진보파의 주목을 받기 위해 겨루는 가치 있는 대의들의 명세서 위의 한 쟁점일 뿐이라는 관념에서 벗어나기를 요구한다. 기후 거부주의가 현재의 권력 및 부의 체계들을 옹호하는 것과 전적으로 얽혀 있는, 우파의 핵심적인 정체성 쟁점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진보파의 경우에는 기후변화의 과학적 현실이 구속받지 않는 탐욕의 위험과 현실적 대안들의 필요성에 관한 정합적인 서사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그런 전환적 운동을 확립하는 것은 처음 보기보다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여러분이 하트랜드 지지자들에게 묻는다면, 기후변화가 어떤 종류의 좌파 혁명을 사실상 불가피하게 만드는데,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은 매우 단호하게 그것의 실재성을 거부한다. 우리는 그들의 이론들에 더 자세히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인데, 그들은 좌파가 여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정말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

 

거부자들은 어떤 은밀한 사회주의적 계획을 밝힘으로써 기후변화가 좌파의 음모라고 결정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후과학이 요구하는 만큼 급격하고 빠르게 전지구적 방출을 낮추는 데 무엇이 필요할지 철저히 검토함으로써 이런 분석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들의 "자유시장" 신앙 체계에 대립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경제 체계와 정치 체계를 급진적으로 재조정함으로써만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국인 블로거이자 하트랜드 지지자인 제임스 델링폴이 지적했듯이, "현대 환경주의는 좌파에 소중한 대의들 가운데 많은 것―부의 재분배, 높은 세금, 더 많은 정부 개입, 규제―을 성공적으로 진전시킨다." 하트랜드의 배스트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서술한다. 좌파에게, "기후변화는 완벽한 것이다.... 그 때문에 우리는 [좌파가] 어쨌든 하고 싶어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

 

여기에 나의 불편한 진실이 있는데, 그들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튼 더 나아가기 전에, 다음 사실을 절대적으로 명확히 할 것이다. 세계의 기후과학자들의 97%가 증언하듯이, 하트랜드 지지자들은 과학에 관해 완전히 틀렸다. 화석연료의 연소를 통해 배출된 온실가스들은 이미 온도 상승을 초래하고 있다. 이번 십 년 말까지 본원적으로 다른 에너지 경로에 접어들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고통의 세계을 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과학적 발견들의 실제 결과들, 구체적으로 우리의 에너지 소비뿐 아니라 우리의 경제 체계의 근본적인 논리에 대해 요구되는 그런 종류의 심대한 변화들에 관한 한, 메리어트 호텔에 모인 군중이 많은 직업적 환경주의자들―지구온난화 아마겟돈을 묘사한 다음에, 오염 속에서 우리가 "녹색" 제품들을 구매하고 영리한 시장을 창출함으로써 파국을 피할 수 있다고 확신시키는 사람들―보다 상당히 덜 거부할지도 모른다.

 

지구의 대기가 우리가 뿜어내는 탄소량을 안전하게 흡수할 수 없다는 사실은 훨씬 더 큰 위기, 즉 우리의 경제 모형이 근거하고 있는 중심적 허구와 관련된 위기의 한 증상인데, 그 중심적 허구란 자연은 무한정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항상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무언가가 고갈되면 그것은 우리가 끝없이 채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원으로 매끈하게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복구 능력을 넘어서 착취한 것은 대기만이 아닌데, 우리는 대양, 담수, 토양, 그리고 생물다양성에도 같은 짓을 저지르고 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매우 오랫동안 지배한 팽창주의적인 채굴적 사고방식은 기후 위기가 매우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대상이다. 우리가 자연을 한계 이상으로 밀어붙였음을 증명하는 과학적 연구가 풍부하다는 점은 그저 녹색 제품들과 시장에 기반을 둔 해결책들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문명 패러다임, 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자연적인 갱신의 순환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둔 문명 패러다임―그리고 인간 지능의 한계를 비롯하여 자연적 한계에 매우 민감한―을 요구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크리스 호너가 그와 한패인 하트랜드 지지자들에게 기후변화는 "쟁점"이 아니라고 말했을 때 그는 옳았다. 사실상 그것은 전혀 쟁점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하나의 메시지, 우리 문화의 가장 소중한 관념들 가운데 많은 것이 더 이상 실행가능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메시지이다. 이것들은 계몽주의적 진보의 이상들에 입각하여 키워져서 우리의 야망이 자연적 경계에 의해 한정받는 데 익숙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엄청나게 도전적인 계시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우파뿐 아니라 국가주의적 좌파에게도 참이다.

 

하트랜드 지지자들은 기후변화에 관해 미국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유령을 불러내기를 좋아하지만(하트랜드 회의에서 인기 있는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는 지구온난화를 방지하려는 시도들은 "공산주의의 중앙 계획자들이 사회 전체를 통제하려는 야심"과 흡사하다고 말한다), 사실은 소비에트 시대의 국가사회주의는 기후에 대해 재앙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만큼이나 열심히 자원을 게글스레 소비하고, 마찬가지로 난폭하게 쓰레기를 뱉어내는데,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 체코와 러시아는 일 인당 탄소 발자국이 영국, 캐나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보다 훨씬 더 높았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은 중앙통제 체제만이 녹색 작업을 시행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중국 재생에너지 프로그램의 현기증 나는 확대를 지적하지만, 중국의 명령통제 경제는 대규모로 파괴적인 거대한 댐, 거대한 고속도로, 그리고 채굴 중심의, 특히 석탄 중심의 에너지 계획들을 통해 자연과 총력전을 벌이도록 계속 속박당한다.

 

기후 위협에 대한 대응은 모든 층위에서 강한 정부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진정한 기후 해결책들은, 공동체가 통제하는 재생에너지, 지역적인 유기농, 또는 사용자들에게 진정으로 책임지는 교통 체계를 통해서, 이런 개입 행위들이 권력과 통제를 공동체 층위로 체계적으로 분산하고 양도하도록 조정하는 것이다.

 

이곳이 하트랜드 지지자들이 두려워 할 좋은 이유가 있는 지점인데, 이런 새로운 체계들에 도달하는 것은 삼십 년 이상 동안 지구 경제를 지배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를 해치우는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어지는 것은 진지한 기후 의제가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영역―공적 하부구조, 경제계획, 기업 규제, 국제무역, 소비, 그리고 조세―에서 의미하는 바를 되는 대로 살펴보는 것이다. 하트랜드 회의에 모인 사람들과 같은 강경한 우파 이데올로그들에게 그 결과들은 그야말로 지적으로 격변적인 것이다.

