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풍경

자연과 문화 그리고 과학기술의 교차로에서 바라보는 사물/대상의 풍경

레비 브라이언트: 인터뷰-독수리, 객체, 그리고 정치

댓글 0

카테고리 없음

2011. 7. 24.

 

- 아래 글은 객체지향 존재론(OOO)를 주창하는 레비 브라이언트(Levi Bryant)가 정치학자 크리스 코필드(Chris Coffield)와 가진 인터뷰 전문을 옮긴 것이다. 이 인터뷰에는, 철학의 "비판적 전환과 사변적 전환, 사변적 전환이 어떻게 비판적 전환 위에 세워지는지, 그리고 인식론에 관한 논의뿐 아니라 정치적 논의도 많이 있다".

 

     ――――――――――――――――――――

 

인터뷰: 레비 브라이언트

 

독수리들은 시체를 우적우적 씹어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독수리들이 대규모로 죽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런 일이 가능성이 없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인도에서 일어났는데, 지난 십 년 동안 하얀등 독수리, 긴부리 독수리, 그리고 가는부리 독수리의 개체수가 95%만큼 많이 감소했다. 많은 독수리들이 파르시 족의 "풍장" 의례와 시체 해체에 있어서 핵심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상실은 전체 생태계를 교란시켜 동물들의 상호작용들을 바꾸고 어떤 질병들의 비율을 증가시킨다.

 

너무나 쉽게 그리고 빈번하게, 독수리 멸종 위기는 법적 보호를 소에게까지 연장하는 문화의 부산물로서 치부되었다. 그렇지만, 레비 브라이언트가 주장하듯이, 문화적 설명들은 인간 주체성의 경계를 벗어나는 비담론적 실재물들의 영향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렇다. 문화는 작동 중이지만, 그것이 작동하고 있는 전부는 아니다. 실재를 담론적 비판의 한계로부터 떼어내려는 노력으로, 브라이언트는 "온티콜로지(onticology)"로 불리는, 그 자신의 판본의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OOO)을 고안했는데, 그것이 아래에서 설명된다.

 

Q: 당신이 "반실재론적 경향"으로 규정하는, 담론과 텍스트성에 대한 근대 대륙철학의 집중은 기술과 신체성의 혼합, 그리고 생태학적 파국 같은 이십일 세기의 사건들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당신은 쓴 적이 있습니다. "사변적 전환"은 무엇이고,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현재의 대륙적 사유의 부적절한 점들을 교정하려고 합니까?

 

사변적 전환(speculative turn)을 이해하는 최선의 길은 비판적 전환(critical turn)과 비교하는 것일 것입니다. 칸트에 의해 최초로 공표된 비판적 전환―그러나 데카르트와 흄 같은 인물들의 이런저런 형식에서 이미 분명히 나타난― 은 형이상학에서 인식론으로의 이동에 의해 특징지워지는데, 인식론에서는 세계의 존재에 관한 어떤 실정적인 주장도 하기에 앞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을 먼저 심문할 것입니다. 비판적 전환의 핵심적인 의문은 "무엇이 나로 하여금 그렇고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뉴턴에 동조하여 "모든 작용은 크기가 같고 방향이 정반대인 반작용을 갖는다"고 주장하면, 나로 하여금 이것을 주장할 수 있게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어떻게 이것을 압니까? 분명히 나는 모든 작용과 반작용을 경험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나는 이것이 필연적인 진리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과 그것이 모든 시간과 장소에서 필연적으로 성립할 정도로 참이라는 점을 안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우리는 비판적 전환을 그런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을 심문하고 우리가 우리의 주장들에 대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여부를 평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존재하는 것을 아는가에 관한 성찰입니다. 달리 말해서, 비판적 전환은 성찰적 전환(reflexive turn)입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왜 비판적 전환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유럽은 기독교의 다른 종파들 사이의 종교전쟁에 의해 좌초된 상태였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를 갈가리 찢고 있던 제분소였습니다. 한편 이런 종교적 정향들은 독단적 신학의 주장들을 전제로 하고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 비판적 전환은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정말 알 수 있는지 여부와 신학 영역에서 정확히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한 심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성한 것의 영역에 대한 어떤 접근 방법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면, 이런 입장들의 권위는 약화되어 그것들은 믿음이나 신앙의 영역으로 넘겨질 수 있을 것이고, 그 때문에 그것들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어 정치의 영역에서 추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에 기여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스피노자, 흄, 디드로, 그리고 칸트 같은 인물들에서 종교와 미신에 대한 거대한 비판을 얻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과학이 등장했습니다. 비판적 전환은 지식의 특질,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과학적 지식의 기반으로서의 지식의 한계에 대한 탐구로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전환은 지식에 관한 성찰이었습니다. 비판적 전환은 세계에 관하여 "소박하게" 주장하기보다 대신에 아는 정신, 그것이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그런 지식의 한계에 관해 성찰했습니다. 철학의 이런 정향은 셀 수 없이 많은 변종들을 산출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에서는 정신의 특질과 그것이 실재를 어떻게 구성하는지에 관한 성찰을 얻습니다. 이후에 세계의 실재를 괄호에 넣고 대신에 살아 있는 지향성에 관해 성찰한 현상론 학자들이 나타납니다. 그 다음에는 언어가 어떻게 실재를 구성하는지 성찰한, 언어적 전환(liguistic turn)을 이룬 철학자들이 나타납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성찰은 세계 자체에 관한 성찰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 우리의 정신, 우리의 언어, 우리의 지향성, 우리의 역사,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어떻게 실재를 구성하는지에 관한 성찰이었습니다. 이런 입장들은 불가피하게 반실재론, 즉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존재하는 대로의 세계에 관해서만 말할 수 있으며 세계 자체가 이런 식으로 존재하는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논제를 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계는 괄호에 들어가게 되고 대신에 정신, 권력, 그리고 언어에 집중하게 됩니다.

