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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게오르그 묄러: 급진적 루만-니클라스 루만의 간략한 지적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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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11. 2.

 

―― 아래 글은 한스 게오르그 묄러(Hans-Georg Moeller)가 <<급진적 루만(The Radical Luhmann)>>(2012)의 부록에 실은 니클라스 루만의 지적 전기를 옮긴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1927-1998): 간략한 지적 전기

Nicklas Luhmann (1927-1998): A Short Intellectual Biography

 

니클라스 루만은 1927년 12월 8일 독일 함부르크의 남동쪽에 위치한 소도시 뤼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양조장을 소유하고 있었고 지역 기업가 단체의 회원이었다. 루만은 어린 시절을 "나치 환경"에서 보냈다. 그 당시에 사실상 의무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어린 나이에 파시스트 유소년 조직이었던 히틀러 유소년단에 가입했다. 그가 해야만 했던 행진과 경례 때문에 루만은 이 경험을 꽤 불쾌한 것으로 회상했다. 십오 세에 그는 공군 보조병으로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44년 말 그는 전선의 병사로 징집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아직 십팔 세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체포된 직후에 풀려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루만은 법학을 공부했다. 이런 결정은 그가 전쟁포로로서 보낸 기간 동안 목격했었던 제네바 협약 위반 사항들의 영향을 받았다(그는 구타당했었고, 나이가 십팔 세 이상이었던 그의 동료 전쟁포로들 가운데 일부는 프랑스 광산에서 노동을 하는 데 동원되었었다). 그는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로마법의 역사에 집중하면서 공부했고, 1949년에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고향의 법률사무소에서 견습 생활을 겪었다. 이 직업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지방 행정부 법률 부문의 자리를 얻었고 다양한 재판의 보조원으로서 일했다. 1950년대에 그는 나치 시대 동안 학대받았었던 독일인들의 요구들을 관리하는 분야에서 주정부를 위해 일했다. 루만은 결코 그 어떤 정당의 당원도 되지 않았다. 루만에 따르면, 지역 소방관 집회에서 술에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향에 덧붙여 그의 정당 무소속은 공무원으로서 경력을 추구하는 데 불리했다. 또한 그는, 데카르트, 후설, 현상학자 알프레트 슐츠, 시인 횔더린, 그리고 다른 저자들에 대한 자신의 지적 관심이 행정부 내에서 승진 전망을 향상시키지 않는다고 느꼈다. 1960년에 그는 결혼했다. 그와 그의 아내 우술라(1977년 사망)는 세 아이를 두었다.

 

그의 사무실을 거쳐 가는 문서들 가운데 하나에서 공시된 것을 보게 되었던 장학금 지원에 응모하여 선정된 후에 루만은 1960에서 1861년까지 하버드 대학에서 사회학을 연구하기 위해 행정 업무에서 일 년 동안 벗어나게 되었다. 하버드에서 그는 탈콧 파슨스(Talcott Parsons)의 제자가 되어 사회적 체계 이론에 입문했다. 독일로 돌아온 직후인 1962년에 그는 스페이어 소재 행정 학교의 연구 기관 내에 자리를 잡았다.1966년에 루만은 첫 번째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그 다음에 하빌리타치온(독일에서 대학 교수가 될 자격을 갖추는데 필요한 두 번째 상급 학위)을 취득한 후에 빌레펠트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았는데, 빌레펠트 대학은 당대의 선도적인 독일 사회학자이자 지식인이었던 헬무트 쉘스키(Helmut Schelsky)의 학문적인 지도 아래 새롭게 설립되었었다. 1963년과 1966년 사이에 루만은 행정 및 사회학적 주제들에 관한 일곱 권의 책과 다양한 논문들을 단독 또는 공동으로 저술하였다.

 

그가 대학 교수로서 보낸 초기 시절 동안 학생 저항 운동이 다른 여러 나라뿐 아니라 독일에서도 일어났다. 루만은 "비난받는 자들 편도 아니고 비난하는 자들 편도 아니었다". 1969년에 빌레펠트 대학의 사회학과 정교수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추구할 연구 계획들의 목록을 제시해야 했다. 루만은 자신의 계획은 "사회에 관한 이론"이고, 연구 기간은 삼십 년으로 추정되며, 연구비는 0원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당대의 정치적 및 사회학적 논쟁들의 이론적 수준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마르크스에서 베버와 뒤르케임, 짐멜까지 고전적 사회사상가들은 아무도 현대 사회에 대한 적절한 서술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그들의 이론들을 나중에 그가 새로운 사회적 "거대이론(supertheory)"이라고 부른 것으로 대체하기를 열망했다.

