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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W. 무어: 인터뷰-세계생태론: 어떤 지구적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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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9.

 

 

 

 

 

 

 

 

 

 

 

 

세계생태론: 어떤 지구적 대화

World-ecology: a global conversation

 

제이슨 W. 무어(Jason W. Moore)

 

제이슨 W. 무어는 겐나로 아발론(Gennaro Avallone)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세계생태론의 기본 개념들을 소개하고 국제적인 정치생태학 논쟁 중에 최근에 출현한 몇몇 문제적 쟁점을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 후자에 속하는 것은 무어가 '신진대사 균열'의 이론가들과 맺은 관계와 부정적 가치로 표상되는 역사적 참신성이다.

 

당신은 근대 역사와 더불어 비인간 자연과 인간 자연의 미래를 이해하고자 하는 세계생태적 접근법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 접근법의 주요 특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생태론은 협동, 대화입니다. 이것은 지구적 정의에 관한 지구적 대화―학자들의, 예술가들의, 활동가들의 대화―입니다. 그것은 맑스에 진지하게 의지하지만, '진짜 맑스'가 있다는 공상을 거부합니다. 진짜 맑스는 전혀 없고, 오로지 역사적 맑스가 있을 뿐입니다. 여타 위대한 사상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급진적 전통들의 거대한 위험 중 하나가 관념을 믿음으로, 그리고 믿음을 신성한 객체로 전환하는 경향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혁명적 실천을 계발하는 대신에 그 신성한 객체―'일국 사회주의' 혹은 '노동 계급'―을 옹호합니다.

 

세계생태론 대화의 경우에, 제 희망은 그것이 21세기의 지구적 정의에 유용한 대화와 종합을 고무하고 촉진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제나 저는 제 표현 중 일부가 다른 표현들보다 더 유용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제 접근법은 역사적 변화―그리고 역사로서의 현재―에 대한 급진적 해석들 사이의 빈틈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2015)에서 저는 지배와 착취, 환경사의 관계들 사이의 연관성에 관한 물음을 제기했습니다. 페미니즘 비판과 환경주의 비판, 맑스주의 비판이 어떻게 새로운 종합으로 재편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생성적 종합―즉, 후속 탐구, 서사, 표상, 연구, 대화를 생성하는 종합―은 어떤 모습일까요?

 

세계생태론은 대화를 촉발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고, 이런 일은 종종 뜻밖의, 심지어 불편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너무나 많은 급진주의자가 '교정'되어야 합니다. 세계생태론의 요점은 올바른 노선에 다다른 다음에 그것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협동적 야망은 지구적 정의를 위한 해방적 지식을 생성하는 대화를 개시하고 유지하며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과거 지식에 대한 확신을 포기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과거 지식은 중요하고 필수 불가결한 것입니다. 동시에, 오늘날의 지구적 위기를 창출한 사고방식은 우리를 지구적 정의로 이끌지 않을 것입니다. 해방적 실천은 모든 해법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주장해야 합니다. 지구적 위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응은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계생태론은 이런저런 역사적 물음이나 이론적 물음에 대한 저의 관점에 관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 감각은, 그것이 인간 역사―현재의 역사를 포함한 역사 생명의 그물과 더불어 그리고 그 내부에서 공동생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신념으로 응집된 대화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그물의 역사적 지리를 존재론적 조건으로 여기는 역사 철학이 있습니다. 이것에 힘입어 인간의 권력과 생산, 재생산의 조직들이 이들 생명의 그물의 생산자일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생산물이기도 한 방식을 묻는 역사적 방법이 고무됩니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관계는 자연 전체와 더불어 그리고 그 내부에서 어떻게 배치됩니까?

 

그것은 생명의 그물 속 인간에 관한 수평주의적 철학입니다. 그것은 실천적 함의가 있습니다. 어쩌면 가장 두드러지게도, 그 철학은 생명의 그물을 부차적으로 여기는 인간 해방에 관한 관점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자연'을 생산주의적 자원으로 여긴 사회주의 프로젝트의 긴 역사가 있었습니다. 이 사태와 관련하여 많은 위험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연'이 비인간 자연에 절대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연'에는 언제나 인간이 포함됩니다. 당신은 제가 '자연'을 대문자 자연으로 적었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관념은 '사회', '문명', 혹은 그에 버금가는 무언가와 언제나 대비됩니다. 그것은 관념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입니다. 그것은 실천입니다. 토양과 개울과 들판과 숲을 지배할 뿐만 아니라 인간도 지배하는 실천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계급 프로젝트이고 1492년부터 계급 프로젝트였는데, 요컨대 '잉여 가치'의 생산과 '잉여 권력'의 실행을 융합한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입니다.