 

비판적 전환에는 권할 것이 많이 있고, 그래서 분명히 사변적 실재론자들은, 예를 들면, 신의 현존, 영혼의 불멸성 등이 증명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전(前)비판적 철학으로의 복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비판적 전환은 사회 이론과 정치 이론에서 사회적 조립체들의 어떤 요소들이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탐구를 배제하는 체계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우리는 방정식의 인간적 항에 속하는 모든 것들(정신, 권력, 의미, 언어)에 집중하며, 훌륭한 책인 <<사물들의 체계>>에서의 보들리야르의 경우처럼, 세계의 존재자들을 그저 우리의 의미작용의 수단으로 다룹니다. 여기서 객체들은 우리가 우리의 의미, 의도, 권력, 그리고 언어를 투사하는 스크린일 뿐이며, 우리가 그것들에게 구조를 부여합니다. 달러 화폐에게 그것을 달러 화폐로 만드는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달러 화폐를 달러 화폐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의도들과 사회적 힘들인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객체들 자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우리의 의도들을 "나를" 뿐입니다.

 

예를 들어, 비판적 전환이 이루어진 뒤에 텍스트를 분석하는 방식을 생각합시다. 첫 번째 단계는 텍스트가 다루는 대상이나 그것이 "소박하게" 세계를 가르키고자 하는 방식을 괄호에 넣는 것입니다. 일단 텍스트의 지시적 차원을 괄호에 넣고 나면 우리는 "표면적 독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을 채택합니다. 표면적 독법은 피상적인 독법이 아니라, 오히려 텍스트가 세계를 가리키는 방식을 괄호에 넣고 대신에 텍스트가 어떻게 자체의 대상을 구성하는지  탐구하는 독법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대상의 실재성을 비판하고 대상을 구성하는 데 작동하는 사회적-언어적 힘들을 보여줍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성별이 어떻게 담론을 통해 구성되는지 보여주고, 그 때문에 성별과 성적 성향을 "탈-자연화"함으로써 성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이런 기법들과 전략들에서 권할 것이 많이 있으며,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들을 간단히 버릴 욕망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것들은 나름의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비판적 전환은, 좌파적 변화를 산출하려고 애쓰는 정치적 개입의 유일한 현장은 관념의 영역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객체들이 담론, 관념, 언어 등의 수단이고 그것들 나름의 실정적인 것을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한, 변화를 산출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 충분하다는 점이 당연히 도출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당신은 변화의 공간을 엽니다. 이데올로기 비판은 절대적으로 필요불가결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감옥에 갖혀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물질적 조건에 의해 우리의 삶도 제한되고 억압 조건도 재생산됩니다. 우리는 비판적 전환의 발견들을 통합할 수 있게 하고 비인간적 존재자들을 그것들 자체로 실정적인 실재(그리고 그저 수단이 아닌 것)로서 다룰 수 있는 이론적 틀이 필요합니다.

 

