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제이슨 W. 무어: 인터뷰-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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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9.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제이슨 W. 무어와의 인터뷰

Capitalism in the Web of Life: an Interview with Jason W. Moore


제이슨 W. 무어 & 카밀 아산(Kamil Ahsan)


제이슨 W. 무어는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의 중간에서 다음과 주장함으로써 맑스주의 사상과 환경 사상, 페미니즘 사상의 완전한 이론적 재편과 종합에의 책무를 제시한다. "저는 많은 사람이 자본주의가 '경제적' 체계 이상의 것이고, 심지어 사회적 체계 이상의 것이라는 점을 직관적으로―우리의 분석 틀을 뒤처질지라도―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는 자연을 조직하는 방법입니다."


카밀 아산은 지난달에 출판된 무어의 책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에 관해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어가 낡은 가정에 대해 제기하는 이의를 파악하려고 애쓴다.


카밀 아산(KA):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를 저술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제이슨 W. 무어(JWM): 저는 우리가 오늘날 마주하는 위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지난 다섯 세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게 할 틀을 고안하고 싶었습니다. 지난 40년 동안 우리에게는 위기에 대한 '녹색산술' 접근법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경제적 위기 혹은 사회적 위기 혹은 여타 종류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것들은 모두 한 상자에 들어갑니다. 그 다음에 다른 한 상자에 들어가는 생태적 위기들―물 위기 혹은 에너지 위기 혹은 기후 위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략 지난 40년 동안 환경주의자들과 다른 급진주의자들은 이들 위기에 대한 위험을 경고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통합할지 결코 정말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환경사상가들은 이것을 말한 다음에 저것을 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고 근대 세계의 모든 것이 인간과 생물권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다음에 그들이 조직과 분석에 관심을 가질 때에는 마치 그 관계가 있는 그대로 친숙하지 않고 직접적이지 않으며 즉각적이지 않은 것처럼 결국 '사회 더하기 자연'이 됩니다.


KA: 이 책의 전제는, 지금까지 적색사상과 녹색사상의 대부분에서 만연한 '자연/사회' 이원론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원론은 어디에서 유래되었고, 그 관념이 왜 그토록 철저히 인공적입니까?


JWM: 인간이 자연의 바깥에 있다는 관념은 역사가 깁니다. 그것은 근대 세계의 창조물입니다. 자본주의 이전의 많은 문명이 인간은 독특하다는 감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6세기와 17세기, 18세기에는 일부 인간이 포함된, 애덤 스미스의 말을 빌리면, '문명화된 사회'로 불리는 것이 존재한다는 매우 강력한 관념이 출현했습니다. 이 관념은 제국주의적 폭력과 농민의 탈취 그리고 인간임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관한 일련의 재구성 전체, 특히 인종과 젠더를 둘러싼 분열들에 묻어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통제되고 지배당하고 일을 해야 하며 그리고 문명화되어야 하는 무언가로 여겨진 '자연'이라는 범주에 여전히 넣어졌습니다. 이 말은 매우 추상적인 듯 들리겠지만, 근대 세계는 일부 인간 집단은 '사회'라고 불리고 대다수 인간은 대문자 '자연'으로 불리는 반대편 사상자에 들어간다는 이 관념에 정말로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 관념은 매우 강력했습니다. 그 관념이 출현한 이유는 그저 그것이 좋은 착상이라고 결정한 과학자들이나 지도제작자들이나 식민주의 지배자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혁명의 광범위한 구상과 그 궤를 같이하는, 시장과 산업, 제국과 새로운 세계관을 결합한 광범위한 과정 때문입니다.


자연과 사회라는 이 관념은 근대 세계의 다른 이원론들에 매우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자본가와 노동자, 서양과 나머지 세계,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문명과 야만이 있습니다. 이들 다른 이원론은 모두 사실상 자연/사회 이원론에서 그 주원인이 드러납니다.


