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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객체들의 민주주의-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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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 1.

 

- 아래 글은 최근에 대륙철학의 한 갈래로서 등장한 객체지향 존재론(OOO, object-oriented ontology)을 주창하는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온티콜로지(onticology)"라는 자신의 존재론을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책 <<객체들의 민주주의(Democracy of Objects)>>(2011)의 서론을 옮긴 것이다.

 

-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오픈 휴머니티즈 프레스(Open Humanities Press)에서 출판된 첫 번째 개방형 책(open access book)으로서 이 책의 pdf 파일은 이곳에서 내려받을 수 있다. 레비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것[개방형 책]은, 사람들이 마음이 크게 내키지 않는다면 아무도 살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런데 열람하기를 원한다면 여전히 열람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민주적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최소의 생태학적 발자국을 남길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디지털 형태와 페이퍼 형태 둘 다로 전 세계에 퍼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좋아한다." 

 

- 레비 브라이언트가 정치학자 크리스 코필드와 가진 인터뷰는 이곳을 보라.

 

- 출판사에서 배포한 이 책의 소개글을 옮겨 놓는다.

 

칸트 이래로 철학은 정신과 세계 사이의 관계 및 객체들에 대한 인간의 접근과 관련된 인식론적 문제들에 사로잡혔다. <<객체들의 민주주의>>에서 브라이언트는 이런 전통과 단절하여 다시 한 번 제일 철학으로서의 존재론의 기획을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그레이엄 하만의 객체지향 존재론뿐 아니라 로이 바스카, 질 들뢰즈, 니클라스 루만, 아리스토텔레스, 자크 라캉,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발달 체계 이론가들에 의존하여 브라이언트는 자신이 "온티콜로지"라고 부르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이 존재론은 존재가 전적으로 객체들, 특성들, 그리고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주체가 객체의 한 변양태라고 주장한다. 체계 이론가들과 사이버네틱스 이론가들의 작업에 의존하여 브라이언트는 객체들이 조작적 폐쇄성이라는 조건 아래 세계와 관계를 맺는 동역학적 체계라고 논증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물질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둘 다를 제대로 다루는 실재론적 존재론 내에서 반실재론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들을 통합할 수 있다. 온티콜로지는, 서로 다른 규모에서 모든 종류의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로 환원할 수 없는 상태로 동등하게 존재하고 객체들 사이의 역동적인 상호작용들 외부에 영원한 본질 같은 초월적 존재자들이 전혀 없는 평평한 존재론을 제시한다.

 

차례

 

감사의 글

서론: 마침내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하여

1장: 실재론적 존재론을 위한 근거

2장: 실체의 역설

3장: 잠재적 고유 존재

4장: 객체들의 내부

5장: 끌림의 체제, 부분, 그리고 구조

6장: 평평한 존재론의 네 가지 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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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마침내 주체 없는 객체를 향하여

 

...형이상학에서 경험적 방법의 효과는 유한한 정신을 많은 유한한 존재 형태에 속하는 것으로 진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다루는 것인데, 그것은 자체의 더 큰 완벽함과 발달에서 도츨되는 그런 존재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을 넘어서는 어떤 특권도 지니고 있지 않다. 만약 탐구가, 그런 결론이 있을 법 하지는 않는 듯 보이지만, 인지적 관계가 독특하다는 점을 증명한다면, 그것은 충실하게 수용되어야 하고 그 도식의 잔류물과 조화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백히 그 가정에 대한 보증은 없으며, 모든 경험은 정신을 함의하기 때문에 경험되는 것의 존재와 성질은 정신 덕택이라는 독단의 경우에는 훨씬 더 그렇다. 정신들은 사물들의 민주주의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가장 재능 있는 구성원들일 뿐이다. 존재 또는 실재에 대해서 모든 현존은 동등한 지위에 놓여 있다. 그것들은 탁월함에 있어서 다른데, 직업이 재능에게 열려 있는 민주주의에서처럼 가장 재능 있는 것들이 영향력과 권위 있는 위치에 오른다.  ―― 새뮤얼 알렉산더(Samuel Alexander) 

 

일반적으로, "객체(object)"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첫 번째 것은 "주체(subject)"이다. 우리의 두 번째 생각은, 아마도, 객체들이 고정되어 있고, 안정되어 있고, 불변하며, 그래서 사건 및 과정과 대조될 수 있다는 것일 것이다. 객체는 주체에 대립되는 것이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의문은 주체가 어떻게 객체와 관계를 맺거나 그것을 표상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문이라고들 한다. 그것 자체로, 객체에 관한 의문은 우리가 객체를 적절하게 표상하는지 여부에 관한 의문이 된다.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 속에서 실제로 객체를 접촉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우리의 표상들은 항상 객체를 "왜곡"하여 우리의 표상들이 실제로 저쪽에 존재하는 실재를 나타낸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지 하는 의문이 전개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객체들에 관한 의문을 제기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객체들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의문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물론, 여기서 모든 종류의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출현한는데, 우리는 결국 주체이고, 주체로서 우리는 우리의 표상들이 어떤 종류의 외부 실재와도 연관되는지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우리 자신의 정신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반실재론과 (곧 명백해질 이유들 때문에) 내가 인식론적 실재론이라고 부를 것 둘 다의 기본 도식은 자연의 세계와 주체 및 문화의 세계 사이의 분할이라는 도식이다. 그래서 논쟁은 표상의 지위를 둘러싸고 벌어진다.