제가 보기에, 사변적 전환은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인간들과는 별도로 존재자들을, 그저 우리의 언어, 담론, 개념 등의 수단이라기보다 그것들 자체로 존재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게 합니다. 지난 이십 년 동안 안도에서 펼쳐진 독수리 묵시록의 예를 생각합시다. 당신은 여기서 모든 것을 발견합니다. 대략 십오 년 전에 인도에서 독수리의 개체수가 가파르게 감소하기 시작하여 거의 멸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심각한 쟁점이었습니다. 인도에는 소들과 다른 동물들이 죽으면 그것들의 시체가 버려지는 "시체 들판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매장되거나 불에 태워지기보다 이런 식으로 처분됩니다.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종교적 이유 때문에 인간 사체들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부패하는 "침묵의 탑"이라고 불리는 장소에 안치됩니다. 독수리들―그리고 그것들이 수백만 마리가 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은 이 시체들과 죽은 자들의 사체를 먹음으로써 필수적인 기능을 수행합니다. 독수리들의 감소와 함께, 개들이 시체 들판들에서 소의 시체들을 먹기 시작했을 때 개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결과를 낳았습니다. 첫째, 광견병이라는 전염병이 출현했습니다. 둘째, 표범들이 개들을 사냥하고 마을들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에 표범의 개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인간에 대한 공격 횟수가 증가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독수리들을 멸종에 거의 이르게 한 개체수의 감소가 일어났을까요? 독수리들은 디클로페낙으로 알려진, 소에게 투여된 저자극성 진통제에 의해 초래된 내장성 통풍을 겪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소를 죽이거나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인도 법률에 어긋나고, 그래서 농부들은 자신들의 소들에게 그것들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이 진통제를 투여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소들이 죽으면, 그 진통제는 그것들의 시체를 먹는 독수리에 들어갈 것입니다. 운이 좋게도, 인도 정부는 현재 이 약품을 가축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존재자들―인간, 소, 독수리, 개, 표범, 법률, 종교적 믿음, 정부, 그리고 진통체 디클로페낙―의 복잡한 네트워크를 발견합니다. 분명히 종교적 믿음과 법률 형식의 문화가 이 집합체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렇지만 이 사태는 이데올로기, 서사, 또는 담론적 구성에 불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 서사, 그리고 담론적 구성의 요소들이 있지만, 표범, 개, 독수리, 디클로페낙, 인간 신체 등은 절대적으로 실재합니다. 우리가 방정식의 인간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이 모든 것을 놓칠 것입니다. 우리가 이데올로기적인 것들과 담론적인 것들에 몹시 집중하여 이런 다른 실재들을 놓치기 때문에 우리의 정치적 투쟁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것이 어설프게 이해됩니까? 비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믿고, 그 때문에, 예를 들면, 물 공급과 위생 같은 것을 향상시키는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억압적인 사회구조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물질적 환경을 창출할 것인지에 주목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정치적 기회들을 놓칩니까? 저는 이런 담론적 요소들과 이런 물질적 요소들 모두를 포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한 이론적 틀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 온티콜로지가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 정확히 이것입니다.

 

Q: 객체지향 존재론, 또는 온티콜로지는 인간의 행위주체성이나 인간적 구조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을 내재적 평면에서 여러 다른 존재들 사이의 한 존재로서 위치시킵니다. 그렇다면, 온티콜로지는 객체들의 자율적 실재에 대해 지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관한 의문을 어떻게 다룹니까?

 

지식에 관한 의문들을 제기할 때 인식론은 암묵적으로 거울 모형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도식은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과 반실재론적 인식론 둘 다에 공통적입니다. 한 객체를 아는 것은 그 객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표상"이라고 부릅니다. 소박한 실재론적 인식론에서는 정신이나 담론이 객체들을 마치 그것들이 우리와 독립적인 것처럼 반영합니다. 반실재론적 인식론에서는 정신, 담론, 언어 등이 자체를 세계에 투사하여 우리가 우리와 독립적인 실재라고 여기는 것이 실제로는 우리 자신의 소외된 투사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저는 이런 도식을 거부합니다. 한편으로, 그레이엄 하만을 좇아, 저는 객체들이 물러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이것에 관해 곧 말할 것이 더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1) 물러남(withdrawal)은 인간들에게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존재자들은 서로로부터 물러나 있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당근은 인간들로부터 물러나 있는 것에 못지 않게 지구로부터 물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칸트를 좇아 어떤 객체도 다른 한 객체를 그것 자체로서 결코 만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모든 객체는 다른 모든 객체를 "현상"으로서 만납니다. 칸트는 이것을 객체들에 대한 인간 정신의 관계에 고유한 것으로 보는 반면에,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것을 인간이 개입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객체들에게 보편적인 관계 양태로서 다룹니다. 그 결과, 2) 객체들은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표상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의 객체들이 아니라, 제가 그것들의 "국소적 표현들(local manifestations)"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나타나는 객체들입니다.

 

저는 객체들의 두 가지 차원 또는 측면, 즉 가상의 고유한 존재(virtual proper being)와 국소적 표현들을 구별합니다. 한 객체의 가상의 고유한 존재는 그것의 물러나 있는 차원이며 그것의 힘들, 행동 역량들, 또는 잠재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 객체의 국소적 표현들은 특수한 조건에서 현실화된 그것의 성질들입니다. 이런 표현들은 특수한 국소적인 물질적 조건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국소적입니다. 그것들은 특수한 특성이나 성질들의 현실화이기 때문에 표현입니다. 객체의 실체성은 그것의 성질들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즉 객체는 성질들의 다발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힘들, 즉 객체가 할 수 있는 것들로 구성된다는 주장이 제 논제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질은 객체에 가해진 작용입니다. 불을 예로 듭시다. 한편으로, 불은 다양한 방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가상의 힘들 또는 역량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불은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국소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구라는 행성에서 불은 하늘을 향해 위로 도약하며 춤을 춥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제 우주정거장에서 불은 중력이 없기 때문에 물처럼 파동 형태로 흐릅니다. 파동처럼 굽이치기와 위를 향해 춤추기는 다른 환경 조건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사물의 두 가지 국소적 표현입니다.

