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09. 7. 26. 10:46


저는 논산 훈련소로 입대를 했었습니다.  훈련소에서의 여러가지 훈련 중 어떤 것이 가장 힘들었는가라고 하면, 사람마다 취향은 약간씩 다르겠지만, 그 답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육군 출신들이 다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행군이지요.  저같은 경우는 (다른 많은 분들도 그랬을 것 같은데) 걸어서 힘든 것보다도, 행군 중에 꼭 생기는 물집 때문에 정말 괴로왔습니다.  우리나라 군대의 군화 품질이 떨어져서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카투사였던 저는 한미 양국군의 군화 품질에 대해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증언할 수 있는데, 정말 최소한 1990년대 초반의 한국 육군 전투화 품질은 미군 것보다 훨씬 떨어졌습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미군 중 자원자들만 뽑아서 레인저(Ranger) 훈련을 받는 과정을 미군 잡지 (미군은 별게 다 있습니다)에서 보았는데, 장거리 행군을 하고 난 뒤에 찍어서 올린 걔들 발바닥 사진을 보니 정말 끔찍하더군요. (발바닥의 1/2이 물집)




(미군과 한국군이 공통으로 겪는 고통 - 행군 뒤 물집, 하계 작전시의 더위, 동계 작전시 추위.  그 밖의 대부분은 미군의 풍부한 예산으로 해결 가능)



그 미군 레인저 프로그램 참가자는 과연 몇 km 행군하고 나서 그런 물집이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발바닥에 지름 3cm 정도의 물집이 생겼을 때, 저는 32km를 걷고 난 뒤였습니다.  1시간에 4km 씩, 8시간 야간 행군을 했었지요.  부끄럽지만 그때 배낭 속에는 깔깔이 상의하고 담요 정도만 들어있었고, 사실 무거운 건 안들어있었어요.


진짜 전쟁을 하는 진짜 군인들(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상하네요... 저도 진짜 육군 병장 출신인데...)의 경우는 어땠을까요 ?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무엇보다도 그 행군 속도로 유명했습니다.  영국-오스트리아 등의 동맹군 병사들이 하루 16~20km 정도였던 것에 비해, 나폴레옹의 프랑스군 병사들은 기본적으로 24km를 넘었습니다.  이 속도는 사실 놀라운 속도는 아니었고, 고대 로마군단의 이동 속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폴레옹 때나 케사르 때나 1800년의 세월 차이가 있었을 뿐 이동은 사람의 다리로 하는 거였으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야, 이 책 재미있겠네요.  나중에 주문해서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그렇다면 영국군이나 오스트리아 군은 왜 그리 느렸을까요 ?  문제는 보급 마차였습니다.  19세기 초반의 열악한 진흙투성이의 유럽 도로망 때문에, 보급 마차가 하루 16~20km 밖에 이동을 못했던 것입니다.  1812년 러시아 원정의 경우 심지어 기병대가 보병대보다 더 진격 속도가 느렸던 적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해, 로마군은 그 유명한 로마군의 포장 도로를 따라 이동했으므로, 소달구지가 끄는 보급 마차도 병사들의 발걸음 속도에 맞출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보급을 과감히 생략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지요. 




(로마군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렇게 열심히 포장 도로를 닦았던 것이 아닙니다.  나폴레옹 시대 유럽 주요 도로는 저렇게 진흙구덩이인 경우가 많았지요.)



하지만, 로마 군단병이건 나폴레옹의 근위대이건, 하루 24km는 생각보다 다소 느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저같은 대한민국 육군 훈련병도 하루 32km를 걷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하루 32km 걸었다고 나폴레옹 근위대보다도 우수한 병사라고 우쭐할 수는 없습니다.  하루 32km는 우습게 걸었던 사례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에도 많았습니다.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에 상륙한 나폴레옹. "나의 사랑하는 병사들이여, 이제 니들 발바닥엔 물집 잘날 없으리라")



엘바 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이 프랑스 남해안의 구프-주앙(Golfe-Juan)에 상륙한 것이 1815년 3월 1일이었습니다. 이 첫날, 나폴레옹이 데리고 온 600명의 근위대 병사들은 무려 80km를 행군합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은 말에 탔겠지요.)  그리고 그레노블(Grenoble)시까지의 험준한 산길이 포함된 320km를 6일만에 주파합니다.  하루 50km가 넘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이 파리에 입성했던 것은 3월 19일이었는데, 이 기간 동안 그의 병사들은 하루 평균 48km를 행군했습니다. 