 

1. 공공 영역을 재생하고 재발명하기

 

재활용, 탄소 상쇄하기, 그리고 전구 바꾸기 등의 행위를 수 년 동안 실행한 후에 개인적 행위가 결코 기후 위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아닐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기후변화는 집단적인 문제이고, 그것은 집단적 행위를 요구한다. 이런 집단적 행위가 일어나야 하는 핵심 영역들 가운데 하나는 대규모로 탄소 배출을 감소시켜려고 고안된 거액의 투자이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할 뿐 아니라 만인이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 시내 전차, 그리고 경전철 체계들, 그런 교통 노선들을 따라 늘어선, 가격이 적당한 에너지 효율이 높은 주택, 재생에너지를 수송하는 스마트 그리드 전기 공급 체계, 그리고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시키는 방대한 연구 노력을 의미한다.

 

민간 부문은 이런 서비스들 가운데 대부분을 제공하는 데 적합하지 않는데, 그것들이 대규모의 선행 투자를 필요로 하며, 만인이 그것들을 정말 이용할 수 있다면 몇몇 서비스는 다분히 수익성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확실히 공익에 속하는 것이며, 이것 때문에 그것들은 공공 부문이 제공해야 한다.

 

전통적으로 공공 부문을 보호하려는 싸움은, 무제한으로 소비하기를 원하는 무책임한 좌파와 우리가 우리의 경제적 수단을 넘어서 살고 있음을 이해하는 실용적 현실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기후 위기의 중력은 한계에 대한 매우 다른 이해뿐 아니라 본원적으로 새로운 현실주의 개념을 요구한다. 정부 예산 적자의 위험은 우리가 생생하고 복잡한 자연적 체계들에서 만들어낸 적자의 위험의 발치에도 못 미친다. 그런 한계를 존중하도록 우리 문화를 바꾸는 것은 우리의 집단적 근육 전체를 요구하는데, 우리 자신이 화석연료에서 벗어나고 다가오는 폭풍에 대비하는 공동 하부구조를 강화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2. 계획하는 방법을 기억하기

 

삼십 년 간의 사유화 추세를 역류시키는 것에 덧붙여, 기후 위기에 대한 진지한 대응은 이런 시장 근본주의의 시기 동안 끊임없이 비방받은 기술, 즉 계획을 복권시키는 것을 포함한다. 수없이 많은 계획. 그리고 국내적 층위와 국제적 층위에서만이 아니다. 세계의 모든 공동체는 화석연료에서 어떻게 전환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 즉 전환마을 운동이 "에너지 강하 행동계획"이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책임을 진지하게 여긴 도시와 마을들에서 그 절차는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드문 공간을 열었는데, 이웃들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어떻게 더 낮은 배출 수준으로 재조직하고 앞으로 힘든 시기에 대비하여 탄력있게 건설할지에 관한 생각들을 공유하기 위해 시청에서 개최되는 협의 모임에 떼지어 몰렸다.

 

기후변화는 다른 계획 형식들도 요구하는데, 특히 우리가 화석연료를 포기할 때 쓸모없게 될 직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그렇다. 소수의 "녹색 일자리" 훈련은 충분하지 않다. 이 노동자들은 실제 일자리가 저쪽에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경제를 기업의 수익성이라기보다 집단적 우선순위에 기반을 두고 계획한다―자동차 공장과 석탄 광산들의 정리해고된 고용인들에게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도구와 자원을 제공하기, 예를 들면, 클리브랜드의 노동자들이 운영하는 녹색 협동조합이 하나의 모형이 된다―는 관념의 회복을 의미한다.

 

토양 부식, 극단적인 날씨, 그리고 화석연료 투입에 대한 의존이라는 삼중 위기를 고려하면, 농업에서도 계획이 부활되어야 할 것이다. 캔사스주 살리나시에 소재하는 랜드 연구소의 공상가적인 창립자인 웨스 잭슨은 "오십 년 농장 법안"을 청원해 오고 있다. 그것은 그와 그의 공동연구자 웬델 베리와 프레드 커쉔만이, 단종 재배로 길러지는, 토양을 고갈시키는 여러 일년생 곡물을 다종 재배로 길러지는 다년생 곡물들로 대체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하부구조를 확립하는 데 걸릴 것이라고 추정하는 기간이다. 다년생 곡물들은 매년 다시 심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들의 긴 뿌리는 희소한 물을 저장하고, 토양을 고정시키며, 탄소를 격리시키는 일을 훨씬 더 잘 한다. 또한 다종 재배는 병충해에 덜 취약하고 극단적인 날씨에 의해 절멸될 가능성이 더 작을 것이다. 또 하나의 보너스는 이런 유형의 영농이 산업적 농업보다 훨씬 더 노동집약적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영농이 다시 한 번 고용의 실질적인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하트랜드 회의와 비슷한 정신의 모임들 외에는 계획의 귀환이 전혀 두려워할 것이 아니다. 결국 우리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로의 복귀가 아니라 진정한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난 삼십 년 남짓의 탈규제화된 야생의 서부 경제 실험은 전 세계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있다. 바로 이런 구조적인 실패 때문에 매우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엘리트 계층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생활 임금과 부패의 종식을 요구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새로운 종류의 경제에 대한 요구와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 요구에 실존적인 정언 명령을 덧붙인다.

 

3. 기업들을 제어하기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계획의 핵심적인 한 요소는 기업 부문의 재빠른 재규제를 포함한다. 장려책, 예를 들면 재생에너지에 대한 보조금과 책임 있는 토지 관리권으로 많은 것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명백히 위험하고 파괴적인 행동을 금지하는 관습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것은, 기업들이 배출할 수 있는 탄소량에 엄격한 총량을 부과하기에서 새로운 화력 발전소의 건설을 금지하기, 기업형 가축 사육장을 단속하기, (확대 계획에 갖혀 있는 키스톤 XL 송유관에서 시작하여) 앨버타 타르 사막 같은 더러운 에너지 채굴 계획들을 중지시키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선에서 기업에 개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구의 매우 작은 일부만이 기업이나 소비자 선택에 대한 어떤 제약도 하이에크의 노예에 이르는 길로 인도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가 아니게도, 기후변화 거부의 전면에 있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일부이다.