 

이제 표상주의적 반영 모형으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두 가지를 인식할 것입니다. 첫째, 지식은 수동적인 반사성 모형, 즉 세계를 바라보기 모형에 바탕을 두고 고려됩니다. 이런 모형들은 시각, 즉 아무런 상호작용도 하지 않는 채 사물들을 바라보기를 특권화하는 지식론입니다. 그리고,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매우 잘 개관하듯이, 바라보기는 수동성, 즉 비행위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아무 개입도 하지 않는 채 광경을 봅니다. 둘째, 이런 모형들은 성질들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객체를 아는 것은 그것의 성질들을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면, 유와 종차의 관계들에 바탕을 둔 지식 모형들에서 우리는 "동물"이라는 유에서 시작하여 그것을 "두발  동물"과 "네발 동물"이라는 종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발이 두 개인 것과 발이 네 개인 것은 성질들입니다. 그러므로 특수한 한 동물을 아는 것은 그것의 성질들을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은 기본적으로, 분류학적 망의 경우처럼, 식별하고 인식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바탕을 두고 모형화됩니다.

 

시각은 명백히 지식의 한 성분이지만, 저는 그것이 많은 점에서 우리 지식의 가장 중요하지 않는 차원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철학자들이 학문에 수반되는 앉아서 일하는 생활양식뿐 아니라 대체로 육체노동으로부터의 격리를 향유하는 경향이 있었던 특권적인 계급적 지위 때문에 반영에 바탕을 둔 표상주의적 지식론에 이끌렸다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런 생활양식들은 시각을 특권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모형의 문제점은 그것이 과학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의 지식 획득, 어린 시절에서 성인 시절까지의 정동적/인지적 발달, 그리고 학습을 철저히 왜곡한다는 점입니다.

 

한 객체를 아는 것은 그것의 힘들을 아는 것이며, 우리는 그것에 작용하고 그것이 우리의 작용에 대한 반응으로 어떻게 행위하거나 국소적으로 표현하는지 식별함으로써 객체의 힘들을 추론합니다. 과학혁명의 위대한 발견은 실험적 방법이었습니다. 실험적 방법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오랜 대립을 깨뜨리며 플라톤의 <<메논>>에 등장하는 노예 소년의 편을 들었고, 우리는 세계에 작용함으로써 그것을 알 수 있을 뿐이라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존재자들이 현존하는 환경의 변화와 장치들을 통해 작용할 때 우리는 존재자들에서 다양한 국소적 표현들을 유발하고, 그래서 그것들의 힘들 또는 역량들의 도표를 전개할 수 있습니다. CERN을 예로 듭시다. 슈퍼충돌기는 입자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에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현존하는 종류들의 존재자들과 그것들의 작용력 또는 역량들을 추론할 수 있도록 국소적 표현들(입자들이 충돌할 때 일어나는 사건들)을 산출하는 고에너지 조건에서 입자들에 작용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x가 일어나면 y가 일어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객체들 자체―결국 그것들은 물러나 있다―가 아니라, 오히려 "작용 도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객체의 성질 또는 국소적 표현들은 그것들 자체가 객체들의 상호작용들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런 국소적 표현들은 객체에 가해진 작용입니다. 제 커피 머그컵의 청색을 예로 듭시다. 저는 이 인터뷰에 응하며 햇빛이 비치는 야외에 앉아 있습니다. 이런 조명에서 제 커피 머그컵은 특별히 밝은 색조의 청색입니다. 제가 실내로 들어가 제 책상에 앉는다면, 제 머그컵의 청색은 진하고 어두워져 그것이 햇빛에서 향유하던 밝은 청색을 잃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머그컵이 청색이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 머그컵이 어떤 특수한 색조의 청색을 나타내든 간에 그것은 다양한 다른 파장들의 빛과 머그컵의 상호작용을 통해 머그컵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다른 파장으로 다른 색깔을 얻습니다. 모든 성질은 이런 상호작용적 특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이런 "외부관계들", 즉 객체들 사이의 이런 상호작용들에 관한 지식입니다.

 

Q: 상상의 객체들―이안 보고스트는 한때 해리 포터의 예를 사용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국경을 논의했습니다―이 실재적인지, 즉 객체지향 존재론 내에서 지위를 부여받는지 여부를 둘러싸고 어떤 논쟁이 있는 듯 보입니다. 이것에 대한 당신의 입장은 무엇이고, 더 일반적으로 당신은 객체의 실재는 어떻게 결정합니까?

