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09. 2. 28. 02:44

 

예전에 올리비아 하세가 나왔던 영화 '로미오와 줄리엣' 기억하십니까 ?  저는 그 영화를 못봤는데, 당시 중딩인가 고딩이었던 우리 누나가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고 와서는, 다음 장면이 가장 마음 아팠다고 하는 겁니다.  즉, 줄리엣이 여차여차한 계획으로 죽음을 가장하는 약을 먹을테니 놀라지 말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가져가는 우체부 할아버지가 나귀를 타고 터덜터덜 가는 바로 그 앞을, '줄리엣이 죽었다'라는 잘못된 소식을 먼저 들은 로미오가 절망하여 마구 달려가버리는 모습이 너무 애절하고 안타까왔다고 하더군요.

 

 

 

(아 !  '빠른우편'으로 부칠걸 !!!)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통신 시스템은 많은 다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가령 1812년 영미 전쟁 때 미군에게 최후의 승리를 안겨준 뉴올리언즈 전투는 바다 건너에서 이미 종전이 선포된 몇주 후에 벌어졌습니다.  당시에 휴대폰은 고사하고 항공 우편만 있었어도 그 전투에서 희생된 1만명에 가까운 영미 양국 군인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전쟁 끝난지가 언젠데 니들 지금 뭐하는 겅미 ?) 

 

 

원래 가장 편지를 기다리는 족속들은 바로 군인입니다.  사령관이야 본국의 지령을 기다렸겠지만, 군인들은 사랑하는 가족, 친구, 그리고 무엇보다 연인들의 편지를 기다렸겠지요.  전에 읽었던 2차세계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보급병으로 복무했던 어떤 독일군의 수기인 '잊혀진 병사' 중의 내용을 보면, 한참동안이나 보급을 받지 못한 부대가 숨어있는 어떤 참호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바로 '편지'더군요.  보급품보다 더요.

 

또 1차세계대전 때 벨기에를 통과해서 프랑스를 침공하기 위해, 브뤼셀을 시가지를 지나 행군하는 독일군 행렬을 대사관 건물에서 내려다보던 영국 대사가 적은 수기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게 잘 조직되고 규율있는 군대를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저렇게 행군 중인 중대들 사이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전령까지 있다, 라고 적었더군요.  원래 군인들은 보급식량 못지않게 편지를 꼭 필요로 하나봐요.

 

나폴레옹은 스페인부터 모스크바까지,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시리아까지 천하를 종횡하며 작전을 펼쳤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디에서 작전 중이건, 항상 본국 파리의 정적들의 첩보를 파악하고, 수천 km 떨어진 부하 장군에게 세부적인 지시를 내리고, 와이프와 연인들에게 밀어를 속삭였습니다.  무슨 통신 수단을 이용했을까요 ?  당연히 편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소문난 일벌레였습니다만, 사실 황제가 직접 자기 손으로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나폴레옹은 대개 편지를 '구술'했고, 그의 서기들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원래 프랑스인들이 말이 빠르고 많지요) 나폴레옹의 말을 받아적느라 곤욕을 치르곤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새벽 2시에 일어나서는 여러 곳에 사소한 내용에 대해서도 일일이 참견하는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가령 틸지트에서 러시아 황제와 회견하는 동안에도, 동생 제롬의 치질 치료법에 대해서도 참견하는 편지를 보냈지요.  ( 나폴레옹 시대의 말, 말, 말  http://blog.daum.net/nasica/6862350 참조)

 

 

 

(나폴레옹은 러시아의 황제와 우정을 쌓았다고 생각하고, 알렉상드르는 코르시카 촌놈에게 당했다고 생각하고...)

