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09. 3. 24. 23:24

 

어느 척탄병의 행군 (무명씨)

 

우리는 재물을 찾기 위해 온 방을 다 뒤질거라네.
그걸 찾아내면 마음껏 써버릴테지.
카드놀이로, 주사위놀이로,
세어보지도 않고 써버릴거라네.
다 써버리고나면,
모든 쾌락이여 안녕.

 


위의 시 같지도 않은 시는 Roy Palmer라는 사람이 모아서 편집한 'Rambling Soldier'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로, Sharpe's Honour 편 Prologue 맨 앞에 인용된 것입니다.

 

Sharpe's Honour 편은 1813년 스페인 비토리아 전투를 다루고 있는데, 이 전투는 프랑스군이 스페인에서 완전히 축출시킨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1812년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한 이후, 허약해진 프랑스를 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침공하려하지만, 나폴레옹의 빛나는 천재성은 부족한 병력으로도 이들을 상대로 여기저기서 승리를 거둡니다.  원래 위태로와진 본국의 방어를 위해 스페인에서 철수하려고 했던 프랑스군은, 이 승전보에 사기가 고무되어, 추격해오는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에 맞서 비토리아에서 일대 회전을 치르기로 합니다. 

 

 

 


웰링턴이 지휘하던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은 약 78,000명, 이에 맞서는 주르당 원수의 프랑스군은 58,000명이었는데, 특기할 만한 점은 나폴레옹의 형이자, 당시 스페인 괴뢰정부의 왕이던 조셉 보나파르트도 여기에 직접 참전했습니다.  사실 조셉 보나파르트는 여기에 꼭 참전할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꼭두각시 왕이라고 해도, 왕은 왕입니다.  조셉은 스페인의 왕 노릇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기서 지거나, 또는 싸우지 않고 그냥 프랑스로 돌아가면, 조셉은 나폴레옹의 형이라는 호칭 외에는 아무런 호칭도 없게 되는 것이었지요.  그러니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한 결정적 전투에 참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비토리아 시 앞의 평원에 프랑스가 자랑하는 우세한 포병을 주욱 늘어놓고 영국군이 그 화망 안으로 걸어들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즉,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시 프랑스 장군들 중에 웰링턴과 싸워 이긴 사람이 전혀 없었을 정도로, 웰링턴은 상승 장군으로서 이름이 높았지만, 웰링턴은 '방어는 그럴싸 하게 하지만, 공격은 할 줄 모른다'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웰링턴은 항상 언덕을 끼고 언덕 뒤에 숨어서 방어를 하다가 역습을 하는 것이 전형적인 수법이었거든요.  워털루 때도 똑같은 수법으로 나폴레옹과 맞짱을 떴지요.  아뭏든 당시 프랑스의 원수였던 주르당은 그렇게 화망을 펼쳐놓고 웰링턴의 공격 쯤이야 하는 심정으로 다소 안일한 자세를 취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포병이 일을 다 끝내줄 것으로 믿고 여유만만한 자세로 대기 중인 프랑스 보병들)

 

 

 

 

하지만 웰링턴은 바보가 아닌지라, 프랑스군의 정면으로 걸어들어가는 척 하면서 병력의 상당 부분을 우회시켜 프랑스군의 측면을 파고듦과 동시에, 프랑스로 향하는 대도로(Great Road)를 봉쇄합니다. 특히 대도로가 봉쇄되었다는 소문이 아침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프랑스군을 일시에 붕괴시켜버립니다.  사실은 완전 봉쇄가 아니었고, 일부 위치는 프랑스군이 굳게 지키고 있었습니다만, 그 프랑스 부대조차도, 주력부대가 붕괴되어 몰려오는 것을 보고는 스스로 무너져 같이 도주해버립니다. 

 

여기서 영국-스페인-포르투갈 연합군의 사상자수가 4,500명인 것에 비해, 프랑스군은 8,000명의 사상자에 2,000명의 포로를 냅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사상자 수나, 그 결과가 미치는 영향이 아닙니다.


