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데이비드 헤이그: 다윈에서 데리다까지-데닛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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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5.

대니얼 C. 데닛의 서문

 

이 즐거운 책은 의미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와 우리 자신이 우리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준다. 그것은 적대적인 경계를 태평스럽게 무시하고서 철학과 과학, 시와 생화학, 정보에 관한 섀넌의 수학적 이론과 훌륭한 구식의 문학적 학문성을 통합한다. 아리스토텔레스 혹은 프랜시스 베이컨에게서 유전자 조절의 동역학에 관해 필경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태반의 조절 네트워크를 재배선하는 데 레트로바이러스가 수행하는 역할에서 문학적 해석에 관해 필경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과학자들은 자기 분야의 역사를 학습함으로써 얻게 되는 것이 있는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학자들은 미생물학의 매혹적인 세부 내용 중 일부를 학습함으로써 자신의 분야에 대한 이해를 강화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이 거대한 분열의 양쪽 지지자들에게 열정을 불러 일으켰던 나는 이제 그들에게 데이비드 헤이그가 놀랍도록 광범위한 원천--로렌스 스턴의 흥미로운 소설 ≪트리스트램 샌디≫(1759)와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3)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와 자그 데리다의 저작을 거쳐 유전자 전달과 복제, 표현의 복잡한 기구에 관한 동료심사를 거친 최근 논문들에까지 이르는 원천--에서 교묘하게 끌어낸 관념들의 롤러코스터에 탑승하기를 권유한다. 그 탑승이 더욱더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확신을 조용히 품고서 수행된 우아한 논증 형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인데, 요컨대 과시나 특별한 호소가 전혀 없이 참신한 생명관을 전개하고 그 함의가 스스로 드러나게 내버려 둔다.

 

철학자들은, 빈약한 상투형에 따르면, 오래된 물음에 관여한다.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그리고 '경성' 과학자들은, 또 다른 빈약한 상투형에 따르면, 그 물음은 제쳐두고 무한정 연기하면서 더 인정받을 만한 일단의 물음, 사물이 작동하는 이유가 아니라 방식에 관한 궁극적으로 물리적이거나 혹은 기계적인 물음들을 탐구한다.

 

물질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분자는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하는가?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고 생명체는 어떻게 계속 살아있는가?

 

이들 상투형은 강력한 전제로 굳어짐으로써 독자적인 목적과 방법을 갖춘 예술과 인문학을 나름의 다른(그리고 대립하는) 목적과 방법을 갖춘 과학과 분리시켰다. 정신과학(문자 그대로, 마음에 관한 과학) 대 자연과학(문자 그대로, 자연에 관한 과학인데, 가장 넓은 의미에서 달과 산맥, 산소와 대양을 포함하는 과학). 왼쪽에는 법칙 없는 서사가, 오른쪽에는 자연 법칙이 있다.

 

이들 전통적인 분리선은 수세기 동안 가르쳤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들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생명체의 복잡한 기관들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있음을 알고 있고--우리가 그것들을 식별할 수 있기만 하다면--우리는 모두 예술과 인문학에서 찾아내는 의미가 실재적인 현상, 즉 과학자들이 그들의 방정식에서 찾아내어 전달하는 의미만큼 확실히 실재적인 현상임을 알고 있다. 물질과 의미, 메커니즘과 목적, 인과관계와 정보를 하나의 통일된 시각으로 결합하는 방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리고 150년 이상 동안 우리는, 이런 통일의 열쇠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다윈의 위험한 관념에 있음을,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이해했다.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이 관념은 다윈 자신의 시대에서 21세기의 점점 늘어나는 일단의 생물학자, 물리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철학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심오한 사상가의 공통 기반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인--텔로스 혹은 무엇을 위해?라는 물음--은 아무튼 생명은 스스로 목적을 갖는 생산물--생명체와 그 제작물--이 출현하는 맹목적이고 아무 목적이 없는 변별적 복제 과정으로 설계된다는 다윈의 제안에 흡수되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칼 맑스가 다윈의 《종의 기원》을 발견했을 때 부른, 흔히 인용되는 쾌재로 요약되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긴장이 있다.