프랑스 근위대만 남자고 영국군에는 남자가 없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영국 남자도 한 행군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있습니다.  1809년 웰링턴 공작이 탈라베라 전투에서 악전고투할 때, 그를 돕기 위해 영국군 크로포드 장군이 3,000 명의 라이플 소총병을 이끌고 100km에 이르는 거리를 26시간 만에 주파한 사례가 있습니다.


이렇게 잘 걷는 병사들을 데리고, 왜 하루 24km 밖에 못 걸었을까요 ?  그 이유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소설의 한 장면에 설명됩니다.





Sharpe's Honour by Bernard Cornwell  (배경: 1813년 스페인) ---------------


"텐트라고 !" 샤프가 뱉어내듯 말했다.  "염병 지랄맞은 텐트라니 !"


"숙영을 위한 것입니다, 대위님."  패트릭 하퍼 중사는 표정없는 엄숙한 얼굴로 대꾸했다.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우쓰 에섹스 연대 병사들은 씨익 웃었다.


"빌어먹을 텐트 같으니라구."


"깨끗한 텐트입니다, 대위님.  질도 좋고 하얀 색입니다.  병사들이 향수병에 걸릴 때에 대비해서 텐트 주변에 꽃밭을 가꿀 수도 있습니다."


샤프는 캔버스 천으로 된 텐트 뭉치 하나를 발로 걷어찼다.  "누가 염병할 텐트 필요하댔어 ?"


"병사들이요, 대위님.  밤에 춥거나 젖으면 안되쟎습니까"  하퍼 중사의 거친 아일랜드 억양 속에는 고소해 죽겠다는 기분이 가득차 있었다.  "다음 번에는 침대가 지급될 것 같습니다, 대위님.  깨끗한 이불보와 우리를 재워줄 귀여운 여자애들까지 딸려서요.  아, 그리고 요강도요.  가장자리에 '신이시여 국왕을 보호하소서'를 새긴 것으로 말입니다."


샤프는 텐트 뭉치를 다시 한번 걷어찼다.  "이거 보급관에게 말해서 태워버릴거야."


"못 태울 겁니다, 대위님."


"왜 못태워 ?"


"서명하고 지급받은 것이거든요, 대위님.  분실 또는 파손되면 급여에서 공제됩니다, 대위님."

샤프는 천박해보이는 커다란 텐트 뭉치 옆에서 으르렁거렸다.  세상의 온갖 웃기고 쓸데없고 멍청한 보급품 중에서, 기마 근위대(Horse Guards, 병종이라기보다는 사령부에 가까운 부대입니다)가 텐트를 보내온 것이다 !  병사들은 언제나 텐트없이 노숙을 해왔다 !  샤프는 그의 머리카락이 땅에 얼어붙어 달라붙은 채로 아침에 일어났고, 옷은 흠뻑 젖은 상태로 깨어났지만, 한번도 텐트가 있었으면 했던 적은 없었다.  그는 보병이었다.  보병은 행군을, 그것도 빠른 행군을 해야 했는데, 텐트는 행군 속도를 떨어뜨릴 뿐이었다.  "저 빌어먹을 것들을 어떻게 옮기지 ?"

"노새요, 대위님.  텐트 노새가 있습니다.  2개 중대 당 1마리 씩입니다.  내일 지급받습니다, 대위님. 서명하고서요."

"예수님이 통곡하실 노릇이구만 !" (Jesus wept !  이렇게 직역하면 우스운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이거 쌍욕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텐트가 없으셔서 우셨나보지요, 대위님."


