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갬블 & 하난 & 나일: 새로운 유물론이란 무엇인가?-새로운 유물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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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16.


3부: 새로운 유물론들

Part 3: new materialisms


그렇다면 새로운 유물론과 관련하여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일반적인 합의는,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이행과 물질의 고유한 활성에 대한 인식에 근거를 둔 새로운 유물론이 인간 중심적이지 않은 실재론을 포용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들 항목 사이 관계의 본성이 지금까지 대체로 오해받았다고 믿는다. 일반적인 가정과는 대조적으로, 존재론적 집중도 물질의 활성에 대한 인식도 반드시 서로 수반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것들은, 어느 하나든 아니면 둘 다든 간에, 인간중심주의에서의 긴급 피난구를 제공하는 데 충분하지도 않다 [...]. 존재론으로의 이행이 상관주의를 기피하면서 일반적으로 실패한 유물론이나 후기구조주의에 비해 "새로운" 것임이 확실하지만, 그런 이행은 고대 원자론 같은 유물론의 회복을 나타낼 수 있을 뿐일 것이다. 더욱이, 물질에 관한 원자론의 수동적 구상이 (전적으로 물질적인) 인간을 물질적 실재의 예외적이고 외부적인 객관적 관찰자로 여전히 자리매김하는 적극적 구상으로 대체될 뿐이라면,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여기서 이어지는 글에서 우리는,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vital new materialism)과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negative new materialism)이 둘 다 이런 점에서 사실상 인간 예외주의를 유지한다고 주장한다.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performative new materialism)의 존재인식론만이 모든 층위에서 인간 예외주의를 문제시한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에 관한 절의 말미에서 우리가 다루듯이, 이것은 참신성에 대한 비(非)수행적 해설을 영속시킬 방식으로 그런 접근법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실상,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과 관련하여 우리가 가장 참신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깨닫는 것은 그것 덕분에 다양한 고대의 은폐된 비서구적 존재론이 회복될 수 있다는 점이다.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


여태까지 가장 만연하는 유형의 새로운 유물론은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임이 거의 확실한데, 매우 널리 확산하여서 그것이 자신과 나머지 두 유형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가리고 흡수하는 경향이 있다 [...].


역사적으로,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은 바루흐 스피노자(그리고 덜한 정도로 라이프니츠)의 코나투스 이론에 관한 질 들뢰즈의 1960년대 독법에서 비롯되었다. 들뢰즈가 처음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 전념한 이유는, 다른 근대 유물론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가 자연 전부는 본래 내재적인 생기적 역능 또는 힘으로 규정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베이컨과 데카르트, 홉스, 뉴턴의 경우에, 생기력은 정신이나 물질과 별개의 것이어서 여전히 그것들에 외재적인데, 흔히 신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거나 유신론적 자연법칙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에서 힘은 물질에 내재적인데, 그 이유는 물질이 힘 자체의 표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신은 자신의 역능을 신이 갖춘 존재함과 행함의 역능을 동시에 표현하는 특이한 확정적 사물들의 코나투스를 통해서 표현한다. 그 둘은 함께 동일한 코나투스를 표현한다.

[...]

스피노자는,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자신의 철학에서 공식적인 지위를 부여하지 않은 채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전개하는 대신에, 또는 홉스가 그랬듯이 운동 중인 물질의 매우 작은 틈새에 인과적 역능을 묻으려고 시도하는 대신에, 코나투스를 최고의 존재론적 층위, 즉 신 그리고/또는 자연으로 격상시킨다. 그리하여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서 이미 본질적이고 일차적인 것―모든 물질적인 것의 내적인 힘과 분투, 역능―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무한자로 격상시킨다.


『동역학(Specimen Dynamicum)』(1695)에서 라이프니츠는 운동과 공간, 시간을 실체의 힘에서 파생된 비실재적인 정신적 구성물로 환원시킬 정도까지 나아간다.

[...]