 

허구적 객체―상상의 객체가 아니라―에 대한 제 입장은 많은 논쟁을 초래했습니다. 저는 허구적 객체들이 그것들 나름대로 실재하는 존재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확실히 저는 현존하고, 먹고, 세금을 내고,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 만날 수 있는, 이름이 "해리 포터"인 한 인간이 있다고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터무니 없을 것입니다. 제 요점은 텍스트가 무언가에 관한 것뿐 아니라 그것이 무언가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어떤 텍스트의 지시적 차원 또는 그것의 대상과 그것 나름대로의 존재로서의 지위를 구별해야 합니다. 지시적 차원에서 <<해리 포터>>는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세계 저쪽에 현존하는, 텍스트에서 묘사되는 존재자들은 없습니다. 텍스트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기타 등등. 그럼에도, 하나의 텍스트로서 <<해리 포터>>는 세계 전체에 걸쳐 유포되고 모든 종류의 일들을 행하는 실재하는 것입니다. 인도의 예로 돌아갑시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고, 소들은 환생한 조상들인 것 같지 않습니다. 즉, 이런 믿음은 그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믿음은 세계 전체에 걸쳐 유포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소들을 먹지 못하게 하고, 소들을 매장하거나 불태우지 못하게 하고, 소들의 고통을 경감하게끔 디클로페낙을 주입하게 하고, 그리고 그 밖에 다른 많은 일들과 같은 모든 종류의 실제 효과를 산출합니다. 허구가 실제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누구든 어떤 한 사람의 정신에 머무르는 한, 저는 그것이 실재한다고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객체의 실재와 우리가 어떻게 객체의 실재를 아는지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객체의 실재는 그것이 세계 속에서 어떤 효과나 차이들을 산출하는지 여부와 전적으로 무관합니다. 한 객체는, 인간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다른 객체에게도 영향을 미치치 않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여전히 전적으로 실재적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는 객체가 산출하는 차이나 효과들을 통해서 그것의 실재를 추론한다고 주장합니다. 지식의 문제로 돌아가면, 우리는 객체가 작용하는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서 그것의 현존을 추론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추론들에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플로지스톤이 좋은 일례입니다. 1617년에 요한 베허는 객체들의 연소 능력과 녹슬게 하는 능력을 설명하기 위해 그것들 내부에 다른 한 객체, 즉 플로지스톤이 현존한다고 제안했습니다. 플로지스톤은 객체들이 연소되거나 녹이 슬 때 상실되는 그런 객체였을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차이, 즉 무게 손실에 근거하여 한 객체의 실재 또는 현존을 추론합니다. 문제는 뒤에 많은 금속들이 연소될 때 무게가 증가하고, 녹이 쓸 때도 무게가 증가하는 현상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과학자들은 플로지스톤이 현존한다는 이론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객체들의 발견에 이르는 왕도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객체들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대해 잘못을 범할 수 있고, 다른 유형들의 객체들을 다른 한 유형과 혼동할 수 있고(예를 들면, 번개를 설명하기 위해 제우스를 불러내는 경우처럼, 허구적 객체들은 물질적 객체들과 혼동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실상 다수의 객체들을 만날 때 우리가 한 유형의 객체 앞에 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Q: 객체들의 "물러남"이란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암흑 객체 또는 준암흑 객체라는 당신의 관념을 정초합니까? 게다가, 도대체 이런 객체들이 해방적 정치 기획들 속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저는 "물러남"이라는 술어를 하만과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합니다. 하만의 경우에, 물러남은 객체들이 모든 관계들에 독립적이어서 그것들은 결코 서로 접촉하지 않거나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저의 경우에, 객체들은 관계할 수 있지만, 그것들은 현재의 관계들을 단절하고 새로운 관계들을 맺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관계들에 외재적입니다. 따라서 하만과 함께 저는 객체들이 그것들의 관계들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객체들은 독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만과 대조적으로 저는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의 경우에, 물러남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한편으로, 물러남은 객체들의 가상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객체들의 가상적 차원, 즉 그것들의 힘들은 영원히 다른 객체들로부터 물러나 있습니다. 객체들은 표현, 즉 현실화될 수도 있거나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모든 종류의 힘들을 가질 뿐 아니라, 힘들 자체는 결코 스스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즉, 객체가 표현하는 성질들은 결코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힘들을 닮지 않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저의 경우에, 물러남은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객체들은 결코 있는 그대로의 다른 객체들과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 나름의 조직 또는 인클로저의 견지에서 다른 객체들과 만납니다. 실로폰을 연주할 때 사용하는 것과 같은 작은 나무 채로 한 조각의 나무와 돌 하나를 때리는 예를 듭시다. 그 작은 채가 산출하는 소리(국소적 표현)는 돌의 경우와 나무 조각의 경우에 다릅니다. 이것은 이런 존재자들의 조직이 산출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상호작용을 할 때 원인들은 결코 일의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한 존재자에 의해 영향을 받는 존재자가 항상 산출되는 국소적 표현에 무언가를 기여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잠정적으로 객체들을 네 가지 넓은 유형으로 구별할 것인데, 암흑 객체들(dark objects), 희미한 객체들(dim objects), 밝은 객체들(bright objects), 그리고 불량 객체들(rogue objects)이 그것들입니다. 암흑 객체들이라는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물러나 있어서 무엇이든 어떤 국소적 표현도 산출하지 않는 객체들을 생각할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도 스스로를 표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암흑 객체들의 현존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절연되어 있습니다. 요점은 객체들이 물러나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그것들의 현존이 존재론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희미한 객체들은 객체들의 조립체에서만 스스로를 미약하게 표현할 뿐인 객체들일 것입니다. 중성 미자가 희미한 객체의 훌륭한 일례입니다. 그것은 전기적으로 중성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어떤 효과도 산출하지 않는 채 가장 친숙한 물질을  관통합니다. 우리의 독수리들도 인도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에 희미한 객체의 일례일 것입니다. 그것은 더 친숙한 물질 형태들과 때때로 상호작용하여 잠깐의 섬광을 산출할 뿐입니다. 밝은 객체들은 상황 속에서 스스로를 강하게 표현하는 객체들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휴대전화는 오늘날 매우 밝은 객체인데, 세계 도처에 나타나 사람들이 사는 방식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모든 종류의 심대한 변화를 초래합니다. 마지막으로, 불량 객체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어떤 특수한 조립체나 객체들의 무리에도 갖혀 있지 않는 객체들로서 조립체들의 안팎에서 돌아다니며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조립체들을 바꿉니다. 최근에 과학자들은 어떤 특수한 태양계에도 속하지 않고 은하 전체를 떠도는 행성들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종류의 블랙홀도 존재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마이몬(Solomon Maimon)은 그가 유럽, 경력, 그리고 지적 공간을 떠돈 방식 때문에 불량 객체의 일례입니다. 객체들이 관계들에 외재적이기 때문에 불량 객체들이 가능합니다.

