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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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켄지 워크: 인터뷰-정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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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9. 5.

 

- 아래의 글은 매체이론과 신매체에 관심이 많은 작가이자 교사인 맥켄지 워크(McKenzie Wark)가 '월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 OWS)' 운동과 관련하여 <아큐파이드 타임즈(Occupied Times)>와 가진 인터뷰를 옮긴 것이다. 그가 펴낸 책은 <<해커 선언(A Hacker Manifesto)>>(2004), <<거리 아래의 해변(The Beach Beneath the Street)>>(201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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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 월가의 점령 직후에 글을 쓴 당신은 그 현상의 가장 흥미로운 측면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월가의 세계에는 정치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예증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을 제시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MW: 지식인들과 좌파 인사들만이 정치가 존재한다고 사실상 믿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 밖의 사람들은 아무도 믿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글쎄요,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옳다면 어떻게 될까요? 니체가 말하듯이, 신은 죽었습니다. 정치도 죽었습니다. 하늘에 계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일종의 환상입니다. 하느님과 꼭 마찬가지로 현명하게 지배할 수 있을 이곳 지상의 유산자들의 동포애 또는 형제애라는 환상말입니다. 글쎄요,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여전히 정치의 모습입니다.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고 심지어 가끔 통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대하는 것만큼 상황을 많이 바꾸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환상입니다.

 

그런데, 정치는 존재하지 않는 반면에, 어떤 다른 것들은 매우 실재적입니다. 자본주의는 존재합니다. 착취는 존재합니다. 억압은 존재합니다. 불평등은 존재합니다. 기후 위기는 매우 매우 실재적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도 불러내지 않고 정치라는 마술도 불러내지 않고서 그런 모든 것들을 어떻게 다룰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저 도움이 될 수 있는 과거 경험에 의존하여, 그러나 신만큼이나 실재적이지 않는 정치라는 방어적 환상을 불러내지 않은 채, 새로운 실천들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OT: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죽었다'라는 점을 수용할 수 있을지라도, 부고는 확실히 발표된 적이 없으며, 그리고 중앙집권적 정부들은 여전히 널리 퍼져있습니다. 그것들의 팡파르가 계속 울리는 한 새로운 과정들이 이런 실패한 기구들에 어떻게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MW: 국가는 실재적이지만 정치와 아무 관련도 없다는 점을 덧붙여야 합니다. 저는 "정의란 없다. 법이 있을 뿐이다"라고 우리에게 계속 주장했던 법학 교수가 있었습니다. 비슷한 식으로 저는 "정치란 없다. 국가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자체의 견지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국가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국가에 맞서기보다는 오히려 국가를 무시하기 위해, 이른바 그것의 그늘 속에서 삶의 형식들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국소적 맥락, 즉 어떤 의미에서든지 국가가 얼마나 많이 "우리의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그들의 것"인지에 의존합니다. 마르크스는 방문객들을 런던 주변에 데리고 가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의회입니다. 이것의 그들의 외무부입니다." 기타 등등. 그러나 이십 세기에 국가는 자체의 기능들 가운데 일부를 운동의 이해관계에 양도함으로써 노동운동과 다른 것들의 전술에 대응해야 했는데,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운동을 국가에 편입시켰습니다. 그래서 운동이 얼마나 많이 구제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이 "그들의 국가"일 뿐이지에 대한 국소적인 전략적 평가가 항상 있습니다.

 

OT: 새로운 실천들과 관련하여 당신은 물리적 공간의 점거가 재검토되어야 할 전술이라고 믿고 계신지, 또는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환경적 부정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더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될 수 있는 대체 전술들이 있습니까? 새로운 전술을 개발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어떤 충고를 하시겠습니까?

 

MW: 때때로 그것은 먹힙니다. 때때로 먹히지 않습니다.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의 경우에 그것은 멋지게 먹혔습니다. 전술 또는 근거에 결코 감정적으로 애착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한 장소들과 관련하여 어떤 상징적 권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도 권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런 것들을 행하는 사람은 많이 배우며 삶의 동지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다시는 서로 결코 말하지 않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습니다. 추상물을 어떻게 점거하겠습니까? 권력은 벡터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자원을 전례 없는 속도로 지구의 어디로든지 움직일 수 있습니다. 특수한 한 장소를 차단할 수는 있지만, 벡터적 권력은 그런 장소들을 우회하여 나아갑니다. 그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태국의 '노란 셔츠' 운동에서 그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방콕 공항을 점거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은 물리적 공간을 차단하는 것을 상징적 효과를 넘어서 실제로 중요하게 만들기 위해 버텨야 할 기간을 강조합니다.