 

1970년대 초에 루만은 프랑크푸르트 학파, 특히 현대의 주요한 프랑크푸르트 학파 대표 인물인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와 펼친 논쟁들을 통해서 독일 학계에서 유명해졌다. 이른바 루만-하버마스 또는 프랑크푸르트-빌레펠트 논쟁은 1971년에 공저로 출판된 책―<<사회에 관한 이론 또는 사회적 기술(Theories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gie)>>에 가장 잘 기록되어 있다. 사회의 이해에 대한 하버마스의 접근 방식과 루만의 접근 방식은 매우 상이하다. 방법론적으로 말하자면, 하버마스는 사회의 규범적 재구성에 기여할 비판 이론을 옹호했는데, 그는 이 이론이 사회를 더 평등하고, 정의롭고, 공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루만은 그 어떤 이데올로기적 성향도 결여된 엄밀히 거리를 둔 서술적 방법을 채택했다. 하버마스의 경우에, 사회는 소통 행위가 상호 이해에 맞게 조정되어야 하는 인간적 "생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소통은 인간들의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활동이며, 충분히 합리적으로 수행되기만 한다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일부 사람들의 지배를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루만의 경우에, 소통은 인간의 상호작용에 의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가 작동되는 양태다. 루만에 따르면, 개인들이 아니라 소통 체계들이 소통한다. 예를 들면, 경제는 다양한 형태의 금융 거래들을 통해서 작동하는 소통 체계다. 예를 들면, 은행계좌 소유권을 부여받은 인간들이 아니라, 이 거래들이 경제적 체계의 기능을 구성한다. 하버마스의 규범적인 인간주의적 접근 방식와 루만의 서술적인 기능적 접근 방식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들을 고려하면, 그 논쟁은 대화라기보다는 사회가 무엇이고 사회 이론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화해할 수 없는 입장들의 교환이었다. 말년에 루만은, 지적으로 말하자면, 그 논쟁이 자신에게 대단히 유익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루만의 견해에 따르면, 그 자신의 이론적 입장과 하버마스의 정치적 의제 사이의 본원적인 차이점들 때문에 그 논쟁은 꽤 무익했었다.

 

위에서 언급한 고전적 저자들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이론들과는 달리 사회의 기능적 측면에 주로 집중할 새로운 사회 이론을 구성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채 루만은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출현했던 사이버네틱스 모형과 구성주의적 모형에 경도되었다. 그는 그것들을 사용하여 사회에 대한 파슨스의 체계 분석을 발전시키고 수정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에른스트 본 글라세르스펠트(Ernst von Glaserfeld), 하인츠 본 푀르스터(Heinz von Foerster), 그리고 논리학자이자 수학자인 조지 스펜서 브라운(George Spencer Brown) 같은 저자들에 영향을 받은 루만은 체계를 "사소한 기계"로 간주한 일차 등급 사이버네틱스에서 복잡한 기계의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로의 변환을 사회적 체계 이론에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루만은 구별짓기, 자기준거와 타자준거, 그리고 인지적 맹점이라는 사이버네틱스 개념들을 사회 이론에 도입했고, 그래서 더욱 더 파슨스로부터 멀어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루만은 칠레의 구성주의적 진화생물학자들인 움베르토 마투라나(Humberto Maturana)와 프란치스코 바렐라(Francisco Valera)의 작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후에 그들과 협동연구를 진행하였다. 사이버네틱스 어휘에 덧붙여 루만은 자기생산(autopoiesis)이라는 그들의 생물학적 개념, 체계-환경 공진화에 관한 그들의 견해, 그리고 구성적 관찰에 관한 그들의 관념들을 통합했으며, 그리고 이것들을 사회와 소통에 관한 자신의 이론에 통합했다.

 

1984년에 루만의 첫 번째 대작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이 출판되었다. 이 방대한 책은 루만의 사회적 "거대이론"에 대한 최초의 요약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의 출판물들은 단지 "제로 모델의 이론 생산"을 구성하는 반면에, 그의 이전 출판물들―이미 매우 많은―모두에 비교하여 이 책을 자신의 첫 번째 "진정한 출판물"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은 <<사회적 체계들>>을 출판하고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와 진화생물학의 구성주의를 포함한 이후에야 성숙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후자의 상당한 영향을 감안하여, 루만의 이론에 대한 포괄적 분석에서 하버마스는 그것을 꽤 적절하게도 "메타생물학적"이라고 불렀다. 그리스 형이상학이 물리적 개념들을 적용하여 물리적인 것들을 넘어서는 세계를 설명한 것과 꼭 마찬가지로 루만은 비생물학적 세계, 그리고 특히 사회와 소통에 대한 서술적 분석에 생물학적 개념들을 적용했다.