라이프니츠의 경우에 실재적인 유일한 것은 힘의 관계들이다. 운동은, 그것이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힘"인 한에서만 실재적이다. 기하학의 대상, 즉 연장 외에 유형적 자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 힘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라이프니츠는, 힘은 실재적이고 절대적인 것이고, 그래서 운동(그리고 물질)은 상대적 현상들이라는 하위집합에 속할 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오늘날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자들은, 물질을 (자연 또는 신의) 외력의 수동적 대상으로 여기는 고대 및 근대의 기계론적인 유물론적 사유와 실패한 유물론자들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고자 하면서 이런 전통을 채택하였다. 예를 들면, 이런 접근법의 옹호자 중 가장 많이 인용될 것 같은 포스트들뢰즈적 원천인 제인 베넷(Jane Bennet)은 이런 차이에 주의를 집중하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한다.


내가 비인격적 정동 또는 물질적 활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그것이 깃들어 있다고 하는 물질에 추가된 정신적 보충물 또는 "생명력"이 아니다. 나의 사유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생기론이 아닌데, 나는 정동을 물체에 들어가서 활성화할 수 이쓴 별개의 힘으로 상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물질성과 동일시한다. 또 다시, 내 목표는 물질성 자체에 내재하는 활력을 이론화하는 것이고, 물질성을 수동적이고 기계론적인 실체 또는 신성이 깃들어진 실체라는 상징에서 떼어내는 것이다. 이런 활기찬 물질은 인간이나 신의 창조적 활동을 위한 원료가 아니다.


베넷의 경우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그리고 들뢰즈)를 좇는 것은 힘 자체의 관계들에 지나지 않는다. 다이애나 쿨(Diana Coole)과 사만다 프로스트(Samantha Frost)이 주장하듯이, "물질을 적극적이고 자기창조적이고 생산적이며 예측 불가능하게 만드는 과잉, 힘, 활력, 관계성, 또는 차이"가 존재한다. 이런 견해의 변양태들이 "전(前)가속", "활기찬 물질". "가상적 힘", 그리고 "정동" 같은 것들을 논의하는 다양한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 철학자들에게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낡은 유물론과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 사이의 주요한 차이는 생기력의 내재적 활성의 존재론화 뻬기 원자 물질의 기계론적 수동성이다. 따라서 생기적 물질은 결정론적이지도 않고, 유신론적이지도 않고, 자연주의적이지도 않고, 인식론적이지도 않다. 생기적 물질은 인간 의식, 언어, 또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말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 자체로 창의적이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게도,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은 유물론과 관련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존재론적 생기론과 관련된 것이다. 엘리자베스 그로츠(Elisabeth Grosz)는 새로운 생기론적 전통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친밀한 연계를 인식한 소수의 생기론적 유물론자 중 한 사람인 듯 보인다. 그로츠의 글을 인용하면, "이른바 새로운 유물론의 발흥과 더불어 동시에 새로운 관념론을 환기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또한 "스피노자에 관한 들뢰즈의 독법이 '새로운 관념론'에 대한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기론을 "유물론적"이라고 부르거나 아니면 "관념론적"이라고 부르려고 선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라이프니츠가 이미 명시적으로 분명히 했듯이, 무언가 다른 것―물질이 아니라 힘의 존재론―에 근거를 두는 수사학적 전략에 해당한다.


모든 물질이 수동성이 박탈당할 정도까지 적극적이라면, 물질은 어떻게 작용할 대상이 없이 작용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이런 긍정적 생기론은 다양한 물질적 실천을 힘 일반의 모호하고 평평한 존재론으로 "평탄화"할 위험이 있다. N. 캐서린 헤일스가 주장하듯이,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은 "'힘'의 본성에 관해" 대단히 "부정확한" 경향이 있어서 "다른 종류들의 힘들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이들 종류의 구분이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널리 탐구되었지만 말이다."