 

4. 생산을 재지역화하기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업들을 엄격하게 규제하는 것이 얼마간 급진적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1980년대 초 이래로 정부의 역할은 기업 부문에 개입하지 않는 것―국제무역의 영역보다 더 그런 곳은 없다―라는 것이 신조였기 때문이다. 자유무역이 제조업, 지역 기업, 그리고 영농에 미친 파괴적인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대기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전 지구에 걸쳐 원료와 완제품들을 수송하는 화물선, 점보 제트 비행기, 그리고 대형 트럭들은 화석연료를 게걸스레 삼키고 온실가스를 내뿜는다. 그리고 생산되고 있는 값싼 상품은 안전하게 흡수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면서 매우 다양한 재생불가능한 자원을 소비하고 있다.

 

사실상 이 모형은 매우 낭비적이어서 배출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줄임으로써 얻어진 약간의 이득을 상쇄한다. 예를 들면, 최근에 <<프로시딩스 오프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사이언시즈>>는 교토 의정서에 서명한 산업화된 국가들의 배출량에 관한 연구를 출판했다. 그것은 배출량이 안정되었지만, 그 이유는 국제무역 덕분에 이 나라들이 자체의 더러운 생산시설을 중국 같은 지역으로 이전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밝혔다. 연구자들은 개발도상 국가들에서 생산되지만 산업화된 국가들에서 소비되는 상품으로 인한 배출량의 증가가 산업화된 국가들의 배출량 절약보다 여섯 배 더 컸다고 결론을 내렸다.

 

자연적 한계를 존중하도록 조직된 경제에서는 에너지 집약적인 장거리 수송의 사용이 제약될 필요가 있을 것인데, 상품이 지역적으로 생산될 수 없거나 지역적 생산이 더 탄소 집약적인 경우들에 대해서만 유보된다. (예를 들면, 미합중국의 서늘한 지역의 온실에서 식량을 재배하는 것은 흔히 남쪽에서 재배하여 경전철로 수송하는 것보다 더 에너지 집약적이다.)

 

기후변화는 무역의 종말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무역기구뿐 아니라 모든 양자 무역 협정을 지배하는 무모한 형태의 "자유무역"의 종말을 요구한다. 이것은 더 좋은 소식인데, 실업자들에게, 갑싼 수입품과 경쟁할 수 없는 농부들에게, 자체 제조업이 역외로 이전하고 자체 지역 기업들이 대기업업들로 대체되는 것을 바라본 공동체들에게 그렇다. 그런데 이것이 자본주의적 기획에 제기하는 도전은 과소평가되면 안 되는데, 그것은 기업 권력에 대한 모든 가능한 제약을 제거한 삼십 년 추세의 역전을 나타낸다.

 

5. 쇼핑 숭배를 끝내기

 

지난 삽십 년 간의 자유무역, 탈규제, 그리고 사유화는 기업의 더 큰 수익을 원한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결과만은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빠른 경제 성장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발견하도록 격심한 압력을 야기한 1970년대의 "스태크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책이었다. 그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현재 경제 모형 내에서 생산 감소는 당연히 위기―경기 후퇴, 또는 충분히 심하다면, 불황인데 이 단어들은 절망과 고난을 의미한다―이다.

 

이런 성장 정언명령 때문에 통상적인 경제학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기후 위기에 신뢰성 있게 접근하게 된다. 견고한 GDP 성장을 유지하면서 어떻게 배출을 줄일 수 있는가? 일반적인 대답은 "분리"―재생에너지와 더 큰 효율성 덕분에 경제 성장과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분리될 것이라는 관념―이다. 그리고 토머스 프리드먼 같은 "녹색 성장" 옹호자들은, 새로운 녹색 기술을 개발하고 녹색 하부구조를 설치하는 과정이 거대한 경제적 경기 부양을 일으켜 GDP를 급등시키고 "미국을 더 건강하고, 더 부유하고, 더 혁신적이고, 더 생산적이며,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지점이 상황이 복잡해지는 곳이다. 요크 대학의 피터 빅터, 서레이 대학의 팀 잭슨, 그리고 환경법 및 정책 전문가 거스 스페스뿐 아니라 메릴랜드 대학의 생태경제학자 허먼 댈리가 이끄는, 경제 성장과 건전한 기후 정책 사이의 충돌에 관한 경제적 연구의 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산업화된 국가들이 심지어 오늘날의 부진한 속도로 계속 경제를 성장시키면서도 과학이 요구하는 극심한 배출 감축(최소한 2050년까지 1990년 수준의 80% 아래로)을 충족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한 의문들을 제기한다. 빅터와 잭슨이 논증하듯이, 더 큰 효율성은 성장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을 뿐인데, 부분적으로는 더 큰 효율성은 거의 항상 더 많은 소비를 수반하여 이득을 줄이거나 상쇄하기까지 한다(흔히 "제본스의 역설"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더 큰 에너지 효율성과 물질 효율성의 결과로 얻어지는 절약이 더 기하급수적인 경제 확대로 그냥 재투자되는 한, 전체 배출량의 감소는 좌절될 것이다. <<성장 없는 번영>>에서 잭슨이 논증하듯이, "성장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나는 길로서 분리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역사적 증거―그리고 성장의 기본 산술―를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최종 결론은, 자연 자원의 과소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생태학적 위기는 그저 우리 경제의 효율성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산하고 소비하는 물질의 양을 줄임으로써 대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착상은 매년 항상 더 많은 이윤을 요구하는, 아무 구속 없는 투자자들에 의해 통제되는 지구 경제를 지배하는 대기업들에게 저주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잭슨이 서술하듯이, 우리는 "체계를 파괴하거나 아니면 행성을 박살내는" 옹호될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다.

 

출구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계획 도구들을 사용하여 다른 한 경제 패러다임으로의 관리된 전환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장은 여전히 가난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세계의 지역들에 대해서는 유보될 것이다. 한편, 산업화된 세계에서는, 생태학적 영향이 최소인 부문들(돌봄 직업들과 같은)과 마찬가지로, 매년 이윤 증가에 대한 추동력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부문들(공공 부문, 협동조합, 지역적 기업들, 비영리 단체들)이 경제 활동 전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몫을 확대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출 및 이윤 증가에 대한 구조적인 욕망를 지닌 기업 부문의 역할은 축소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하트랜드 지지자들이 인간이 유발한 기후변화의 증거에 대해 자본주의 자체가 위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대응하는 까닭은 그들이 편집증 환자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8. 부자들과 부정한 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기

 

지금쯤 분별있는 독자는 물을 것이다. 도대체 이 모든 것에 대한 비용을 어떻게 지불할 것인가? 낡은 대답을 쉬울 것인데, 성장을 통해 해결할 것이다. 사실상 엘리트 계층에게 성장 중심 경제의 주요한 편익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 덕분에 그들은 파이를 계속해서 키우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 충분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적 정의에 대한 요구를 끊임없이 지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불평등 위기가 드러내듯이, 그것은 항상 거짓말이었으며, 다중의 생태학적 한계를 맞고 있는 세계에서 그것이 성공할 가망은 없다. 그래서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유의미한 대응에 자금을 조달하는 유일한 방법은 돈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그것은 금융 투기뿐 아니라 탄소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기업들과 부자들에 대한 증세, 비대한 군사 예산의 삭감, 화석연료 산업에 대한 터무니 없는 보조금의 삭제를 의미한다. 그리고 정부들은 기업들이 어디에도 숨을 곳에 없도록 대응을 조정해야 할 것이다(이런 종류의 견고한 국제 규제 구조가 하트랜드 지지자들이 기후변화가 불길한 "세계 정부"를 예고할 것이라고 경고할 때 의미하는 바이다).