 

그의 사회 이론 전체에 대한 개요를 제시한 <<사회적 체계들>>이 출판된 지 십 년 후에 루만은 사회 속 다양한 하부체계들의 작용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에는 <<사회의 경제(Die Wirtschaft der Gesellschaft)>>(1988), <<사회의 학문(Die Wissenschaft der Gesellschaft)>>(1990), <<사회의 법(Das Recht der Gesellschaft)>>(1993), <<사회의 예술(Die Kunst der Gesellschaft)>>(1995), 그리고 <<대중매체의 현실(Die Realitat der Massenmedien)>>(1996)이 포함된다. 정치 체계, 종교 체계, 그리고 교육 체계에 관한 책들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1997년 루만은 1,164쪽의 <<사회의 사회(Die Gesellschaft der Gesellschaft)>>에서 자신의 사회에 관한 일반 이론에 대한 새롭고 훨씬 더 확장된 요약을 제시했다.

 

사회 이론에 관한 두 가지 일반 개론서와 특정한 사회적 기능 체계들에 대한 구체적 서술에 덧붙여, 루만은 "사회적 구조와 의미론"에 관한 수많은 글, 즉 사회의 구조적 변화, 또는 다시 말해서, 사회의 진화가 의미론적 진화, 즉 개념, 가치, 그리고 어휘들의 발달을 어떻게 동반했는지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글들을 발표했다. 대체로 (흔히 긴) 논문 형식으로 루만은 개체성과 도덕의 의미론의 발달 같은 주제를 논의했으며, 그리고  <<열정으로서의 사랑(Liebe als Passion)>>(1982)이라는 저서 형식으로 사랑의 의미론의 발달에 관해 논의했다.

 

네 번째 종류의 출판물들은 당대의 정치와 관련이 있던 쟁점들에 관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생태적 소통(Okologische Kommunikation)>>(1986)이라는 책은 사회와 정치에 있어서 생태적 주체들의 소통적 성공(독일에서 녹색당의 집권에서 나타났듯이)에 관한 성찰이다. <<위험사회학(Soziologie des Risikos)>>(1991)이라는 책은 울리히 벡(Ulrich Beck)에 의해 제시된 "위험사회"라는 개념의 인기 상승에 대한 대응책으로 여겨질 수 있다. 이 두 저작(수 많은 관련 논문들뿐 아니라)으로 루만은 정치적 좌파와 벌였던 이전의 논쟁들을 계속한 것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좌파의 대중적 참여와 학술적 참여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관심사들에서 환경적 쟁점들로 전환되었고, 루만은 소통에 관한 기능주의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런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을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생의 마지막 십 년 동안 루만의 글들은 (프랑스)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에 대한 의식과 인식이 계속 커져가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루만은 애초에 후설에서 차용했었던 의미라는 자신의 주요 개념을 언급할 때 들뢰즈를 자주 참조한다. 루만의 후기 출판물들에서는 데리다와 리오타르 같은 저자들도 계속 언급된다. 1993년에 루만은 자신의 접근 방식과 해체주의적 접근 방식의 유사점들을 명시적으로 단언한 "이차 관찰로서의 해체"라는 프로그램적 논문을 발표했다. 루만는 "탈근대성"이라는 술어가 오해를 낳을 소지가 있다―그는 근대성의 시기가 역사적으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고 언제나 주장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이론에 대해 이렇게 선언했다. "이것은 결국 탈근대적 이론인가? 그럴지도 모르지만, 결국 탈근대적 관념들의 신봉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는지 알 것이다."

 

<<사회적 체계들>>을 출판함으로써 루만은 당대의 가장 영향력이 있는 독일 사회학자이자 이십 세기 후반의 주요한 독일 이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대략 칠십 권의 책과 오백 편에 이르는 논문들로 이루어진 그의 방대한 저작물은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다양한 분과학문에서 널리 사용된다. 이태리어, 스페인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그리고 다른 언어들의 번역본들이 출판되어 그 이론은 전지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또는 최소한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에 루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저명한 헤겔 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 그는 빌레펠트 대학의 명예교수가 되었다. 질병이 점점 심해진 후에 그는 1998년 11월 6일 빌레펠트 시 근처의 외링하우젠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그는 1969년에 개요를 제출했던 삼십 년 기획을 시간에 딱 맞춰서 완수했다.

 

사회 이론

의미상 루만의 사회 이론은 소통 이론인데, 그는 사회가 소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사회"는 진행되고 있는 모든 소통을 의미한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는 사회를 소통 체계들의 복잡한 결합체로 여긴다. 그러므로 루만의 소통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 체계 이론의 포괄적인 틀을 이해하고, 그리고 이 틀 내에서 사회적 체계 이론의 더 협소한 틀을 이해해야 한다. 루만의 소통 이론은 이런 더 큰 이론적 맥락 속에 묻어 들어가 있다.

