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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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 브라이언트: 오늘의 에세이-사회생태학과 엔트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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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12. 15.

 

 

사회생태학과 엔트로피

Social Ecology and Entropy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

 

사회는 생태학적으로 사유되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상, 제인 베넷,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티모시 모턴 같은 사상가들은 바로 이런 견지에서 사회에 관해 생각한다. 이것은 은유도 아니고 유비도 아니다. 우리는 생태학을 아마존 우림 같은 자연 생태계들에 관한 연구와 즉각적으로 관련시키는 불행한 경향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유기체들과 그들 환경의 물리적 특징들 사이의 다양한 관계들, 한 유기체가 다른 한 유기체에 어떻게 의존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서로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어느 유기체들이 생태계를 지배하는가, 다양한 유기체들 사이의 되먹임 순환들 등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는 벌레, 곤충, 미생물, 그리고 부패하는 동물상과 생물체들이 어떻게 나무들과 식물이 자라는 토양을 가능하게 하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나무들이 결국 어떻게 다양한 동물에게 음식을 제공하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다양한 존재자들이 구성하는 상이한 적소들과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교차하고 갈라지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우리는 에너지가 첫번째 에너지원으로서의 태양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변환을 겪고, 그리고 다양한 상이한 순환들을 거치면서 어떻게 이런 조립체들을 통과하는지에 관해 생각한다.

 

이런 형식의 분석이 산호초 같은 비인간 유기적 존재자들의 조립체들에 한정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도시와 산호초 사이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이지 종류의 차이가 아니다. 도시에는 사람들이 삶을 개척하고 삶의 전략들을 고안하는 다양한 적소들이 있다.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방식에서 제도, 정부, 기업, 법인 등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기체들 사이에는 의존 관계들이 존재한다. 다양한 "종들" 사이에는 어떤 종들이 다른 종들보다 더 지배적이고, 더 영향력이 있는 위계가 존재한다. 이런 다양한 유기체들 사이에는 다양한 존재자들이 다른 존재자들에게 의존하고 사람들과 제도가 조립체를 조직하는 다양한 상호작용과 되먹임 관계들의 제약을 받는 되먹임 고리들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태양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식물과 동물, 그 다음에 이것들이 사람들을 위한 칼로리로 변환되는 다양한 방식으로 연속적인 변환을 겪는 에너지의 흐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물론 석탄, 석유, 천연가스, 온천, 햇빛 등과 같은 자연 자원을 통하여 이런 조립체들이 생산하는 모든 에너지들이 존재한다.

 

세계와 사회를 생태학적으로 사유하는 첫 걸음은 엔트로피적으로 생각하는 데 놓여 있다. 처음에 우리는 쇠퇴, 열사, 그리고 해체의 견지에서 엔트로피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또한 엔트로피는 조립체의 질서의 척도이다. 고엔트로피 체계는 매우 낮은 정도의 질서를 지닌 체계이다. 그것은 브라운 운동을 하고 있는 기체 입자들의 구름과 같다. 그 체계에서 한 입자의 위치가 주어지더라도, 나머지 입자들이 그 체계의 어느 곳에서나 나타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그 체계의 그 어떤 다른 입자들의 위치에 대해서도 추측할 수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저엔트로피 체계는 대단히 질서정연한 체계이다. 그것은 입자들이 그 체계의 어느 곳에서나 위치할 확률이 낮은 체계이다. 따라서, 그런 체계에서 한 요소의 위치가 주어지면, 다른 요소들이 어느 곳에서나 위치할 확률이 낮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의 위치에 대해 확실히 추측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체계의 요소들은 다소간 "주소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저엔트로피 체계―즉, 대단히 질서정연한 체계―를 "비개연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비개연성"이라는 술어가 가치가 있다면, 이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질서를 당연히 여기지 말라고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질서는 항상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지속하는 질서, 즉 시간에 따라 자체를 유지하는 질서는 훨씬 더 많이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엔트로피 개념이 생태학적으로 사유하는 데 왜 그렇게 중요한가? 그것이 중요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질서는 결코 공짜로 오지 않는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질서는 항상 ,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아무 일도 없으면, 아무 질서도 없다. 아무 에너지도 없으면, 아무 질서도 없다. [...]