평평한 생기론적 존재론들이 추가적으로 문제가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삶/죽음 대립쌍의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측면(생명, 활성, 행위주체성)만을 존재론화하려고 선택했기 때문이다. 죽음과 수동성, 수용성이 생명의 "평평한 존재론"에서 문자 그대로 아무 존재아무 지위도 없다면, 지금까지 많은 비판가들이 지적했듯이, 이것은 위험한 개념적 및 정치적 결과를 낳는다. 개념적으로,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은 삶과 죽음, 활성과 수동성 사이의 얽힌 관계을 절대 설명할 수 없다. 정치적으로, 그것은 비생명에 대한 생명의 역사적으로 정착한 특권화와 이런 특권화가 비생명과 고나련된 인간 신체와 비인간 신체의 착취와 몰수에 관해 가진 함의들을 피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힘의 존재론이 비수행적 물질관을 낳는 이유는, 베넷의 경우에, 사물이 수행적 연결관계를 맺기 전에 "어떤 활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토머스 렘크(Thomas Lemke)가 올바르게 주장하듯이, "조립된 개별 존재자들이 맺게 되는 관계에 무관하게 이들 존재자와 관련된 생기력이, 조립체 이전에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한다." 하지만 힘이 물질적 관계에 선행한다면, 그것은 관계들 자체의 수행적 내부작용이 절대 될 수 없다. 따라서, 생기론적 새로운 유물론은 여전히 매우 형이상적이고 비역사적이며 비정치적인 관점이다,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


두 번째 유형의 새로운 유물론은 어쩌면 가장 기묘한 유형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으로 부르는 것은 물질이 사유에 대해 비관계적으로 외재한다고 여기는 이론이다. 우리가 이 이론을 "부정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사유와 물질 사이의 관계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접근법은 낡은 유물론의 합리주의와 실패한 유물론의 불연속성이 꽤 놀랍게/흥미롭게 조합한 데서 비롯된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부정적 유물론의 두 가지 주요한 전통은 "사변적 실재론"과 "객체지향 존재론"이다. 그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그것들은 모두 사유의 비관계성에 대한 신념을 공유한다.


퀑탱 메이야수의 사변적 실재론에서,


유물론은 두 가지 핵심 진술로 포착된다. 1. 존재는 사유(넓은 의미의 주관성으로 이해되는)와 별개의 것이자 독립적이다. 2. 사유는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 1번 논제는 주관적 속성을 존재에 확대하고자 하는 어떤 인간중심주의와도 대립적인데, 요컨대 유물론은 애니미즘, 영성주의, 생기론 등의 일종이 아니다. 1번 논제는, 비사유가 사실상 사유에 선행하거나, 또는 적어도 사유 직전에 앞서 존재하고, 게다가 사유의 외부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는데, 요컨대 에피쿠로스주의적 원자의 사례를 좇아서 아무 주관성도 없고 우리가 세계와 맺은 관계와 독립적이라고 주장한다. 2번 논제는 유물론이 관계론임을 확언한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물질은 사유와 독립적이고, 그런데도 근본적으로 비관계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유와 합리성뿐이다. 메이야수는 그리스 원자론을 존재론적인 것이라고 인정하기만, 원자와 공허가 필연적으로 실재의 궁극적인 원소라는 그 주장은 거부한다. 메이야수의 경우에, 물질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이고, 그래서 언제든 주어진 순간에 무엇이든, 심지어 신조차도 절대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메이야수는 물질에 관한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사유를 인간의 사유와 융합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지만, 또한 그는 여태까지 알려진 어떤 다른 존재자도 사유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요컨대 사유는 인간 속에서 무로부터 창발하였다. 생각하지 않는 물질은 인간보다 앞서 존재했고, 그 후 갑자기 사유가 생각하지 않는 물질에서 비관계적으로 창발하였다. 그러므로 메이야수의 유물론은, 사유가 물질에서 어떻게 창발할 수 있는지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 물질과 사유 사이의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존재론적 이원론의 일종에 근거를 두고 있다. 메이야수가 존재의 "초혼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대단히 비관계적인 철학의 직접적인 결과다. 존재가 비관계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신을 비롯하여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하지만 존재가 매우 근본적으로 우연적인 것이어서 신조차 될 수 있다면, 이것은 왜 "물질"로 불리는가?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의 두 번째 갈래는 "객체지향 존재론"(OOO)인데, 그레이엄 하먼이 만들어낸 이 용어는 물질에 관한 인간의 경험 너머 실재적인 것을 생각하기에 대한 이론적 신념을 규정한다. 하먼은 이렇게 주장한다. "우주에서 실재적인 것은 여타의 것을 파생적 지위로 환원하는 지속 가능한 물질의 알갱이들이 아니라, 형상들 속에 포장된 형상들이다. 이것이 '유물론'이라면, 그것은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역사상 최초의 유물론이다." 하먼의 경우에, 존재자들의 본질은 그것을 구성하는 객체들과 그것을 생각하는 객체들 모두에서 물러서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는 인간 중심적이거나 경험되거나 관계적인 것이 결코 아니라, 마치 완전히 "진공으로 포장된" 것처럼 절대적으로 그리고 비관계적으로 "물러서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처럼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자기충족적인 것으로 여기는 본질주의적 견해는 사실상 그 이론의 표준적인 압축적 표상이 되어 버린 세 가지 이산적이고 별개로 둘러싸인 원, 영, 또는 "O"로 완벽히 포착된다. 또한, 이 견해에 힘입어 하먼은 자신이 "새로운 종류의 '형식론(formalism)'"이라고 부르는 것을 확언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티모시 모튼(Timothy Morton)도 의미 형성의 인간 영역을 무한히 넘어서는 본질적 형상들을 옹호하기 위해 "어떤 종류의 기체, 또는 어떤 종류의 형상을 갖추지 않은 물질"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친다. 예를 들면, 모튼은 지구온난화 같은 "초객체"를 "그 원시적 실재가 인간에게서 물러서 있는 실재적 존재자"로 서술한다. 모튼의 경우에, 하먼과 트리스탄 가르시아( Tristan Garcia)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객체"는 어떤 관계에서도 자신을 결코 부분적으로도 드러내지 않는 무한히 숨은 실재를 가리킨다.