 

두 세대의 체계 이론이 존재하는데, 루만은 두 번째 이론 세대의 대표자들에 속한다. 두 번째 세대 이론의 관념들은 "이차 등급 체계 이론",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 또는 "이차 등급 창발"에 관한 이론들을 구성하는 것으로 다양하게 서술되어 왔다. <<사회적 체계들>>의 서론에서 루만은 전체/부분 구별짓기에 의거한 체계 개념에서 체계/환경 구별짓기에 의거한 체계 개념으로의 전환을 지적함으로써 그가 "체계 이론의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르는 것을 논의한다. 그러므로 이차 등급 체계 이론을 "체계-환경 이론" 또는 심지어 "생태적 체계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데, 물론 이 술어들 가운데 어느 것도 널리 사용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루만은 이차 등급 체계 이론의 특징들을 앞선 일차 등급 체계 이론과 비교하여 이렇게 요약한다.

 

체계 분화는 체계와 환경 사이의 차이의 체계들 내에서 일어나는 반복일 뿐이다. 그것을 통해서 체계 전체는 자체의 하부체계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자체를 환경으로 사용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을 더 엄밀하게 여과함으로써 그런 하부체계들의 층위에서 비개연성이 더 큰 것을 달성한다. 따라서 분화된 체계는 더 이상 비교적 많은 수의 부분들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들로 그저 구성되어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수의 조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체계/환경 차이점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차이점은 상이한 단층을 따라서 체계 전체를 하부체계와 환경의 통일체로 재구성한다.

 

이것은 루만의 난해하고 대단히 전문적인 글쓰기의 전형이다. 나는 구체적인 비유를 사용하여 간단히 그것의 "복잡성을 해소"하려고 할 것이다. 이 비유는 루만 자신이 대단히 많이 차용했던(마투라나와 바렐라를 통해서) 생물학에서 인용한 것이다. 육체에 관한 "사소한" 개념은 그것을 개별적 부분들의 체계적인 또는 유기적인 전체로 여길 것이다. 예를 들면, 이것들은 장기들―폐, 심장, 간 등―일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는 기능하는 전체에 기여하는 부분들의 집합체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부분 또는 장기들은 그것들이 하나의 통합된 메커니즘으로 기능할 수 있는 더 큰 전체, 즉 유기체를 형성하는 그런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육체에 대한 대안적인(그리고 더 복잡한) 견해는 육체가 장기들이 아니라 체계들로 구성되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면역 체계, 심혈관 체계, 신경 체계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체계들은 특정한 장소들에 위치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들은 결합될 수 있는 개별적 요소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육체 전체에 걸쳐서 작동하는 기능적 과정들이다.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육체 부분들이 아니다. 각 체계는 "조작적으로 폐쇄되어 있다." 예를 들면, 혈액 순환은 후속적인 혈액 순환에 의해서만 지속될 수 있다. 그 어떤 육체적 체계도 이 기능을 대행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혈액 순환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환경 속 다른 체계들, 예를 들면 면역 체계가 동시에 기능해야 한다. 혈액 순환이 멈출 때 면역 체계도 더 이상 기능하지 않고, 면역 체계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을 때 혈액 순환도 멈춘다. 인간 육체 같은 복잡한 체계 속에는 서로에게 환경을 상호적으로 제공하는 수 많은 하부체계들이 존재한다. 이런 체계들 사이의 관계들은 대단히 복잡하며 매우 다양한 단층들(심혈관 체계와 면역 체계 사이, 신경 체계와 심혈관 체계 사이, 면역 체계와 신경 체계 사이 등)을 구성한다. 육체의 기능에 대한 그런 견해의 복잡성 증가는 이런 체계들 각각이 그 어떤 단일한 장기보다 총체적 체계의 기능에 더 필수적이라는 사실에 의해 예증될 수 있다. 장기들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을 때 교체될 수 있지만, 면역 체계나 신경 체계는 어떻게 교체하는가?

 

