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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틴 로버츠: 서평-인류세의 충격: 지구, 역사 그리고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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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 8.

 

서평-인류세의 충격: 지구, 역사 그리고 인간

The Shock of the Antropocene: Earth, History, and Us (book review)

 

―― 오스틴 로버츠(Austin Roberts)

 

인류세는 한 시대와 더불어 어떤 조건을 가리키는 이름인데, 충적세 이후의 지질 시대 및 점점 더 취약해지고 있는 인간들과 비인간들의 얽힘을 가리킨다. 2000년에 화학자 파울 크루첸에 의해 대중화된 이래로 인류세는 강단과 더 넓은 문화에서, 특히 기후 변화를 다루는 기사들과 서적들에서 자주 나타났다. 인류세는 환경 위기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낱말에 불과한 듯 보일지라도, 그것은 "인류에서 비롯된 지질학적 혁명"(xi)을 명명함으로써 더 나아간다. 현재 많은 과학자들이 우리는 비교적 안정된 기후 덕분에 오 대륙에 걸쳐 인간 문명들의 번영이 가능했던 지난 11,500년 동안의 지질 시대인 충적세에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는 것에 동의한다. <<인류세의 충격>>에서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보뇌이(Christophe Bonneuil)와 장-밥티스트 프레소(Jean-Baptiste Fressoz)는 인류세, 즉 "새로운 인간 시대"로의 이런 전환이 품고 있는 깊은 의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인류세는 언제 시작되었는가? 많은 과학자들이 그것은 19세기 산업 혁명 동안 이산화탄소 수준을 284ppm이라는 충적세 최대 농도 너머 290ppm(현재는 400ppm 이상)으로 상승시킨 석탄 사용의 증가와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크리스토프 보뇌이와 장-밥티스트 프레소가 설명하듯이,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지질학적 크기의...단절"을 특징지었다. "인간 활동이 지구 체계의 생물학과 지질학을 매우 심대하게 변형시킨 것은 화석 연료의 힘 때문이었다."(16) 지금까지 인간 활동은 계속해서 지구를 심대한 방식으로 변형시켰다. 현재의 이산화탄소 수준은 수백만 년 동안 엇비슷한 적이 전혀 없었다. 지구 온난화는 1500만 년 동안 비견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예측된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생물다양성의 대멸종은 이전 45억 년 동안 다섯 번 일어났을 뿐이다. 종 분포는 거대하게 수정되어 버렸다. 대규모의 도시화, 산업적 생산, 채광 그리고 농경 활동에 대한 증거는 플라스틱과 살충체 같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물질들과 더불어 층서학적 기록 속에 새겨질 것이다. 그래서, 지금부터 수백만 년 동안, 이 모든 것이 얼음 코어와 퇴적학적 기록에 인간 활동의 지질학적 증거를 남길 개연성이 매우 높다.


보뇌이와 프레소(지금부터 BF)는 인류세의 과학, 역사 그리고 철학을 탁월하게 소개할 뿐 아니라, 그것의 공식 서사에 반대하는 일련의 강력한 논증도 제시한다. 확실히 그들은 인류세라는 개념 속에서 가치를 찾아내며,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의 한 판본을 수용한다. 인류세는 근대성에서 심화된 사유의 이분화 양식들에 필연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과 문화 사이의 분열, 인간의 역사와 지구 생명의 역사 사이의 분열을 폐기하"(19)기 때문이다. 그런 사유는, 급진적인 인간중심주의, 개체주의 그리고 거의 무한한 것으로서의 자연의 외부화―그래서 행성적 한계가 보이지 않게 만든다―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류세로의 진입을 위한 문화적 전제 조건"을 형성했다. 그래서 근대 과학은 비정치적인 자연에 관여하게 되는 반면에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비자연적인 사회/문화에 집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류세는 "서양의 산업적 근대성 전체가 지구적 토대 너머에 있는 것으로 표상하는 세계 속으로 지구가 귀환하는 것"을 알림으로써 이런 견해들을 전복한다. 그것은 행성적 한계를 확대하고, 그래서 자연을 자원을 채굴하고 폐기물을 쌓아두는 장소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제 및 정치 이론들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자연과 사회라는 이원론을 폐기함으로써 인류세는 사회가 "생물물리학적 과정"을 겪게 되는 한편으로 물질-에너지의 흐름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인간 활동에 의해 양극화"되는 세계관을 수반한다. 이런 세계관을 긍정하는 BF는 그들의 시각이 화이트헤드와 들뢰즈의 철학,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학 그리고 제이슨 무어의 생태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강조한다.


인류세의 개념적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BF는 그것의 공식적인 "각성의 서사"는 틀림없이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서사는 이렇게 전개된다. 이제 인류는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대자연의 다양한 거대한 힘들에 필적하는 결정적인 지질학적 힘이다. 과학자들은 영웅인데, 왜냐하면 그들이 환경 위기와 인간의 지속 불가능한 방식들에 대해 우리를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이런 위기를 촉발한 잘못을 저지른 반면에, 자신들이 지구를 파괴하고 있었다는 우리의 과학 또는 각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과학자들 덕분에 알고 있고, 그들이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를 기대해야 한다.