샤프는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웠다. 하지만 이 뜻하지 않게 사령부에서 도착한 텐트는 쓸데없는 문제거리를 만들어냈다.  대대 전체의 텐트를 움직이려면 노새가 5마리 필요했다.  노새 한마리는 200 파운드의 짐을 싣고, 거기에 추가로 자기가 먹을 6일치 사료 30 파운드를 더 실을 수 있었다.  작년 여름 작전처럼 행군을 한다면 사료가 부족해지니까 추가 사료를 싣기 위해 추가의 노새가 필요했는데, 그 추가된 노새도 먹어야 하니까 그 추가된 노새가 먹을 사료를 실어나를 노새가 또 필요했다.  샤프가 6주간의 행군을 한다면 900 파운드의 추가 사료가 필요했는데, 이 사료를 실은 노새만도 4~5 마리가 필요했고, 이 노새들이 6주간 먹을 사료만도 700 파운드가 필요했으므로 추가로 4마리의 노새가 필요했다.  이 추가된 4마리 노새도 또 사료를 먹어야 했으므로, 이 웃기지만 정확한 계산을 끝마치고나니 5마리의 텐트 수송용 노새를 6주간 먹여살리기 위해 추가로 14마리의 노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  그는 또 텐트를 걷어찼다.  "젠장, 패트릭 !  이거 완전히 웃기는 노릇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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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  논산 훈련소에서 저야 행군을 마치고 나면 막사(비록 거지같기는 했지만)로 들어가서 씻고 자면 되었지만, 로마군이나 나폴레옹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텐트를 치고 밥도 짓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종일 정말 지쳐 나가 떨어질 때까지 행군을 해서는 안되었고, 최소한 진지를 구축할 시간과 힘은 아껴둔 상태에서 행군을 마쳐야 했습니다.  게다가 위 소설 속에서 친절하게 계산해준 것처럼, 텐트를 치고 진지를 구축할 장비들을 실어나르려면 역시 노새나 말 같은 수송용 가축이 필요하고, 이들은 식량 수송마차처럼 행군 속도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자, 여러분이 등산을 하거나 하이킹을 하다가 이제 야영을 준비한다고 생각해보십시요.  뭐 폴을 박고 텐트를 치고 근처에서 물을 길어오고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여러분 2~3명이서 할 때의 이야기이고, 수천명, 수만명의 병사들이 한꺼번에, 그것도 2~3시간 안에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물은 어디서 떠오고, 땔나무는 어디서 구하고, 혹시 밤에 자는 도중에 적군이 쳐들어올 경우 어떻게 방어하는지 등등을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떤 장소에 진지를 구축할 것이지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건 까딱 잘못하면 작게는 수천명의 병사들을 고생시키는 일이 될 것이고, 크게는 전군의 몰살로 이어질 수 있는 중대한 결정입니다.




(이건 1803~1805년 사이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프랑스 불로뉴 지방에 대군단의 대형 캠프를 설치하고 병력을 집결시키던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입니다.  머스켓 볼이나 동전, 가방 버클이나 군복 단추 뿐만 아니라 캠프 구조물에 사용된 못도 발견됩니다.)



서양 애들과는 달리, 동양, 적어도 한중일 동북아 3국의 남자들은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읽으며 자랐기 때문에 이런 진지 구축의 중요성에 대해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처음으로 출사표를 내고 북벌에 나섰을 때, 결국 패배했던 원인이 바로 제갈공명의 수제자 마속의 적절치 못한 진지 구축 때문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이 그토록 신신당부했건만, 마속은 단기적 전술 상의 잇점만 생각하고 고지 위에 진지를 구축하는 바람에 병사들이 식수 부족으로 위나라 군대에게 패배를 당하게 되지요.  그 외에도, 춘추전국 시대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적군이 머물렀던 진지의 흔적을 보고 적세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든지, 적장이 얼마나 우수한 능력을 갖추었는지 판단한다는지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지요.  손자병법에서도 진지 구축시 위치 선정의 중요성에 대해 배산임수 등의 용어로서 누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 캠핑장 위치 잘못 잡았다고 목을 쳐 ?  읍참마속의 비극)



서양 것들이라고 손자병법의 오묘한 원리에 대해 모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 방면에서 선두주자가 바로 (또 다시!) 로마군이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진지 구축법을 castrametation이라고 부르는데, castra라는 라틴어 단어가 바로 로마군의 캠프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원래 로마군 규정에, 병사들은 하루의 행군을 마치고 나면 반드시 제대로 구축된 임시 요새로 퇴거해야 했습니다.  아, 로마 군단이 행군할 때는 그 앞에 항상 공병대가 먼저 가서 진지를 구축해놓느냐고요 ?  물론 아니지요.  갑옷과 방패, 온갖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하루의 고된 행군을 마치고나면 그때부터 곡괭이와 망태기를 들고 그날 밤에 잘 진지 구축에 나서야 했습니다.