다시 말해서, 일차 등급 체계 이론은 체계를 입력-출력에 의거하여 작동하는 "사소한 기계"로 여긴다. 예를 들면, 소다수 기계는 여러 기계 부품들로 구성된 전체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의 작동은 역학적으로 그래서 필연적으로 어떤 출력을 산출하는 특정한 입력에 의해 외부적으로 조종될 수 있다. 일 달러 동전을 삽입하고 특수한 단추를 누름으로써 기계가 어떤 캔을 배출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자동차, 또는 컴퓨터, 또는 로켓의 조종은 "조종 과학"이라는 의미의 그런 기계적 사이버네틱스에 의거하여 설명될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는 "사소한 기계"가 아니라 "사소하지 않은 기계" 또는 "복잡한 기계"―예를 들면, 육체는 본질적으로 장기가 아니라 체계들로 구성되어 있다―로 여겨지는 이차 등급 체계들을 다루는 방식에 집중한다. 이런 체계들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에 덜 예측 가능하고 쉽게 조종될 수 없다. 예를 들면, 어떤 약을 복용하거나 공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방출할 때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입력"의 "출력"으로 규정될 수 있는 단일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약의 입력은 육체 속의 복잡다양한 하부체계/환경 관계들에 복잡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리고 공기 중 이산화탄소의 입력은 지구 기후를 구성하는 복잡다양한 하부체계/환경에 복잡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일차 등급 체계 이론과 이차 등급 체계 이론 사이의 또 하나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변화에 관한 각 이론의 관념들과 관련이 있다. 엄격히 말해서, 일차 등급 체계들이 겪을 수 있는 변화는 전적으로 외부 인자들에 의존하는데, 그것들은 타자생산적(allopoietic), 즉 "외부적으로 생성된다." 소다수 기계는 사람들이 그것에 주입하는 것에 따라 가득 찬 상태에서 텅 빈 상태로, 또는 텅 빈 상태에서 가득 찬 상태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자체가 노출되는 습기에 따라 녹슬지 않은 상태에서 녹슨 상태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차 등급 체계들은 그런 "창조론적" 방식―모든 변화가 외부로부터 만들어지는―이 아니라 진화적 방식―변화가 내부에서 생성되는―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이차 등급 체계들은 자기생산적(autopoietic), 즉 "스스로 생성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종의 진화(인간 종이 명백히 입력이자 출력이다) 또는 기후의 진화(인간 활동이 입력인 동시에 출력으로서 영향을 받는다)는 외부에서 조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조정적이다. 이런 자기조종성은 조종이라고 거의 말할 수 없을 것인데, 진화도 기후 변화도 특정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전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목적론적이지 않다. 일차 등급 사이버네틱스의 조종 이론은 바라는 출력이 달성되도록 어떤 입력으로 체계를 조종하는 방법과 관련이 있지만, 이차 등급 사이버네틱스는, 예를 들면 지구의 기후, 생물학적 유기체, 마음, 또는 루만의 경우에는 사회에 대하여 그 어떤 외부 조종도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이 모든 체계들의 경우에, 입력도 출력이며 출력도 입력이다. 다시 말해서, 입력과 출력은 되먹임 고리들을 통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자기생산적 체계는 내재적 체계인데, 그것의 내부가 외부이며 외부가 내부다.

 

체계 이론가로서 루만은 인식 실체와 연장 실체, 또는 마음과 몸 같은 두 가지 근본적인 실체들의 공존을 가정하는 전통적인 데카르트적 이원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삼원론자"인데, 최소한 세 개의 상이한 종류의 자기생성적 체계들―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체계들―이 존재한다고 가정했다. 이 체계들은 상이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완전히 구별된다. 육체 같은 생물학적 체계들은 혈액 순환, 신경 활동, 소화, 생식, 그리고 세포 분열 같은 생명 과정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심리적 체계들은 사유, 느낌, 그리고 감정 같은 심리적 조작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루만은 스스로를 사회학자로 여겼고, 그래서 소화하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세 번째 종류의 체계, 즉 사회적 체계에 주로 집중한다. 사회적 체계들은 소통한다. 이차 등급 체계 생물학자가 육체 속 다양한 하부체계들의 작동과 그것들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서술하고 싶어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루만은 사회 속 다양한 소통 체계들의 작동과 상호 결합을 서술하려고 했다. 예를 들면, 화폐와 금융 가치들이 순환하는 경제적 체계가 있고, 권력이 생성되고 영속되는 정치적 체계가 있으며, 합법적인 것과 불법적인 것 사이의 구별짓기에 의거하여 작동하는 법적 체계가 있다. 인간 육체가 "창발"을 통해 자체 내에서 모든 종류의 다양한 기능 체계들을 진화시키고 발달시켜온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도 소통을 통해 작동하는 수많은 비개연적인(진화적으로 가능했던 것의 제한된 범위를 고려하면) 방식들을 진화시키고 산출해왔다. 그러므로 사회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진화 과정을 통해서 다소간 우연히 또는 우발적으로 출현한 다양한 소통 유형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적 "생명"(사회는 살고 있지 않고 육체들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은유적으로 말하자면)은 법적 소통, 정치적 소통, 경제적 소통, 친밀한 소통, 교육적 소통, 과학적 소통, 종교적 소통, 의학적 소통 등의 형식으로 발생한다. 이 모든 소통 형식들은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자기생산적 소통 체계들로서 출현했다. 사회 속에서 그것들은 모두 서로에게 환경들이다.

 

게다가, 사회와 소통 체계들은 마음과 몸, 또는 심리적 체계와 생물학적 체계들의 사회 밖 환경 속에서 진화해왔다. 물이 없었다면 아무 물고기도 없었을 것과 꼭 마찬가지로, 사회의 환경 속에 몸과 마음이 없었다면 아무 소통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와 물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 또는 소통 체계들과 "사람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들이 생각하고 살고 있다는 점이 무엇이든 소통 체계가 진화하는 데 필수적인 환경 조건이다. 아무도 살고 있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 생명과 인간 사유와 느낌들은 소통적 조작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의 외부에서 작동한다. "소통만이 소통할 수 있"고, 그래서 비인간들이다. 이것이 루만의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비롯되는 가장 급진적인 소통 이론적 진술일 것이다.