 

이 책에서는 자연과학에 있어서 '목적론'에 대한 치명타가 최초로 다루어질 뿐만 아니라 그것의 합리적인 의미도 경험적으로 설명된다. (맑스, 라살에게 보내는 편지, 1861)

 

다윈의 관념은 목적론을 설명하는가, 혹은 해소하는가? 그 관념은 둘 다 하는데, 그것은 실제 목적, 실제 기능이 그 자체로는 아무 목적, 아무 기능도 없는 현상에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보기에, 이것은 의심스러운 주장, 기껏해야 희망적 사고, 혹은 자기기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텔로스telos는 매력적인 관념이지만...신성한 느낌을 주기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과학을 수행할 때 우리는 청교도적으로 목적론을 삼가해야 하는가(그러나 문학, 역사, 철학, 심리학을 수행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다윈은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괄량이를 길들여서 가장 정직한 여성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는가? (쟁점을 제기하는 이런 떠들석한 방식 혹은 어쩌면 공격적이기도 한 방식 자체가 고찰되어야 하는 쟁점인데, 다양한 분야에 걸친 사상가들의 잠복된 혐오와 부각되지 않은 편견이 헤이그의 정통한 주의가 널리 비추는 밝은 빛에 노출된다.)

 

세부는 중요한데,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조각들이 모두 어우러지는 방식에 대한 헤이그의 완벽한 설명에 내가 휩싸이게 될 때까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요하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이 진화론--결코 자세하지 않고 때때로 소묘적 개요이지만 적어도 유용한 형태--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게다가 우리는 이것이 진화적 사유를 유전자 풀과 유기체를 넘어서 마음과 문화, 사회로 확장하기 위한 확고한 토대를 구축하기에 충분한 이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헤이그는, 우리가 그의 철저한 적응주의적 시각을 채택하면,  복잡한 내용에서 배워야 할 가치 있는 것이 더 많이 있음을 보여주는데, 요컨대 그 시각은 모든 생명 현상을 역공학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연에서 나타나는 모든 패턴에 대한 근본 이유를 추구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와 리처드 르원틴(1979)은 이런 '한없이 낙천적인 패러다임'(우리는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의 세계에서 살아간다고 추정된다)의 해로운 영향에 관해 경고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리는 누군가가 일컫는 대로 이런 '다원주의적 편집증'의 위험에 관한 우리의 여전한 걱정을 방기해야 하고, 따라서 헤이그가 우리를 전략적 유전자들, 변절자들과 협잡꾼들의 무심한 경쟁, 협력자들과 파수꾼들, 자신이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이유를 결코 인식하거나 파악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거대한 운반체를 미래로 용케 조종하는 로봇들로 이루어진 로봇들로 이루어진 로봇들의 기묘하고 매력적인(그러나 또한 불안하게 하는) 세계로 이끌도록 내버려 두자. 이것은, 리처드 도킨스(1976)이 멋지게 소개하였고 헤이그가 훨씬 더 자세히 탐사한 이기적 유전자들의 세계다.

 

두 가지 비공식적 규칙, 즉 브라이텐베르크의 법칙과 간수의 규칙이 헤이그의 프로젝트를 잠정적이지만 유용한 토대 위에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스위스 신경학자 발렌티노 브라이텐베르크는 ≪운반체≫(1984)라는 우아한 소책자를 출판했는데, 그 책에서 그는 점점 더 복잡해지는 일단의, 박테리아(결코 단순하지 않다!)보다 더 단순한 상상의 유기체를 서술하고 그것들이 단독으로 그리고 집단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서술한다. 이런 방법론에 대한 정당화는 브라이텐베르크의 상향 분석과 하향 합성의 법칙이었다. 그가 지적한 바에 따르면, 여러분이 그 행동을 관찰하는 복잡한 존재자의 내부 작동을 분석하는 것--상향 분석--보다 여러분이 더 단순한 존재자들로 합성하는 복잡한 존재자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하향 종합, 구성주의적 접근법--이 더 쉽다. 많은 사람이 보기에 그는 옳았고, 그의 소책자는 로봇공학과 다른 컴퓨터 이용 탐구의 상당한 연구 전통을 개시했다. 그런데 브라이텐베르크의 법칙 같은 것은 자연선택의 과정에서 정보가 포착되고 순환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한 헤이그의 분석에서도 작동한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여 구축하라.