 

표상의 도식 안에서 객체는 주체에 대립되는 하나의 극으로 다루어진다. 실재론과 반실재론 사이의 논쟁 전체는 이런 두 원이 중첩하는 방식의 결과로서 일어난다. 이런 두 영역 사이의 중첩이 그것들의 관계를 입증하거나 보증하는 듯 보이는 반면에, 이 중첩이 하나의 이율배반 또는 근본적으로 애매한 것도 포함한다. 표상은 두 영역 사이의 중첩 영역에 놓여 있기 때문에 표상이 정말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와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대단히 애매한 점이 있다.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은 주체와 객체 사이, 표상과 사태 사이의 대응 또는 적실화(adequation)를 찾는다. 그들은 참된 표상들과 상상에 불과한 것들을 구별하기를 원하며, 참된 표상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누가 세계를 표상하는지에 무관하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은, 참된 표상들은 주체나 문화에 의해 그것이 존재하는 대로 존재한다고 서술되는 것에 결코 의존하지 않는 세계를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식론적 실재론은 계몽주의적 비판의 기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세계의 참된 본성을 발견하여 인식론적으로 정당화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데 필요한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미신과 몽매주의를 폐기하고자 노력한다.

 

반면에, 반실재론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계가 여전히 주체, 정신, 그리고 문화에 속하는 영역 내에 놓여 있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오른쪽 원 안에서 음영으로 나타낸 공간은 자연과 객체의 영역이 배제되었고 지워져 버렸으며, 그래서 우리는 주체와 문화의 원 안에 주어진 것들만 탐구할 것이라는 점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반실재론자는 주체, 정신, 그리고 문화에 독립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지만―즉, 그는 버컬리주의적인 주관적 관념론자이거나 헤겔주의적인 절대적 관념론자가 아니다―그럼에도 반실재론자는 표상들이 전적으로 주체와 문화의 영역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표상들이 우리의 구성물에 불과하여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지 않는지, 또는 이런 표상들이 실재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표상되는지 여부에 무관하게 있을 그대로 나타내는 참된 표상들인지 결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적 논증은 일반적으로 표상이 구성물인지 아니면 실재에 대한 참된 표상인지 결정할 수 없다는 점에 근거를 두지만, 그것은 흔히 표상은 구성물이고 실재는 우리가 그것을 표상하는 방식과 전적으로 다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테제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러므로, 반실재론자의 경우에, 진리는 표상과 실재 사이의 대응이라기보다 간(間)주체적 의견 일치, 합의, 또는 공유된 표상이 된다. 사실상 실재라는 바로 그 개념이 우리에 대한 실재(reality for-us) 또는 우리가 세계를 경험하고 표상하는 방식으로 변환된다. 인식론적 실재론과 마찬가지로, 반실재론도 흔히 비판이라는 기획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반실재론자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예증하고자 노력하거나, 아니면 그 대신에 세계에 대한 "서술"이 역사, 문화, 언어, 또는 경제적 계급에 따라 변하도록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지 보여주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반실재론자는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기능하는 많은 "세계상"의 배후에 놓인 보편주의적 위선의 가면을 벗길 수 있다.

 

이런 두 세계 도식의 결과로서, 객체에 관한 의문, 즉 실체란 무엇인가에 관한 의문은 우리가 객체들을 어떻게 아는지 그리고 알고 있는지에 관한 의문으로 교묘하게 전환된다. 객체에 관한 의문은 인간과 객체 사이의 특수한 관계에 관한 의문이 된다. 그 다음에 이것은 우리의 표상들이 실재와 연관되는지 아닌지에 관한 의문이 된다. 인식론 주위를 공전하는 그런 의문은 최소한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의 강박이었다. 이전의 철학이 실체의 참된 본성에 대한 맹렬한 논쟁들에 관여한 반면에, 대략 데카르트와 함께 철학의 주요한 의문은 주체가 객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또는 객체를 어떻게 표상하는지에 관한 의문이 되었다. 지식과 관련된 이런 논쟁들에 걸린 몫도 작지 않았다. 쟁점이 된 것은 우리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아는지에 관한 무미건조한 의문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의 토대로서의 지식의 정당성이다. 서양철학에서 르네상스 시기와 계몽주의 시기 동안 지식에 관한 의문들이 매우 열기를 띤 까닭은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탄생, 군주제와 교회라는 형식을 갖춘 전통적 권위의 부식, 종교개혁, 민주주의의 등장, 그리고 새로운 과학의 등장이 동시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식에 관한 의문들은 정치적 의문들이었는데, 군주제와 교회―그 둘은 대단히 얽혀 있었다―에 대한 지주 또는 토대로서 쓰였던 권위로부터의 논증들을 동시에 겨냥했고, 모든 인간이 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거나(데카르트와 아마도 로크) 지식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으며 정서, 관습, 또는 견해로 구성될 뿐(흄)이라는 예증을 통해서 참여민주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어쨌든 근대성을 열었던 그 두 가지 선택지―데카르트와 흄―는 정치적 층위에서 대체로 같은 결과를 초래했는데, 개인들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국가 구성에 참여할 권리가 있는 까닭은 a) 모든 인간은 알 수 있고, 그래서 자신들을 지배할 특수한 권위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거나, 아니면 b) 인간들은 절대적 지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가 지식에 정초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어떤 권위도 대중을 통제하고 조정하는 데 열중하는 불법 행상인이라는 것이다. 요약하면, 이 논쟁 배후에 놓여 있던 것은 평등주의 또는 만인이 통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에 관한 쟁점이었다. 이런저런 형태로 이 논쟁과 이런 두 가지 선택지는 우리 시대로 계승되었으며, 인식론으로의 이동이 최초로 일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격렬하고 정치적이다. 한편으로는 과학이 실재에 대한 유일한 참된 표상을 제공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친과학적 군중이 있다. 배경에 숨어 있는, 정치 영역에서 미신과 종교가 수행하는 역할에 맞선 오래된 전투를 감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사회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우리를 암흑시대로 다시 빠뜨릴 우려가 있는 미신과 종교의 비합리성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여기서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이 떠오른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인간, 인종, 성별, 그리고 심지어 실재에 관한 우리의 관념들이 구성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회구성주의자들과 반실재론자들이 있다. 그들의 걱정은 지식에 대한 어떤 명백한 주장도 배타적이고 압제적인 지배력이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인 듯 보이는데, 그들이 이런 결론에 이른 데에는 정당한 이유나 역사적 선례가 없지 않다.