 

그러므로 세계생태론은 이데올로기와 문화적 지배의 역사를 매우 진지하게 여깁니다. 저는 이 역사가 자본주의가 생명의 그물을 파괴한 사태와 분리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우리가 인종과 젠더, 섹슈얼리티를 '자연'과 '문명'의 세계역사적 물신숭배에서 분리하여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생태론에 근본적인 것은, 근대적 양식의 사유와 문화, 권력과 축적이 진화하는 전체를 구성한다는 주장입니다. 제가 보기에, 자본주의의 출현은 오로지 이들 견지에서만 적절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저는 계급 투쟁과 경제적 변화의 역할이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하기에 단지 자본주의의 신흥 지리문화에 집중하겠습니다. 자본주의의 지리문화와 지정학적 경제, 체계적인 계급 적대는 모두 이런 진화하는 전체의 국면인데, 각각의 국면은 생명의 그물과 맺는 특정 관계를 수반합니다. 이런 지리문화는 두 가지 강화하는 논리에 전제를 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진 코드의 논리이고, 그것의 최초 표현은 '문명' 대 '자연'이라는 존재론적 주장이었습니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도구주의의 논리였는데, 인간이 대다수 인간과 나머지 자연을 이윤 추구의 기회로 전환하기를 바란 (일부) 인간에게 필요한 논리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시초부터 '지배와 이윤'은 '규정과 통치'와 변증법적으로 결합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지리문화의 범위는 '문명'과 '자연'의 대립쌍을 훨씬 넘어섭니다. 1492년 이후에 자본주의의 자극적인 논리는 젠더와 인종, 섹슈얼리티의 대립쌍들과 빠르게 얽히게 되었고, 게다가 제국주의적 통치와 자본 축적의 전략에 얽매이게 됩니다. 제가 자본주의는 이진 코드를 통해서 작동한다고 말할 때, 저는 구체적으로 자본주의적 실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실천은 자본의 끝없는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행위를 보상함으로써, 그리고 방해하는 행위를 처벌함으로써, 역사적으로 발달하는 사유와 행동의 통일체입니다. 이런 실천은 물신화의 지리문화적 공장입니다. 그것은 실재를 이진 코드로 분할함으로써 파편화한 다음에 이들 파편을 사용하여 지배하고 전유하며 착취합니다.

 

또다시 대문자 '문명'과 '자연'은 실재적 추상관념입니다. 이들 관념의 힘은 1%가 그것들이 실재적인 것처럼 행동하는 정도와 99%가 그 실재성을 수용하는 정도에 있습니다. '문명'/'자연'이라는 실재적 추상관념들은 자본주의 아래서 나타나는 소외에 관한 세계역사적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일한 형태의 소외가 아닙니다. 이런 지리문화의 역사를 살펴보자마자 우리는 '문명'과 '자연'의 경계가 세계 피부색과 젠더 경계선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492년부터 줄곧 진행 중인 노동관계의 인종화와 젠더화는 '문명'과 '야만'이라는 실재적 추상관념들을 관류하면서 강화했습니다. 문명의 언어와 야만의 언어는 인종주의적이고 성차별주의적이며 동성애 혐오주의적인 담론과 실천을 위한 일종의 논변적 '원료'를 언제나 형성했습니다. 실비아 페데리치가 지적하는 대로, 자본주의의 초기에 여성은 "유럽의 야만인"이 됨으로써 여성의 생명 활동은 비노동으로 재규정되었습니다. 여성은 '자연적으로' 어머니와 돌봄의 역할, 즉 노동으로서 보상받을 필요가 없는 일에 적합하였습니다. 대서양 세계의 도처에서, 아프리카인, 토착민, 노예, 아일랜드인 같은 비유럽인들은 야만인으로 재규정되었습니다. 그들은 '문명'이 아니라 '자연'에 귀속되었는데, 그리하여 더 좋게도 그들의 생명과 일은 저렴해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계생태론 접근법은 세계체계 분석 및 신진대사 균열 이론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세계생태론과 이들 다른 접근법 사이의 주요한 유사점과 차이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것들은 제 사유에 도움을 준 두 가지 전통입니다만, 유일하지도 않고 언제나 가장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세계체계 분석은 두 가지 큰 이유로 중요합니다. 한 가지 이유는 월러스틴이 내재적 관계의 철학이 견지하는 관점에서 세계역사를 작성하는 방법을 제공했다는 것입니다. 월러스틴의 걸작인 근대세계체제 I(1974)을 읽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설사 그 책을 읽는 사람도 종종 2장을 읽고 멈춥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대중은 그 책이 세계 시장을 위한 생산과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그 책을 읽는다면, 세계 시장의 형성이 중요하더라도(맑스에게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월러스틴의 접근법은 사회과학자들의 모형 구축 노력과 근본적으로 어긋납니다. 사실상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의 모형'을 전혀 제시하지 않고, 오히려 소수의 기본 전제를 제시합니다. 무엇보다도, 장기 16세기에 대서양 양안의 상호의존적인 노동 분업을 생성하는  획기적 이행이 나타난다는 전제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연계적 세계역사입니다. 근대세계체제 I에서 우리는 기후변화, 계급 투쟁과 계급 구조, 국가 형성, 제국 건설, 토양과 식단과 숲의 변환, 그리고 물론 근대 세계 시장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를 맞닥뜨립니다. 그것은 상황적 세계역사입니다. 다수의 역사 중 하나의 가능한 세계역사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가 막 시사한 대로, 그것은 지리와 생명의 그물을 진지하게 여기는 세계역사입니다.