KA: 이 이원론을 무너뜨리는 것의 중요성, 특히 당신이 자본주의를, 이른바,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이 '공동생산'하는 것으로 재구상하는 방식의 견지에서 그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JWM: 자본주의는 인간과 나머지 자연에 의해 공동생산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날 전개되고 있는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 세계의 문제에 관해 생각하는 일반적인 방식은 사회 위기와 경제 위기, 문화 위기를 '사회 위기'라는 표제어 아래 놓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생태 위기가 있고 그것은 기후와 여타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후자를 배제한 채로 전자에 관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점점 더 깨닫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런 상황이 지금까지의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원론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현재 위기, 다양하게 표현되는 단일한 위기에 관한 지식을 구축할 수 있습니다. 금융화 같은 일부 위기는 순전히 사회적인 것처럼 보이고,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지구 생명의 여섯 번째 멸종 같은 다른 위기들은 순전히 생태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 두 국면은 온갖 종류의 흥미로운 방식으로 매우 밀접히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런 관계들이 중요함을 일단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월스트리트가 어떻게 자연을 조직하는 한 가지 방식인지 알아채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문제들의 전개―최근에 일어난 중국과 미합중국 주식시장의 격변 같은 전개―가 급진적인 경제학자들도 기꺼이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 방식으로 지구의 생명과 기후의 더 큰 문제로 마무리됨을 봅니다. 이것은 우리 정치에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런 전환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운동들―예를 들면, 식량정의 운동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식량정의 운동은 생태적 의미에서의 식량권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 의미와 민주주의적 의미에서의 식량권과도 관련되어 있고, 게다가 이것들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회 + 자연'이라는 '녹색산술'과 관련된 문제는 환경정의와 사회정의를 분리하고, 환경 지속가능성과 사회 지속가능성을 분리하고, 생태제국주의와 표준 제국주의를 분리하는 이런 기이한 구상입니다. 제국주의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국주의가 '누구를 중시할 것인지'라는 문제 및 '사회의 어떤 집단을 중시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언제나 관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일단 이런 형용사적 혼란을 멈추게 되면, 우리는 제국주의가 인간과 나머지 자연이 어떻게 서로 뒤엉켜 있는지와 언제나 관련되어 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세계 사회 운동들의 상이한 부분들과 새로운 동맹을 실제로 결성하기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농민 운동과 노동자 운동 사이에, 여성 운동과 인종정의를 위한 운동 사이에 동맹이 결성될 수 있습니다.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제가 인간의 '단일한 신진대사'라고 부르는 것을 생명의 그물 속에 종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이유가 바오 그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회 운동과 생태 운동을 연결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KA: 당신은 자연/사회라는 이항 구조에 직접 반대하면서 새로운 종합, '오이코스'를 제기합니다. 그것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더 심층적인 분석을 가능하게 합니까?


JWM: 급진 사상의 핵심에는 인간과 생명의 그물 사이의 역사와 관계를 강조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일어난 일은 역사 없는 자연처럼, 인간관계의 바깥에 순수한 상태로 있는 대문자 '자연'이라는 핵심 관념입니다. '자연'은 저쪽에 있고 우리는 그것을 보호해야 이유는 우리가 그러하지 않는다면 파국이 도래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감각을 낳습니다. 그것은 진행 중인 상황의 일부를 바로 잡지만, 급진주의자들이 언제나 능숙한 일, 즉 시스템을 잘못 명명하는 일을 행합니다.


급진주의자들은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상호작용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환경과 종을 모두 생산하는 생명형성의 관계를 명명하지 않습니다. 인류는 풍경뿐만 아니라 인간 생물학도 전환하는 일련의 환경형성 활동을 통해서 진화합니다. 예를 들면, 인간 조상은 불을 이용함으로써 더 작은 소화계를 발달시킬 수 있었고, 그리하여 불을 일종의 외부 위장으로 여길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제시된 빅 아이디어 중 하나는 '자연' 일반이 비교적 일정한 다양한 패턴―태양 주위를 궤도 형태로 공전하는 지구―을 나타내지만 '자연 '역시 역사적이라는 것입니다.