 

항상 그렇듯이, 인식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투들은 궁극적으로 윤리와 정치에 관한 의문들이다. 베이컨이 언급했듯이, 지식은 힘이다. 그리고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주변 세계를 통제하거나 지배할 수 있게 한다는 의미에서의 힘일 뿐 아니라, 오히려 누가 말할 자격이 있는지, 누가 통치할 자격이 있는지 결정한다는 의미에서의 힘이기도 하며, 사람들과 다른 존재자들이 사회적 질서 안에서 올바르게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힘이다. 그렇다. 지식에 관한 의문들은 순수한 의문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삶, 통치, 그리고 자유와 밀접하게 관련된 의문들이다. 인식론의 무미건조한 사변에서 즉각적으로 명백하지는 않을지라도, 한 사람의 인식론은 사회적 질서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관한 관념을 매우 많이 반영한다.

 

그럼에도 거의 모든 분과학문을 혼란에 빠뜨린, 인식론을 둘러싼 모든 열띤 논쟁에서 우리는 객체에 관한 의문이 인식론적 의문, 즉 우리가 객체를 어떻게 아는가에 관한 의문이 아니라, 객체들이 무엇인지에 관한 의문이라는 핵심을 놓치는 듯 보인다. 객체들의 존재는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한 의문과 다른 별개의 쟁점이다. 여기서, 물론, 객체들의 존재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객체를 알아야 한다는 점은 명백한 듯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맞다면, 당연히 인식론 또는 지식에 관한 의문들이 존재론에 선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만 나는 이어지는 글에서 존재론의 의문들은 인식론의 의문들로 환원될 수도 없으며, 또한 존재론의 의문들이 인식론의 문제들 또는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에 관한 의문들에 선행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어떤 객체가 무엇인지는 그 객체에 대한 우리의 접근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글에서 보게 되듯이, 그런 접근은 대단히 한정적이다. 그럼에도,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대단히 한정적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객체들의 존재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접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객체들이란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라는 테제를 피해야 한다.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이 주장했듯이, 객체들은 소여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이 책 자체는 탄탄한 실재론을 옹호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어지는 모든 것에 중요한데, 여기서 옹호되는 실재론은 인식론적 실재론이 아니라 존재론적 실재론이다. 인식론적 실재론은, 우리가 존재하든 말든 간에, 우리의 표상들과 언어가 세계를 실제로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정확한 거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참된 표상들과 환영들을 구별하고자 한다. 반면에, 존재론적 실재론은 객체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한 테제가 아니라, 그것들을 표상하기 위해 우리가 존재하든 말든 간에 객체들 자체의 존재에 관한 테제이다. 그것은, 세계는 객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런 객체들은 가지각색이고, 정신, 언어, 문화적 존재자들과 사회적 존재자들, 그리고 은하, 돌, 쿼크, 완보 동물 등 같은, 인간에 독립적인 객체들이 다양하게 포함된다는 테제이다.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실재론은 객체들을 인간들의 구성물로 다루기를 거부한다. 나는, 모든 객체들이 서로 번역하는 것은 참이지만, 번역되는 객체들은 그것들의 번역물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우리가 보게 되듯이, 존재론적 실재론은 인식론적 실재론 또는 일반적으로 "소박한 실재론"이라는 경멸적인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을 철저히 논박한다. 처음에는 존재론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실재론 사이의 구별이 아무 차이도 만들어내지 앟는 차이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여주기를 바라듯이, 이런 구별은 우리가 많은 의문을 제기하고 다양한 현상을 이론화하는 방식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인식론이 현재 철학에서 누리고 있는 패권에서 비롯되는 문제적 결과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철학을 전적으로 인간중심적인 준거 상황에 처하게 한다는 점이다. 실체에 관한 존재론적 의문은 실체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관한 의문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실체에 관한 모든 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적 준거를 포함한다. 실체에 관한 우리의 논의들을 둘러싸고 있는 근저의 뜻이나 감추어져 있는 조건은 항상 "인간에 대한"이라는 언급을 암묵적으로 포함한다. 이것은, 개인들의 의도들을 넘어서는 언어와 구조 같은 다양한 비인격적인 익명의 사회적 힘들을 지지함으로써 주체를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반인간주의적 구조주의자들과 탈구조주의자들의 경우에도 참이다. 여기서, 사회와 문화가 인간적 현상이고 모든 존재가 이런 힘들에 종속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인간중심주의적인 우주의 궤도에 있다.

 

반면에, 이 책은 주체 없는 객체, 즉 주체의 앞에서 대립하는 극으로서의 객체라기보다 단독으로 존재하는 객체를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달리 서술하면, 이 에세이는 주체의 응시, 표상, 또는 문화적 담론의 대상이 아닌 독자적인 객체를 생각하려고 한다. 요약하면, 이것이 객체들의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바이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다루어져야 한다거나 모든 객체가 인간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의 정치적 테제가 아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는,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가 매우 멋지게 서술했듯이, 모든 존재는 동등하게 존재하지만 똑같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존재론적 테제이다. 모든 객체가 동등하게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떤 객체도 다른 한 객체에 의해 구성된 것처럼 다루어질 수 없다는 주장이다. 객체들이 똑같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은 객체들이 집합체(collective) 또는 조립체(assemblage)에 다른 정도로 기여한다는 주장이다. 요약하면, 주체나 문화 같은 객체도 다른 모든 것의 근거가 전혀 아니다. <<객체들의 민주주의>> 자체는 인간들의 응시라는 족쇄에서 풀려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객체들의 존재를 생각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민주주의가 인간의 배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얻는 것은 구분들의 재구성과 인간의 탈중심화이다. 요점은 우리가 인간보다 오히려 객체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체계화는 인간들이 객체들과 다른 어떤 특수한 범주를 구성한다는 전제, 즉 객체들이 인간들에 대립되는 한 극이라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래서 그 체계화는 객체들이 상관물이거나 인간들 앞에 서 있는 대립물이라는 전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 않다. 온티콜로지(onticology)―이어지는 존재론을 가리키는 이름―의 틀 안에서는 오직 한 종류의 존재, 객체들이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인간들은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에 존재하거나 거주하는, 나름의 특정한 힘과 역량을 지닌 다양한 종류의 객체들에 속하는 객체들이다.