바로 맨 위에 적힌 '시같지도 않은 시'의 주제인, '약탈물'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당시 프랑스군은, 위기에 처한 본국의 방어를 위해 스페인에서 철수할 준비를 했던 부대였습니다.  즉, 짐을 챙겼다는 이야기지요.  그 짐 안에는, 당연하게도, 스페인 제국이 남미와 유럽 전역에서 긁어모았던 막대한 양의 재물이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그 액수는 최소 약 500만 파운드에 해당했다고 합니다만, 워낙 다양한 형태의 보물들이 들어있었던 관계로, 정확한 추산은 아무도 못한다고 합니다.  중국 비단부터, 남미의 금, 루벤스의 그림, 고가의 포도주, 값비싼 고가구,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르네상스 시대의 보석 시계, 기타 보석류 등등 그 부피만 해도 엄청났다고 합니다.  당시 화폐로 500만 파운드라고 해봐야 여러분에게는 감이 잘 안 올 테니, 현대 화폐로 환산하면 약 2억3천4백만 달러라고 합니다.  약 2천200억원 정도 되는군요.  한 전투에서 이 정도의 노획물이 있다는 것은 정말 역사적인 전투라고 할 만 합니다.  혹자의 말로는 유럽 전장에서 그런 노획물이 있었던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마케도니아군이 잇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한 이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재물들이 다 웰링턴 손안으로 들어왔을까요 ?  물론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  웰링턴 본인에게 들어온 노획물은 '겨우' 10만 스페인달러(1달러는 5실링)의 은화 뿐이었습니다만, 웰링턴 본인이 투덜거리기에도, 영국군 사병들이 약탈한 금화만도 100만 파운드에 해당했다고 합니다.  그나마, 영국군 사병들은 그 금은보화를 실은 마차군단에 손을 댄 세번째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손을 댄 손님들은 다름아닌 프랑스군 자신이었고, 두번째 손님들은 인근 비토리아 시에서 긴 칼을 들고 그야말로 파도처럼 밀어닥친 비토리아시민들이었습니다. 

 

어떻게 총칼로 무장한 프랑스군과 영국군 사이에서, 비무장 스페인 민간인들이 군용 마차 행렬을 습격할 수 있었는지 이해가 안되실런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시 '보물이 있다'라는 소문은 사람들을 좀비 비슷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곧 죽는다고 하더라도, 한 10분이라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욕망은 민간인들 뿐만 아니라, 도주하는 프랑스군이나 추격하는 영국군 모두를 눈이 뒤집힌 괴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웰링턴은 이 약탈 행위에 크게 노해서, 자신의 영국군을 '술마시러 입대한 땅거지 색히들 (the scum of the earth, enlisted for drink)'라고 불렀던 것으로 두고두고 욕을 먹습니다. 

 

웰링턴이 뭐라고 하던 간에, 병사들은 별 신경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령 에드워드 코스텔로라는 이름의 라이플병사는 그날 저녁 1천파운드를 벌었다고 합니다. 라이플 개머리판으로 몇번 탁탁 두들겨서요.

 

보석이나 금화 등은 그런대로 누군가를 부자로 만들어주었습니다만, 이 날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습니다.  루벤스가 그린 명화가 그냥 금화나 보석를 감싸기 위한 포장지 역할을 했다고 하니 할 말 다한거지요.  금과 다이아몬드가 넘쳐나는 현장에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은식기나 은화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그런 명화들 중 몇점은 회수되어, 스페인 왕위에 복원된 페르디난드 7세가 웰링턴에게 선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날 없어진 보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이었던 스페인 국왕의 왕관은 영영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이 전투에 참전했던 나폴레옹의 형 조셉의 운명은 어땠을까요 ?  조셉은 마차를 타고 후퇴를 하고 있었는데, 항상 후퇴시에 그러하듯이 결국 전복된 다른 마차로 인해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렇게 막힌 도로 위로 검을 뽑아든 영국군 경기병들이 바람처럼 달려들었습니다. 조금 과장된 이야기 같습니다만, 상황이 어느 정도로 급했는가 하면, 영국 경기병이 마차의 오른쪽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조셉 왕은 왼쪽 문을 열고 달아났다고 합니다.  결국 조셉 왕의 은제 요강을 빼앗은 경기병 장교들은 그 요강을 (용도를 알았는지 의심스럽습니다만) 술마시는데 사용했다고 합니다.

 

아래 그림이 그 조셉 왕의 아슬아슬한 탈출 장면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흠, 그림에서는 뒷문으로 나오는군요.