그렇지만 수행적 유물론의 시각에서 바라볼 때 이 상황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는, 물러서 있는 본질 자체가 관계적으로 구성되지 않기에 그 본질은 결코 변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물질의 존재를 부정하는 어떤 철학도 도대체 "유물론"으로 여길 이유가 전혀 없다. 생기론이 물질을 물질의 수행적 및 관계적 움직임을 초월하는 불가사의한 주관적인 힘으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OOO는 물질을 물질의 수행적 및 관계적 움직임을 마찬가지로 초월하는 관념적인 물러서 있는 본질로 규정한다. 


결국, 우리가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은 사실상 결코 유물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유를 물질에서 단절하는 비관계적 합리주의를 확고히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의 진지한 목표는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실재론을 제시하는 것이더라도,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의 두 판본은 모두 사유를 인간에게만 허용하면서 결국 이 사유를 비물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비판가들은 올바르게도 OOO의 근본적이고 물러서 있는 실재론은 그것이 객체에 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합리적 주관주의에 더 가깝다. 사실상 메이야수 자신은 하먼이 "주관주의자"이자 반유물론자라고 적절히 비판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메이야수가 자신에게 유물론자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부분적인 이유는 그가 존재와 사유 사이의 엄격한 외부성, 즉 수행적 유물론이 부정하는 외부성에 관한 낡은 유물론의 단언을 승인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부정적 새로운 유물론은 백인 남성 철학자들로 가득 찬 서양의 경전에 특권을 부여하는 경향도 있는데, 그리하여 그 의제의 정치적 한계 역시 드러낸다.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


세 번째 유형의 새로운 유물론은 우리가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불행하게도, 수행적 접근법은 대체로 나머지 두 가지 접근법에 가려지거나 융합되었다. 이 절에서는 우리가 왜 수행적 이론이 가장 유망한 이론이라고 깨닫는지 해명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존재론과 행위주체성, 인간 관찰의 지위에 관한 설명에 대하여, 그 이론을 나머지 두 이론과 분명히 분별하고자 한다. 우리는 주로 캐런 바라드(Karen Barad)와 비키 커비(Vicki Kirby)의 작업에 관한 논의를 통해서 분별하는데, 우리는 그들의 작업을 수행적 접근법을 형성하는 모범으로 여긴다.