  

 

나폴레옹이야 휘하에 멋진 제복을 입고 튼튼한 말을 탄 연락 장교들이 잔뜩 있었으므로 자기가 휘갈겨 쓴 편지들이 제대로 전달되는지 걱정할 필요는 별로 없었습니다.  누가 감히 황제의 우편물을 가로 막겠습니까 ?  물론 모스크바 원정 때는 이야기가 많이 달랐지요.  아마 그때 황제의 우편 행낭을 빼앗은 코삭 기병들 중에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친구가 있었다면, 그걸 장군에게 바치지 않고 한두통 정도는 후손을 위해 가보로 남겨놓았을텐데요.  그걸 지금 eBay나 뭐 그런 곳에 올린다면 꽤 큰 돈이 될텐데 말이지요 ㅎㅎㅎ.

 

 

 

(나폴레옹의 편지를 내놔라 !!!  그래야 내 후손이 200년 뒤에 떼돈을 벌 수 있다더라 !) 

 

 

나폴레옹 사정은 그렇다치고, 다른 장군들도 전쟁터 한가운데서 급전을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포탄에는 눈이 없으므로, 장군의 편지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포탄이 피해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가령 1807년 영국군이 코펜하겐을 포위 공격할 때, 전투가 막바지에 이르러 코펜하겐 함락이 코 앞에 닥치자, 덴마크 수비군 사령관은 코펜하겐 항구에 묶여있던 덴마크 해군 함대에게 자폭 명령을 내립니다.  영국 해군에게 덴마크 함대를 고스란히 넘겨주기 싫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 명령서는 불과 몇 km 떨어진 항구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계속되던 영국 육해군의 포격에 연락장교가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덕택에 덴마크 함대는 모두 고스란히 영국 해군 전함이 되고 맙니다.

 

이런 사정은 천하의 영웅 나폴레옹에게도 적용됩니다.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과 혈전을 벌이면서 그로쉬가 지휘하던 프랑스 별동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로쉬가 오지 않자, 그를 찾으러 전령을 보낸 술트 원수를 불러 몇명의 전령을 보냈냐고 묻습니다.  1명을 보냈다는 말을 들은 나폴레옹은 "윽 시발... 베르티에 원수가 살아있었다면 20명은 보냈을거야"라며 탄식합니다.  결국 그로쉬의 부대는 끝끝내 전장에 나타나지 못합니다.

 

 

 

(폐하, 제가 생전에 잘했던 게 전령 많이 보낸 것 뿐이었단 말입니까 ?) 

 

 

러시아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하지요. 

 

'전쟁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바다에 나갈 때는 두번, 결혼 할 때는 세번 기도하라.'

 

이는 결혼 생활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속담이지만, 이 속담에서도 전쟁보다도 오히려 바다가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영국 해군 수병들의 생존률은 육군보다 훨씬 낮았는데, 그 죽음들의 대부분은 전투가 아닌 험악한 바다 생활 자체가 원인이었습니다.  (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생활  http://blog.daum.net/nasica/5512965 참조)  이렇게 사람 목숨도 어찌 될 줄 모르는 상황에서, 편지가 안정적으로 전달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영국 해군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다고 해도 말이지요.

 

그렇게 편지 교환이 어려웠음과는 전혀 무관하게, 편지를 주고 받을 필요성은 해군일 수록 더욱 많았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내내, 영국 해군은 프랑스 주요 항구 거의 전체를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었는데, 그 임무 수행 중인 도버 해협 함대도, 지중해 함대도, 또 인도양에서 작전 중인 함대도 모두 본국 해군성 및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 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누가 그 편지들을 전해 줄까요 ? 

 

교대를 위해 귀항하는 군함이나, 지나가다 만난 본국 상선 등이 그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 그런 것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으므로, 함대 내에 있는 작은 군함(거의 보트 수준)이 그런 연락선 임무를 띠고 움직였습니다.  그나마, 작은 슬룹 함이나 커터 선이라도, 함대 내에 그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연락선 임무를 띠고 본국으로 귀항하는 일이 그렇게 잦지는 않았습니다.  또 그런 연락선은 너무나 작았으므로, 그리 안전하고 신뢰성있는 연락 수단은 아니었습니다.  폭풍에 휘말려 침몰할 수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적함에게 나포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중요한 공식 기밀 서신에는 항상 봉투 속에 작은 포도탄알 두세개를 동봉했습니다.  적에게 나포될 경우, 즉각 바다 속에 던져 넣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지요.