 

세계체계 분석은 또 다른 이유로 생성적입니다. 월러스틴이 그것을 세계체계 분석으로 일컫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의 분석 양식으로, 그리고 특히 19세기 사회과학을 "고쳐 생각하는 것"으로 제시되기 때문입니다. 세계체계 분석에 중요한 것은 근대의 "지식 구조들"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인식론적 비판을 우리의 대학과 분과학문이 조직되는 방식 같은 제도적 구조들과 연계하는 그런 연구였습니다. 이런 견지에서, 세계체계 분석은 언제나 분과학문에 대한 비판이었고 학제성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그것은 특히 사회과학의 지배 원리 중 하나, 즉 지식을 사회문화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의 삼자 분할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월러스틴, 그리고 그에 앞서 페르낭 브로델은 이 비판이 C.P. 스노우가 유명하게도 인간 과학과 생명물리 과학의 "두 문화"로 일컬은 것을 배경으로 전개됨을 언제나 알고 있었습니다. 세계생태론은 이런 지속적인 지식 구조, 즉 두 문화를 그것의 주요한 난제 중 하나로 여깁니다. 저는, 대학에 있는 사람들이 아카데믹 체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체계 "속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분과학문의 문지기 역할을 사절해야 합니다. 그것이 문제의 일부입니다. 세계생태론은 "자연"을 "사회적 변화"에의 부가물로 여기기를 거부함으로써 생명의 그물 속 인간의 분화된 통일성을 우선시하는 새로운 지식 형식들을 위한 공간을 개방합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되고 창발적인 (비선형의) 형식들로 이해되는 것들 말입니다.

 

물론 두 문화 문제와 씨름하고 있는 많은 지적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로버트 M. 영(Robert M. Young), 이제 고인이 된 리처드 레빈스(Richard Levins),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 그리고 더 최근에 롭 월러스(Rob Wallace)와 관련된 변증법적 과학의 특별한 전통뿐만 아니라, "비판적 물리지리학"을 둘러싼 레베카 레이브(Rebecca Lave)와 그 동료들의 작업을 강조할 것입니다. 도나 해러웨이, 캐롤린 머천트, 그리고 페미니즘 과학과 환경 연구의  다른 뛰어난 선구자들이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중요한 관점에서 두 문화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세계생태론은 이들 모든 운동에서 배웁니다.

 

세계생태론이 독특한 방식으로 부각하는 것은 생명의 그물 속 인간들이 맺는 이런 관계들의 세계역사적 특질입니다. 자연을 계급, 혹은 식민주의, 혹은 가부장제에 "부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들 빅 픽처 과정의 각각은 생명의 그물 속에서 그리고 생명의 그물을 통해서 공동생산됩니다. 이것에 힘입어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명의 그물의 생산자인 동시에 생산물인지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는, 부분적으로, 20세기의 전환기에 나타난 두 가지 고전적 논증을 종합하려는 노력으로 고무되었습니다.  하나는 존 벨라미 포스터의 『마르크스의 생태학』(2000)이었습니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폴 버켓의 『맑스와 자연』(1999)이었습니다. 포스터의 책은 자본주의의 역사지리학을 신진대사적 관계로 다시 생각할 새로운 가능성을 개방하였습니다. 계급과 자본, 제국의 생산자이자 생산물이었던 관계 말입니다. 『마르크스의 생태학』에서 포스터는 노동의 소외와 도시-농촌 노동 분업에 기초를 둔, 자본주의의 신진대사적 모순에 관한 강력한 구상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세계생태론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 즉 자본주의의 사회공간적 관계를 그 신진대사적 모순과 종합하는 것를 위한 공간을 개방합니다. 버켓의 기여는 그 생물물리적 차원에서 분리된 맑스의 "가치 법칙"를 통해서 생각하려는 어떤 시도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들 텍스트는 둘 다 자본주의의 세계역사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그 두 텍스트의 단점이 아닙니다. 세계역사는 그것들 각각의 논증에 필수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의 핵심 의도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저는 가치 법칙의 근거를 신진대사적 모순에 두고 싶었습니다. 맑스가 언제나 행하고 있던 것, 끊임없이 인간의 일을 "자연력"으로 일컬었던 행위처럼 말입니다. 둘째, 저는 이런 적대 관계가 1492년 이후로 자본주의의 역사적 지리를 가로질러 작용한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런 접근법에서 신진대사는 신체와 권력, 상품의 흐름을 포함합니다.