 

 

 

 

군대에는 여자들이 따라다닙니다.  당시 프랑스군이 도주하면서 남기고 간 것은 금은보화 뿐만 아니라, 많은 여자들도 남기고 갔습니다.  영국군처럼 일반 사병들의 부인들인 거친 아낙네뿐만 아니라, 잘 차려입은 멋진 여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당시 프랑스 경기병의 쫙 달라붙는 바지와 꼭 끼는 자켓을 입은 프랑스 여자들이 많이 포로로 잡혔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의 패션 감각은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  이 여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적군의 장교들을 자신의 보호자로 받아들였고, 나중에 자신의 소지품과 함께 프랑스로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통행증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 결국 퇴로가 끊긴 프랑스 패잔병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  저 위에 포로의 숫자가 너무 작지 않습니까 ?  152문의 대포는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사람들은 거의 다들 무사히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비토리아 인근에 버려진 황금마차와, 비토리아 시내 호텔에 프랑스군이 승리를 자축하려고 미리 준비해둔 만찬 덕분이었지요. 그 금은보화와 만찬, 그리고 넘치는 샴페인으로 인해 영국군의 추격은 올 스톱 되어버렸거든요.

전시 노획물이라...어려운 시대에 가난한 이들을 군대로 이끄는 매우 강력한 힘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nasica님이 언급하셨듯 노획물 약탈로 인해 부대의 기동이 멈추고, 부대가 개판(?)이 되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지휘관의 입장에서는 이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로마군의 경우, 적의 성내에 들어갔다고 해도 명령없이는 곧바로 약탈하지는 못하게 했다는 군요. 부대 지휘가 개판이 되니까요. 때문에 함락이후 따로 지휘관의 명령이 있어야만 약탈 및 노예획득의 기회가 가능했고, 특히나 신전이나 왕궁과 같이 단위가 다른 약탈장소는 지휘관이나 국가를 위한 특별 관리장소로 정해져 관리했답니다.
덕분에 병사들이 왕궁이나 신전을 찾으면 이를 포위한 상태로 보호하고 있다가, 지휘관이나 군부대의 재정책임관의 감독하에 체계적으로 약탈했고, 덕분에 약탈품의 품목이나 양에 관련된 정확한 기록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기록된 것중 가장 비쌀 것으로 판단되는 약탈품은 로마군이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후, 헤롯왕이 지은 신전을 약탈하면서 발견된 <성궤함>입니다.
참고로 <성궤함>이란 예언자 모세께서 하느님에게 받은 <십계명>이 적힌 석판을 모신 상자인데, 모세께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 있는 삽질을 보고 열받아 반으로 쪼개긴 했지만, 이것이 역사상 가장 비싼 물건임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인디아나 존스에 나온 바로 그 성궤함입죠 ^^)
참고로 체계적인 약탈시스템을 만든 이중에는 <징기스칸>도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오랜 전쟁을 하면서 가장 용감하게 적과 싸운 병사들은 약탈의 기회를 가지지 못해 언제나 가난하고, 뒤에서 별볼일 없는 활약을 한 친구들이 약탈품으로 배를 불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약탈로 인해 도망가는 적을 포위해 괴멸시키는 기회가 상실되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칸의 명령없이 동화 한냥이라도 빼돌린 자는 처형한다고 명령하고, 모든 약탈품을 체계적으로 모은 다음, 이를 공로의 순에 따라 공평히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징기스칸이 괜히 세계를 정복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입죠. ^ㅇ^
너무 재미있어서 단숨에 읽어버렸습니다. ^^

정말 군인들의 이런 탐욕은 전술&전략의 전개가 불가능할정도로 엄청나군요. 적어도 도시에 입성할때는 그 이전에 지휘관이 병사들에게 도시에 들어가서 약탈활동을 벌이지 못하도록 명령이라고 할수 있지 이렇게 전투도중에 발생하는 약탈에대해서는 어쩔도리가 없겠군요 ㅎㅎㅎ...

영화 '워털루'에서도 한 병사가 농가에서 새끼돼지를 자신의 군장에 숨긴것을 알아챈 웰링턴과 그 병사의 대화가 생각나는 글입니다.

"약탈범죄에 대가를 알고 있나?"

"지..진의 배급중지요?"

"사형이다!"

"장군님...제가...이 길잃은 돼지를....보..보호한건데요 ; , :"

"푸히히히힛....이 자를 하사로 진급시켜라!"
재미있는 글 넘흐넘흐 잘봤습니다.
일부로 성을 비워서 적들이 약탈에 정신 팔린 사이 역습하는 전략도 있다더군요.
그건 전략이 아니라 전술입니다. ^^;;....
좋은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