'오이코스'라는 용어로, 우리는 생명형성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인간을 포함하는 다수의 생태계가 생겨나게 하는 이 관계를 명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환경을 형성하고, 도중에 타인 및 자신의 생물학과 관계를 맺습니다. 권력구조와 생산구조, 그리고 특히 재생산구조는 우리가 풍경과 환경을 만들어내는 방식과 이들 환경이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휘와 개념들은 이런 이원론에 배선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원론을 파괴하고 어떤 새로운 개념들을 제시해야 합니다.


KA: 당신은 일찍이 그 책의 서두에서 산업화는 "피를 자본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라는 맑스의 소견을 인용합니다. 계속해서 당신은 모든 형태의 자연이 수행하는 일을 가치로 전환하는 이 끔찍한 작업에 관해 언급합니다.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들의 '자연'을 역사적으로 전유했으며, 이전에 착취당하지 않은 자연들과 관련된 자본주의의 경향은 무엇입니까?


JWM: 자본주의는 기이한 체계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사실상 녹색주의자들이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방식으로 인간 중심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이 착취에 기반을 둔 상품 체계 안에서 일하는 협소한 방식으로 인간 중심적입니다. 일꾼은 자신의 임금을 벌기 위해 네 시간 동안 일한 다음에 자본가를 위해 4~10시간 동안 더 일합니다. 그것이 맑스가 집중한 한 가지 차원입니다. 하지만 맑스는 더 광범위한 일단의 차원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인류의 한 부분, 즉 현금 결합 안에 존재하면서 재생산되는 인류의 부분을 사회적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반직관적이게도, 자본주의는 무상 일/에너지의 전유의 훨씬 더 큰 바다 안에 존재하는 상품 생산과 교환의 섬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중국 센젠 혹은 70년 전 디트로이트의 자동차 제조 공장의 일꾼이 수행하는 모든 작업 과정은 나머지 자연의 무상 일/에너지를 전유하는 것에 의존합니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는 마리아 미즈의 훌륭한 어구를 사용하면 "여성과 자연, 식민지의 전유"로 특징지어지는 웅장하고 파괴적인 체계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의 문제는 숲과 해양, 기후, 토양, 인간으로부터 일을 공짜로 전유할 기회가 두드러지게 축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투자 거리를 찾아서 세계 전역을 떠돌고 있는 자본의 규모는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제시된 자본주의에 관한 견해는 현재 상황과 관련하여 역동적이면서 다음 일이십 년 동안 점점 더 불안정해질 상황으로 진입할 무언가를 거론합니다. 투자되기를 고대하고 있는 이 거대한 규모의 자본과 공짜로 일을 하게 할 기회의 엄청난 축소가 우리가 처한 상황입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사업 운영비를 지불하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이 국면은 결국 자본 투자의 기회가 축소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이렇게 많은 돈이 있습니다.


급진적 비판에서 일어난 일은 서로 평행인 두 견해입니다. 한 견해는 세계가 종말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존 벨라미 포스터의 행성적 아포칼립스 견해입니다. 그다음에, 자본주의는 과소소비 문제 혹은 불평등 문제가 있다는 자본주의에 관한 나머지 다른 한 견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 두 주장은 각각 상대편 주장이 없다면 불완전하고, 따라서 그 주장들은 결합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생태적인 것을 경제위기에 관한 이론 혹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분석에 편입하면, 경제 호황 및 불황과 불평등을 이해하는 견지가 변화하기 시작하는데, 그 역의 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변화는 일부는, 계급과 인종, 젠더 노선을 따라 생겨난 사회적 불평등의 핵심 쟁점들이 자본주의가 생명의 그물 속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KA: 이제 노동 과정, 즉 고전 맑스주의 사상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초석을 살펴봅시다. 당신은, 맑스가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중요한 것은 결코 임금 노동이 아니라 인간, 특히 여성과 비인간 자연 둘 다의 무상 일과 에너지임을 느꼈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은, 우리가 임금과 일자리를 기후에 맞서 점점 더 싸우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이것이 잘못된 이분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당신이 깨뜨리고자 하는 이런 이항 구조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방법은 무엇입니까?