 

저는 이들 주장에 대한 포스터의 반응을 논의하는 것이 약간 고통스럽다고 깨닫습니다. 한편으로, 제가 여러 번 서술한 대로, 신진대사 균열 접근법은 획기적이었습니다. 그 접근법은 여전히 비판적 연구에 적실한 분석법입니다. 제가 균열 분석과 관련하여 몇 가지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음은 확실하지만, 이것들은 동지로서의 의견 불일치 문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존 벨라미 포스터는 저의 비판에 대해 매우 다른 방식으로 반응했습니다. 그것은 초토화 공격입니다. 벨라미 포스터의 경우에, 포스터와 의견이 다름은 맑스를 거부하고 유물론을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포스터의 반응과 관련하여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그가 대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포스터는 200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들 문제를 토론하자는 초대를 지금까지 일관되게 거절했습니다. 그가 저를 기후변화 부인자들의 친구라고 비난하기 대략 아홉 달 전인 2015년 가을에 저는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면서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관점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고, 게다가 반생산적인 비논쟁, 맑스주의자들이 서로 이야기가 엇갈리고 온갖 종류의 불쾌한 이름으로 부르는 그런 종류의 비논쟁이 벌어질 수 있을 위험이 존재합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가 차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사회주의와 지구적 정의에 대한 공동의 신념을 정교히 다듬을 대화를 조직합시다. 여태까지 포스터는 현실적인 논쟁에 대한 독설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모든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접근법은 매우 달랐습니다. 저는 포스터와 신진대사 균열 접근법을 여러 번 상찬했습니다. 포스터는 어떤 형태든 세계생태론이 유용한 말할 거리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제가 포스터는 이원론자라고 말할 때, 저는 지적 양식과 정치적 양식에 그것에 대한 어떤 증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스터의 경우에, "당신은 나의 동지 아니면 나의 적이다!"라고 말합니다). 저의 입장은 신진대사 균열 학파가 불충분하게 변증법적이고 지리적이며 역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심각한 차이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평등과 지속 가능성이라는 사회주의적 핵심 원리들에 대한 공동의 신념도 존재합니다. 포스터의 입장은 제가 사회주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분석적 차이에서 근본적인 정치적 차이를 도출하는 지적 양식입니다. 그것은 20세기 사회주의 프로젝트에서 나타난 불미스러운 역사와 관련된 경향입니다. 제게는 우리가 맑스와 정치경제학, 환경사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름에도 여전히 사회주의 정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계생태론 접근법에서는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이라는 개념이 근본적입니다. 그 개념의 의미를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더욱이, 이 개념은 가치에 관한 포괄적 쟁점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당신의 분석에서는 가치의 어두운 측면 중 하나, 즉 부정적 가치가 강조됩니다. 역사적으로 참신한 그것의 특질을 분석해 주시겠습니까?

 