 

소통 이론

루만의 자칭 "급진적으로 반인간주의적인" 사회 이론은 급진적으로 반인간주의적인 소통 이론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생각과 생명이 없다면 인간의 소통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런 상식적인 가정을 확인할 뿐이다. 또한 그것은 루만이 인간들 또는 그들의 육체나 정신들에 대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가 인간주의적―또는 아마도 더 좋게는, 인류학적―개념들은 소통을 이론적으로 서술하고 분석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루만은 소통, 생물학적 과정들, 그리고 심리적 과정들이 서로에 대해 조작적으로 폐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존재하기 위해 자체 환경 속에 서로를 필요로 하는 반면에―그리고 루만은 이런 실존적 상호 의존성을 "구조적 접속(structural coupling)"이라고 부른다(다시 한 번 마투라나와 바렐라에서 차용하여)―그것들의 조작들은 아무 "연결성"도 없다. 혈액 순환은 혈액 순환에 관해 생각함으로써 지속될 수는 없는데, 혈액이 실제로 흘러야 한다. 마찬가지로, 모든 올바른 해답을 그저 떠올리는 것만으로는 시험을 통과할 수 없다. 실제로 무언가를 기입해야 한다. 답안을 작성하는 동안 떠올리는 생각이 아니라 기입되는 것만이 채점자에 의해 채점될 수 있다. 게다가 평가 결과는 채점자가 실제로 생각한 것이나 또는 답안지를 읽을 때 느낀 것을 결코 보여주지 않는다. 시험은 그것을 치른 사람에게서 진행되고 있던 모든 심리적 활동(육체적 과정들은 말할 것도 없이)을 표현할 수도 없고 표현하지도 않는 소통적 산물이다. 평가 결과는,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그 어떤 방식으로도, 채점자의 생각 속에서 진행되고 있던 것을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80점으로 평가하는 모든 채점자들은 그렇게 점수를 매길 때 유사하거나 동일한 생각을 해야 할 것이다.

 

루만의 이론은 소통에 대한 그 어떤 종류의 심리적 정의이든 또는 인간주의적 정의이든 그것을 순전히 기능적 정의로 교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는 "표현", "교환", 또는 "행위주체성"의 견지에서 소통에 관해 말하는 것을 엄격히 피한다. 그 어떤 송신자 또는 수신자도 없으며, 아무 것도 전송되지 않는다(최소한 심리적으로 또는 물리적으로). 당신의 계좌에서 내 계좌로 돈을 이체하는 것은 두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는" 계좌들 사이의 금융 거래이지만, 이 경우에 당신의 마음이나 몸에서 내 마음이나 몸으로 "전송"되거나 "교환"되는 것은 전혀 없다. 루만에 따르면, 모든 소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가장 친밀한 연인들도 자신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문자 그대로 교환할 수 없다. <<사회적 체계들>>에 붙인 서문에서 에바 노트(Eva Knodt)는 이런 불가능성에서 비롯되는 "해석학적 절망"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당통의 죽음>>의 시작 장면에서 십구 세기 독일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uchner)는 해석학적 절망의 근원적인 장면으로 쉽게 인식되는 것을 극화한다. 그들 사이의 이해의 유대를 재확인하려고 하는 연인의 시도에 대응하여 주인공은 자기 연인의 이마를 향해 조용히 손짓한 다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데, 그런데, 이것 뒤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자, 우리는 감각들이 조잡하다. 서로 이해한다는 것? 우리는 서로의 두개골을 깨고 열어서 우리 뇌 섬유들로부터 생각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물론 뇌 섬유들에서도 생각을 찾아낼 수 없다(덧붙이자면, 다행스럽게도). 뇌, 마음, 그리고 (심지어 친밀한) 소통은 서로에 대해 조작적으로 폐쇄되어 있다. 뇌 또는 소통 속에는 생각이나 느낌이 전혀 없다. 그것들은 여전히 심리적 체계들의 조작들이다. (충분히 흥미롭게도, 생각과 느낌이 뇌에 위치하고 있다는 현대의 일반적인 가정은 심장이 마음 활동의 기관이라는 고대 그리스와 중국의 가정만큼이나 정당화되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교환 또는 표현에 관한 인지적 또는 인간주의적 모형 대신에 루만은 기능적 소통 이론을 제시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소통 환경(예를 들면, 인간들)을 포함하게 되면 소통은 적절히 정의될 수 없다. 생각 또는 관념의 견지에서 소통을 정의하는 것은 뇌 생리학의 견지에서 심리적 과정들을 정의하는 것만큼이나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루만은 소통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시한다. 소통은 세 가지 계기 또는 "선택", 즉 통지(Mitteilung), 정보(Information), 그리고 이해(Verstehen)의 기능적 종합이다.