 

그렇지만 대체로 우리는 우리를 이런 곤경에 빠뜨린 것에 대해 가장 책임이 있는 기업들의 이윤을 목표로 할 필요가 있다. 세계 5대 석유 기업은 지난 십 년 동안 9,000억 달러의 수익을 올렸는데, 엑슨모빌 단독으로 1분기에 100억불의 순익을 올릴 수 있었다. 수년 동안 이 기업들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에 투자하는 데("석유를 넘어서"라는 리브랜딩이 가장 이목을 끄는 사례이다) 자체 수익을 사용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그러나 미국진보센터의 연구에 따르면, 5대 기업의 2008년 전체 수익 1,000억 달러 가운데 고작 4%만이 "재생에너지와 대체에너지 사업"에 투자되었다. 그 대신에 그것들은 계속해서 자체 이윤을 주주들의 주머니, 터무니 없는 경영진의 보수, 그리고 훨씬 더 더럽고 더 위험한 화석연료를 채굴하기 위해 고안된 신기술에 퍼붓는다. 또한 모습을 드러낸 모든 기후 규제 법안을 격퇴하도록 로비스트들에게 보수를 지불하고, 매리어트 호텔에 모인 거부자 운동에 자금을 지원하는 데 충분한 돈이 투자된다.

 

담배 기업들이 사람들이 담배를 끊는 데 도움을 주는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BP가 멕시코 만의 정화 비용을 지불해야 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기후변화에 "오염자가 지불한다"라는 원리를 적용할 호기이다. 오염자들에 대한 더 많은 과세를 넘어 정부들은, 더 적은 화석연료 채굴이 더 많은 공적 세입을 올려 (이미 닥친 기후변화의 엄청난 비용뿐 아니라) 탈탄소 미래로의 전환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도록 훨씬 더 높은 사용료 요율을 협상해야 할 것이다. 기업들은 자체 이윤을 삭감하는 어떤 새로운 규칙도 거부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국유화―무엇보다도 가장 큰 자유시장의 금기―가 도외시될 수 없다.

 

흔히 그렇듯이, 하트랜드 지지자들이 기후변화란 "부를 재분배하고" 계급전쟁을 벌이기 위한 기획이라고 주장할 때, 이것들이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형들이다. 또한 그들은, 일단 기후변화의 현실이 인정되면, 부유한 나라들 내부에서뿐 아니라, 위기를 만들어낸 배출을 한 부유한 나라들에서 그것의 영향의 전선에 있는 가난한 나라들로 부가 이전되어야 할 것이라는 점을 이해한다. 사실상 보수주의자들(그리고 충분히 많은 자유주의자들)로 하여금 UN 기후협약들을 중단시키는 것을 매우 갈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이 개발도상에 있는 세계의 지역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탈식민주의적 용기를 되살렸다는 점이다. 누가 지구온난화에 대해 책임이 있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의 영향을 우선적으로 가장 나쁘게 겪고 있는지에 관한 논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들로 무장한 채, 볼리비아와 에쿠아도르 같은 국가들은 수십 년 동안의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 대부에 의해 떠안게 된 "채무자"라는 외피를 벗으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자국들이 채권자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기후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자금과 기술뿐 아니라 그 속에서 발전해야 하는 "대기적 공간"에 대한 채권이 있다.

 

***

 

자 요약해 보자.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은 우리가 자유시장 규정집의 모든 규칙을 깨뜨리고 그것도 매우 급하게 행하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공공 영역을 재건하고, 사유화를 되돌리고, 경제의 많은 부분을 재지역화하고, 과소비를 줄이고, 장기 계획을 부활시키고, 기업을 세게 규제하고, 기업들에 무겁게 세금을 매기고, 아마도 몇몇 기업들은 국유화도 하고, 군사비를 삭감하며, 개발도상국에 대한 선진국의 채무를 인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기업들이 정치 과정에 대해 지니고 있는 영향력을 급진적으로 줄이려는 대규모의 방대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이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일어날 희망이 도대체 없다. 그것은 최소한 공적 자금의 지원을 받는 선거와 법에 의거하여 기업들로부터 "인민"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면, 기후변화는 기록되어 있는 거의 모든 진보적인 요구를 지지하는 앞선 변론을 강력하게 만들어서 명료한 과학적 정언명령에 바탕을 둔 정합적인 의제로 묶는다.

 

게다가, 기후변화는 케인즈가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독일의 반발을 예측한 이래로 가장 큰 정치적인 "예언"을 함의한다. 마르크스는 "생명 자체의 자연 법칙들"과 자본주의 사이의 "돌이킬 수 없는 균열"에 관하여 글을 적었으며, 많은 좌파 인사들이 자본의 탐욕적인 식욕의 해방에 기반을 두고 세워진 경제 체계가 생명이 의존하는 자연 체계들을 압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물론 토착인들은 그보다 오래 전에 "어머니 지구"를 경시하는 것의 위험에 관해 경고하고 있었다. 공기로 운반되는 산업자본주의의 쓰레기 때문에 지구가 따뜻해지고 있다―잠재적으로 파국적인 결과를 지닌다―는 사실은, 글쎄, 반대론자들이 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 모든 규제를 없애고 마술이 일어나는 것을 지켜보자"라고 말한 사람들은 끔찍하게도, 엄청나게도 틀렸다.