알다시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모든 새로운 유물론은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의 이행을 포용한다. 그런데도, 모든 비수행적 이론은 계속해서 존재론과 인식론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수행적 접근법에서는 존재론과 인식론이 본래적으로 뒤얽혀 있고 서로 구성한다. 더욱이, 그런 상호 구성은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에 한정되지도 않고 한정되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바라드는 양자역학의 "측정 문제"에 관한 자신의 "내부작용적(intra-active)" 설명을 통해서 그런 견해에 대한 특별히 설득력이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측정 문제는 유명한 이중슬릿 실험으로 발생하는데, 이 실험에서는 실험적 배치에 따라, 파동과 입자라는 상호 배타적인 특성들에도 불구하고, 빛(또는 원자 등)이 파동 아니면 입자로 나타난다. 이들 충돌하는 발견 결과를 해석하는 최선의 방법을 둘러싸고 오늘날에도 격렬한 논쟁이 계속해서 벌어지지만, 그 논쟁의 기본 궤적은 대체로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닐스 보어(Niels Bohr)의 초기 해석들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 논쟁에 대한 바라드의 개입은 보어가 슈뢰딩거와 하이젠베르크의 "인식적" 해석과는 반대로 "존재자적" 해석을 제기했다고 참신하게 해석함으로써 시작한다. 바라드가, 이전에는 인식되지 않았던, 보어의 획기적인 존재자적 통찰로 포착하는 것은 존재자들이 그들을 여타의 방식은 배제하고 어떤 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특정한 물리적 측정 장치와 별개로는 결코 확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본래적으로 빛은, 모든 물질과 마찬가지로, 불확정적이다. 그러므로, (비교적) 확정적 존재자로서의 빛이라는 것은 그것을 관측하는 데 사용되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장치에 전적으로 선행하지 않고, 게다가 그 장치와 전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바라드는 이 통찰을 주의 깊게 다듬고 본원적으로 확장함으로써 실재에 관한 "존재인식론적" 설명을 제시하는데, 요컨대 관측이 그저 "선재하는 값"이나 특성을 결코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사실상 그 값이나 특성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항상 어떤 역할을 또한 수행한다. 더욱이, 보어의 인본주의는 관측의 구성적 역할에 대한 그의 고찰을 선재하는 인간이 확정적인 도구와 기술을 휘두르는 과학 실험실에 한정하는 반면에, 바라드는 그 함의를 더 멀리 추구한다. 중대하게도 바라드는, 과학 실험실조차도 나머지 세계로부터 분리하는 엄격하거나 고정된 경계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기에 인간은 우주를 마치 그 바깥에서 관찰하듯이 절대 관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바라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인간이 과학적 앎의 행위나 다른 앎의 행위들에 참여하는 한, 그는 세계와 그 미결의 현행 부각의 더 큰 물질적 배치의 부분으로서 그런 일을 행한다." 그리하여 언제나 인간은 (여타의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관측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구성하는 동시에 그것에 의해 부분적으로 구성된다.


바라드가 "행위자 실재론(agential realism)"으로 부르는 이런 존재인식론적 설명은 철저히 "수행적"이고 관계적인 유물론을 낳는데, 여기서 물질은 바로 자신이 행하는 것이거나 자신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식별 가능한 사물의 어떤 특성도, 즉 그것의 물리적 양태든 행위주체성이든, 또는 심지어 언설아니 사유든 간에 어떤 것도 자신의 행위 또는 다른 사물들과의 만남에 전적으로 선행하지 않거나 그것들로 인해 변하지 않은 채로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런 설명은, 생기력이 만물에 스며들어 있거나 어떤 사물의 행위를 가로질러 변하지 않은 채로 있는 평평한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거부한다. 오히려, 행위주체성과 활성은 특정한 내부작용적 수행과 결코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어떤 주어진 식물은 특정한 바위나 인간과는 다르게 행위주체성을 수행한다(그리하여 구성한다). 그러므로, 베넷의 생기론적 유물론이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 사이의 어떤 구분도 제거한다고 비판하거나, 또는 "관계적인-것-이상의" 행위주체성을 만물에 주입하는 "소박한 실재론"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올바를 수 있지만, 바라드의 유물론은 그렇게 비판할 수 없다. 더욱이, 바라드의 어휘 선택이 죽음이나 비활성보다 활성이나 생동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라드는 활성이나 생동성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생기론이 아니고, 오히려 [...] 새로운 의미의 생동성", 즉 "생명 있는 것과 생명 없는 것 사이의 바로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직설적으로 진술한다. 그렇다면, 베넷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게도, 물질의 활성에 관한 바라드의 관념은 삶과 죽음 사이의 본질적 차이로 여겨지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물질의 활성은 바로 그런 차이를 수행적으로 생성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이유로 인해, 바라드는 심지어 양자 입자의 죽음과 필멸성도 인정할 수 있다.


