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브뤼노 라투르: 오늘의 인용-수사학인가, 과학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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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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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발화체들의 보자기에서부터 가장 첨예한 학술 문헌에 이르기까지 담론을 추적함으로써 얻는 커다란 장점은 [...] 대화에서 '증명'으로 넘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 여기서 나는 담론의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의 '점진적 이행'이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철학, 상식, 교수들과 연구진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선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요. 대화 아니면 증명, 다시 말해 수사학과 진정한 과학 가운데 둘 중 하나라는 거지요. [...]

 

그러니까 수사학을 하든가, 증명을 하든가 둘 중 하나라는 겁니다. 입담이 좋든가, 옳든가 '정말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거지요. [...] 이러한 '명증성에 상반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이 명증성 이야기는 재미있는 데가 있습니다. 수사학이라는 측면에서나 증명이라는 측면에서나 명증성에 기대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그렇지요. [...]

[...]

정치의 측면에 있는 수사학과 대문자 S를 쓰는 과학의 측면에 있는 증명[은] 다 같이 즉각적으로 포착되는 벌거벗은 진리의 존재를 필요로 [합니다]. [...] 그리스인들은 이 두 가지 명증성을 지칭하기 위해서 두 개의 용어를 만들었습니다. 수사학에서의 명증성[...]에 대해서는 '에피데익시스'epideixis라는 단어를 씁니다. 기하학, 이 반박할 수 없는 필연에 대해서는 '아포데익시스'apodeixis를 [씁니다]. [...] 이 반박할 수 없는 것의 엄정한 연쇄는 과학의 개론서들과 입문서들로 이어집니다. [...]

 

[...] 두 측면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측면이 다수로 갈라질 뿐입니다. 그중 한 갈래는 여전히 수사학이라고 부르고 다른 갈래들 중 하나는 '비非수사학의 수사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겠지요. 그 둘을 하나로 묶으면 간단할 텐데요. 사람들에 대해서―특히 사물들에 대해서―'잘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상기하면서 '잘 말하기'의 기술과 과학으로 정의할 수 있을, 성스럽고 위대한 '능변'이라는 단 하나의 개념으로 묶는다면 말입니다. [...] 과학인문학은 확신을 줄 수 있거나 그럴 수 없는 '모든 시험들', 모든 재간, 조합, 술책, 발상, 요령 등을 추적하는 데 그 가장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힘입어 마침내 우리는 함께 의논하는 사안에 대한 대화 상대들의 견해를 바꿈으로서 어떤 증거를 논의를 종결지을 만큼 명증한 것으로 만듭니다. 우리가 명증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에서 출발한다면 심각한 오류를 저지르는 셈이라는 것을 이해하겠지요. 그렇지만 명증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명증한 것은 결코 명증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처음에는요. 반박할 수 없는 것은 언제나, 적어도 처음에는 반박을 당했었습니다.

 

증거들이 점진적으로 생성되고 연구는 진리를 더듬더듬 모색해나가는 것이라는 이러한 이해 방식은, 참된 것의 힘이 편견이나 정념의 힘과 벌이는 일종의 갈등을 상정하는 일반적인 무대 설계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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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과학인문학 편지>>(이세진 옮김, 사월의책, 2012), pp. 107-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