 

내가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서 누구에게 전술을 권유하는 것은 무책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제시하는 전부는 전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전술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행한 바를 연구해야 합니다. 또는 기 드보르가 말했듯이, 클라우제비츠를 읽어야 합니다. 워털루 전투에 대한 그의 해설은 여전히 놀라운 서술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른 의미의 전술, 즉 전쟁의 전술이 아니라 비폭력적인 운동 전술을 말합니다. 그러나 시간, 불완전한 정보, 상황 자체에서 기인하는 '마찰'의 압박 아래 취해진 행동들을 연구함으로써 배우게 될 것이 여전히 있습니다.

 

OT: 클라우제비츠에 대한 한 비판은, 전쟁과 투쟁에 관한 그의 이론들은 알카에다 같은 반자율적인 세포 조직들의 경우에서처럼 교전 중인 진영들 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한 '집단지성' 형태의 투쟁에 적응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당신은 기성의 주류 정치와 자본주의 모형들이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같은 운동들에 의해 사용되는 예측할 수 없는 전략에 대해 비슷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MW: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과 관련하여 정말 새로운 것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그래서 그것이 지난 설명들을 무효화시키는 정도는 꽤 과장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완전히 다르고 아무 관련도 없는 예를 살펴보면, 알카에다의 경우에도 새로운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새로운 통신 기술은 시간과 공간에서 사건들을 전개시킬 수 있는 가능성들의 범위를 변화시킵니다. 그런데 이것은 클라우제비츠를 읽는 목적입니다. 시간과 공간에서 사건들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그리고 물질적 관성과 감정적 관성뿐 아니라 시간의 제약과 한정된 지식 아래 사건들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이해할 채비를 해야 한다는 것 말입니다. 또는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떻게 지식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을 것인가!

 

OT: 당신은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을 '기묘한 전지구적인 매체 사건'로 서술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며, 당신은 이런 의미에서 무엇이 그 운동의 독특하거나 흥미로운 특징들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MW: 저의 첫번째 책 <<가상 지리학(Virtual Geography)>>(1994)은 1980년대 말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천안문 광장 점거와 같은 기묘한 전지구적 매체 사건들을 다루었습니다.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은 그런 종류의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 매체에게는, 뜻밖의 것으로 보이는 사건입니다. 그것의 참신한 본성이 매체에 의해 선택되어 보도됨으로써 증폭되고(그리고 물론 왜곡되고), 그 다음에 사건 자체로 되먹임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매체 사건입니다. 그것이 지구 전체를 포함했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세계를 불러내어 그것의 예외 순간을 통해서 최소한 세계의 일부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전지구적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기묘합니다. 기묘한 전지구적 매체 사건들은 추상적 세계, 벡터적 권력의 세계가 규범과 규약들이 적용되지 않는 듯 보이는 예외 순간에 자체와 그것의 기능 작용을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OT: 매체는 명백히 현 상황을 유지하는 데 매우 큰 공생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시민 언론의 등장이 전통적인 뉴스 가치들을 재정의하는 데 도움을 주며, 그리고 그것을 억압하기보다 변화를 고무할 확률이 더 높은 매체를 낳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MW: 어떤 형식의 매체든 그것을 행위로 표현되는 대로의 대중적 분위기에 반응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의 일부는 자율적인 채널들을 개발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되며, 그것의 일부는 어떤 대중적 형식이든 그것의 다가적인 성질을 산출함으로써 됩니다. 급진적인 욕망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욕망들에 동시에―그것들을 상품화함으로써―반응할 수 있을 때에만 매체는 대중적입니다.