 

사회적 조립체들의 경우에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 사회는 요소들 사이의 생태학적 관계들의 대단히 질서정연한 저엔트로피 체계이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알고 있다. 사회는 군중이 아니라, 구조, 조직을 갖춘 존재자이다. 그런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한 우리의 개념들은 매우 조잡하다. 우리는 권력, 질의, 사회적 세력, 이데올로기 등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헤겔이 "형식적 근거"라고 불렀던 것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사물들은 왜 낙하하는가? 중력 때문이다. 중력이란 무엇인가? 사물들이 낙하하는 경향이다." 우리는 다른 낱말들("중력", "낙하하는 사물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우리가 무언가를 설명한 것처럼 느낀다. "사회는 왜 지금의 형태로 조직되어 있는가? 권력 때문이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사회를 조직하는 힘들의 집합이다."

 

우리의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는 일 또는 에너지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확실히 노동이라는 개념은 있는데, 노동은 사회적 생태계들이 왜 현재의 조직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지만,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질서와 조직을 유지하는 데 투입되는 에너지와 조작들에 관한 일반화된 이론이다. 최소한, 한 사회가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들을 작동시키고 조작들을 가능하게 하는 데 사용되는 다양한 에너지 형태로 그리고 칼로리 형태로 에너지가 사회를 통해 흘러야 한다. 이런 에너지 흐름들은 고무적이기도 하고 제약적이기도 하다. 그것들이 고무적인 까닭은 그것들 덕분에 우리가 다양한 조작 또는 활동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작 또는 활동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것은 이런 에너지이다. 그것들이 제악적인 까닭은 우리가 그것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우리 육체들을 유지시키고,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할 수 있게 하고, 조명, 자동차, 그리고 열차가 운행할 수 있게 하며,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에너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해체된다. 우리는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여파로 뉴올리언즈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칼로리 형태와 기술들에 동력을 제공하는 에너지 형태를 갖춘 에너지 흐름들을 차단하면, 전체 질서가 해체된다.

 

우리의 육체 활동, 우리의 기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 등이 에너지와 끊임없이 일어나는 에너지 상호관계들에 의존할 뿐 아니라, 만물은 끊임없는 엔트로피적 쇠퇴 또는 해체 상태에 있다. 우리의 육체, 사람들 사이의 관계, 건물, 도로, 전력선, 위성, 컴퓨터, 자동차, 목장 등 만물은 쇠퇴에 시달리고 괴로워한다. 이런 쇠퇴를 저지하는 것은 조작, 일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일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다양한 활동가 집단, 정부, 이웃, 기업 등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말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사람들 사이에 소통 경로들이 있어야 한다. 음식과 자원이 분배될 수 있도록 도로가 유지되어야 한다. 계속 수확할 수 있도록 밭을 관리해야 한다. 도시, 이웃, 관계에 우연한 일들이 영구적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토네이도, 저기서 지진, 저기서 산불, 여기서 허리케인, 저기서 가뭄. 사물들은 재구성되어야 한다. 또 다시 에너지.

 