JWM: 저는 맑스가 그것에 관해 생각한 방식에 부합되는 새로운 해석을 알아내기 위해 맑스주의 사유의 핵심으로 진입했습니다. 가치는 맑스주의자라면 누구나 언급할 수 있는 가장 지루한 것 중 하나입니다. '가치 법칙'이라는 구절을 발설하면 확실히 제 눈이 흐릿해집니다. 하지만 모든 문명은 삶의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행하는 바는, 현금 결합 내에서의 노동생산성이 중요한 것이고, 따라서 여성과 자연, 식민지의 일은 저평가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맑스주의 주장을 안팎으로 뒤집습니다. 자본주의에는 일종의 가치 법칙, 즉 '저렴한 자연'의 법칙이 있는데, 이는 나머지 자연과 더불어 인간의 일을 순서대로 저평가하는 법칙입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정치가 전개되고 있던 와중에 태평양 북서부 지역에서 성장했습니다. 이쪽에는, 올바르게도 오래 성장한 숲을 보호하기를 바란 보존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글쎄, 우리에게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부르주아뿐만 아니라 노동조합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바뀌고 있습니다. 많은 대기업의 경우에도, 기후변화가 이윤을 창출할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식량에 근거하여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근대 세계는 저렴한 식량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매우 규칙적인 기후, 많은 토양, 저렴한 노동이 있다면 얻을 수 있고, 그리하여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칼로리를 올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무 일자리도 존재하지 않고 이제 더는 자연을 공짜로 일하게 할 길은 없다고 말하는 식량주권 운동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제 지구적 대기를 오염물을 버리는 쓰레기장으로 여긴 것으로 인한 모든 비용 청구서가 제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에서는 가뭄이 매우 격심해져서―1200년 만에 최악이라고 합니다―북아메리카의 환금 작물 재배의 중심지가 어쩌면 다음 몇십 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그런 상황에 부닥쳐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적 변화가 가속함으로써 다양한 방식으로 '일자리 대 환경' 담론을 쓸모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KA: 당신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무상 일의 전유라는 자본주의의 작업 방식에 관해 많이 이야기하고, 녹색사상과 적색사상이 일반적으로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사례들이 있습니까?


JWM: 우리가 인식해야 할 첫 번 것은, 지난 40년 동안 녹색사상과 환경행동주의를 조직한 가장 강력한 신화는 산업혁명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인류세'에 관한 주장이기도 한데, 환경변화와 관련된 모든 나쁜 것은 증기기관과 석탄을 갖춘 대략 1800년의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합니다. 그 주장은 정말 사실이 아니지만, 그 관념은 우리가 근대 세계에 관해 배우는 방식에 깊이 배어들어 있고 특히 우리가 환경위기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깊이 배어들어 있습니다.