 

OT: 당신은 일상생활에 뿌리를 둔 혁명적 실천들에 관한 '낮은 이론(low theory)'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 방법이 혁명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들과 어떻게 다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MW: 높은 이론(High Theory)은 철학의 주요한 전통이며 사유와 실천의 여타 영역들을 위한 법률을 제정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낮은 이론은 높은 이론으로부터 차용할 수도 있지만 그것의 욕망에 대해서는 정말 관심이 없는, 일상생활의 유기적인 개념 형성 실천들입니다. 높은 이론은 결국에는 강단적 체면과 명예를 욕망합니다. 낮은 이론은 다른 사람만큼이나 덧없음과 자애심에 의해 추동되는 사람들에 의해 쓰여지며, 현존하는 게임 형식들이 흥미로운 전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앎의 실천들을 발명하는 것, 잘된다면 더 흥미로운 실천들을 발명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결국, 철학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었다면 지금쯤 그렇게 했었을 것입니다.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실험이 실패라고 선언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입니다.

 

OT: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의 과정과 관습들은 때때로 개방형 소프트웨어 개발의 실천들을 모방하는 듯 보였습니다. 최근에 그것의 개발은,  "시장"과 생산의 거대한 영역들이 공동으로 유지되는 채,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의 더 성공적인 실행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연결망을 이룬 매체와 통신으로부터 '월가를 점거하라' 운동 같은 후속 운동들에 어떤 다른 도구들이 적응될 수 있겠습니까?

 

MW: 저는 비상품적 관계 형식들이 끊임없이 창출되고 재창출되고 있는 약간은 더 전문적이고, 약간은 더 사회적인 실천들의 연속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생활의 많은 부분이 상품 형식 밖에 있습니다. 많은 부모 집단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아이들을 공동으로 양육하고 있습니까. 공동체들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습니까. 교회, 사원, 그리고 모스크들은 어떻습니까. 저는 그것이 더 폭넒게 동맹들을 추구하는 방식들과 솜씨를 공유하고 살아가는 방법에 관한 세대간 교육을 실시하는 방식들을 생각해내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에 대한 공격은 명백히 이것을 막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교육 영역이 지금 당장 핵심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OT: 오늘날의 지적 재산의 창조자들은 '해커 계급'에 속하는 것으로 서술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유 재산, 생산, 그리고 상품 형식 사이의 동학에 있어서의 변화를 반영합니까?

 

MW: 글쎄요, <<해커 선언>>에서 제가 규정했듯이, 해커 계급은 항상, 어느 분야에서든지, '지적 재산'이 되는 것의 창조자였습니다. 그러나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우리―은 자신들이 창조하는 것으로부터 매우 많이 이득을 보지는 않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튼, 자신에게 정직한 창조자라면 누구든지 알고 있듯이, 창조는 항상 재창조이며 항상 빌린 부분들로 구성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대로 사적 언어는 없으며, 그리고 과학에도 예술에도 '독창적인' 작업들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재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어떻게 모든 영예를 다 가져가는지 알려져 있습니다. 기업가가 '혁신가'였고 혼자 전부를 행한 것처럼 말입니다! 잡스가 죽었을 때 맨해튼 5번가의 애플 상점 밖에는 작은 제단도 설치되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들의 죽은 작은 신에게 작은 사과들을 바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것은 더 좋은 시기의 자본주의―그것의 모든 결함에도 불구하고―의 모습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문화라기보다 오히려 수당 수령자 문화를 만드는 것의 일부입니다. 이제 그것은 바로 지대 수금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혁신과 관련이 없습니다. 애플이 발명한 것이라면 어느 것도 그것이 근거를 두고 있는 계산 분야의 획기적인 연구―공립대학들과 비영리 사립대학들에서 공적 자금으로 행해진―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OT: 최근 저작에서 당신은 이십 세기의 반핵무기 운동과 오늘날의 환경운동 사이의 가설적 유사점을 강조하면서, 이런 형태들의 비판적 에너지가 사실상 현존하는 정치 세력들을 위해 작동한다는 우려를 제기합니다. 환경적 부정의에 이의를 제기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이것이 지니고 있는 역동적이고 가능한 함의들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MW: 한 가지 해방운동은 무제한적으로 성공했는데, 그것이 계급이나 인간이나 젠더를 해방시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탄소라는 원소를 해방시켰습니다. 기후변화는 매우 실재적입니다. 그것은 분자적 문제인데, 탄소(그리고 메탄 등) 분자들은 그것들이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환경'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우리는 주요한 사건을 다루지 않는 많은 것들로 주의가 흐트러집니다.