질서에 관해 말할 때 나는 그것을 긍정적인 술어로도 부정적인 술어로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믿어 달라. 인종 불평등과 성 불평등은 질서이지만, 그것들이 좋은 질서라고 말할 사람은 우리들 가운데 거의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 하비 같은 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경제 불평등은 지리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저 시카코에 가보라. 북부는 부와 높은 정도의 인종적 균질성으로 특징지워지는 반면에, 남부는 가난으로 특징지워진다. 이것은 하나의 질서이다. 왜 이런 질서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어떻게 생성되는가? 무엇보다도, 그것은 어떻게 시간에 따라 지속되는가? 그것은 왜 브라운 운동으로 무너지거나 해체되지 않는가? 절대적 엔트로피는 견딜 수 없을 것이지만―다른 운전자들의 개연적인 행위들에 관한 아무 추측도 할 수 없는 고속도로에서 차를 모는 것을 상상하라―질서가 그것 자체로 그리고 그것만으로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대체적으로 사회적 질서 또는 저엔트로피 상태들이 유지되는 서로 연관된 네 가지 일반적인 방식이 존재한다. 첫째는, 내가 주장했듯이, 에너지이다. 다른 생명 형식들은 에너지의 흐름들에 의존한다. 에너지 덕분에 우리가 일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정도로 에너지는 우리를 제한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고, 집에 난방을 제공하고, 자동차를 굴리기 위해 이런저런 에너지원에 의존한다. 우리는 의존적 관계들의 연결망 속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 질서가 터무니없고, 불공정하며, 끔찍하며, 억압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지속하기 위해 접속해야 한다. 사회 혁명들이 흔히 심한 기근(프랑스 혁명) 또는 거대한 경제 불안(러시아 혁명) 같은 대재난의 여파로만 일어나는 이유가 있다. 에너지 도관들이 절단되고, 그래서 다른 한 형식의 질서 또는 조직을 찾는 것 외에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우리 육체로 유입되는 에너지의 흐름들이 아니다. 우리 육체들도 에너지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집중하고 인지할 수 있는 우리 능력에 대한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휴식이 필요하기 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육체적 노동의 양에 대한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어떤 생활 양식들은 다른 방식들로 발달하기를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특수한 삶의 양식에 갇히게 된다. 우리는 하루가 끝날 무렵에 지쳐서 기진맥진 상태에 이른다. 우리는 가족 및 친구 같은 일들과 사회적 전환 및 다른 기회들의 추구 사이에 선택해야 한다.

 

사회가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사회적 생태계의 요소들의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움직임을 조절하는 경로들의 구성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경로는 대단히 복잡한 것이다. 때때로 경로는 도로와 공공 교통의 배치 같은 단순한 것일 것이다. 시카고에서는 버스 체계와 철도 체계가 배치되어 있는 방식 때문에 자가용이 없다면 남부에서 도심지에 가기가 어렵다. 한 장소에서 다른 한 장소로 이동하는 데 대단히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이것은 그 도시의 특수한 지리적 영역에 사람들을 국소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런데 우리가 묻어 들어가 있는 사회적 연결망들에 의해 만들어진 경로들도 있다. 조지 H. W. 부시의 아들로 태어난 조지 W. 부시와 아팔라치아의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조지. W. 부시에게 열려 있는 경로들은 전적으로 다르다. 학사 학위를 취득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경로들이 있고, 조선소 같은 현장에서 작업하는 노동자가 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경로들이 있고, 특수한 공동체의 전문 용어를 앎으로써 만들어지는 경로들이 있으며, 바른 억양과  방언을 구사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경로들이 있다. 경로들은 지구 표면을 따라 만들어진 통로들을 포함하는 한편, 기호학적 존재자들에 의해 구성된 많은 경로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사회가 자체의 질서를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되먹임 메커니즘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되먹임은 두 가지 형식―음의 되먹임과 양의 되먹임―으로 온다. 음의 되먹임 관계는 어떤 상태 또는 한 특수한 궤적을 따르는 움직임을 유지하는 둘 이상의 존재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자동 온도 조절기가 고전적 일례이다. 자동 온도 조절기를 어떤 특수한 온도로 설정하면, 방이 그 온도에 이르기까지 난방기가 가동된다. 온도가 낮아지면, 다시 난방이 가동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양의 되먹임은 한 체계가 통제불능 상태가 될 때, 즉 더 이상 항상성을 유지하지 못할 때 일어난다. 예를 들면, 우리는 지구온난화에서 이것을 본다. 지구가 더욱 더 데워질수록, 만년설이 용해되면서 지구는 훨씬 더 많은 열을 흡수하고 태양열을 우주로 반사시킬 수 없기 때문에 상황은 더욱 더 나빠진다. 음의 되먹임은 모든 종류의 방식들로 사회 질서를 유지한다. 사회적 변화가 매우 어렵다면, 이것은 사회 질서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정부, 기업 등에서 비롯되는, 기성의 행동 방식들로 되돌리는 모든 종류의 조절 메커니즘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삶을 바꾸는 것이 자주 어렵다면, 그것은 가족과 친구들이 여러분을 다시 끌어당기면서 여러분이 이전처럼 행동하고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계속 살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다시, 삶은 흔히 여러분을 가둘 뿐이다.