사실상, 자본주의의 발흥은 15세기와 16세기, 17세기에 풍경과 그 풍경 위 인간이 전환된 방식으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1450년과 1750년 사이에 그 규모와 속도, 범위에 있어서 전례가 없는 환경형성의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이 혁명이 현시한 가장 극적인 표현은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이었는데, 이 사태는 군사적 정복과 대량 학살의 큰 부분을 차지하더라도 그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신세계는 모든 의미에서 산업자본주의의 실험장이었습니다. 그 기원은 사탕수수 농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인접한 두 번째 기원은 포토시, 오늘날 볼리비아, 스페인, 오늘날 멕시코의 은광이었습니다. 매우 거대한 생산 작업, 많은 기계류와 유입 자금, 시간과 업무로 조직된 다수의 일꾼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연의 일을 공짜로 혹은 매우 낮은 비용으로 전유하여 그 일을 사고팔 수 있는 것으로 전환한다는 전제에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를 들면, 안데스의 산악 지역과 토양이 파괴되었는데, 요컨대 숲이 완전히 벌채되면서 끔찍한 토양 파괴가 초래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태는 또한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파괴적이었습니다. 16세기와 17세기에 페루의 총독 관할지에서 거주한 카스티요인, 스페인 사람들은 '나투랄레스naturales'라는 토착민을 가리키는 특수한 낱말이 있었습니다. 이들 일꾼과 토착민은 자연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아프리카 노예의 경우에도 같은 종류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아프리카 노예무역은 사탕수수 농장과 결합한 현실이었습니다. 신세계 토양은 전유되고 소진되며 삼림은 벌채되었고, 게다가 아프리카 노예는 인간 또는 사회의 일부로 여겨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연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아프리카인들의 일이 전유되었고, 토양과 숲의 일이 전유되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 바탕을 두고서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가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경제와 관련되었습니다.


신세계와 인도양에 진출한 포르투갈인들, 네덜란드인들, 스페인 사람들의 새로운 제국이 등장할 때마다, 그들이 행한 첫 번째 일은 자신들이 찾아낼 수 있는 모든 자연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그것들을 코드화하고 합리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상품 생산과 교환을 위해 무상 일을 동원하는 특별한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자본가라면 누구나 가장 바라는 것, 또는 모든 식민 강국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약간의 돈을 투입하여 많은 유용한 에너지를 돌려받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은과 사탕수수의 형태로, 그다음에는 담배의 형태로, 그다음에는 산업혁명의 등장과 더불어 면화의 형태로 말입니다. 기술적 돌파구의 모든 행위―증기기관 혹은 그 이전의 조선 혁신―도 동일한 과정에 전제를 두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공짜로 혹은 낮은 비용을 들여 자연이 대규모로 일하게 하는 새로운 방식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석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KA: 인류세에 대한 당신의 비판은 무엇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실제적인 역사적 분석을 어떻게 호도한다고 느끼십니까?


JWM: 우리는 인류세라는 용어의 두 가지 용법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문화적 대화,  식당이나 휴게실에서 친구들과 나누는 그런 종류의 대화로서의 인류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인류세는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제기하는 미덕이 있습니다. 인간은 생명의 그물 안에서 어떻게 어울리는가? 하지만 인류세는 그 물음에 답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 개념의 바로 그 견지가 이원론적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인류세: 이제 인간이 자연의 거대한 힘을 압도하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유명한 논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고 믿는다면 그것은 대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다른 한편으로, 지배적인 형태의 인류세 논증은 터무니없는 역사적 모형입니다. 그것은 1800년에 증기기관과 석탄과 더불어 영국에서 모든 것이 시작한다고 대개 말합니다. 우리가 언급한 대로, 그 주장과 관련하여 온갖 종류의 역사적 문제가 있습니다. 증기기관이 등장하기 오래 전에 규모와 속도, 범위의 척도에서 환경을 전환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능력이 10배 정도 증가했습니다.


저는 인류세가 자본가들에 의해 초래된 문제가 인류 전체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오래된 부르주아 수법을 연출하는 것이 아닌지 매우 우려합니다. 그것은 일련의 매우 실제적인 문제를 인류 전체의 책임으로 제시하는 대단히 인종주의적이고 유럽중심주의적이며 가부장주의적인 견해입니다. 인류세가 보기에, 깊은 철학적 층위에서 우리는 모두 동일합니다. 역사적 의미에서, 그것은 당신이 가할 수 있는 최악의 개념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미합중국에서 인종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웃음을 받고서 무대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세 관념이 빠져나가는 것의 일부는 '자연'/'사회' 이원론입니다.