 

우리가 객체지향 철학(object-oriented philosophy)과 온티콜로지에 의해 제안되는 구분들의 재구성을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형식의 법칙들(Laws of Form)>>에서 조지 스펜서 브라운(George Spencer-Brown)은 무엇이든 그것을 지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구분이 지시에 선행한다.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것은 세계 속의 무언가와 상호작용하거나, 그것을 표상하거나, 가리키는 것이다(지시는 다양한 형식을 띤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내가 태양이 빛나고 있다고 말할 때 나는 어떤 사태를 지시했지만, 이 지시는 빛과 어둠, 흐린 날과 맑은 날, 기타 등등의 사전 구분에 바탕을 두고 있을 것이다. 스펜서 브라운에 따르면, 모든 구분은 유표공간(marked space)과 무표공간(unmarked space)를 포함한다.

 

그림에서 직각은 스펜서 브라운이 구분의 표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유표공간은 지시될 수 있는 것을 드러내는 반면에, 무표공간은 배제되는 그 밖의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나는 한 장의 종이 위에 원 하나를 그릴 수 있고(구분), 이제 그 원 안에 있는 것을 지시할 수 있다. 스펜서 브라운의 구분 연산에서 두 가지 중요한 점이 도출된다. 첫째, 어떤 구분의 무표공간은 그 구분을 채용하는 사람에게 비가시적이다. 여러 사례에서 구분의 경계는 가로지를 수 있고 무표공간이 지시될 수 있다는 것이 참이지만, 어떤 구분이 적용될 때 그 구분의 무표공간은 그 구분을 전개하는 체계의 맹점이 된다. 구분의 무표공간에 존재하는 것은 그 구분을 적용하는 체계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구분의 무표공간은 구분에 의해 생성되는 유일한 맹점이 아니다. 구분의 무표공간에 덧붙여 구분 자체가 하나의 맹점이다. 구분을 적용할 때, 우리가 그 구분을 "통하여" 지시를 하는 한에 있어서 구분 자체가 보이지 않게 된다. 이 상황은 창을 통해서 나무에 앉아 있는 진홍색의 홍관조를 관찰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창은 보이지 않게 되고 우리의 모든 주의는 홍관조에 집중된다. 우리는 구분을 적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구분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구분을 적용하면서 구분을 알아차릴 수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구분을 적용하는 도중에는 구분이 시야에서 물러나 있는 덕분에, 구분은 지시되는 것의 특성들이 그 구분의 결과라기보다 지시되는 것 자체에 속하는 듯 보이게 하는 실재 효과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우리는 다른 구분들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우리는 특수한 일련의 구분 아래 세계를 은밀하게 통일하게 되며, 매우 다른 종류들의 지시가 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대체로 현대철학과 이론은 자체 구분의 유표공간 안에 주체나 문화를 놓는다. 그 결과, 객체들은 무표공간에 놓이며 주체와 다른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이런 논리의 체계화를 위해서는 피히테(Fichte)만 생각하면 된다. 어떤 구분 안에도 그것들 자체의 지시들을 가능하게 하는 하부구분들이 또한 있을 수 있다. 문화주의적 도식의 경우에, 주체/문화 구분은 내용을 표시하는 하부구분을 포함한다. 문제점은, 객체를 주체에 대립시키거나 주체와 다른 것으로 다룰 때 이런 사유의 틀이 객체를 주체의 견지에서 다룬다는 것이다. 여기서 객체는 하나의 객체, 즉 자체적으로 존재하는 자율적인 실체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표상이다. 이것의 결과로서, 세계의 다른 모든 존재자는 인간적 내용, 의미, 기호, 또는 투사들의 매체로서만 다루어진다. 유추를 통해 우리는 문화주의적 구분 구조를 영화와 비교할 수 있다. 여기서 객체는 매끈한 화면일 것이고, 영사기는 주체 또는 문화일 것이며, 영상은 내용 또는 표상일 것이다. 이런 도식 안에서 화면은 거의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것으로 다루어지고 모든 탐구는 표상 또는 내용에 집중된다. 확실히 화면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인간적 표상과 문화적 표상들의 매체일 뿐이다.

 

반면에,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존재론은 구분의 유표공간에 객체들을 놓기를 제안한다.

 

객체들이 구분의 유표공간에 놓일 때 하부구분은 지시될 수 있는 것을 축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시될 수 있는 것을 확대한다는 점이 강조될 것이다. 여기서 주체와 문화는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수한 유형들의 객체로 다루어진다. 게다가, 이제 비인간적 객체들을 인간적 내용의 매체로서 다루지 않는 채 지시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 결과, 이런 조작은 문화주의적 도식의 단순한 반전이 아니다. 그것은 주체보다 객체에 주목해야 한다거나 또는 객체를 주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다루기보다는 주체를 객체에 대립되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요청이 아니다. 오히려, 주체 또는 문화가 구분의 유표공간을 차지했을 때 객체가 표상으로 환원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객체가 사실상 주체와 내용으로 환원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의 틀 안에서 구분의 유표공간에 객체를 놓는 것은 주체를 다른 많은 객체들 가운데 하나의 객체로 변환시키며, 철학과 존재론 안에서 주체가 차지하는 특권적, 중심적, 또는 토대적 지위의 기반을 약화시킨다. 주체란 다른 모든 객체들에 관련된 일정한 준거점들이라기보다 객체들 속의 객체이다. 그 결과, 반인간주의(anti-humanism)과 탈인간주의(post-humanism) 같은 이론적 정향들이, 세계는 개별적 주체에 대립되는 비인격적인 익명의 사회적 힘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테제가 더 이상 아닌 한에 있어서, 어떤 형태가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단초를 얻는다. 우리는, 표상들로 환원될 수 없으며, 그것들이 우리의 표상들로 환원되는 인간에 대한 어떤 일정한 준거로부터도 자유로운 자체적으로 자율적인 행위자들로서 세계에 풀려 난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을 얻는다.