 

간수의 규칙, 즉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일어날 것이라는 규칙(≪자유는 진화한다≫, 2003. 160~1에서 논의됨)은 내가어딘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규칙인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원전을 잊어버렸다. 그것은 잘못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못될 것이라는 '머피의 법칙'을 개선한 규칙이다. 그것이 개선책인 이유는, 그것의 한 판본이 한낱 비관주의의 즐거운 표현에 불과하지 않고 정말로 성립하는 실제 환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감옥 간수의 격률로 추정된다. 그것의 논리적 근거는, 감옥은 시간이 남아돌고 어느 정도의 인내심과 탐구적이고 경쟁적인 본성을 갖춘 죄수들로 가득차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이 감금된 체계의 모든 양태를 샅샅이 탐색하여, 그 길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출구를 찾거나 자신의 조건을 개선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죄수들은 얼마나 영리한가? 일부 죄수는 똑똑하고, 일부 죄수는 집요하다. 그들이 각자의 발견 결과를 공유하면, 누가 혁신에 대한 영예를 갖게 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지능을 시험하기보다는 그들의 기회 환경을 시험하라. (《엘보우 룸》[1984]에서 나는 몇 피트 떨어진 쓰레기통 속에 수건 한 상자가 현존하는 상황을 기본적인 기회--내가 그 상황에 관해 알고 있기만 했다면 나는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지만, 내게는 보물을 찾아서 그 쓰레기통을 점검하게 할 정보가 전혀 없다--로 서술했다.) 간수의 규칙에 따르면, 기본적인 기회도 고려되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수들이 그런 기회를 찾아내는 것밖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감옥에서는 어떤 쓰레기통도 그냥 두지 않는다.

 

진화의 세계에는 기본적인 기회가 풍부하고, 그런 기회를 맞닥뜨리는 데 지능이 필요하지 않다. 변이가 일어나서 시도될 시간이 걸릴 뿐이다. 진화 환경 속에 정보가 있다면, 즉 차이를 감지하거나 그냥 응답할 수 있을 무언가에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을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차이를 만들어낼 것인데(일반적으로--이것은 경험 법칙이다), 그 차이 역시 재생산에 의해 증폭될 수 있기에 더 큰 차이를 만들어내고, 되풀이되는 과정에서 미래에 일어날 개연성이 더 큰 차이를 탐지하고, 기타 등등. 그렇다, 이것은 자연선택이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법일 따름이지만, 그것은 아래로 줄곧 이런 식으로 작동하기에 단순한 분자 구조체조차도 그런 끈덕진 죄수들과 같다고 유용하게 여겨질 수 있는데, 언제나 철저히 조사하고, 언제나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을 추구한다. 그 죄수들은 단 하나의 포괄적인 목표를 지니고 있다. 탈출하라! 이들 행위주체는 다른 목표를 지니고 있다. 재생산하라!

 