KA: 최종 분석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발전적 위기에 처해 있습니까? 이런 새로운 역사적 분석은 우리에게 어떤 예언을 제시합니까?


JWM: 모든 것은 당신이 자본주의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끝없는 경제 성장과 수익성 극대화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에 관한 표준적인 정의를 믿는다면, 당신은 자본주의의 생존 능력에 관하여 많은 것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자본주의는 인간과 나머지 자연의 무상 일을 전유하는 것에 의존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한계에 관한 매우 다른 견해를 갖기 시작합니다.


정치경제학의 핵심 물음은 다음과 같습니다. 근대 세계에서 자본주의적 투자와 축적의 거대한 호황이 어떻게 생겨나고, 그것들에 대한 한계는 무엇인가?


기후변화가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이들 한계는 심대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본가들은 위기를 벗어날 길을 언제나 찾아내었습니다. 이 사실은 급진파와 보수파가 동의하는 것입니다. 두 진영이 같은 말을 하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자연을 도외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무엇보다도 저렴한 자연의 체계입니다. 요컨대 네 가지 저렴한 것, 노동력과 에너지, 식량, 원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아직 상품화되지 않았거나 현금 결합에 들어오지 않은 자연의 새로운 부분을 찾아냄으로써 이들 자연의 저렴성을 회복시킵니다. 19세기에 그 부분은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였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신자유주의는 중국과 인도, 러시아, 브라질에 진입했습니다.


그다음에 기후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남아 있는 모든 '저렴한 자연들'을 감속하는 방식으로 되먹임 작용을 수행합니다. 기후변화는 정상적인 사업 운영의 비용을 상승시키는 유일한 최대 벡터입니다. 기후변화는 자본주의가 바탕을 두고 있는 저렴한 자연 전략의 기반을 근본적으로 약화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자연의 관계 전체의 기반을 약화할 것입니다.


KA: 당신은 환경 운동과 사회 운동이 '자연'/'사회' 이항 구조가 잘못된 것임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다고 언급합니다. 어쩌면 그 이유는 '자연'과 '사회'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실제적 위협 때문일 것인데, 특히 인간이 일부를 이루는 '자연'을 침식하고 있는 대규모 채굴 프로젝트 때문일 것입니다.


JWM: 저는 몇몇 운동이 '자연'과 '사회'가 떼어놓을 수 없게 연계된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다음 단계는 인종과 젠더, 불평등에 관한 물음들의 핵심에 진입하여 이들 쟁점이 근대 세계에서 '자연'과 '사회'가 상상되는 방식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왜 어떤 인간들의 삶이 다른 인간들의 삶보다 더 중요한지―그래서 우리는 '흑인의 삶은 중요하다'라는 운동에 관해 생각합니다―혹은 왜 어떤 대량 학살 사건들이 다른 대량 학살 사건들보다 더 중요한지와 같은 단순한 물음을 제기한다면, 당신은 그곳에 도입된 '자연'과 '사회'에 관한 매우 강력한 전제들이 존재함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저는, 타르 샌즈나 키스톤 XL 송유관을 둘러싼 운동들이 이 책의 논증과 매우 잘 어울리는 그런 종류의 사회적 운동 조직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를 위한 운동들은 새로운 보상 분배를 통해서 더는 진정될 수 없는데,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예전에 가졌던 잉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특히 라틴 아메리카에서 에너지와 수압파쇄, 석유, 추출 프로젝트를 둘러싸고 대화가 벌어지는 상황을 봅니다. 그리고 물론,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많은 토착민 집단이 애초부터 이런 이원론을 절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앞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좌파에는, 특히 북아메리카에서는, '자연'이 하나의 변항 혹은 맥락으로서 저쪽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 관념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막다른 길일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을 자본주의 안에 도입하여 자연 속 자본주의를 이해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