 

그 다음에, 물론 인문학의 사회이론가들과 정치이론가들이 선호하는 것, 즉 기호권(semiosphere) 또는 무형의 기계들이 있다. 믿음, 규범, 이데올로기, 종교, 우리가 매체에서 보는 것들, 법률 등은 모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행동 성향들을 조직한다. 무형의 기계들은 절대적으로 실재적이고 모든 종류의 방식들로 특수한 사회 질서의 지속에 기여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것들의 수행하는 역할을 과대평가하고 있다고 믿는다. 라투르가 즐겨 말하듯이, 과속 방지턱에 비교할 때 정지 신호는 얼마나 빈약한가? 우리의 사회적 세계는 기표와 이데올로기들보다 과속 방지턱들을 통해서 훨씬 더 자체의 질서를 유지한다. 이것은 기표와 이데올로기들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질서가 왜 현재의 조직을 유지하는지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것들이 제한된 역할을 수행한다고 말할 뿐이다. 예를 들면, 어떤 근본주의자 가정의 아이가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 근본주의 노선을 계속 견지하는 것이 당연한 까닭은 그가 그것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사회적 관계와 가족의 애착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히친스나 도킨스의 방식으로 종교적 믿음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은 중요한 점을 놓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믿음이 아니라 공동체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사회와 정치를 생태학적으로 사유하는 것의 이점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는 행동주의적 개입들을 위한 연장통을 확대한다. 사회적 관계들을 순전히 믿음과 이데올로기들에서 비롯된다고 간주하여 우리의 활동주의를 대체로 이데올로기들을 폭로하고 설득하는 문제로 여기는 대신에, 정치적 참여를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는 문제로서만 여기는 대신에, 사람들을 생활 양식들에 가두는 되먹임 관계, 경로, 에너지적 요구들을 바라보기 시작하고 대안들을 만들어내기 위한 전략들을 고안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법률의 제정을 위한 작업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가 말했듯이, 사회 질서는 과대결정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라이스 대학교에서 나는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에서 비롯된 일종의 그런 형식의 활동주의에 관해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빚을 매수하여 즉시 탕감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희망은 빚을 탕감받은 이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의 빚에 투자하여 같은 일을 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빚은 한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그런 경로들 가운데 하나이며, 그를 어떤 노동 양식과 생활 양식를 택하도록 강요하는 에너지적 관계들의 장 속에 가두는데, 그는 달리 할 선택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그의 삶을 조직해온 한 특수한 행로를 단절하거나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 덕분에 그는 삶과 믿음 둘 다의 층위에서 상이한 벡터들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런 실천은 삶이 어떻게 조직되고 질서를 부여받는지에 대한 생태학적 이해에 전제를 두고 있다. 폭로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고, 권력에 대한 진단도 아니고, 설득도 아니다. 아니다. 특수한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어떤 경로들의 순전한 해체―바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이다. 사회가 주로 이데올로기, 믿음, 기표, 텍스트, 규범, 그리고 서사들에 의해 조직된다는 전제에서 작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다른 전략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한편으로, 사회 질서에 대한 생태학적 이해는 자연/사회 이분법을 배척하는데, 그것이 사회적 관계들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에너지학을 강조하면서 사회적 생태계들이 인간적인 것들을 넘어선 자연 세계―태양, 대양, 날씨, 동물, 식물, 토양 조건 등―에 개방되는 방식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회 질서를 통해서 흐르는 에너지원들에 주목하고, 이런 에너지 흐름들의 소비의 결과로서 산출되는 출력을 인식하기를 요청한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세계는 평평해지고 자연 질서의 일부로 여겨지게 된다...자연 질서와 그것이 의존하는 바로 그 기반 둘 다를 매우 잘 파괴할 수 있는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