 

그러므로, 두 개의 양립불가능한 세계, 즉 자연과 문화의 견지에서 존재를 사유하기보다, 우리는 그 대신에 객체들의 다양한 집합체를 얻는다. 라투르가 설득력 있게 논증했듯이, 인식론적 실재론과 인식론적 반실재론 둘 다를 추동하는 근대주의적 도식 안에서 세계는 별개의 두 영역, 즉 문화와 자연으로 양분된다. 주체와 문화의 영역은 자유, 의미, 기호, 표상, 언어, 권력, 기타 등등의 세계로 다루어진다. 자연의 영역은 기계론적 인과성의 지배를 받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이런 분할 모형으로 작업하는 이론과 철학의 형태들에 내재하는 것은, 그것들의 독특한 특성들의 혼합이 전혀 일어날 수 없도록 그 두 세계가 전적으로 분리된 채로 존재해야 한다는 공리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많은 문화이론이 객체들을 기호나 표상들의 매체로서 언급할 뿐이고, 비인간 객체들이 집합체에 제공할 수 있는 어떤 비기호학적 또는 비표상적 차이들도 무시한다. 사회는 오직 사회적 특성들만 가질 것이고, 비인간 세계에 관련된 어떤 종류의 성질도 결코 지니지 않는다.

 

그런 문화주의적이고 근대주의적인 구분 형식은 사회적 분석 및 정치적 분석과 적절한 인식론에 대해 재앙을 초래한다는 것이 내 견해이다. 문화주의적 구분 양식 속에 함축된 구분 형식이 내용을 지시하고 비인간 객체들을 구분의 무표공간으로 추방하는 한에 있어서, 인간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들이 현재의 형태를 띠는 까닭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요인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기표, 의미, 기호, 담론, 규범, 그리고 서사들이 사회 조직이 왜 현재의 형태를 띠는지 설명하는 모든 어려운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이런 행위자들 모두가 인간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들의 구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이런 구분 양식 때문에 우리는 기술, 날씨 유형, 자원, 질병, 동물, 자연 재해, 도로의 존재 또는 부재, 물의 입수가능성, 미생물, 전기와 고속 인터넷 연결망의 존재 또는 부재, 수송 양식, 기타 등등의 형태를 한 비인간적이고 비기표적인 것들의 역할을 무시하게 된다. 이것들 모두와 그 외에 더 많은 것이 인간들을 특수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기표화하는 행위자들과 겹치게 되지만 그럼에도 비기표적인 차이를 제공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모든 사과를 내용의 바구니 안에 놓는 액티비즘(activism) 정치 이론은, 그것이 자체의 이데올로기 비판이 바라던 또는 의도한 사회 변화를 왜 산출하지 못하는지 계속 의아스러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좌절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엄청난 기후변화의 확연한 위협을 직면한 시대에 비인간 행위자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인식론적 전선에서 주체/객체 구분은 인식론 학자들로 하여금 대체로 실천과 비인간 행위자들이 지식 생산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무시하고 오직 명제와 표상들에 집중하게 하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 중요한 의문은 명제들이 실재에 대응하는지 여부와 대응하는 방식에 관한 의문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실험실 환경, 물질 및 장치와 맺는 관계, 기타 등등을 무시한다. 그것은 마치 실험과 실험실에 있는 존재자들이 그저 지식의 목적에 대한 수단으로 다루어지는 것과 비슷한데, 그것들은 명제의 내용에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것으로 안전하게 무시될 수 있으며, 그래서 지식 생산에서 중요한 결정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그런데 지식이 생산되는 현장, 실천, 그리고 절차들을 무시함으로써 명제들이 어떻게 실재를 표상하는지에 관한 의문은 전적으로 모호해지는데, 우리가 인간들의 세계와 비인간들의 세계가 만나는 공통의 장소와 명제들의 탄생을 식별할 수단을 지니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기 때문이다.

 

자연/문화 분할에 바탕을 둔 이원론적 존재론에서 집합체로 이동함으로써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철학은 모든 존재자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지위에 놓는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존재론적 영역, 즉 주체의 영역과 객체의 영역 대신에 우리는 인간과 사회를 비롯하여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객체들이 거주하는 단일한 존재 평면을 얻는다.

 

집합체라는 개념은 분리된 두 영역의 견지에서 존재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적절한 술어를 사용하면, 객체들이 서로 얽혀 있는 단일한 평면으로서 접근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와 자연은 틀림없이 결코 건너지 못하는 전적으로 다른 별개의 두 영역을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들은, 그것들이 없다면 그런 집합체들이 존재할 수 없을 모든 종류의 비인간들과 항상 얽혀 있다. 확실히, 그런 집합체들은 기호, 기표, 의미, 규범, 그리고 일단의 다른 여러 가지 존재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또한 그것들은 동물, 곡물, 날씨, 지리, 강, 미생물, 기술 등과 같은 모든 종류의 비기표적 존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존재론은 인간들과 비인간들을 동등한 지위에 놓음으로써 이런 얽힘에 주목하게 한다.

 

그렇지만, 집합체들이 반드시 인간들을 포함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인간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들이 있고, 인간들과 아무 관계도 없는 객체들의 집합체들이 있다.