여기에는 사실상 세 가지 의문이 제시되는데, 요컨대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 가치 법칙, 그리고 제가 "부정적 가치"라고 부른 것에 관한 의문들입니다.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은 경험적인 것입니다. 그것이 본질적으로 기여하는 바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엥겔스가 "자연의 공짜 선물"이라고 일컬은 것에 관한 근본적인 주장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저는 엥겔스의 흠을 들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결코 공짜도 아니고 선물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강연에서 "1492년은 절대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할 때의 제 논점입니다. 자연이 행하는 일의 대부분은 무상이고, 강탈당하고, 피와 불로 보상받습니다. 자연의 요소들을 취하여 세계 축적의 소용돌이에 집어넣는 과정은 결코 단순한 적이 없었고 엄청난 폭력과 공포가 언제나 적용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신이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이 세계생태론에 근본적이라고 말할 때, 저는 그 말이 진실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치에 관한 맑스의 구상과 아무튼 분리된 '근본적인' 범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치'가 역사적 자본주의에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역사적 및 지리적 탐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가치에 관한 물음은 기술과 직접적인 생산 과정, 현금 결합으로 환원되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역시 지배 관계 속에서 그리고 지배 관계를 통해서 결정됩니다. 어떤 일이 일―화폐 경제에서의 일로 여겨지는 조건은 대다수 일이 일로 여겨지지 않는 점입니다. 생명의 그물의 일과 잉여 권력을 둘러싼 투쟁을 편입하지 않는, 자본주의의 잉여 가치에 관한 구상은 분석, 혹은 정치 행위에의 설득력 있는 지침일 가망성이 없습니다.

 

우리는 식민 지배 아래서의 인구 및 저렴한 일과 관련하여 이런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자본은 식민지의 인구를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로 맞닥뜨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본을 위해 일하도록 강제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은 이런 일을 할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는데, 그것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일입니다. 근대 국가, 혹은 그것에 가까운 무언가를 떠올립시다. 국가가 행하는 일의 일부는 강제력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국가와 제국이 행하는 일의 또 다른 일부는 잠재적으로 수익성이 있는 영토의 지도를 제작하고 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그물을 이윤 창출의 기계로 전환하는 데 근본적이었습니다. 모든 거대한 유럽 제국이 행한 젓 번째 일 중 하나는 지도제작술과 지도제작 기관과 식물원을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그물은 자본이 사용하도록 준비가 된 기존 사용가치들의 저장고가 아닙니다. 사용가치는 생산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농업에서 사용가치는 엄청난 양의 인간 일과 비인간 일을 수반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자본이 자동으로 판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그물의 요소들을 자본에 유용하게 만드는 데는 일이 필요합니다. 국가는 자본이 판독할 수 있는 자연의 단위체들을 공동생산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상적인 사회적 자연입니다. 정치적 맑스주의자들이 강조한 부르주아 소유 체제는 이런 과정의 일례입니다. 그 자체가 오로지 조사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부르주아 재산법, 토지의 살아 있는 부분을 추상적인 재산의 단위체로 추상화하는 제도를 부과할 수 있는 근대 국가가 없었다면 '토지'가 자본을 위해 일을 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조사 및 부르주아 재산과 관련하여 방금 언급한 모든 것은 근대적 지도제작과 지구적 영토에 관해 말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발흥에 대한 근대 지도학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혹은 그 점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메리카 제국에 의해 조직된 지구적 감시와 지도제작 체계의 중요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대의 지도―1569년 이후의 메르카토르 투영법을 생각합시다는 그 중요성이 증기기관에 버금가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획기적 발명품이었다.

 

여기서 저는 모든 세부를 다루지 않을 것이지만, 근대의 지도제작술은 추상적인 사회적 자연에 대한 두 번째 기여를 말해줍니다. 세계역사적 견지에서 이것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유와 행동 사이의 자본주의적 관계가 갖는 역사적 특정성을 부각합니다. 근대의 지도제작술과 수학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세계역사적 분열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장기 16세기에 자본주의가 출현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들 16세기의 발달에서 금융화된 "대량살상 수학무기"의 확산과 지구 주위를 공전하면서 지구 공간의 모든 구석구석에 대한 지도를 제작하고 수정하는 데 전념하는 일단의 인공위성으로 이어지는 직선이 있습니다. 이 논의에서 중요한 점은, 그런 기술적 체계들이 그 "물질적" 내용으로 환원될 수 없고 오히려 역사적 자본주의에 내포된 사유와 실천의 적대 관계를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데카르트적 이원론'으로 불리는 것에 관해 언급할 때 저는 데카르트가 17세기까지 거의 두 세기 동안 발달한 이런 세계역사적 적대 관계을 철학적으로 표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가치 법칙'을 다루어 봅시다.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점을 수용하면, 무엇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결정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우리의 사회적 지평과 지리적 지평을 확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산 지점에서―들판에서, 사무실에서, 매장에서의 기술적 관계와 노동관계가 필요노동시간을 결정하는 데 중요함은 분명합니다. 또한, 가치관계가 직접적인 생산 지점을 훌쩍 넘어 확대된다는 점도 분명합니다. 그래서 저는 필요노동시간이 무상의 일에 의해 결정된다는 페미니즘적 통찰을 수용했습니다. 페미니스트의 경우에, 이것은 압도적으로 가정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재생산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반半프로롤레타리아와 비판적 농업연구 학자의 통찰과 저렴한 노동 예비군이라는 통찰도 수용했습니다. 기본적으로, 농가가 일부 가족을 임금 노동에 내보낼 수 있으면서 경작지를 이용할 수 있을 때처럼, 가구가 비임금 소득이나 비현금 소득을 입수함으로써 재생산할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여 최저 임금의 문턱은 낮아집니다(이런 상황은 여성이 수행하는 무상 일의 경우에도 대체로 마찬가지임을 기억합시다). 마지막으로, 저는 필요노동시간이 비인간 자연의 일에 의해서도 형성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맑스가 폭포와 잉여 이윤, 혹은 고정 자본처럼 '작용하는' 토양 비옥도에 관해 언급할 때의 논점입니다. 이런 사태는 근대 초기의 노예/사탕수수 농장 단지에 근거를 둔 자본주의적 농업의 장기 역사에 근본적입니다. 사탕수수 농장 단지의 새로운 단계는 각각 토양 비옥도, 미자본화된 숲 등을 이용하는 특별한 프런티어 운동에 의존했습니다. 저는 가치를 방법론적 전제로 여김으로써 현금화된 일과 사회적 재생산, 생명의 그물 사이의 필수적인 연결관계를 구체화할 수 있었습니다.