 

매우 무시무시한 일과 관련하여 옳다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에게는 그것에 책임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사상―산업국가 사회주의의 실패뿐 아니라 토착적 가르침에 의해 특징지워지는―이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개혁주의를 거부하고 우리 경제의 이윤 중심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녹색-좌파적 세계관이 인류가 이런 중복된 위기들을 극복할 것이라는 최선의 희망을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잠깐 이 모든 것이 시카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고 내게 자신의 소명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서술한 하트랜드 소장 배스트 같은 인사에게 어떻게 보일지 추측하자. 그것은 세계의 종말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의도와 목적에 대해, 그의 세계의 종말이다. 기후변화는 현대의 보수주의가 의존하는 이데올로기적 비계를 폭파한다. 집단 행동을 비방하고 총체적인 시장의 자유을 존중하는 믿음 체계를 전례없는 규모의 집단 행동과 위기를 초래했으며 심화시키고 있는 시장의 힘들의 극적인 억제를 요구하는 문제와 일치시킬 방법은 전혀 없다.

 

***

 

하트랜드 회의―에인 랜드 연구소에서 헤리티지 재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장식용 책과 팜플렛을 지니고 있는―에서 이런 불안들이 표면에 드러났다. 배스트는 기후과학에 반대하는 하트랜드의 운동이 그 과학이 요구할 정책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에 관해 기꺼이 말한다. "우리가 이 쟁점을 볼 때, 이것은 대규모의 정부 확대를 위한 처방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우리가 이런 조치를 취하기 전에 과학을 다시 한 번 살펴봅시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보수주의 집단과 자유방임주의 집단은 멈추고 말합니다. 이것을 하나의 신조로서 그저 받아들이지 맙시다. 우리 자신의 연구를 실제로 수행합시다." 이것이 이해해야 할 중요한 점인데, 거부주의자들을 추동하는 것은 기후변화에 관한 과학적 사실들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실들이 현실 세계에 대해 품고 있는 함의들에 대한 반대이다.

 

무심코 그럴지라도 배스크가 서술하고 있는 것은 최근에 기후변화에 대한 믿음의 극적인 변화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점점 많아지고 있는 일단의 사회과학자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현상이다. 예일 대학의 문화적 인지 연구과제에 참여한 연구원들은 정치적/문화적 세계관이 "어떤 다른 개인적 특성보다 더 강력하게 지구온난화에 대한 개인들의 믿음"을 설명한다는 점을 알아내었다.

 

강한 "평등주의적" 세계관과 "공동체주의적"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집단 행동과 사회 정의를 향한 성향, 불평등에 대한 우려, 그리고 기업 권력에 대한 의심으로 특징지워지는)은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합의를 압도적으로 수용한다. 반면에, 강한 "위계적" 세계관과 "개인주의적" 세계관를 지닌 사람들(가난한 사람들과 소수자들을 위한 정부 보조에 대한 반대, 기업에 대한 강한 지원, 그리고 우리 모두가 우리가 마땅히 얻을 만한 것을 얻는다는 믿음으로 특징지워지는)은  과학적 합의를 압도적으로 거부한다.

 

예를 들면, 가장 강한 "위계적" 관점을 드러내는 미국인 집단 가운데 11%만이 기후변화를 "매우 위험"하다고 평가하는 반면에, 가장 강한 "평등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미국인 집단 가운데 69%가 그렇게 평가한다. 이 연구의 주저자인 예일 법대의 교수 댄 카한은 "세계관"과 기후변화의 수용 사이의 이런 단단한 상관관계의 원인을 "문화적 인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정치적 성향에 상관없이―가 우리의 "좋은 사회에 대한 선호하는 관점"을 보호하도록 고안된 방식으로 새로운 정보를 걸러내는 과정을 가리킨다. 카한이 <<네이처>>에서 설명했듯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결하다고 알아채는 행동이 그럼에도 사회에 유해하고, 비천하다고 알아채는 행동이 사회에 유익하다고 믿는 것이 당혹스러운 일이라고 알아챈다. 그런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그들과 그들의 동료들 사이에 쇄기를 박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는 강한 감정적 성향을 지닌다." 달리 말해서, 여러분의 세계관이 산산조각나기보다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 항상 더 쉬운데, 이것은 숙청 절정기의 완고한 스탈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자유방임주의적 기후 거부자들의 경우에도 참인 사실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들이 현실 세계로부터 얻은 단단한 증거의 도전을 받을 때, 그것들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그것들은 컽트가 되고 주변화된다. 소수의 맹신자들은 항상 여전히,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관련이 없으며, 그것은 규칙들을 충분히 엄밀하게 적용하지 않은 지도자들의 나약함이었다고 말한다. 스탈린주의 좌파에 이런 유형들이 있으며, 신나치 우파에도 존재한다. 역사상 이 시점에서 자유시장 근본주의자들은 비슷하게 주변적 지위로 쫓겨나서 <<선택의 자유>>와 <<아틀라스>>라는 자신들의 책을 조용히 애지중지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들이 이런 운명에서 구제된 유일한 이유는 최소 정부에 관한 그들의 관념이, 현실과 아무리 명백히 충돌하더라고, 세계의 억만장자들에게 여전히 매우 이익이 되어서 그들이 두뇌 집단에서 찰스 코흐와 데이비드 코흐 같은 사람들과 액슨모빌로부터 계속해서 생계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화적 인지" 같은 이론들의 한계를 가리킨다. 거부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세계관을 보호하는 것 이상을 행하고 있는데, 그들은 기후 논쟁의 물을 흐림으로써 이익을 얻을 것 같은 강력한 이익집단들을 보호하고 있다. 거부자들과 그런 이익집단들 사이의 유대는 잘 알려져 있고 잘 기록되어 있다. 하트랜드는 코흐 형제 및 리처드 멜론 스카이프와 관련된 재단들과 더불어 엑슨모빌로부터 백만 달러 이상(훨씬 더 될 것이지만, 그 두뇌 집단은 기부자들의 이름을 공표하기를 그만두었는데, 그 정보는 "우리 입장의 장점"에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을 받았다.

 

그리고 하트랜드 기후 회의에서 발표를 하는 과학자들은 거의 모두 화석연료 자금의 세례를 받고 있어서 여러분은 실제로 향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두 가지 사례만 인용하면, 회의의 기조연설을 한 카토연구소의 패트릭 마이클스는 한때 CNN에 나와서 자신의 자문회사 수입의 40%를 석유회사들로부터 얻으며, 나머지 수입 가운데 얼마를 석탄회사들로부터 얻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말했다. 회의 발표자들 가운데 다른 한 사람인 천체물리학자 윌리 순에 대한 그린피스의 조사를 통해, 2002년 이래로 그는 자신의 새로운 연구비 전부를 화석연료 이익집단으로부터 얻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화석연료 기업들이 기후과학의 기반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강한 동기를 지닌 유일한 경제적 이익집단이 아니다. 이런 위기의 해결이 내가 요약한 그런 종류의 경제 질서에 대한 심대한 변화를 요구한다면, 느슨한 규제, 자유무역, 그리고 감세로부터 이익을 얻는 모든 메이저 기업들이 두려워 할 이유가 있다.