 

요약하면, 모든 것이 인간들과 관계를 맺지는 않으며, 내가 이어지는 글에서 논증하듯이,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맺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연히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들을 포함하는 집합체들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존재론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모든 집합체를 인간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앞선 말한 것으로부터 내가 제시하고 있는 존재론이 상당히 독특하다고 추측될 수 있다. 나는 객체를 주체에 대립되는 존재자로 다루기보다는 주체를 비롯한 모든 존재자를 객체로 다룬다. 게다가, 근대성의 두 세계 가설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객체 또는 실체의 자율성을 확고하게 옹호하여 객체를 자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런 관계들이 인간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든 다른 객체들과 맺고 있는 관계이든 간에―로 환원시키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에, 근대주의적 도식의 기원은 관계론(relationism)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근대주의적 도식을 괴롭힌 아포리아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도 객체들은 그것들이 맺는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테제, 즉 관계론을 극복해야 한다. 따라서, 그레이엄 하만(Graham Harman)의 획기적인 객체지향 철학 작업을 좇아서, 나는 객체들이 모든 관계로부터 물러서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기묘한 테제의 결과들은 심대하다고 나는 믿는다. 한편으로, 객체들은 그것들이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 물러서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실체의 자율성과 환원불가능성을 보존할 수 있으며, 그래서 인식론적 실재론자들과 반실재론자들 사이의 끝없는, 그리고 이 지점에서는 오히려 교착 상태에 있는 논쟁을 회피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반실재론자들은 표상이 객체들에 접근할 수 없는 방식을 둘러싸고 끝없이 공전하며 인간들과 객체들 사이의 단일한 간극에 강박적으로 집중한 반면에, 객체지향 철학 덕분에 우리는 이 간극을 다원화할 수 있게 되어, 그것을 인간들의 독특한 또는 특권적인 특이성이 아니라, 관계들에 인간들이 포함되든 말든 간에 객체들 사이의 모든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으로 다루어야 한다. 요약하면, 인간들과 다른 객체들 사이의 차이는 종류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객체는 서로 번역한다. 번역(translation)은 정신이 세계와 관계를 맺는 방식에 특유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것의 결과로서, 어떤 객체도 어떤 다른 객체이든 간에 그것에 직접 접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철학은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에 대해서 기묘한 위치에 있다. 사변적 실재론은 2007년에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에 의해 조직된 골드스미스 컬리지 학술회의에서 일어난 느슨하게 결성된 철학운동이다. 이 행사의 참가자들―레이 브래시어(Ray Brassier), 이에인 해밀턴 그랜트(Iain Hamilton Grant), 그레이엄 하만, 그리고 퀑탱 메이야수(Quentin Meillassoux)―은 대단히 다른 철학적 입장들을 나눠 갖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실재론의 한 변양태을 옹호하며 반실재론 또는 그들이 "상관주의(correlationism)"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는 점에 있어서 통일되어 있다. 여타의 사변적 실재론자들과 함께,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철학은 객체들을 정신, 주체, 문화, 또는 언어의 구성물이나 상관물에 불과한 것으로 다루기를 거부하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옹호한다. 그렇지만, 반실재론자들과 함께, 온티콜로지와 객체지향 철학은 객체들이 서로에게 직접 접근할 수 없으며 각 객체는 그것이 비관계적 관계들을 맺는 다른 객체들을 번역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는 다른 실재론적 철학들의 인식론적 실재론을 거부하고, 표상들을 단속하고 비판을 탈신화화하는 기획에게 작별을 고한다. 차이는, 반실재론자들이 인간들과 객체들 사이의 단일한 간극에 집중하는 반면에 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는 이 간극을 모든 존재의 편재하는 특징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의 큰 장점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들이 현재 반실재론적 사유 계통을 괴롭히고 있는 교착 상태로 빠지지 않는 채 반실재론적 철학과 대륙의 사회 이론 및 정치 이론의 많은 발견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객체지향 철학과 온티콜로지의 기본 주장들에 친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객체지향 인물들의 목록이 온티콜로지 안에서 방향을 잡는 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온티콜로지의 인물들은 그레이엄 하만, 브뤼노 라투르, 이사벨 스땅제(Isabelle Stengers), 티모시 모턴(Timothy Morton), 이안 보고스트(Ian Bogost),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제인 베넷(Jane Bennett), 마누엘 데란다(Manuel DeLanda),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카렌 바라드, 존 프로테비(John Protevi), 월터 옹(Walter Ong), 들뢰즈와 가타리, 리처드 르완틴(Richard Lewontin)과 수전 오야마(Susan Oyama) 같은 발달 체계 이론가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로이 바스카(Roy Bhaskar), 캐서린 헤일즈(Katherine Hayles), 그리고 일단의 다른 사상가들이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들 사상가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사상가들보다 더 많이 나타나고, 다른 사상가들은 드물게 나타나거나 전혀 나타나지 않지만, 모두가 나의 사유에 깊이 영향을 끼쳤다. 이들 사상가들의 작업을 관통하는 줄은 인간과 주체의 심대한 탈중심화인데, 그럼에도 인간, 표상, 그리고 내용과 더불어 모든 종류의 비인간 객체들이나 행위자들을 내용과 기호들의 매체로 환원시키기를 거부하는 것과 결합된, 이런 행위주체들에 대한 부수적인 배려를 위한 여지를 마련한다. 