 

물론 언어는 하나의 소통 수단이다. 그런데 다른 수단들도 많이 존재한다. 기호, 몸짓, 그리고 화폐 또는 (시험) 점수 같은 매체들이 있다. 소통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선택 모두가 결합되어야 한다. 내가 기록 담당관에게 평가 결과를 제출할 때, 나는 이 정보의 통지가 이해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나는 결코 기록 담당관의 사무실에 방문한 적이 없으며, 그리고 나는 그곳의 어느 누구도 모른다. 나는 그곳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또는 그들이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모른다. 우리는 결코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으며, 개인적인 이메일도 주고받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통은 일반적으로 완벽하게 작동한다. 내가 성적표에 평가 점수를 기입하면, 그 숫자들이 학기 말에 특정한 강좌의 강사에 의해 통지된 수강생들의 평가 결과에 관한 정보라는 것은 기록 담당관의 사무실 "안"에서 아무튼 이해된다(그리고 정확히 누구에 의해 이해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 그렇다. 소통 과정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모든 종류들의 심리적 사건들과 물리적 사건들이 이런 소통 과정의 환경 속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지만(학생, 강사, 그리고 직원들이 살아 가고 생각해야 한다), 기능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소통은 이런 특정한 심리적 및 물리적 조작들로부터 조작적으로 독립적이지는 않지만 분리되어 있다. 아무 교환도 없다. 평가 결과는 이 사람으로부터 저 사람으로 문자 그대로 건네진다. 게다가 "이해"는 올바를 필요가 없다. 많은 학생들이 흔히 내 말을 오해한다는 점이 내 강좌가 개설되는 것을 막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다. 그들이 항상 즉각적으로 이해하면, 강의에 대한 요구는 크지 않을 것이다. 완전한 오해에서 기인된 낙제는 결코 잘 치른 시험보다 (소통으로서) 덜 작동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모두 평가 점수의 할당을 가능하게 하고, 그래서 그것들은 모두 교육 체계의 지속에 기여한다.

 

소통 체계들과 사회는 의미(Sinn)를 구성한다. 여기서 "의미"는 그 속에서 무언가가 의미를 획득하는 가능한 것들의 "지평"(루만은 이 술어를 후설로부터 차용한다)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80이라는 점수를 할당하는 것은 그것이 평가 방식, 사본을 교부하는 행위, 그런 사본을 고용되거나 대학원 과정의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한 선택 기준으로 검토하는 것 등의 유의미한 지평 안에서 일어나는 한에 있어서만 의미가 있다. 루만에 따르면, 소통 체계들(즉, 사회적 체계들)과 심리적 체계들은 "의미 처리 체계"다. 그것들은 의미를 생산하고, 그 다음에 의미를 생산했다는 것에 의거하여 작동한다. 그 표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대로 소통은 의미를 만들어내는데, 즉 소통은 의미를 구성한다.

 

사회 속 다양한 소통 체계들은 모두 의미를 구성한다. "급진적 구성주의자"로서 루만은 어떤 전(前)사회적 보편자들에 의거하여 사회가 작동한다고 믿지 않는다. 루만에 따르면, 무언가가 경제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무언가가 예술 작품으로 지각되는 것, 어떤 행위들이 합법적이라고 간주되고 다른 행위들이 불법적이라고 간주되는 것, 정치적 권력 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 종교적 제도와 신념들이 존재하는 것은 모두 소통적 구성의 다양한 결과다. 예를 들면, <<국가>>에서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루만은 "정의의 이데아"가 탐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믿지 않는다. 루만의 경우에, 그의 사회적 구성주의의 예를 하나만 제시하면, 정의는 법적 체계 안에서 산출되는 "우연적 원칙"(Kontingenzformel)이다. 이 원칙에 의거해서 법적 체계는 끊임없이 작동할 수 있다. 그것은 한때 합법적이지도 않고 불법적이지도 않는 것들, 예를 들면 실내에서 흡연하는 행위가 어떤 경우들에는 합법 행위가 되고 다른 경우들에는 불법 행위가 된다고 선언할 수 있다. 이 법률들은 미래에 다시 바뀔 수 있다. 게다가, 법적 체계 안에서의 이런 조작들 덕분에 그것의 환경 속 다른 체계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공명"을 산출한다. 예를 들면, 대중 매체는 추문 뉴스를 구성할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인기 있는 영화 배우가 영화제에서 기자 회견을 하면서 담배를 피웠다고 보도될 수 있다. 흡연 행위에 대한 우연적 원칙을 법률이 창의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TV 뉴스를 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체계들은 그 어떤 특정한 진화적 목적도 없다. 그것들은 생식과 번성에 알맞게 적응된다. 이것은 때로는 성공적이고, 때로는 성공적이지 않다. 어떤 종들은 생존하고, 다른 종들은 소멸한다. 소통 체계들은 목적론적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법적 소통의 번성과 법적 체계가 사회를 더 공정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정치적 소통의 번성과 정치적 체계가 사회에 더 큰 권능을 부여하지는 않는다. 소통 체계들은 진보하지 않고, 우리는 서로를 더 잘 이해하지는 않지만, 소통 체계들은 "연결성"을 만들어냄으로써 진화한다. 그것들은 자체의 조작들을 지속하기 위한 메커니즘들을 개발한다. 한 번의 선거는 후속 선거들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의 뉴스는 내일의 뉴스를 가능하게 한다. 오늘의 새로운 불법 행위가 내일의 새로운 재판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 어떤 궁극적인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은 여전히 의미를 만들어낸다. 진보를 초래하지 않으면서 소통은 여전히 새로운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지는 않으면서 소통은 여전히 우리가 서로 이해한다는 환상을 제공할 수 있다. "사실상 이해는 실제적으로 항상 오해에 대한 이해가 없는 오해다."

