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매튜 T.시걸: 오늘의 에세이-화이트헤드와 마르크스: 생태문명에 대한 코스모폴리틱스 접근법

댓글 2

카테고리 없음

2019. 7. 21.


화이트헤드와 마르크스: 생태문명에 대한 코스모폴리틱스 접근법

Whitehead and Marx: A Cosmopolitical Approach to Ecological Civilization


매튜 T. 시걸(Matthew T. Segall)


제목에 포함된 낱말들에 관한 언급:


"코스모폴리틱스"는, 이사벨 스탕게스(Isabelle Stengers)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 같은 사상가들이 수행한, 인간/자연과 사실/가치의 근대적 분리, 즉 화이트헤드가 "자연의 이분화"라고 부른 것을 넘어서 생각하려는 노력이다.


"생태문명"이라는 어구는 중국 공산당에서 비롯된다. 생태문명의 달성은 중국 공산당이 내세운 21세기의 목표 중 하나다. 중국에서는 현재 대략 35개의 대학원 과정과 연구센터가 화이트헤드의 사상과 과정학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에게, "문명화"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그 용어를 배타주의적 의미에서 사용하지 않고, 게다가 몇몇 동물(예를 들면, 다람쥐)은 문명화될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기꺼이 생각한다[『사고의 양태(Modes of Thought)』를 보라].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문명화란 역사를 형성할 수 있는 관념들―자유나 사랑 같은―의 창조력에 대한 의식적인 인식과 그것에의 참여를 뜻한다. 


"우리는 와글거리는 세계에, 동료 생명체들의 민주주의 속에 처해 있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과정과 실재』)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관념론자가 아니다. 관념은, 물질적 조건과 역사적 조건이 성숙되었을 때, 특수한 서식지가 관념의 이입을 뒷받침할 수 있을 때에만 힘을 발휘할 뿐이다.


마르크스를 비롯한 많은 근대인은 관념에 관하여 너무나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했다. 의식을 갖춘 인간이 무대에 등장하기 오래 전에 관념은 이미 진화 과정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관념은 단지 인간의 머리 속에서 구상되거나 인간의 손으로 종이 위에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화이트헤드는, 좋음이라는 관념이 물리학자에게 알려진 핵 반응과 전자기 복사에 못지 않게 태양빛과 태양열을 생성한다는 점, 아름다음이라는 관념이 베토벤의 9번 교황곡이나 모나리자뿐 아니라 공작새와 나비의 진화에서도 작동한다는 점을 감지할 수 있도록 생각을 확장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한다. 관념은 역사를 형성할 뿐 아니라, 지구 역사도 형성하고 사실상 우주 역사도 형성한다.


"민주주의의 기초는 현실태의 박동 하나하나가 갖는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것으로서의 가치 경험이라는 공통의 사실이다. 만물은 자신과 타자와 전체를 위한 모종의 가치가 있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사고의 양태』)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모든 박테리아, 벌집에서 꿀을 제조하는 모든 꿀벌, 사회에 참여하는 모든 인간, 은하에서 나선 운동을 하는 모든 항성은 자신과 타자와 전체를 위한 가치가 있다. 비인간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가치를 창출하는 행위자다.


화이트헤드는 (1944년에 자신의 부인 이블린과 저널리스트 루시엔 프라이스와 나눈 대화에서) 새로운 상대성 물리학과 양자 물리학을 창시한 물리학자들만큼 대범한 정치사상가가 대략 이전 50년 동안 존재했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믈론, 마르크스가 있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그에 관해 언급할 수는 없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계속해서 마르크스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예언자"로 서술하고, 그가 제시한 관념들의 실제적인 효력이 농민이 지배적인 사회[레닌 치하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최초로 발생했다는 사실의 독특한 적실성에 유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화이트헤드가 식량 주권의 중요성을 인식한 점에서 시대에 앞섰음을 알게 된다. 자본주의에 대한 어떤 진지한 저항도 토양과 씨앗으로 시작해야 한다.


가치란 무엇인가? 우리는 사용가치 대 교환가치, 객관적 가치 대 주관적 가치 사이의 차이점들을 논의할 수 있지만, 결국 마르크스는 가치란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 시간의 양으로 결정되는 사회적 관계라고 말한다. 인간은 원료나 죽은 자연에 작용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한다.


모든 가치가 정말로 인간 노동에 의해서만 산출되는가? 가치를 제공하는 인간 이외의 것은 전혀 없는가? 화이트헤드의 코스모스에서는 인간으로 불리는 무언가에 의해 전유될 한낱 물질에 불과한 것이나 죽은 자연, 생명 없는 원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우주의 바로 그 본질인 가치 경험을 손상시킬 권리가 없다." ―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사고의 양태』)


우리는 가치를 행위주체성에 관련시킬 수 있다. 로크든 마르크스든 하이에크든 간에 근대인들은 행위주체성을 한정함으로써 가치 창출을 인간에게 한정한다.