 

 

 

(이런 쬐그만 커터 선을 타고 대서양을 횡단 ?  미쳤구만...) 

 

 

따라서 편지 교환은 무척 제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국 해군에서는 '바닷물과 먼 거리는 어떤 사랑도 씻어내버린다'는 격언이 있었다고 합니다.  해군에서 육지의 연인과 사랑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주는 말이지요.  또 넬슨 제독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일단 지브랄타(스페인 남단 지중해의 입구)를 지나고나면, 모든 해군은 독신자다.'

 

아무튼 이렇게라도 영국 항구에 전달이 된 편지는 누가, 어떻게 겉봉에 주소가 씌여진 사람에게 전달이 되었을까요 ?  당시 유럽 각국에는 이미 우체국 같은 것이 있었으므로 우체부가 그 편지를 배달해주었습니다.  우체부가 있었다면 우표를 붙여야 했을까요 ?  아닙니다.  우표는 1837년에야 발명되었는데, 그걸 만든 로우랜드 힐(Rowland Hill)이라는 교장 선생님은 그 공로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고 하니까, 나폴레옹의 근위대 병사이든 넬슨 제독의 수병이든 편지에 우표를 붙이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공짜였을까요 ?  아시다시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짜라는 것은 없습니다.

 

 

 

(기사라는 것이 꼭 갑옷 입고 말을 타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힐 선생님...) 

 

 

1653년에 드 발라예르(De Valayer)라는 프랑스인이 파리에서 우체통을 이용한 우편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즉 주요 거리마다 우체통을 세워놓고, 거기에 편지를 넣으면 배달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때 드 발라예르의 우편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드 발라예르가 파는 편지 봉투를 써야 했습니다.  즉 드 발라예르는 봉투 판매로 우편 사업의 수익을 보았습니다.  약간 이야기가 빗나갑니다만, 드 발라예르의 사업은 처참하게 망했습니다.  그와 원수지간이었던 사람이 그의 우체통마다 살아있는 쥐를 넣는 바람에 편지들을 쥐가 쏠아먹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드 발라예르에게는 우체통, 그의 원수에게는 쥐통)

 

 

드 발라예르는 파리 시내에서의 우편 배달만 해주었기 때문에 사실 거리에 따른 우편 요금 문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령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영국 노썸버랜드의 어느 작은 마을로 부치는 편지의 요금은 어떻게 될까요 ?

 

스톡홀름에서 편지를 부치는 사람도 우편 요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러면 스웨덴 우체국에서 항구까지 편지를 보내어, 영국으로 가는 적절한 배에 우편 행낭을 실어 보냅니다.  여기서 적절한 배라는 것은 군함이든 상선이든 어선이든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영국으로 가기만 하면 다 해당이 되었습니다.  당시 영국 체신부가 운영하는 정기 연락선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수가 많지는 않았으므로, 대개는 그것에만 의존할 수는 없었거든요.  또 당시 배의 선장들은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우편물의 자유로운 왕래에 기여한다는 면도 있었지만, 우편 행낭을 날라주고  약간의 돈도 받았거든요. 