내 논증을 전개할 때, 나는 브리콜뢰르(bricoleur)로서 작업을 진행하며, 다양한 분과학문과 사상가로부터 서로 반드시 정합적이지는 않는 근거들을 자유롭게 끌어내었다. 브리콜뢰르에 관해서 레비 스트로스(Levi-Strauss)는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브리콜뢰르'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일을 능숙히 수행하는데, 그렇지만, 기술자와 달리, 그는 그런 일의 목적에 맞게 고안되고 마련된 원료와 도구들의 유무에 좌우되지 않는다. 그가 사용하는 장비들의 세계는 한정되어 있으며, 그의 작업 규칙들은 항상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해 내는 것인데, 말하자면, 현재의 일, 또는 사실상 어떤 특수한 일과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건설이나 파괴의 잔류물로 재고를 갱신하게 하거나 풍성하게 하거나 또는 재고를 유지하게 한 모든 기회의 우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항상 한정되어 있고 이질적이기도 한 일단의 재료와 도구들로 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브리콜뢰르'가 사용하는 수단들의 집합은 어떤 일의 견지에서 규정될 수 없다(그 외에, 기술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서로 다른 종류들의 일이 있는 만큼 도구들과 재료들의 집합 또는 '장비 집합'이 많이 있다고 전제할 것이다). 그 집합은 잠재적인 용도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는데, 이것을 다른 식으로 그리고 '브리콜뢰르'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면, 그것의 요소들은 '항상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수집되어 간직되기 때문이다. 그런 요소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전문화되어 있는데, '브리콜뢰르'가 모든 업종에 대한 지식과 장비를 갖추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들 각각이 하나의 한정된 특정한 용도를 갖기에는 미흡하다. 그것들 각각은 일련의 현실적 관계들과 가능한 관계들을 나타내며, 그것들은 '조작자'인데 같은 유형의 어떤 조작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이어지는 글에서 내가 함께 벼리는 사상가들과 사유 노선들의 일부에 깜짝 놀라게 되는 독자들에게, 이것은 브리콜뢰르의 작품이며 내 자신의 지적 배경과 발달의 특이한 점들을 매우 많이 반영한다는 점을 떠올리는 것이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이어지는 글에서 라캉이 여러 번 나타나는데, 이것은 과거에 내가 현업 정신분석가로서 활동한 시간을 반영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내가 논증하듯이, 모든 객체는 하나의 집합체인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책에 대해서 들어맞는다. 책을 구성하는 재료들이 자체적으로 이질적일 수도 있는 경우에, 중요한 것은 이런 다른 재료들이 자체적으로 서로 정합적인지 여부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객체을 구성할 때 이런 부분들로 구성된 산물이 어느 정도의 정합성을 성취해 내는지 여부이다. 예를 들면, 독자들은 하만의 객체지향 존재론, 니클라스 루만의 자기생성적 사회 이론, 들뢰즈와 가타리의 잠재적인 것들의 존재론, 그리고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랄지도 모른다. 독립적으로 있을 때, 이런 다양한 이론들은 여러 방면에서 대립한다. 그렇지만, 브리콜뢰르의 작업은 독자적으로 서 있을 수 있는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이질적인 재료들을 함께 벼리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내가 그런 일을 해냈음을 바라지만, 이것이 객체지향 존재론이 체계화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며, 실재에 관한 한 이론으로 다른 이론들을 단속하는 일에도 특별히 관심이 없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이 인식론적 실재론자들이나 반실재론자들에게 자신들이 존재에 관한 두 세계 모형에서 비롯되는 인식론적 문제들을 극복하는 길을 발견했다는 점을 납득시킬 것 같지 않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말을 인용하여, 마셜 매클루언과 에릭 매클루언은 이렇게 서술한다. "새로운 과학적 진리는 그것의 적들을 설득하여 그들이 그 빛을 보게 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적들이 죽고, 그리고 그것에 친숙한 새로운 세대가 성장하기 때문에 승리한다". 이것은 철학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인 듯 보인다. 철학의 새로운 혁신들은 그것들의 적들을 논박하기보다는 어떤 의문들과 문제들에 몰두하기를 그만둘 뿐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은, 리처드 로티(Richard Rorty)의 충고를 좇아서, 논쟁에서 전적으로 빠져 나오려고 노력할 뿐이다. 객체지향 존재론자들은 이 세기 이상 동안 진행된 논쟁에 넌더리가 나게 되었고, 이런 입장들의 가능한 변양태들이 자체적으로 소진되었다고 믿으며, 다른 것들에 관한 토론으로 넘어가기를 바란다. 이것이 인식론적 단속에 대해 충분히 좋지 않더라도, 우리는 더 기쁘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고, 우리의 이른바 엄밀성의 결여를 포용하며, 우리가 인간들에 독립적인 실재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우리의 환상을 마음 속에 계속 품을 것이다. 그런데, 그저 넘어가는 그런 움직임은 철학에서 무시당하지 않는다. 아직까지 아무도 유아론자를 논박하지 못했고, 버컬리주의적인 주관적 관념론자도 논박하지 못했으며, 유아론도 극단적인 버컬리주의적 관념론도 결코 철학에서 진행되는 중요한 논쟁이었던 적이 없다. 철학자들은 대체로 이런 입장들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주의를 요하는 피해야 될 사례들로 사용할 뿐이다. 접근을 둘러싼 끝없는 논쟁들도 같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내가 옹호하는 존재론적 실재론에 인식론적으로 근거하는 논증들을 체계화하려고 노력한다. 제1장은 존재론적 실재론에 대한 근거를 개괄하는데, 로이 바스카가 전개한 선험적 실재론(transcendental realism)에 대단히 의존한다. 이 논증의 기본적 요점은 특성상 선험적이고, 실험적 활동이 가지적이고 가능하도록 세계가 특수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에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선험적인 존재론적 조건들에 관한 바스카의 표명은 내게 객체들의 기본 구조, 실체와 성질들 사이의 관계, 자체가 맺고 있는 관계들로부터의 객체의 독립성, 그리고 객체들의 물러서 있는 구조를 개괄하는 수단도 제공한다. 여기서 나는 반실재론과 인식론적 실재론의 끝없는 논쟁들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가정도 드러낼 것이다.