 

비판과 대응

예측 가능하게도, 루만의 명시적인 "급진적 반인간주의"는 다양한 비판을 초래했다. 이것들 대부분은 1970년대의 프랑크푸르트-빌레펠트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루만의 입장과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입장은 공통점이 거의 없어서 사실상 서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지만, 그 논쟁은 대단히 상이하고 양립하지 않는 점들을 명확히 드러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철학―또는 이 경우에는 소통 이론―은 세계를 해석할 뿐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려고 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언명을 따르고자 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하버마스의 이론과 루만의 이론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점은 방법론적인 것이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더 합리적으로 소통하게 만듦으로써 사회를 개선하고자 한 반면에, 루만의 이론은 근본적으로 서술적일 뿐 아니라, 사회를 조종하려는 시도들의 한계점들을 보이고자 하였다. 현대 사회의 소통 체계들의 높은 복잡성을 감안하여, 루만은 그런 시도들을 흔히 소용이 없는 것으로 여겼다. 정치와 법에 관한 루만의 이론에 대한 연구서에서 킹(King)과 손힐(Thornhill)은 푸랑크푸르트 학파의 저자들에서 직접 비롯되거나 아니면 그들의 공격 노선의 측면에서 비슷한, 루만에 대한 이어지는 비판들을 훌륭하게 요약했다. 이 비판들은 루만의 소통 이론에 대한 유사한 비판들을 나타내도록 쉽게 수정될 수 있다. 킹과 손힐에 의해 나열된 다양한 비판들의 수정된 한 판본은 루만을 다음과 같이 비난할 것이다.

  • 그는 소통을 사회 진보를 위한 도구로 간주하기를 거부한다.
  • 그는 소통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주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 그의 이론적 관념들은 새로운 종류의 보수주의를 제공할 따름이다.
  • 그는 소통의 타당성, 가치, 그리고 정당성의 보편적인 중재자로서의 합리성을 거부한다.
  • 그는 소통과 관련된 현재의 정치적 및 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논쟁들에 관여하기를 꺼려한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편향된 강단인들로부터의 이런 기초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루만의 이론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다양한 분과학문들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여태까지 이런 영향은 대체로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에 한정되었다. 독일, 이탈리아, 영국, 스페인, 그리고 유럽 밖의 스페인어 및 포르투갈어 사용 국가들에서 그의 이론을 활발히 수용하였다. 북아메리카에서 그의 이론 수용은 꽤 제한적이었다. 이것에 대한 이유들을 추측할 수 있다. 나는 그 이유들 가운데 두 가지가 루만의 소통 이론의 비인간주의적 토대와 독자에 비친화적인 루만의 문체라고 생각하는데, 비인간주의적 토대는 시민 사회에 관한 자유주의적 또는 공동체주의적 견해들에 정초하고 있는 북아메리카의 지배적인 담론들과 배치된다. 그의 여러 저작들이 영어로 번역되었고 훨씬 더 많은 저작이 번역되고 있지만, 흔히 불가해하고 복잡한 문체는 북아메리카의 독자들에게 매력이 없다.

 

북아메리카 강단이 루만의 이론을 연구하기를 꺼려함에도 그것은 당연히 점점 더 현대적인 의의가 커지고 있는데, 특히 루만에 의해 강조된 소통의 비인간주의적 측면들이 세계의 이 지역에서 두드러지게 명백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 대중매체, 그리고 정치의 최근 전개는, 최소한 내가 보기에, "탐욕" 같은 매우 단순한 인간주의적 견지에서 이루어진 2008년에 출현한 경제 위기 같은 현상에 대한 설명을 넘어서는 분석적 서술들을 필요로 한다. 다음의 인용문이 북아메리카 소통 연구에 있어서 루만의 작업의 미래 수용에 대한 전망을 나타낼 것이다. "소통, 더 일반적으로 신호전달은 독립적 인지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과정의 측면들이다. 이런 추론은 모두 루만에 의해 개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