더욱이, 사물들 사이의 어떤 근본적인 외재성도 상정하지 않는 수행적 유물론은 가능한 것의 어떤 궁극적이거나 불변하는 총체성도 거부한다. 오히려, 생성적인 "존재론적 불확정성"이 그런 설명의 핵심에 만연하는데, 그리하여 각각의 새로운 수행과 더불어 물질이 행할 수 있는 것의 바로 그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내부적 분리만를 통해서, 즉 특정하고 항상 얼마간 비확정적인 "구성적 배제"에 의해 결정되는 국소적 한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더라도, "재배치된다". 그렇지만, 버틀러의 배제와 달리, 바라드의 배제는 인간 담론이 근본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무언가를 완전히 포획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고, 오히려 특정한 방식으로 물질의 고유한 비결정성을 잠정적으로 해소하는 내부적 단절이나 주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OOO와 달리, 배제되거나 물러서 있는 것은 불변하는 본질이 아니라 항상 수행적으로 그리고 관계적으로 구성되어서 참신하다.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있고 철저한 수행적 유물론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커비는 그런 접근법의 더 큰 이론적 결과를 특별히 생생하고 도발적인 견지에서 부각한다. 특히 커비는, 인간이 여타의 것과 마찬가지로 물질의 수행이라면 인간과 관련하여 예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자연의 행동의 특정한 굴절일 뿐이어야 한다는 함의에 사로잡힌다. 그러므로, 인간이 말을 한다면, 어쩌면 그 이유는 자연이 이미 셀 수 없이 번성하는 언어로 말을 하고,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하도록 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이 일고 쓸 수 있다면, 확실히 우리는 아무리 거북하더라도 "자연이 글을 읽고 쓴다"는 가능성을 향유해야 한다. 2008년에 출간된 책에 수록된 글의 제목에서 탐구 노선을 요약한 커비는 이렇게 묻는다. "문화가 처음부터 줄곧 실제로 자연이라면 어쩔 것인가?"


후속 저서에서 그런 의문을 더 한층 추구하는 커비는 인간 영역과 비인간 영역 둘 다에 수없이 독창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런 "원초적 인간성"을 탐구하는데, 예를 들면, 번개가 어떻게 해서 때리기 전에 땅을 의식하고 심지어 땅과 대화를 촉발하는 비국소적 현상인지 검토하며, 지질과학자가 자연이 자신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수량화하며 예측하는, 사실상 편재적인(하지만 항상 특정한) 실천의 한 특정한 사례일 뿐이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커비가 활력에 대한 어떤 종류의 균일한 언어적 등가물이나 인지적 등가물이나 정동적 등가물을 만물에 투사함으로써 실재를 평탄화하는 데 아무 관심도 없음을 강조해야 한다. 오히려 커비는,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비롯하여 사물들 사이에 근본적이거나 절대적인 경계가 전혀 없다면, 인간은 지능이나 언어, 또는 심지어 과학적 탐구에 대한 독점권을 여타의 것과 마찬가지로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그러므로 커비의 표현에 힘입어 그런 관념들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과 비인간의 수행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데서 비롯되는 그것들의 끝없이 번성하는 특정성다양성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커비는 더 최근에 이 주장의 수학적 함의를 추구하면서 수학에 관한 궁극적으로 비수행적인 메이야수의 견해에 대한 대단히 통렬한, 수행적 유물론에 입각한 반응을 제시한다. 흥미롭게도, 커비가 지적하듯이, 커비와 메이야수 둘 다 무기적 물질을 "본래적으로 수학적"이라고 인식한다. 그렇지만 그들이 근본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은 누가 또는 무엇이 수학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수행하지 않는지에 놓여 있다. 이 물음에 관해 만연하는 과학적 견해를 사실상 채택하는 메이야수는 무기적 물질이 어떤 고정되고 예정된 자연을 수동적으로 발제하는 한에서만 수학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메이야수의 경우에, 수학적 사유―자연에 접근하고 재현하기 위해 수학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는 그냥 기적적으로 , 무에서 생겨난 고유하게 인간적인 능력이다.