 

매우 많은 것이 걸려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기후 거부자들이 대단히 불평등하며 고장난 현재의 경제 상황에 가장 많이 투자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거의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기후 인식에 관한 연구의 가장 흥미로운 발견 결과 가운데 하나는 기후변화의 과학에 대한 수용의 거부와 사회적 및 경제적 특권 사이의 명료한 연결이다. 압도적으로, 기후 거부자들은 보수적일 뿐 아니라 백인 남성인데, 즉 평균 이상의 소득을 버는 집단이다. 그리고 그들은 여타 성인들보다 자신들의 관점들을, 그것들이 아무리 명확히 틀렸다 하더라도, 대단히 확신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 주제에 관해 많이 논의되는 애론 맥크라이트와 라일리 던랩의 논문(기억하기 쉽게 "쿨한 멋쟁이들(Cool Dudes)"라는 제목을 단)은,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자신만만한 보수적인 백인들이 조사받은 성인들 가운데 나머지 사람들보다 기후변화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을 가능성이 거의 여섯 배라는 점을 밝혔다. 맥크라이트와 던랩은 이런 불일치에 대한 한 가지 단순한 설명을 제공하는데,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은 우리의 경제 체계 내에서 유력한 지위들을 과도하게 차지해 왔다. 기후변화가 산업자본주의적 경제 체계에 제기하는 방대한 도전을 고려하면, 기후변화를 거부하기 위해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이 체계를 정당화하는 강한 태도를 불러 일으키는 일이 놀랍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거부자들의 상대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 특권 때문에 새로운 경제 질서로부터 그들이 잃을 것이 더 많다는 것만은 아닌데, 그것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기후변화의 위험에 관해 더 낙천적일 수도 있다. 내게 이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하트랜드 회의에서 기후변화의 희생자들에 대한 공감의 전적인 부재로서만 서술될 수 있는 바를 드러내는 다른 한 발표자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약력에 따르면 "공간 건축가"로 소개된 래리 벨은, 그가 군중에게 약간의 더위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말할 때 충분한 웃음을 유발했다. "저는 일부러 휴스턴으로 이사했습니다!"(그 당시에 휴스턴은 미국에서 최악의 기록적인 한 해의 가뭄으로 판명될 사태의 와중에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지질학자 밥 카터는 "우리 인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사실상 세계는 더 더운 시기에 더 좋다"는 의견을 제의했다. 그리고 패트릭 마이클스는, 기후변화에 관해 걱정하는 사람들은 2003년의 치명적인 혹서 때문에 14,000명의 프랑스인들이 죽은 후에 프랑스인들이 행한 일을 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월마트와 냉방 시설을 발견했다."

 

이프리카 호른의 1,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바짝 마른 땅 위에서 기근에 직면해 있을 때 이런 우스개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매우 심란했다. 이런 냉담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거부자들이 기후변화에 관해 틀리더라도 몇 도의 온난화는 산업화된 국가들의 부유한 사람들이 걱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다. ("비가 내릴 때 우리는 피난처를 발견한다. 날씨가 더울 때 우리는 그늘을 발견한다"고 텍사스주 출신 하원의원 조 바튼은 에너지 및 환경 소위원회의 청문회에서 설명했다.)

 

어쨌든 다른 모든 사람의 경우에, 그들은 지원금을 찾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 가난에서 벗어나느라고 바빠야 한다. 내가 마이클스에게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들이 더 더워진 기후에 대한 값비싼 적응을 위한 비용을 치르는 데 도움을 줄 책임이 있는지 물었을 때, 그는 그런 국가들에게 자금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고 비웃었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들의 정치 체계는 적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더 자유로운 무역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

 

이 지점이 강경 우파의 이데올로기와 기후 거부 사이의 교차가 정말 위험해지는 곳이다. 그것은 그저 기후변화가 그들의 지배 중심적인 세계관을 뒤집을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런 "쿨한 멋쟁이들"이 기후과학을 거부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지배 중심적인 세계관이 그들에게 개발 도상에 있는 세계의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지적인 도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공감을 근절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제기하는 위험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긴급한 문제인데, 기후변화가 이전과는 거의 전적으로 다르게 우리의 도덕적 특성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합중국 통산성은, 환경보호국이 탄소 배출을 규제하기 못하게 막는 과정에서, 지구온난화의 경우에 "주민들은 다양한 행동적, 심리적, 그리고 기술적 적응 대책들을 통해 더 더워진 기후에 순응할 수 있다"고 한 청원에서 주장했다. 이런 적응 대책들이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점점 격심해지고 빈번해지는 자연 재앙 때문에 집과 직업을 잃게 되는 사람들에 어떻게 익숙해질 것인가? 우리는 물이 새는 배를 타고 우리의 해안에 도착한 기후 난민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우리가 그들이 피신하고 있는 위기를 초래했다고 인정하면서 우리의 국경을 개방할 것인가? 아니면, 훨씬 더 첨단적인 기술의 요새를 건설하고 훨씬 더 엄격한 반이민 법률을 채택할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자원 희소성을 다룰 것인가?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다. 희소 자원을 향한 기업의 추구는 더 탐욕스러워지고 더 폭력적으로 될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경작 가능한 토지는 더 부유한 국가들에게 식량과 연료를 제공하기 위해 계속 약탈당할 것이다. 가뭄과 기근이 유전자 조작 씨앗을 강제하는 구실로 계속 사용될 것이며, 농부들을 더욱 더 빚에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는 최후의 방울까지 채굴하기 위해 점점 더 위험한 기술들을 사용함으로써 석유 피크와 가스 피크을 초월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지구의 훨씬 더 방대한 영역을 희생 영역으로 바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국경을 요새화하고, 자원을 둘러싼 외국의 충돌에 개입하거나 스스로 그런 충돌을 개시할 것이다. 이른바 "자유시장 기후 해결책들"은, 우리가 탄소 거래와 탄소 상쇄 대책으로서의 숲의 사용에서 이미 보고 있듯이, 투기자본주의, 사기자본주의, 그리고 정실자본주의를 끌어들이는 자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기후변화가 가난한 사람들뿐 아니라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함에 따라, 우리는 온도를 낮추기 위해 대규모의 알 수 없는 위험을 지닌 기술적 해결책들을 점점 더 찾을 것이다.

