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루크레티우스: 오늘의 인용-목적론에 대한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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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 27.

 

"

한데 이 일에 있어서 그대가 다음 악덕을 피하기를,

미리 조심하여 이 실수를 멀리하길 나는 진심으로 원하노라,

즉 눈의 밝은 빛이 만들어진 게, 우리가 앞을 내다볼 수 있게 하려는

   목적에서라고는

그대가 생각지 말기를, 또 다리에 기초를 둔

정강이와 허벅지의 끝부분이 구부러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긴 보폭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지 말

   기를.

또 나아가 아래팔이 든든한 위팔에 맞춰져 있고,

손들이 보조자로서 양쪽에 주어진 것이

우리가 삶에 유용할 것들을 행할 수 있도록 그런 거라고는 하지 말

   기를.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런 종류의 다른 주장들은

모두가 뒤집힌 추론으로 인해 앞뒤가 바뀌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도록 몸에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생겨난 그것이 용도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눈의 빛이 생겨나기 전에는 본다는 것이 없었으며,

혀가 생기기 이전에 말로써 연설한다는 것도 없었고,

오히려 혀가 생겨난 사건이 연설을 멀리 앞질렀으며,

소리가 들리게 되는 것보다 훨씬 전에

귀가 생겨났고, 내 생각으로는 모든 지체가,

그것의 활용보다 먼저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용되기 위해 자라난 것일 수 없다.

오히려 이와 반대로 전투에서 싸움을 손으로 수행하는 것,

또 지체들을 찢는 것과 사지를 피로 물들이며 난자하는 것은 

빛나는 창들이 날기 훨씬 전에 있었다.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여 왼손이 방패로 몸을 방어해주기 전에는

자연이 부상을 피하도록 강제했었다.

그리고 물론 지친 몸을 휴식에 맡기는 것은

침상의 부드러운 깔개가 생긴 것보다 훨씬 오래된 일이며,

목마름을 가라앉히는 것은 잔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것들, 삶의 필요에서 발견된 것들은,

사용을 위해서 발명된 것으로 믿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저 모든 것들, 그 자체로서는 훨씬 전에 생겨나서,

나중에야 쓸모라는 개념을 낳은 것들은 이들과는 별개의 부류에 속

   한다.

우리는 특히 감각들과 지체들이 이 부류에 속함을 본다.

그러므로 다시 또 다시, 그것들이 사용되기 위해서

생겨날 수 있었다고 믿기에는 사실이 너무나 멀리 있다.

"

―― 루크레티우스(Lucretius),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아카넷, 강대진 옮김, 2012), pp. 3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