 

가치를 논의하는 데 핵심적인 또 다른 논점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의 '가치 법칙'은 두 가지 차원에서 파악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본 축적의 국면입니다. 나머지 다른 하나는 윤리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가치 법칙입니다. 그 둘은 서로 근본적입니다. 이 두 번째 국면은 자본주의가 생명과 일을 가치 있게 여기는 방식―그리고 낮게 평가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를 들면, 자본주의의 발흥에 있어서(그리고 그 이후로 언제나) 일의 인종화와 젠더화를 기초적인 것으로 여겨야 함을 뜻합니다. 장기 16세기에 지배의 지리문화―자본주의적 백인 우월주의와 가부장제의 문화가 이원론적인 근대적 형식으로 출현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본원적 축적의 시대에 일의 근대적 젠더화―그리하여 여성이 비일꾼으로 재규정되었습니다와 근대적 인종주의가 '수반'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본원적 축적과 유상 일과 무상 일의 체계적 가치관계의 형성을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문명', '자연', '인종', '젠더', 그리고 '섹슈얼리티'라는 실재적 추상관념들은 '지배'의 프로젝트, '잉여 권력'의 프로젝트로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저렴한 자연'과 잉여 가치의 프로젝트로 또한 형성되었습니다. 이것은, 예를 들면, 근대적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 식민주의가 대다수 인간의 일을 낮게 평가함으로써 각각의 프롤레타리아에게서 구현되는 필요노동시간을 더 잘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성의 노동을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것은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임금을 삭감하고 1%를 위한 이윤을 늘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 사태는 또한 1970년대 이후로 지구적 남부에서 "이용 가능한 제3세계 여성 일꾼"을 핵심에 두고서 진행된 산업화의 세계역사이지 않습니까?

 

이제 부정적 가치를 다루어 봅시다. 그것은 가치 법칙에 대한 세계생태론적 독법에서 비롯된 관념입니다. 부정적 가치는 후기 자본주의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종류의 모순을 명명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부정적 가치는 예전의 위기 해결 전략을 통해서 해결될 수 없을 일련의 신흥 한계―특히 기후변화를 말해줍니다. 몇몇 비판자는 저의 책에서 제가 생물권을 무시했고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원했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상 그 책 전체는 정반대의 주장, 즉 기후변화는 다른 모순들과 뒤엉켜서 획기적 위기의 조건을 창출한다는 주장을 향해 구축됩니다. 그리하여 부정적 가치는 적자(장부에서 그런 것처럼)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 부정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정적 가치는 과거 다섯 세기의 '일상적 활동' 모형으로 해결될 수 없는, 자본 축적에 대한 걸림돌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자본에 의한 대기 공유재의 급진적인 탄소화로 예고된 홀로세의 종언이 모범적인 사례입니다(하지만 유일한 사례는 아닙니다). 뛰어난 안드레아스 말름과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대로, 재생에너지로의 직접적인 전환을 위한 기술적 수단은 현존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전환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자본주의의 다섯 세기 모형이 무자비하게 무정부적이고 경쟁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형은 또한 먼저 파편화하고 나중에 연결하라는 사고방식에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그런 파편화로 인해 '계몽된' 자본주의가 기후 위기를 해결할 수 없게 되는데, 왜냐하면 기후 위기는 부분적인 수단을 통해서 '해결될' 수 없는 전체의 위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통찰이 엘마 앨트바터(Elmar Altvater)가 지구공학과 기후변화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전환을 바란다면, 전체론적 정치를 필요로 하는 전일적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노동 정의, 토착민 정의, 기후 정의, 그리고 식량 정의―결코 포괄적인 목록이 아닙니다!를 연결하는 일단의 운동에서 우리가 깨닫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비판자들이, 증거라고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채로, 세계생태론은 이들 차이를 평평하게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 대해 놀랍니다.) 이들 운동과 주장은 생명과 정의, 권력과 생산을 그 차이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새로운 존재론적 정치의 일부입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하여 낭만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물론 그런 운동들과 관련하여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 민주화, 그리고 지구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주장들을 연결하는 경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 운동들은 그 자체로 부정적 가치의 일종입니다.