 

세계가 따뜻해짐에 따라, 각자가 알아서 살고, 희생자들이 희생되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며, 우리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하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사실상 우리를 매우 냉엄한 상황에 처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거부 운동의 일부에서 거의 숨기지 않는 인종적 우월성에 관한 이론들이 맹위를 떨치며 복귀함에 따라 상황은 더욱 더 냉엄질 것이다. 이런 이론들은 선택 사항이 아닌데, 그것들은 전세계 개발도상 지역과 뉴올리언즈 같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우세한 도시들의 대체로 아무 죄가 없는 기후변화 희생자들에 대한 냉담함을 정당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쇼크 독트린>>에서 나는, 우파가 위기들을 초래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엘리트 계층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고안된 잔인한 이데올로기적 대의를 관철하는 데 어떻게 위기들―실제적인 것과 날조된 것―을 체계적으로 이용해 왔는지 탐구한다. 기후 위기가 괴롭히기 시작함에 따라 그것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일이다.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재앙으로부터 이익을 챙기는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현재 체계가 행하도록 확립되어 있는 일이다. 그 과정은 이미 잘 진행되고 있다.

 

유일한 기회는 어떤 대항적 민중운동이 이런 음울한 미래에 대한 실행가능한 대안을 제공하도록 확대될 것인지 여부이다. 그것은 그저 일련의 대안적 정책안들이 아니라 생태학적 위기의 핵심에 놓여 있는 세계관과 경쟁할 대안적 세계관― 이번에는 초개인주의라기보다 상호의존성에, 지배라기보다 호혜성에, 그리고 위계라기보다 협동에 묻어 들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적 가치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명백히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경영적 사고방식을 갖춘 비정부기구들의 적절한 부문에 의해 다루어지도록 모든 것이 단일한 "쟁점들"로 조각나기 전인 한 세기 전에 운동들이 투쟁의 목적으로 삼았던 그런 종류의 야심찬 전망을 요청한다. <<기후변화의 경제학에 대한 스턴 보고서>>의 말을 인용하면, 기후변화는 "우리가 여태까지 본 시장실패의 최대 사례이다." 아무튼 이런 현실은 진보적 항해에 확신을 잔뜩 불어넣고, 자유무역에서 금융 투기와 산업형 농업과 제3세계 채무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맞서 오랫동안 벌인 투쟁에 새로운 생기와 긴박성을 불어 넣으면서, 이 모든 투쟁을 지구생명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지에 관한 정합적인 서사로 우아하게 엮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다. 하트랜드 지지자들이 기후변화를 좌파의 책략이라고 분주히 부르고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좌파 인사들은 기후과학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어두운 악마의 맷돌"(그리고 물론 그런 맷돌들이 기후변화의 기원이었다) 이래로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는 점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있다는 사실은 고통스러운 아이러니이다. 기후변화는 최후의 일격이어야 하는데, 아테네, 마드리드, 카이로, 매디슨, 그리고 뉴욕에서 시위자들이 그들의 정부와 기업 엘리트의 부패를 비난할 때 기후변화는 흔히 각주에 불과하다.

 

문제의 절반은 진보주의자들―그들의 손은 치솟는 실업과 다수의 전쟁으로 가득차 있다―이 대규모 환경단체들이 기후 쟁점을 다룬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런 대규모 환경단체들 가운데 많은 단체가 기후 위기의 매우 명백한 기원들―지구화, 탈규제, 그리고 현대자본주의의 영구적 성장 추구(이것들은 경제의 나머지 부분의 파괴에 책임이 있는 동일한 힘들이다)―에 관한 어떤 진지한 논쟁도, 혐오스러울 정도로 정확히, 회피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자본주의의 실패와 대결하는 사람들과 기후 행동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인데, 소규모지만 용맹스러운 기후정의 운동―인종차별주의, 불평등, 그리고 환경 취약성 사이를 연결하고 있는 운동―이 그들 사이에 소수의 흔들다리를 연결하고 있을 뿐이다.

 

한편, 우파는 기후 행동을 경제적 아마겟돈을 위한 방책―석유를 시추하고 새로운 송유관을 건설하는 크게 필요한 새로운 일자리들을 막고 가구 비용을 상승시키는 확실한 방법―으로 묘사하는 데 전지구적 경제 위기를 활용할 수 있는 자유재량권을 가졌다.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경제적 위기와 생태학적 위기 둘 다를 벗어날 방법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필적하는 전망을 제공하는 시끄러운 목소리가 사실상 전혀 없는 상황에서, 두려움을 퍼뜨리는 이런 목소리는 준비된 청중이 있었다.

 

과거의 실수들로부터 배우기는 커녕, 환경운동의 한 강력한 분파는 기후에 관해 이기는 길은 대의를 보수적 가치들의 입맛에 더 맞게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동일한 재앙의 길을 따라 계속 더 내려가도록 추동하고 있다. 이것은, 환경운동이 유기농과 탈중앙집권화된 재생에너지 대신에 산업형 농업과 핵발전을 포용하도록 요청하고 있는, 신중하게 의도적으로 중앙집권주의적인 브레이크스루 연구소(Breakthrough Institute)로부터 들을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기후 거부의 등장을 연구하는 여러 연구자들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예일 대학의 카한 같은 몇 사람은, 대단히 "위계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고 조사되는 사람들이 규제에 대한 어떤 언급에도 화를 내는 반면에, 그들은 인간들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자신들의 믿음을 확인시켜 주는 거대한 중앙집권화된 기술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그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환경주의자들은 국가 안보에 대한 우려를 강조할 뿐 아니라 핵발전과 지구공학(지구온난화에 상쇄하기 위해 기후 체계에 의도적으로 개입하는 것) 같은 대응책들을 강조하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전략과 관련된 첫 번째 문제는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대규모 환경단체들이 기후 행동을 "에너지 안보"를 역설하는 방법으로 규정했으며, "자유시장 해결책들이" 사실상 미국에서 논의된 유일한 것들이었다. 한편으로 거부주의는 치솟았다. 그렇지만 이런 접근방식과 관련된 더 곤란한 문제는 그것이 거부주의를 고무하는 뒤틀린 가치들에 이의를 제기하기보다 그것들을 강화한다는 점이다. 핵발전과 지구공학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이 아닌데, 그것들은 우리를 이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한 정확히 그런 종류의 단기적인 오만한 사유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공포심에 사로잡힌 과대망상적인 엘리트 계층의 구성원들에게 그들이 여전히 우주의 지배자들이라는 점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의 일이 아니며, 필요한 일도 아니다. "쿨한 멋쟁이들" 연구의 공동저자인 맥크라이트에 따르면, 가장 극단적인 완고한 기후 거부자들(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보수적인 백인 남성들이다)은 미국인들 가운데 매우 소수인데, 대략 10%를 차지한다. 이런 인구가 유력한 지위에 엄청나게 과대대표되고 있다는 것은 참이다. 그러나 그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념과 가치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소규모지만 과도하게 유력한 이런 소수가 두드러지게 더 작은 권력을 행사하도록 문화를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