라투르에 따르면,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추상적이고 관념론적인 유물론은 세계의 활동성/행위주체성을 빠뜨린다.


라투르: "우리는 자신을 해방시키면서 날마다 자연의 얼개에 점점 더 밀접하게 얽히게 되었다는 매우 간단한 의미에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마르크스는 신진대사 균열을 인식했음에도 라투르가 "해방과 지배의 이중 과업"(『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이라고 부른 것을 신봉한 점에서 전적으로 근대인이었다. 해방 과업은 정치적인 것이었는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지배 과업은 기술과학적인 것이었는데, 자연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우리 집합체들의 얼개는 18세기의 시민과 19세기의 노동자를 흡수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했었다. 이제는 과학과 기술로 창출된 비인간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유사한 전환이 필요하다." ― 라투르(『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가이아에 관한 라투르의 기포드 강연은 지구를 근대적 지구본으로 떠올리는 우리의 심상을 뒤집어보도록 요청하는데, 그리하여 우리가 중대한 의미에서 지구로 둘러싸여 있고, 우리가 지구 안에 갇혀 있고, 묶여 있으며, 지구에 달라붙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저 너머로 탈출할 수 없는데, 머스크(Musk)와 베조스(Bezos)의 외계 유토피아주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근대 이후에 우리는 인간의 자유와 인간-지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인간은 근대인이 상상한 만큼 자유롭고 목적론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 역시 근대인이 상상한 만큼 멍청하고 결정론적이지 않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가장 나쁜 건축물을 꿀벌의 가장 좋은 건축물과 구별하는 것은 인간은 자신의 건축물을 물질적으로 구성하기 전에 관념적으로 고안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계획이 있다. 보기에 꿀벌은 맹목적인 본능을 따르는 자동 장치에 불과한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인간의 창의성이 작동하는 방식일까? 이것이 정말 꿀벌의 창의성이 작동하는 방식일까? 건축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Christopher Alexander)는 중세 성당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의도적이지만 중앙계획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논의한다. 이것은 곤충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건설하는 방식과 유사한데, 요컨대 지속하는 형태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낳는 간단한 조직 패턴을 형성하는 언어를 따른다. 마르크스가 상상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건설되는 건축물은 생활보다 오히려 영리를 위한 죽은 구조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 관념의 힘에 대한 의식이 관념에 대한 지배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관념이 우리를 소유하고 우리를 사용하는데, 결국 우리는 관념의 힘에 참여하는 공동 작업자이지 자유로운 발명가가 아니다.


도나 해러웨이: "자본세(Capitalocene)가 대문자 근대성와 진보, 역사로 장식된 근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어휘로 이야기되는 한, 그 용어는 정도가 같거나 더 심한 비판을 받게 된다. 인류세와 자본세 둘 다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언제나 너무나 거대한 이야기로 치달을 듯한 상태다. 마르크스는 그보다 더 잘했고, 다윈도 그러했다. 우리는 결정론과 목적론, 계획이 없는, 충분히 거대한 이야기를 말할 그들의 용기와 역량을 계승할 수 있다." [『문제와 함께 머물기(Staying with the Trouble)』]


해러웨이는 그 대신에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제안하는가? 해러웨이는 결정론적 목적론 대신에 과정-관계적 창의성을 제안하고, 게다가 위에서 내려온 거대한 계획 대신에 우리가 여기 아래 행성 지구에서 일상적으로 호흡하고 죽이고 먹고 사랑하며 소통하는 생태적 존재자들과의 유쾌한 공동체적 친족 형성을 제안한다. 해러웨이는 "충분히 거대한" 이야기, 즉 여전히 "존재론적으로 완결되지 않은" 채로 접촉과 투쟁, 대화의 구역에 자리하고 있는 이야기라는 관념를 고안한 공은 제임스 클리퍼드(James Clifford)에게 있는 것으로 여긴다[『귀환(Returns)』].


우리는 어떻게 비인간의 가치에 민감해질 수 있는가? 우리는 자신이 비인간의 가치에 민감해지는 데 도움이 될 새로운 감각 형성의 실천,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의례가 필요하다(또는 어쩌면 "과거의" 실천과 이야기, 의례를 회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토착민이 우리가 이것들을 발달시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일이 애튼버러(Attenborough)의 신작 『우리의 행성(Our Planet)』(그것의 제목만큼, 그리고 애튼버러의 생태적 정치학만큼 문제를 일으키는 영화)처럼 주요한 다큐멘터리 영화들에서도 진행 중이라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면, 러시아 북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바다코끼리의 집단 자살에 대한 영상들이 상영된다.