 

마지막으로, 몇몇 논문에서 당신은 자본주의적 세계생태의 최종 위기에 관해 적었습니다. 포스트자본주의적 세계생태로의 전환에 관한 당신의 가설을 상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자본주의는 여타 문명과 마찬가지로 영원하지 않습니다. 문명의 사유와 권력, 재생산 양식에서 근본적인 전환점으로 이해되는 위기는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그 사실은 위기가 언제 어디서 전개될지에 관해 그리고 문명적 위기의 정치에 관해 그다지 말해주지 않습니다. 제 생각은 세 가지 광범위한 물음을 관류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본주의의 내부에서 그리고 생산 양식 사이에서 이전에 일어난 체계적 위기(예를 들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위기)를 언제 그리고 어디서 보게 되는가? 둘째, 자본주의의 이전 위기들은 어떻게 해결되었는가? 그리고 셋째, 이들 위기는 생명의 그물을 통해서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저는 하나의 소견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제 소견은 비교적 우호적인 기후를 나타낸 홀로세 장기 시대의 종언이 현재의 문명적 위기를 독특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후 전환은 홀로세에 일어난 기후변화의 이전 국면들을 무색하게 합니다. 그것은 지구체계 과학자들이 상태 전환으로 부르는 것, 즉 생명의 그물의 조건에 있어서 급작스럽고 비가역적이며 근본적인 전환의 일부입니다.

 

지난 20년에 걸쳐 기후과학에 관해 읽음으로써 제가 꾸준히 배운 통찰 중 하나는 기후변화가 비선형적이라는 점과 그런 비선형성을 이해하기 위한 모형들이 주요한 방식으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급진주의자들이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비선형적 변화에 대한 자신들의 모형을 기꺼이 수정하려고 했는지 확신하지 못합니다. 부정적 가치는 그런 비선형성의 일례입니다. 이것은 홀로세에 일어난 기후변화와 문명적 위기의 교훈이 그냥 미래로 투영될 수는 없음을 뜻합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무시될 수 없습니다.

 

생물권의 상태 전환을 극복하려면 우리가 생명의 그물에서 다른 사람들과 행동하고 생각하는 방식의 상태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지적 상태 전환을 요구하고, 게다가 물론 정치적 상태 전환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몇몇 신성한 객체, 무엇보다도 '자연'(인간 없는 생태)과 '사회'(생태 없는 인간)을 버려야 합니다. 이들 범주는 인식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실천적이고 실재적인 지배 도구인데, 요컨대 그것들은 자본주의의 잇따른 생태 파괴 및 인간 학살의 물결에 연루된 실재적 추상관념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인간'/'자연' 이진 구조에 고무되어 자본주의의 탄력 복원성을 과대평가하게 됩니다. 심지어 많은 급진주의자도 자본주의를 생명의 그물 바깥에 있는 사회적 힘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하여 자본주의는 급격한 기후변화를 견뎌낼 수 있는 초자연적인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일부 자본가가 재난과 탈취로부터 이익을 챙길 것이라면, 기후변화가 체계 전체에 대해 나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기후변화는 근대적 생명과 권력과 축적과 합리성을 다섯 세기 동안 지배한 '저렴한 자연' 모형의 내파를 가리킵니다. 특히, 그리고 확실하게도, 기후변화는 극적이고 갑작스럽고 불가역적인 반전을 예고합니다.