하지만 스톡홀름에서 낸 우편 요금은 목적지인 영국 항구까지만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일단 영국 항구의 우체국에 편지 행낭이 전달되면, 그때부터는 현지 우체국의 책임 하에 그 편지를 배달했는데, 당연히 그 우체부에게 누군가는 돈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 비용은 편지를 받는 사람이 냈습니다.  게다가 거리에 따라 또 비용이 차이가 났습니다.  요즘 휴대폰으로 따지면, 전화 거는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전화 받는 사람이 돈을 내는 것이니까, 돈을 내고 편지를 뜯어봤더니 전혀 원치 않는 고지서였다면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체부 입장에서도 이런 방식은 꽤 모험이었습니다.  반드시 편지를 배달해야만 돈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혹시라도 수신자가 편지 수령을 거부하거나 배달할 집을 못찾거나 하면 상당히 씁쓸한 하루가 되었을 것입니다.

 

특히 편지를 배달할 주소지를 찾아가는 것은 나름대로 꽤 큰 일이었습니다.  당시 런던이나 파리 같은 곳에도 거리 이름까지는 있었어도 아직 번지수 같은 것은 없었거든요.  시골 마을 같은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요.  그래서 편지 겉봉에도 주소지는 "XXX 마을 시내가 큰 바위 옆 빨간 지붕 집의 스미스씨" 정도 수준이었습니다.  이런 주소에 정확히 편지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편지의 겉봉에 씌인 주소 : 런던, 메이 폴 근처의 스트랜드 가의 피콕이라는 간판이 있는 집에 사는 토마스 피콕 씨에게. 그 동네 사람들은 다 그 여관과 그 간판을 알아요 ! 라고 씌여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그 마을의 선술집이나 잡화점 같은 곳에 들러 스미스씨네 집이 어디있는지 묻거나 아예 그 선술집에 편지를 맡겨두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아예 선술집이나 잡화점이 정식으로 마을 우체국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요즘의 편의점 택배를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도시에서도 다닥다닥 붙은 집들 중에서 존슨씨네 집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도시에서도 선술집이나 커피 하우스가 그런 간이 우체국 역할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런 우편물이 도중에 분실 또는 훼손되면 큰일이겠지요.  안전한 통신은 사회 전체의 신뢰성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니까요.  그를 막기 위해 당시 우편물은 매우 엄중한 법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모든 포탄마다 우편 요금 선불 도장을 찍어라 !) 

 

패트릭 오브라이언이 지은 영국 해군 소설의 명작 오브리-머투어린 시리즈 중 "The Ionian Mission" 편을 읽다보면, 잭 오브리 함장이 전투를 앞두고 선원들에게 '모든 포탄에 우편 요금 선불 도장을 찍어서' 쏘라는 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요 ?  당시 영국 법에 따르면, 국왕의 우편 행낭의 운송을 방해하거나 막는 행위는 사형에 해당했습니다.  이것의 연장선 상에서, 국왕의 우체국에 우편 요금을 선불로 낸 편지도 같은 법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비록 영국법의 보호는 아니지만, 발사된 대포알은 더 절대적인 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그 법은 바로 뉴튼의 운동 법칙이지요.  즉, 국왕의 우편물이든 대포알이든, 그 이동 경로를 막고 서 있다면 결과는 죽음 뿐이라는 뜻의 농담이었던 것입니다.

 

 


이동 경로를 막고 서 있으면 죽음 뿐이라 ㅎㅎ

마지막 문장 너무 재미있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수신자부담편지를 선술집에 맡겨놓았다면 요금 수령은 어떻게 했을까요?
저도 그 점이 궁금했는데, 아마도 술집 주인이 선납해주고 나중에 수금했든가, 아니면 술집 주인이 수신자에게서 요금을 받아두었다가 나중에 우체부가 다시 올 일이 있을 때 주던가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우체통에 쥐를 넣어서 문제가 된것은 사람들이 놀라서가 아니라 쥐들이 편지를 다 갉아먹었기 때문임.
흠...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본문도 님의 말씀대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사진용 멘트가 넘 위트있고 재미나요.^^
ㅎㅎㅎ 재미있게 너무 잘봤습니다. ^^

내동생 제롬에게... '치질에는 역시 거머리 굳'
유익한정보!!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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