비인간의 가치에 민감해지는 것은 우리에게 대체로 인간을 꼭대기에 두는 가치의 위계가 여전히 있다는 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대로, "삶은 약탈이다." 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말한다. "약탈은 정당화가 필요하다." 어쨌든,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많은 종 가운데 하나의 종인가? 어떤 명백한 의미에서, 물론 우리는 그렇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위험할 지경에 이르도록 더 넓은 생태적 네트워크들에 우리가 의존한다는 사실과 그것들에 묻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다른 한 의미에서, 우리는 그저 또 하나의 종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좋든 나쁘든, 우리는 행성적 존재자, 지질학적 힘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어떻게 지구에서의 우리 존재를 제대로 정당화할 수 있는가? 정의라는 관념이 한낱 인간 사회를 넘어서 확대될 때 생태적 정의는 어떤 모습일까?


인간과 자연 세계의 나머지 부분이 맺는 관계를 이해할 적절한 방법을 둘러싸고, 반자본주의 학자들, 특히 신진대사 균열 이론가들과 세계생태 연구자들(예를 들면, 존 벨라미 포스터와 제이슨 무어가 있는데, 덧붙여 말하자면 포스터는 라투르를 전적으로 오해하는 듯 보인다) 사이에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나는 외교적 방식으로 이런 논쟁들에 접근하고 싶다. 여기서 나는 편을 들지 않을 것인데, 어쨌든 나는 이야기 전체를 알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지구 역사의 이런 파국적인 국면에서 자본의 유사 분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추상적인 의미론적 분리를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이 인간-지구에서 우리가 어느 날 성취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공동의 미래를 상상하고 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지구물리학적 사건이다. 이 사건의 역사를 200,000년 전에 일어난 상징적 의식의 출현, 12,500년 전의 신석기 혁명, 500년 전의 자본주의 혁명, 250년 전의 산업혁명, 75년 전의 핵 시대, 또는 20년 전의 정보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든 간에, 적어도 현재는 지구가 지구역사적 전개의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2010년 5월 6일에 AP 헤드라인은 이렇게 보도한다. "유엔 보고: 다른 종들의 멸종을 가속화하고 있는 인류." 그 기사의 첫 번째 줄은 이렇다. "현재 사람들은 자연을 인간 역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도 더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고 있는데, 이를테면 1백만 종의 식물과 동물의 멸종이 확연해지고 있다고 과학자들이 월요일에 말했다."


또한 2019년 5월 6일에 에릭 레비츠(Eric Levitz)가 작성한 NY 매거진 헤드라인에 따르면, "인류는 지구 전체에 걸쳐 타살-자살의 형태로 1백만 종을 살해할 전망이다."


그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지구의 생태계들은 70억 인간의 전 지구적인 선진 자본주의 문명이 창출한 조건 속에서 번성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 문명은 산호초나 습지, 야생 꿀벌 없는 행성―그리고 지구 온도가 산업혁명 이전의 온도보다 1.5도 더 높은 행성―에서 번성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우리 문명의 야망과 작동 방식을 환경의 그것들과 더 잘 동조하게 만드는 것은 이타주의적 행위를 전혀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장기적인 집단적 이기심을 인식하는 것과 더불어 전 지구적 차원에서 국제 협력을 통해서 우리가 식량을 재배하고, 에너지를 생산하고, 기후변화를 다루며, 쓰레기를 처리하는 방식을 바꿀 것을 요구할 뿐이다."


현시대를 인류세로 부르든, 자본세로 부르든, 플랜테이션세(Plantationocene)로 부르든, 크툴루세(Chthulucene)로 부르든, 엔트로피세(Entropocene)로 부르든, 생태세(Ecozoic)로 부르든 간에, 현재 진행 중인 생태적 대참사의 형이상학적 뿌리를 진단하는 것은  탈자본주의 세계를 구상하고 구현하는 데 필요한 작업이다.


마르크스는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모르고 있지 않았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자연은 인간의 무기적 신체인데, 말하자면, 자연은 그것이 인간의 신체가 아닌 한 그렇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살아가고....그래서 인간은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자연과 끊임없이 대화를 지속해야 한다. 인간의 육체적 삶과 정신적 삶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자연이 자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할 뿐인데, 그 이유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을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통해서 자신과 자연 사이의 신진대사를 매개하고 조절하며 통제하는 과정"으로 적는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재료를 대면한다."


마르크스는 인간-지구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연을 인간 의식의 가치 창출 능력을 기다리고 있는 죽은 것으로 여긴다.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나는, 가치가 한낱 인간의 사회적 구성물 또는 인간 노동이나 욕망의 자유로운 창조물에 불과한 것(내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로크와 마르크스, 하이에크처럼 다양한 근대 사상가가 이 점에 동의한다)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와 인간의 힘이 비롯되는 우주론적 힘 또는 생태적 힘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