로마군은 철두철미하게도, 단 하루를 묵을 진지조차도 철저하게 규정에 따라 지었습니다.  사실 진지를 구축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일단 1개 로마군단(약 1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한 넓은 평지가 있어야 했고, 또 근처에 물살이 빠른 하천이 있어야 했습니다. 땅은 습기찬 곳이어서는 안되었고, 또 비가 오더라도 물이 고이지 않도록 적절히 높은 곳이어야 했으며, 진지를 만들 목재를 베어낼 숲이 근처에 있어야 하되, 적병이 매복 공격을 할 수 없도록 숲이 너무 진지 가까이 붙어 있어도 안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적의 습격에 대해 손쉽게 방어할 수 있는 곳이어야 했습니다.


이런 곳이 가는 동네마다 24km 간격으로 다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습니다.  로마군은 열사의 페르시아 사막부터 진눈깨비 날리는 스코틀랜드 언덕들까지 다양한 환경에서 작전을 펼쳤으니까요.  그래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그런 장소를 구했는데, 보통은 호민관(tribune)이 본대보다 먼저 출발하여, 적절한 숙영지를 찾아내어 깃발로 표시를 해두었습니다.  또, 애초에 행군을 할 때 그런 적절한 숙영지가 있는 곳을 골라서 행군 루트를 짜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림 좋군요. 어차피 제 블로그 그림은 다 훔쳐오는 것이긴 하지만 정말 좋은 그림의 출처는 안 밝힐 수가 없네요. 출처는 http://legioneromana.altervista.org/eng/legione.html 입니다.)



기본적으로 진지의 구조는 로마군이 전투에 임할 때의 그 진열 그대로를 반영했습니다.  그 면적도 실제로 전투에서 1개 군단이 차지하는 면적보다 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지의 모양이 직사각형 모양이 되었습니다.  그 앞쪽에는 경장보병들(auxilaries, 로마군단병이 아닌 주로 외국 용병들로 구성된 궁수, 투석수, 기병 등등)이 진을 치고, 그 뒤인 진지 정중앙에는 사령관의 천막이 자리잡고, 그 뒤로 약 800여개에 이르는 군단병(legionaries)들의 텐트가 위치했습니다.  이는 혹시 야간에 공격을 받더라도, 병사들이 당황하지 않고 곧장 전투 태세를 갖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천막 배열조차도 매우 질서정연해서, 로마군들은 칠흙같이 어두운 밤중에 불을 밝히지 않아도 자기가 속한 분대(contubernium)의 천막으로 찾아들어갈 수 있다고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만약에 텐트를 칠 곳이 평평하지 않으면, 먼저 지반 공사를 해서 평평하게 만들어놓고 텐트를 쳤습니다.  대단한 정성이지요 ? 




(유대 전쟁 당시 유대인들의 전원 자살로 비극적 결말이 난 이스라엘 마사다 요새 근처의 고대 로마군의 진지터입니다.)



이렇게 잠잘 곳 뿐만 아니라, 진지 주변을 방어하기 위한 참호와 바리케이드(abatis라고 하지요) 등을 구축했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야영이 아니라 전쟁을 하러 나온 것이니, 언제 어디서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참호를 파고 거기서 파낸 흙으로는 방벽을 만들고, 주변 숲에서 베어낸 나무가지를 이용해 바리케이드 비슷한 목책을 만들었습니다.  이 목책은 굵은 통나무보다는 잔가지가 그대로 붙어있는 작은 나무가지를 이용해서, 잔가지들끼리 서로 얽히도록 구성했습니다.  그리스군이 만든 굵은 통나무로 된 목책은 전투시 적병들에 의해 쉽게 뽑히거나, 쉽게 그 사이로 적병들이 비집고 들어왔던 것에 비해, 로마군이 만든 잔가지 목책은 서로 얽혀있는 구조 때문에 쉽게 뽑히지도 않고 목책 사이로 적병들이 들어오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용 화장실도 만들었습니다.  이 공용 화장실이 또 예술인데, 사실 아무리 1~3일 정도 쓸 진지라고 해도, 1만여명의 응가를 받아낼 화장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프로젝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군은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근처 강에서 끌어들인 물을 이용한 수세식 화장실을 썼습니다.  사실 그래서 진지 근처에 '유속이 빠른 시냇물'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강으로부터 도랑을 파서 진지 내부로 물을 끌어들이고, 그 물이 처음에는 식수를 받는 곳, 그 다음으로 목욕장, 기타 작업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거쳐 진지 밖으로 나가도록 인공 수로를 만들었습니다.  대개의 시냇물은 수돗물처럼 유속이 빠르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 제대로 흐르려면 공용 화장실이 있는 곳은 다소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특히, 로마인들은 물의 오염이 전염병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식수로 쓰이는 물과 분뇨장에서 쓰이는 물이 철저히 분리되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강이 없는 곳에서는 우물을 팠는데, 이 경우에도 화장실과 식수를 퍼올리는 우물과의 거리에 신경을 썼습니다.