 

기후 진영의 몇몇 사람들은 유화 전략에 맞서 강하게 반격하고 있다. 유타에서 석유와 가스 임대의 타협된 입찰를 무산시킨 행위로 이 년 징역형을 치르고 있는 팀 드크리스토퍼는 올 오월에 기후 행동이 경제를 뒤집을 것이라는 우익의 주장에 관해 논평했다. "저는 우리가 그런 혐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그는 인터뷰어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경제를 붕괴시키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뒤집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것―우리가 만들어내기를 원하는 건강한 정의로운 사회―에 관한 우리의 전망을 시도하고 숨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작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경제와 사회의 급진적인 개편을 원합니다." 그는 덧붙였다. " 저는 일단 우리가 그것에 관해 말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동지들을 발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드크리스토퍼가 심층적인 경제적 전환을 요구하는 운동과 융합된 기후 운동에 대한 이런 전망을 표명했을 때, 확실히 그것은 대체로 허무한 공상처럼 들렸다. 그러나 바로 오 개월 후에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집회가 수백 개의 도시에서 광장과 공원을 점거함으로써 그것은 예언처럼 들린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실제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까지 많은 전선에서 이런 종류의 전환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점이 드러난다.

 

기후변화는 그 운동의 초기 문건들에서 추가 사항이었지만, 생태학적 의식―주코티 공원에서 식물에 물을 대기 위해 개숫물을 사용하는 정교한 "중수도 용수" 정화 체계에서 '포틀랜드를 점거하라'에서 조성된 단편적인 공동 정원까지―은 애초부터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 속에 섞여 있었다. '보스턴을 점거하라'의 랩톱과 휴대폰들은 자전거 발전기로 동력을 제공받으며, '워싱턴 DC를 점거하라'는 태양전지판을 설치했다. 한편,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의 궁극적인 상징―인간 확성기―은 탈탄소 해결책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연결들이 형성되고 있다. 석탄산업에 자금을 지원했다고 뱅크오브아메리카를 목표로 삼은 열대우림행동네트워크는 압류를 둘러싸고 은행을 목표로 삼고 있는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활동가들과 공통의 대의를 구성했다. 반(反)프래킹 활동가들은 가스가 계속 순환하도록 지구의 지반을 폭파하고 있는 바로 그 경제 모형이 이윤이 계속 순환하도록 사회적 기반도 폭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올 가을에 결정적으로 기후 운동을 로비스트들의 사무실로부터 홱 잡아당겨 거리로(그리고 감옥으로) 나서게 한, 키스톤 XL 송유관에 반대하는 역사적인 운동이 있다. 반키스톤 운동가들은, 기업의 민주주의 전복에 관해 우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국무부로 하여금 가장 민감한 국토의 일부를 가로질러 더러운 타르 사막 석유를 수송하는 송유관이 "환경에 제한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게 한 부패 과정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350.org의 필 애로뉴누가 서술하듯이, "월스트리트가 오바마 대통령의 국무부와 의회를 점거하고 있다면, 인민들은 월스트리트를 점거할 때이다."

 

그런데 이런 연결들은 기업 권력에 대해 공유하는 비판을 넘어 선다. 점거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을 박살내는 경제를 대체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경제가 확립되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듯이, 많은 사람들이 지난 십 년 동안에 뿌리를 내린 녹색경제적 대안들의 네트워크―공동체가 주관하는 재생에너지 계획들, 공동체가 지원하는 농업 및 농부들의 시장, 주요 거리들을 재생시킨 경제적 지역화 계획들, 그리고 협동조합 부문―에서 영감을 발견하고 있다. 이미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운동의 한 집단은 그 운동 최초의 녹색 노동자 협동조합(출판사)을 출범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 지역 식량 활동가들은 "식량 체계를 점거하라!"라는 운동을 펼쳤다. 그리고 11월 20일에는 "지붕을 점령하라"라는 운동―공동체 건물들을 위한 태양전지판을 구입하는 데 크라우드소싱을 사용하려는 조정된 노력―이 있었다.

 

이런 경제 모형들은 배출을 줄이면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공동체를 부활시킬 뿐 아니라, 그것도 체계적으로 권력을 분산하는 방식으로 행하는데, 그것들은 1%에 의한, 1%를 위한 경제에 대립된다. 사우스 브롱크스에서 그린워커 코퍼레이티브를 창립한 사람들 가운데 일인인 오마르 프레일라는, 수천 명이 광장과 공원에서 겪고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근육을 이완하는 것과 비슷"했다고 내게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이제 그들은 모임에서 뿐 아니라 자신들의 공동체 계획 수립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한다.

 

달리 말해서, 문화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순간이 참으로 차별화된다. 점거자들―"탐욕은 역겹다"와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표어가 적힌 표지판을 든―은 일찍이 자신들의 항의를 협소한 정책 요구에 한정하기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경제 위기를 초래한, 만연하는 탐욕과 개인주의라는 근본적인 가치를 겨냥하면서, 서로를 대우하고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는 본원적으로 다른 방식들―대단히 실행가능한 방식들―로 구체화했다.

 

문화적 가치들을 변화시키려는 이런 주도면밀한 시도는 "실제적" 투쟁들로부터의 일탈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불가피하게 만든 불안한 미래에서는 만인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과 깊은 공감 능력이 인간성과 야만성 사이를 가르는 유일한 점들일 것이다. 기후변화는 우리를 확고한 사선에 세움으로써 바로 이런 심대한 사회적 및 생태학적 전환을 위한 촉매로서 쓰일 수 있다.

 

결국 문화는 유동적이다. 문화는 변할 수 있다. 그것은 항상 일어난다. 하트랜드 회의의 사절들은 이것을 알고 있는데, 그래서 그들은 매우 단호하게 자신들의 세계관이 지구 생명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입증하는 산더미 같은 증거를 숨긴다. 나머지 우리들의 과업은 같은 증거에 입각하여 매우 다른 세계관이 우리의 해방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