 

저는 물러남, 국소적 표현, 그리고 암흑 객체라는 개념들이 다양한 정치적 함의들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객체들을 암흑 객체들, 희미한 객체들, 밝은 객체들, 그리고 불량 객체들로 분류할 때, 저는 바디우가 <<세계의 논리>>와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전개한 현상의 논리에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바디우는 한 객체의 현존을 어떤 세계 또는 상황에서 나타나는 그것의 현상의 강도의 견지에서 정의합니다. 저는 객체가 세계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여부는 그것의 현존 또는 실재 여부와 무관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바디우의 현상 개념은 정치적 상황에서 힘의 분배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희미한 객체들은 흔히 어떤 상황에서 작용력이 제한된 억압받는 객체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 정치에서 노동자들과 봉급쟁이들의 지위를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 정책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객체들의 이런 분류는 이런 권력 분배들, 즉 어떤 객체들의 표현이 희미해지는 메커니즘들과 그것들의 표현의 강도를 증가시키기 위해 채택할 수 있는 전략들에 주목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Q: 존재론 내에서 차이의 문제는 어떻게 이해되고, 그것은 생성의 과정들, 특히 비인간적 존재자들에 대해 어떻게 관련됩니까?

 

우리는 차이를 두 사물 사이의 차이로서 생각하곤 합니다. 예를 들면, 해바라기는 데이지와 다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질에 있어서 구별될 수 있는 자기동일적 존재자들이라는 전제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서 차이는 부정의 견지에서 이해됩니다. 차이는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들뢰즈를 좇아, 저는 긍정적이고 실정적인 차이 개념을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존재자들은 현존 속의 그리고 현존을 통한 차이들이고, 그것들은 그것들 자체와 다르며, 그리고 그것들은 차이들을 산출합니다. 먼저 첫 번째와 세 번째 유형의 차이를 고려합시다.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 단 하나의 소리 또는 음인 우주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이 우주에서는 이 음 외에 어떤 다른 것도 현존하지 않습니다. 아무 입자도, 아무 행성도, 아무 별도 없습니다. 그런 우주에서는 이 음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 음을 듣거나 경험할 사람도 아무도 없을 것이지만, 이 음은 여전히 현존할 것이고 그 자체로 실정적인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요점은, 차이가 그냥 그대로의 차이이기 위해서 어떤 것과 다를 필요가 없다는 것, 어떤 것과 구별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예를 들면, 물이 끓는 온도는 하나의 순수한 실정성, 즉 그것 자체로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실재인데, 이 온도가 구별될 수 있는 여타의 온도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사물들을 가리키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구별해야 하기 때문에 명백히 그런 차이들은 말하기도 생각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만, 그것이 그런 차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기 위한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그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우리 능력의 한계가 그것들의 존재 여부를 규정하지는 않습니다.