그렇지만 BF는 이런 서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그것은 인류세를 촉발한 점에 대해 모든 인간이 똑같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처럼 인류에 관한 추상적인 개념 구상을 수반한다. 인간중심적인 이분화 세계관을 조장했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인류세로 진입시킨 채굴적인 사회-경제적 메커니즘들도 제정한 것은 "부르주아 및 산업 계몽주의"의 특수한 인간들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BF는 분화된 인간의 역사들(권력, 계급 등)을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적이고 탈식민주의적인 망을 고수한다. 게다가, 인류세의 원인들이 분화되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인류세의 인간적 결과들도 "공통적이지만 분화되어"야 하는 것으로 간주될 필요가 있다.


둘째, BF는 인류세의 공식 서사가 근대인은 환경적 경고가 없었다고 잘못 단언한다고 주장한다. 사실상, "지구의 인류세의 진입은 환경에 무지한 열렬한 근대주의가 아니라 인간의 지구 파괴에 대한 수십 년 동안의 성찰과 우려에서 비롯되었다."(76) 근대 초기 사회들이 기계론적 세계관에 의해 균일하게 지배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저자들은 주장한다. 아마 놀랍게도, 산업적 착취에 반대한 유기체론적 우주론과 "환경적 신중함"은 명백히 꽤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런 "신중함"이 정말로 얼마나 퍼져 있었는가? 그리고 자연을 고유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기보다 도구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에 있어서 이런 세계관은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이었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전의 환경적 감성을 무시하는 것은 인류세를 탈정치화하는 것이라는 주장에 있어서 저자들은 설득력이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전에 환경적 담론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권력자들―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고의로 환경을 파괴했다―에 의해 적극적으로 억압당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충격적이게도, 저자들은 근대인은 산업적 계획이 환경적으로 파괴적인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런 계획을 계속했다고 증명한다. 예를 들면, 인류가 더러운 석탄과 동행하는 "단기적인 위대함" 아니면 그것이 없는 "지속적인 평범성" 사이의 선택에 직면했다는 것을 인식했을 때, 경제학자 윌리엄 제본스(William Jevons)는 1866년에 전자를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했다. 저자들이 적고 있듯이,


"아무리 심란하게 만들지라도, 우리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은 우리 조상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적으로 알고 있으면서 환경을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문제는 "환경적 각성"의 출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인데, 인간을 환경의 산물로 간주하는 동시에 환경을 훼손하고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는 근대성의 정신분열증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다."(197)


저자들이 인류세 서사에 대해 제기하는 세 번째 비판은 그 서사가 더 주의 깊게 분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일반화된 "근대성"을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책 전체를 통해서 BF는, 인류세의 실제적 뿌리는 더 구체적으로 산업적 근대성의 힘들―자본주의("자본세"), 근대적 전쟁("타나토세"), 소비주의("파고세") 그리고 아메리카 제국주의와 영국 제국주의―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역사적으로 상세한 주장들을 제시한다. 이런 구조적 힘과 산업적 과정들은 지구를 변형시킴에 있어서 독특하게 강력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들은 너무나 쉽게 비정치적인 "초월적인 견해"에 대한 기초가 되는 인류세 서사를 다수화하는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그러므로 일반화된 "근대성"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은 무익하고 부정확하다. 지금까지 권력 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환경 파괴를 가능하게 한 방식에 관한 후속 탐구에 대한 저자들의 요청은 전적으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과학자들의 소집단을 무지한 대중 위에 격상시킴으로써 인류세의 공식적인 서사는 "기술자 지배 체제", "과두 지배 체제" 그리고 "시장중심적 지(地)력"(49, 288)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BF는 걱정한다. 획기적인 균열과 참신성이라는 유혹적인 수사를 활용하는 이런 거대 서사를 비판하지 않은 채, 과학자들은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규정하고 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일을 처방하는 데 있어서 독점적인 지위를유지할"(80) 것이다. BF는 현대 과학의 중요성을 긍정하지만, 다른 의견들이 청취될 수 있도록 민주적인 "아래로부터의 정치"도 유지되어야 한다. "지구 체제적 전문가들"에게, 특히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위험한 지구공학적 계획을 지지할 때, 해결책에 관한 모든 논쟁을 맡겨둘 수 없다고 BF는 주장한다. 그런 제안은 지구를 본원적으로 도구주의적인 견지에서 간주하고, 그래서 "그것을 전적으로 점유하고 기술적 자연, 즉 인간 활동이 완전히 스며들어가 있는 지구로 변형시키기 위해"(61) 지구의 타자성을 부인한다. 게다가, 이런 "기술적 해결책"은 "근대 사회의 기본적인 산업적 구조"(94)와 그것의 착취적인 자본주의적 체계―바로 이것들이 지구를 위해 이의를 제기하고 혁명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이다―에 관한 정말로 중요한 의문들을 무시한다.


이것은 인류세에 관한 진행 중인 논쟁들에 있어서 틀림없이 중요한 준거점이 될 중요하고 어려운 책이다. 과학, 역사 그리고 철학을 인상 깊게 버무리는 학제적 텍스트로서 이 책은 널리 읽을 만하다. 일반 독자는 인류세의 기원과 다양한 해석을 논의하는 이 책의 첫 번째 부분에서 특히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환경 윤리, 정치신학 그리고 생태신학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와 신학자에게도 유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