 

여기서 저는 반전이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사실상 상당히 비선형적입니다. 그것은 '저렴한 자연'의 프런티어가 현재 폐쇄되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 역시 충분히 참이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권력과 재생산에 대한 자본주의의 전체 전략이 '저렴한 자연'을 낳은 생명의 그물에 의존했다는 것과 그런 전략이 이제는 자체를 뒤집고 있다는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인간 활동과 광범위한 정의 운동을 포함하는 생명의 그물은 자본 축적을 가능하게 하는 거대한 수단에서 근본적인 걸림돌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프런티어에서 한계로의 이런 전환은 잉여 가치에서 부정적 가치로의 전환입니다. 저는 그런 한계가 자본주의와 생명의 그물 전체 사이의 연계 조직에서 나타난다고 강조하겠습니다. 그런 견해는 생물권의 국면을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붕괴시키기는커녕 지구적 상태 변화를 자본주의의 위기에 있어서 획기적 국면으로 제시합니다.

 

대략 지난 4000년 동안 기후변화와 문명적 위기는 동반하여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태를 서기전 1200년경에 일어난 지중해의 청동기 시대 문명의 위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2세기경에 로마의 기후 최적기가 끝나면서 로마의 세 번째 위기와 더불어 4세기와 5세기에 '야만인' 침공의 마지막 거대한 물결이 이어지는데, 결국 서양 제국이 붕괴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4세기의 야만인 침공이 지난 2000년 동안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최악의 가뭄 중 하나의 와중에서 개시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합니다. 봉건주의의 위기는 14세기에 나타난 소빙하 시대의 개시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틀림없게도 자본주의의 최대 위기(여태까지)는 소빙하 시대(대략 1550~1700)의 가장 비우호적인 조건 아래서 전개되었습니다.

 

한랭한 장기 17세기의 가혹한 기후―신세계 대량 학살과 오르비스 스파이크(Orbis Spike)로 심화된 기후를 통해서 발달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역량은 시사적입니다. 장기 4세기와 장기 14세기의 기후로 인한 위기들―'로마의 멸망'과 봉건제 위기로 특징지어진 위기들―과는 대조적으로, 상품화의 전반적인 반전이 없었고, 게다가 일부 제국은 다른 제국들보다 더 나았지만 제국적 권력의 거대한 붕괴도 없었습니다. 일어난 일은 제가 "기후 강화-기후 해결" 동학으로 부른 것이었습니다. 권력과 생산의 유럽 체계들은 적도 세계 전역에 철저히 파고 들어갔는데, 특히 대서양 세계의 머리가 네 개 달린 짐승, 즉 사탕수수-은-해운-노예 복합체가 그랬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화석연료 혁명 역시 네덜란드와 영국의 이탄과 석탄의 채굴 붐과 더불어 이 시기에 개시되었음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17세기의 기후 위기에 대한 자본주의의 대응은 그 범위를 새로운 프런티어로 확대하는 것이었는데, 요컨대 수평적으로는 사탕수수와 은과 그것들의 지역적 네트워크로 확대하고 수직적으로는 석탄 채굴로 확대하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런 프런티어가 전혀 현존하지 않습니다.

 

다음에 무엇이 도래할지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대략 20세기에 걸쳐 시도된 급진적 정치에서 도출할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어두운 교훈 중 하나는 제국주의적 세력이 생산력을 기꺼이 파괴하는 경향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자본에 의해 초래된 기후변화가 경악스러운 파괴력을 동반함은 확실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나오미 클라인이 보여주는 대로, '쇼크 독트린' 재편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시점에서는, 제가 생각하기에 나중보다 오히려 곧, 이런 재편이 대규모로 수익성이 더는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기후변화가 대규모의 축적을 위한 기회는 거의 없이 오직 비참함을 수반할 뿐인 아이티와 지구적 남부의 다른 어떤 지역과 같은 장소들에서 이런 사태를 이미 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자본이 더는 재건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시대에 기후 재편에 관한 물음을 제기하는데, 사스키아 사센(Saskia Sassen)이 보여주는 대로, 점점 더 약탈적인 금융화된 자본주의에 저항할 방법에 관한 물음과 교차합니다.

 

기후 재편과 기후 정의를 포함하는 어려운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재편은 '수평주의'(참여 민주주의의 심화)와 '수직주의'(국가 계획) 사이에 균형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정부주의 전통과 사회주의 전통 중 최선의 것이 필요할 것이고, 다가오는 세기에 둘 다를 기꺼이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자연'을 생산력으로 사용하는 관념과 실천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고, 지구적 정의의 다종적 구상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주의―혹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가 결국 더 민주적이고 평등하며 지속 가능한 세계라고 부르는 것는 모든 생명을 위한 사회주의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