 

존재자들이 현존해야 하고 물러나 있다면, 그것들은 그런 차이들을 지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들은 전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정적인 차이는 부정성이나 부정을 앞서야 하며, 존재자들은 자체의 차이들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스스로를 지속해야 합니다. 둘째, 저는 존재자들이 그것들 자체와 다르며, 그리고 자체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차이는 정적인 형용사가 아니라 변화 과정에서의 동사 또는 활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 존재자들의 실체성이란 그것들이 자체의 내부에서 펼쳐지는 과정들의 결과로서 영원히 스스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즉, 그것들은 모두 영원히 생성 과정 속에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실체와 과정, 존재와 생성 사이에 어떤 대립도 보지 못합니다. 하나의 실체라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생성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존재는 하나의 생성 방식입니다. 모든 존재자는 자체의 내부 엔트로피 즉 해체되는 경향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가 "엔트로피"라는 술어를 들을 때, 우리는 즉시 열사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엔트로피는 어떤 체계 내부의 시간에 따른 질서의 척도입니다. 매우 질서정연한 체계들은 낮은 정도의 엔트로피를 갖는 반면에, 매우 무질서한 체계들은 높은 정도의 엔트로피를 갖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모든 객체는 엔트로피라는 유령, 즉 무질서의 위협에 직면합니다. 객체들을 그것들 자체와, 그리고 자체적으로 다르게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객체가 계속 현존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자체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데, 이런 과정들이 자기차이화 과정들입니다. 객체의 동일성은 자체의 자기차이화의 산물입니다. 이런 점에서, 유기체, 토네이도, 그리고 사회 같은, 적극적으로 엔트로피와 싸울 수 있는 객체들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바위, 별 등과 같은, 엔트로피에 수동적으로만 저항하는 객체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경우에 시간을 가로질러 객체의 실체성을 구성하는 자기차이화 생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객체들의 실체성을 고정된 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을 가로질러 자체의 역사를 함께 나르는 줄로 생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여러 환경에서 객체들은 다른 객체들에게 영향을 미침으로써 차이를 산출하는 역량이 있습니다. 모든 객체들이 다른 모든 객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는 없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객체들은 선택적으로만 서로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는 제 딸애의 장난감 상자에게 말을 함으로써 그것을 조립할 수 없습니다. 제 딸애의 장난감 상자는 언술에 닫혀 있고, 그래서 언술의 영향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녀의 장난감 상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제 손과 도구들, 제 신체를 사용해야 합니다. 객체들은 모든 종류의 방식으로 다른 객체들에게 선택적으로 개방되어 있으며, 이런 선택적 개방성이 그것들이 다른 객체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고 다른 객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방식을 규정합니다.

 

Q: 마지막으로, 객체들은 다른 객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온티콜로지의 관점을 고려하면, 당신이 보기에, 객체들은 그것들 자체를 구성하는 관계들과 분리가능합니까 아니면 그것들로 환원가능합니까? 그리고 이런 부분전체론적 가설이 정치 체계들뿐 아니라 그런 체계들 내부에서 작동하며 그것들을 구성하는 체계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까?

 

현대 좌파의 정치 이론은 객체들을 그것들의 관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래서 객체들이란 관계들과는 별도로 자체적으로 그리고 홀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적 사유와 생태학적 사유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런 경향은 이해할 만 합니다. 신자유주의적 정치 사상은 우리를 독립적인, 자기충족적인 행위자나 주체로 여기며,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으며 사회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거나 제약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경우에, 아팔라치아의 트레일러 공원에서 매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사람과 수백만장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사람은 정확히 같은 자유를 누립니다. 트레일러 공원에서 태어난 사람이 자라서 계속 가난하게 산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결과입니다. 마찬가지로, 환경 운동에 적대적인 사람들은 환경 사건들을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제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놀랍지 않게도, 좌파와 환경주의자들은 열심히 관계를 강조하며, 관계들이 객체들에 내재적이고 그것들을 구성한다고 주장하는데, 관계 네트워크들이 핵심적인 투쟁 현장입니다.