 

객체들의 기존 구조를 개괄한 후에, 제2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체 개념을 탐구하는데, 실체를 단순하거나 쪼갤 수 없는 것과 구별하고, 실체와 성질들 사이의 관계를 개괄한다. 여기서 문제 하나가 출현한다. 한편으로, 성질들은 변할 수 있지만 실체는 지속한다는 점에서 실체는 필연적으로 자체의 성질들과 구별된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실체로부터 모든 성질을 빼면, 우리는 다른 모든 실체나 객체와 동일할 어떤 벌거벗은 기체 또는 전적으로 특징이 없는 실체에 이를 듯하다. 게다가, 실체는 객체의 바로 그 존재, 그것의 개별성 또는 특이성인 반면에, 실체는 자체의 성질들을 통해 항상 표현될 뿐이다. 이 세 번째 문제에 대해, 나는 실체의 바로 그 존재가 물러섬과 동시에 자기타자화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실체의 구조는 자체의 성질들 속에서 자체를 타자화하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실체에 대한 그런 설명이 성공할 수 있으려면, 질적이지 않은 채 구조화되는 물러선 실체에 대한 설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질적이지 않는 그런 구조를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는가?

 

질적이지 않는 구조의 문제를 만난 후에, 제3장은 들뢰즈의 존재론 및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논의한다. 여기서 나는 잠재적인 것을 개별적인 것과 다른 무언가로 다루는 들뢰즈의 경향을 비판하며, 개별적인 것이 잠재적인 것에 선행하고, 그래서 잠재성은 항상 실체의 잠재성이라는 점을 논증한다. 나는 이것을 "잠재적 고유 존재(virtual proper being)"라고 부르고, 그것을 존재자의 힘들 또는 능력들로 다룬다. 잠재적인 것에 관한 들뢰즈의 개념은 실체를 질적이지 않은 채 구조화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수단을 제공한다. 나는 잠재적 구조에서 산출되는 성질들을 "국소적 표현들(local manifestations)"이라고 부르고, 그것들을 객체들에 의한 사건, 행위, 또는 활동들로 다룬다.

 

객체들이 서로 물러서 있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이것이 하만이 "대리적 인과관계(vicarious caus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의 문제이다. 객체들이 필연적으로 그것들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독립적일 때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는가? 제4장은 이런 의문을 다시 다루는데, 니클라스 루만의 자기생성적 이론에 의존하여 물러선 객체들 사이의 상호작용들을 설명한다. 그곳에서 나는, 모든 객체가 조작적으로 닫혀 있어서 그것들은 그것들의 환경에 대해 그것들 자체의 관계와 개방성을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은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로부터의 교란들을 정보, 즉 체계 상태들을 선택하는 사건들로 변환하는 방식에 의해 설명된다. 결과적으로, 이런 정보-사건들, 즉 체계 상태를 선택하는 사건들은 객체들의 국소적 표현들의 산출을 지배하는 행위주체들에 속한다.

 

제5장은 제약,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 그리고 시간과 엔트로피에 관한 의문들을 다룬다. 객체들이 서로 물러서 있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서로 제약할 수 있는가? 생물학의 발달 체계 이론의 근거들에 의존하여, 나는 객체가 자체 환경을 구성함과 동시에 자체 환경의 제약을 받아서 극소적 표현들이 특수한 형태들을 띠게 되는 방식에 관해 설명하고자 한다. 메레올로지(mereology)에 관한 절에서는 더 큰 규모의 객체들과 더 작은 규모의 객체들 사이의 관계들에 대한 설명이 전개되는데, 더 큰 규모의 객체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규모의 객체들의 자율성과 함께 더 큰 규모의 객체들도 그것들을 구성하는 더 작은 규모의 객체들로부터 자율적이라는 점을 옹호한다. 여기서 나는, 현대의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을 괴롭힌 많은 문제가 이런 기묘한 부분-전체 관계들에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초래된다고 주장한다. 이 장은 시간화된 구조,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객체들의 관계, 그리고 객체들이 어떻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엔트로피 또는 파괴를 저지할 수 있는지에 관해 논의함으써 끝난다.

 

마지막으로, 제6장은 온티콜로지가 옹호하는 평평한 존재론의 네 가지 테제를 개괄한다. 이런 테제들 가운데 첫 번째 테제는 모든 객체는 물러서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어떤 객체도 현전 또는 현실태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지 않는다. 물러섬은 우리가 객체들에 직접 접근할 수 없는 데서 초래되는 객체들의 우연한 특징이 아니라,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지 여부에 무관하게 모든 객체의 구성적 특징이다. 이 테제를 전개하기 위해 나는 라캉의 성별화(sexation) 도표들에 의존하는데, 그것들을 성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존재론적 담론―내재성 및 물러섬의 존재론과 초월성 및 현전의 존재론―으로서 다룬다. 평평한 존재론의 두 번째 테제는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모든 객체를 하나의 조화로운 통일체로 함께 묶을 "초객체(super-object)", 대(大)전체, 또는 총체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테제는, 인간들이 존재 내에서 어떤 특권적 지위도 차지하지 않고 있으며, 인간/객체 관계와 여타의 객체/객체 관계 사이에는 종류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테제는 모든 규모에서 모든 종류의 객체들은 동등한 존재론적 지위에 놓여 있다는 것인데, 그래서 주체, 집단, 허구, 기술, 제도 등은 쿼크, 행성, 나무, 그리고 완보 동물과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다. 평평한 존재론의 네 번째 테제 덕분에 우리는 인간들과 객체들 사이의 간극에만 전적으로 집중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다양한 시공간적 규모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유형의 행위자들 사이의 얽힘과 집합체들의 견지에서 생각하게 된다.

 

이어지는 글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세 가지 목표를 추구했다. 첫째, 나는 매우 상이한 두 가지 연구 프로그램의 종합을 제공할 수 있는 존재론적 틀을 제시하려고 노력했다. 문화연구 안에서는 의미작용에 집중하는 탐구 유형들과 기술, 매체, 그리고 물적 조건의 형태를 띤 물질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탐구 유형들이 날카롭게 구분된다. 비슷하게, 인문학의 더 폭넓고 지배적인 경향은 물질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내용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런 별개의 경향들을 통합할 수 있는 존재론적 틀을 추구했다. 그런데, 둘째, 그런 통합은 환원주의를 회피할 필요가 있다. 자연적 존재자들이 문화적 구성물들로 환원되지 말아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기호적, 그리고 문화적 존재자들도 자연적 존재자들로 환원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는 한 존재자를 다른 한 존재자에 근거를 두는 것, 즉 환원의 견지에서 사유하기로부터 얽힘의 견지에서 사유하기로 바뀔 필요가 있다. 얽힘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유형의 존재자들의 비환원성, 이질성, 그리고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째, 무엇보다도 나는 폭넓은 독자들이 접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매우 다양한 분과학문들과 실천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의문들과 기획들을 생성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는 책을 쓰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런 목표들을 달성하는 데 얼마간 성공했기를 바란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