자연 세계를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 있어서 "수학의 터무니 없는 유효성"에 마찬가지로 깊은 인상을 느낀 커비는 거의 정반대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커비의 경우에, 언어가 인간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지 않은 것과 꼭 마찬가지로, 수학적 사유도 그러한데, 수학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재)규정하는 데에도 사용되는 특정한 방식으로 항상 실천할지라도 만물은 수학을 실천한다. 인간 예외주의에 묶인 사람들에게  그런 견해가 아무리 이상하거나 터무니 없더라도, 우리가 꽤 온건하고 합당한 전제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당연히 인간이 수학을 행하는 전적으로 물질적인 존재자라면 물질도 수학을 행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리고 사실상, 자연이 이미 수학적이지 않았다면, 자연은 어떤 다른 식으로 인간 수학자를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자연은 어떤 다른 식으로 수학자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바로 그 원릳르을 생성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질 역시 본래적으로 수행적이고 즉흥적이지 않다면, 어떤 다른 이유로 인해 그런 원리들은 부인할 수 없는 성공에도 불구하고 물질을 결코 완전히 수량화하지도 못하고 예측하지도 못하는가?


요약하면, 커비는 물질이 어떤 엄격하거나 불변하는 외부적 한계도 없이 끊임없이 자신을 연구하고 재발명한다는 수행적 유물론을 개진한다. 커비가 자신의 접근법을 핵심을 찔러 요약하는 대로, 자신이 데리다(의 유물론적 독법)에게 빚을 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텍스트의 외부는 없다"라는 커비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자연의 외부는 없다"라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커비와 바라드에 의해 표명된 수행적 유물론들과 호머의 서사시 및 호머에 의해 촉발된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적 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나타나는 존재론들 사이의 꽤 두드러진 유사성을 간략히 지적하고 싶다. 사실상, 최근 출간된 책에서, 나일은 루크레티우스를 전면적인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자로 읽는 독법을 옹호하는 논변을 전개하는데, 루크레티우스는 꽤 놀랍게도 양자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에서 창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하고 새로운 유물론에 진화적인 견해 중 많은 것을 적절히 예상했다. 마찬가지로 놀라운 것은, 그 철학적 시가 지금까지 항상 영어로 번역된 방식과는 대조적으로, 루크레티우스는 "원자"라는 낱말의 어떤 변양태나 판본이나 번역을 세심하게 회피했던 것처럼 보인다는 나일의 발견이다. 사실상, 우리의 앞선 논의에 바탕을 두고서, 우리는 루크레티우스가 왜 원자론자일 수가 없었던 동시에 전적으로 수행적이고 관계적인 물질관을 신봉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진전 중인 작업에서 크리스 갬블(Chris Gamble) 역시 호머의 서사시에 대한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 독법을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더욱이, 이 작업의 핵심 목표는 서양 역사 자체의 구술적인 토착적 과거와의 중요한 연결관계를 조명함으로써 현재의 토착적 존재론들에 대한 더 큰 개입도 촉진하고 고무하는 수단으로서 수행적 새로운 유물론의 함의를 추구하는 것이다.


― C.N. Gamble, J.s. Hanan & T. Nail, "What is New Materialism?" (2019), pp. 118-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