 

문제는 관계들이 객체들에 내재적이고 그것들을 구성한다면 무엇이든 어떤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하만이 주장했듯이, 관계주의는 사실상 우파적 입장이지 좌파적 입장이 아닙니다. 하만은 프랑스 혁명기의 버크(Burke)와 쟈코뱅당의 예를 대조합니다. 관계들이 객체들에 내재적이어서 자연스러운 유기적인 사회 질서가 있다고 주장한 사람은 버크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쟈코뱅당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현존하는 관계들의 체제를 깨뜨릴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유형이 보수적 사상의 역사 전체를 통해 작동하고 있음을 압니다. 플라톤은 사회 속의 인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계층화되는, 자연스러운 유기적인 사회 질서를 위한 변론을 전개합니다. 중세 시대 전체에 걸쳐, 교부들은 인민들이 필연적으로 배열되는 자연스러운 사회 질서를 위한 변론을 전개합니다. 자유시장의 옹호자들은 항구적으로 이런 시장의 자연성을 위한 변론을 전개하며,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개입하면 파국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파 사상은 관계들이 우연한 배치라기보다 존재자들의 본질적이고 자연스러운 측면들이라고 항구적으로 주장합니다. 남자와 여자, 서로 다른 인종 집단들, 서로 다른 계급들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질서가 있다고 합니다.

 

변화가 가능하려면, 존재자들이 현재의 관계들을 단절하고 그것들을 재배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적절한 좌파적 정치 변동 이론은 두 가지 요소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관계들을 단절하는 것이 어떨게 가능한지 설명해야 하고, 존재자들이 어떻게 현존하는 관계들의 특수한 장에 한정되거나 갖혀 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물러남의 이론은 우리에게 관계를 단절하기 위한 최소의 존재론적 조건을 제공합니다. 존재자들이 그것들의 관계들에 독립적인 한, 관계들이 객체들에 외재적인 한, 원칙적으로 모든 객체는 관계들을 단절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한 존재자는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존재자이면서 사회나 제도 같은 더 큰 규모의 객체의 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그것은 그것이 속해 있는 더 큰 규모의 객체에 도전하고 그 객체와 관계를 단절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진공 속에 놓여진 쥐의 경우처럼, 그 객체와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 매우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진공 속에서 쥐는 여전히 쥐이긴 하지만 죽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국소적 표현은 객체들이 다른 객체들과 맺는 관계들에 의해 어떻게 고도로 제약당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국소적 표현들은 대체로 한 객체가 다른 객체들과 행하는 상호작용의 산물들이라는 점을 떠올립시다. 냉방기를 켜면 제 피부는 간지럽습니다. 제 신체의 형태는 부분적으로 대기압에 의존합니다. 대기압, 냉방기의 가동 등은 끌림의 체제(regime of attraction)의 요소들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세계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국소적 표현들을 구성하는 끌림의 체제입니다. 트레일러 공원에서 매우 가난하게 사는 아팔라치아 사람은 다른 사람들, 음식과 교육의 가능성, 일자리의 가능성, 필수불가결한 것이 된 인터넷 같은 핵심 기술들에 대한 접근, 언어 역량은 지능과 능력을 반영한다는 관념 같은 이데올로기적 허구, 기타 등등이 가득 찬 끌림의 체제 속에 현존합니다. 그 사람의 끌림의 체제를 이루는 이런 요소들은 중력과 비슷한 방식으로 기능하는데, 중력에 의한 시공간의 휨 때문에 위성이 특수한 방식으로 지구를 도는 궤도 운동을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특수한 방식들로 세계 전체에 걸쳐 그를 안내하고, 특수한 방식들로 그로 하여금 국소적으로 표현하게 하거나 발달하게 만들고, 기타 등등의 일을 합니다. 이런 관계들은 그런 사람에 외재적이지만, 그럼에도 핵심적인 방식들로 그의 국소적 표현들을 관장하여 궤도를 벗어나기 어렵게 만듭니다.

 

핵심은 이런 끌림의 체제들과 더 작은 규모의 객체들의 독립성을 물화하고 자연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그것이 우리를 구조적으로 자유롭다고 생각하여 우리가 우리의 자유와 행위를 행사하는 장인 끌림의 체제들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특수한 방식들로 우리로 하여금 세계 속에서 궤도 운동을 하게 하는 "사회적 중력"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대체로 좌파 정치학의 문제는 그것이 관계들이 외재적이고 우연적이라는 점을 인식하기보다 역설적으로 관계들을 물화하여 그것들을 구조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점입이다. 끌림의 체제라는 개념은 우리를 특별히 벗어나기 어려운 사회적 궤도들로 끌어들이는 그런 우연한 외재적 관계들에 주목하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이런 체제들이 기능하게 하는 메커니즘들을 탐구하게 만들고 이런 궤도들의 강함을 깨는 전략들을 고안하기 시작할 수 있게 합니다. 로켓 공학자들이 지구 중력을 벗어나기 위한 모든 종류의 전략과 기법을 고안해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정치학자들은 끌림의 체제들을 그저 비판하지(즉, 그것들의 메커니즘들을 분석하지) 말고 공학자처럼 창의적으로 되어야 하며,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체제들과 관계를 단절할 수 있게 하는 "기술들"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비판은 필요하지만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번역: 김효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