 

그렇지만 '환경'이라는 낱말의 사용에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몇 개의 피자 상자들을 재활용하면 지구를 구할 것처럼 말입니다. 또는 세계의 부유한 지역에서 가난한 지역으로 독성과 위험을 그저 옮기기만 하면 괜찮을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환경은 하부구조 전체의 진정한 재구성이라기보다 판촉 행위 또는 책임 전가입니다. 그것은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OT: <<거리 아래의 해변>>이라는 책에서 당신은 이십일 세기를 떠나는 것이 "나쁜 야망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넌즈시 말합니다. 당신은 이런 야망을 초래할지도 모르는 우리 시대와 관련된 주요 문제들이 무엇이라고 규정하며, 그리고 이십일 세기로부터의 '결별'이라는 관념을 어떤 의미로 해석하십니까?

 

MW: 상황주의자 인터내셔널(Situationist International)―그것의 전술들은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은 이십 세기를 떠나는 것에 관해 이야기했습니다. 글쎄요, 연대기적 의미를 제외하면, 우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십일 세기를 떠날 방법을 알아내는 것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있습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우리는 지구를 다 써버렸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량적 축적의 방법, 자본의 방법은 최소한 자원의 발견과 할당의 지배적인 형식으로서 작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여전히 자본주의라면 말입니다. 저는 확신하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더 나쁜 것입니다. 그것은 지대 추구이고 상품 경제의 기생적 형식입니다. 그것을 떠날 방법을 알아내야 할 시기입니다.

 

OT: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현상 유지의 '정치 노선'은 "아무 대안도 없다"고 주장하며, 이런 과정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어떤 시도들도 소외되거나 경시됩니다. 우리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소외된 요청을 우선적으로 공적인 주목을 받기를 어떻게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MW: 그것에는 여러 층들이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사실상 주류 경제의 논쟁 속에 대안이 있으며, 그것은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 긴축 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지배 계급을 위해서도 정말 매우 잘 작동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측하는 것들―예를 들면, 더 느슨한 금융 정책과 온건한 오바마 부양책 때문에 불황에서도 이자율이 올라갈 것이다―에 따라 돈을 맡겼다면 돈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이슬랜드―위기에 대한 '케인즈주의적' 노선에 따른 두 개의 대응―가 오스트리아 학파적 긴축에 바탕을 둔 접근방식들보다 상당히 더 나은 듯 보입니다. 카메론 정부도 이것을 깨닫고 있는데, 비록 그것의 대응이 공공 부문이 채권 발행을 통해서 더 잘 해낼 공공 작업의 계획들을 사기업들이 실행하도록 공적 자금을 사기업들에 집중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의 대안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은 지배 계급을 점령했고 지배 계급에 널리 퍼져 있는 이데올로기에 대립되는 현실 경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느 때처럼 사업에 복귀함으로써 매우 매우 긴 이 불황을 끝내는 것일 뿐입니다. 그 이후에, 다음의 대안은 공적 투자를 통해서 경제를 탄소로부터 멀리 벗어나게 하여 덜 위험한 행로로 옮기는 것입니다. 최소한 오바마는 이것을 시도했지만 에너지 부문이 거의 모든 희망을 닫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끈기있게 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 기술, 설계, 국가의 동원력, 그리고 경제적 정의와 사회적 정의를 연결하는 것 말입니다.

 

그 다음에 그런 대안들에 대한 대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정말 우리 스스로 처음부터 다시 사회적 삶 전체를 조직하는 데 착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명이 정말 끝나버렸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이미 파멸하였고 다시 시작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낡은 것의 유물 조각들을 사용하는 것과 방대한 전용이나 짜깁기 작업을 행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아래로부터 위로 규모를 확대하는 법을 배움에 따라 우리의 모든 미시적 규모의 계획들이 공생할 것이라고 희망하는 것은 어떻게 될까요?

 

또는 요약하면, 대안들은 충분히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국면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우리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매우 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대안들은 우리 주변에 모든 곳에 있습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