여러분이 이 두 가지 시각을 결합하면, 데이비드 헤이그의 저작에서 매우 맛있는 열매를 맺는 방법론을 얻게 된다. 브라이텐베르크의 법칙은 우리에게 아래서 위로 작업하도록 요청하는데, 요컨대 매우 단순한 행위주체인 물질적 유전자들, 혹은 심지어 그 원소들로 시작하여 그것들을 재생산하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지닌, 생명 없고 어리석은 호문쿨루스--우리가 집합시킬 수 있을 만큼 어리석은--로 다루도록 요청한다. 주지하다시피, 프랑스와 자코브가 서술한 대로, "모든 세포의 꿈은 두 개의 세포가 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그의 견해를 그보다 더 낮은(혹은 높은) 층위에 적용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유전자 유형의 개별적 토큰들이 감옥에 갖힌 일단의 형제와 오히려 유사함을 인식하게 된다. 그것들은 친족-이타적이거나 혹은 우리는 친족을 한 단위체, 이기적 단위체로 여길 수 있다. 다양한 간수 같은 목적을 위해서는 한 이기적 집단이 입수할 수 있는 기회를 고려하는 것이 더 쉽다. 그것들의 경쟁적 본성은 그것들을 내부에서(그것들은 결국 거대분자의 부분들일 뿐이다) 추동하는 충동이라기보다는 기회가 생겨날 때면 그 기회를 이용하기 위한 체계적 재능이다. 우리가 전략적 유전자를 살펴봐야 하는 이유는 이들 집단이 함께 작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생식 계열--난자와 정자--의 복제본들은 몸 또는 신체 속 형제들의 '노력' 덕분에 탈출하게 된다(그리고 운이 좋다면 증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소형 로봇들의 이들 가족은 가장 단순한 브라이텐베르크 운반체와 유사하고, 게다가 하향 종합의 법칙 덕분에 우리는 생겨날 기회들과 그것들을 '발견하는' 일단의 그런 운반체의 영향을 그래프로 그릴 수 있다. 헤이그가 유전자가 '기대'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언급할 때, 그는 이들 로봇이 직면하는 인식적 곤경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들이 자신에 이익이 되도록 (원칙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어떤 정보가 바로 근처에 있는가? 그것들이 우연히 발견한 다음에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을 기본적인 기회가 있는가? 그것들은 기회를 '인식'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그런 로봇이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으로, 즉 그 기회를 무작위적으로 시도하여 어떤 편익으로 '보상'받음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기회가 체계적으로 입수될 수 있다면, 그것들은 그 집단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의 일부이다.

 

그러나 우리가, 논증을 위해, 혹은 우리 상상을 위한 버팀목으로서, 우리 자신이 그런 무심한 사물을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행위주체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실제 행위주체성은 아디에서 생겨나는가? 우리는 분자에서 어떻게 기안자가 되는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어떻게 이기적(그리고 이타적) 사람이 되는가? 헤이그는 우리에게 "의식적인 의도는 생명체의 만연하는 지향성의 특별한 사례다"라고 말하고, 게다가 그는 이들 사례가 어떻게 특별한지 그리고 어떻게 생겨날 수 있는지에 관해 말할 것이 많다. ≪도덕감정론≫(1759)이라는 애덤 스미스의 흔히 무시당하는 걸작에서 계시를 찾아낸 헤이그는 두드러지게 다윈적이지만 현재 유행하는 진화 기반 윤리 사상의 단순한 몇몇 형태들과는 매우 다른 판본의 도덕을 구축한다. (다시 말해서, 비교적 조악한 최근의 사례들에서 다윈적 사유의 윤리와 정치 이론에의 적용에 감동받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헤이그에게 그 시각을 구출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다.) "나는 당신이 내가 신뢰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느끼는가? 나는 당신이 내가 착취당할 만한 사람이라고 느끼는 것을 느끼는가?" 헤이그는 유전자와 문화, 이성의 미묘하게 상호작용적인 조합을 구축하여 "통합성이 타산에서 생겨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을 제공한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단계씩, 더욱더 큰 복잡성을 향한 일련의 점진적인 움직임 속에서 더 많은 자유도가 통제된다.

 

진화생물학은 물론 다윈 자신에게서 시작하여 많은 정교한 해설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 훌륭한 저자들에 대한 나의 감탄과 감사는 종종 표현되었기에 여기서는 되풀이되지 않을 것인데, 몇 쪽에 걸쳐 이어지거나 나에게 특별히 계시적인 저서의 저자가 누락된 저자 명부에서 독자를 구조하기 위함이다. 데이비드 헤이그는, 이런 계시적인 집단에서도, 참신한 통찰을 아낌없이 베푸는 원천으로서, 논쟁의 정리자--그리고 흔히, 내가 보기에는, 해소자--로서, 성실하고 유쾌한 학자로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인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깨워줄 수 있는 것처럼, 내게 일깨워주는 사람으로서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