(Potasissa라는 곳에서 발견된 로마군 야영지의 화장실입니다.  저렇게 돌로 수로를 포장까지 한 것을 보면, 아무래도 하루짜리 캠프는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텐트는 요즘 것보다 더 고급이어서, 천으로 된 것이 아닌, 가죽으로 된 텐트와 나무로 된 폴대를 썼습니다.  이 텐트에는 보통 8명의 병사들이 함께 잤는데, 이들의 단위가 바로 contubernium입니다.  이 contubernium이라는 단어는 요즘 영어에는 없는 라틴어지요.  굳이 해석하면 분대 정도입니다.  이 contubernium이 10개 모이면 바로 centuria(백인대)가 됩니다.  그 지휘관이 바로 centurion(백인대장)입니다.  바로 성경에도 나오는 '백부장'이지요.  그러니까 백인대장 밑에 있는 병사들의 수는 사실 100명이 아니라 80여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텐트류는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 나를 수 없었기 때문에, 병사들의 다른 짐들과 함께 우마차로 날랐습니다.  그래서 로마군에게 군용 도로가 특히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런 대규모 공사를 매일 저녁마다 진행한다고 생각해보십시요.  그것도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어깨에 짊어지고 하루 종일 고된 행군을 마친 뒤에 말이지요.  무척 비효율적일 것 같지요 ?  하지만 로마 군단의 힘은 바로 이 진지 구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들은 행군 중에 매일 이런 작업을 해서 매우 익숙해졌으므로, 의외로 공사가 빨리 진행되어 2~3시간이면 완성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어떤 경우에라도, 전투에서 패배할 경우 이렇게 견고하게 만들어진 진지 안에 들어가서 며칠이고 버틸 수 있었으므로, 무척 안정적인 작전을 운용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의 작은 패배가 대참사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케사르의 갈리아 전기를 읽어보면, 로마군은 창이나 방패 못지 않게, 곡괭이와 망태기를 정말 많이 썼다는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알고보면 우리나라 육군의 '사격보다는 삽질' 전통도 고대 로마때부터 이어진 것입니다(?).




(갈리아 전기 최대 공방전인 알레시아 포위전의 구조도.  로마군단병의 눈물의 삽질이 눈에 선합니다.)



마케도니아 왕가의 친척 뻘인 일리리아의 왕 피루스가 이탈리아 원정을 왔다가 로마군을 보고, '저 야만인들도 진영만큼은 야만스럽지가 않구나'하고 감탄했다는데, 유럽인들은 그 로마군의 진지 구축법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벗어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진지 구축법은 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에, 일단 그 맥이 끊겼지만 옛 로마 기록을 공부한 학자들에 의해 끊기지 않고 계속 전해졌습니다. 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진지 구축법(castrametation)'이란 단어 자체가 로마 군단에서 나온 용어일 정도니까요.  나폴레옹 시대에도, 제가 위에서 기술한 로마군의 진지 구축법과 거의 유사한 진지 구축법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약간 모순점이 생깁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은 식량 수송차량을 과감히 포기한 덕분에 행군 속도가 남달랐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폴레옹군은 천막 수송용 차량은 어떻게 했다는 것일까요 ?  저 위 소설 속에 언급한대로 대대마다 천막 수송용 노새만 19마리를 끌고 다녔던 것일까요 ?  그럴리가 없지요.  나폴레옹처럼 기동력을 중시하는 장군에게 그런 노새가 있다면 탄약이나 식량을 싣고 다녔을 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나폴레옹과 케사르의 차이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나폴레옹은 텐트에 대해서 별로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실제로 나폴레옹은 병사들에게 텐트를 허용하지 않았고, 노숙을 하도록 했습니다.  노숙을 영어로는 bivouac (비부액이라고 읽습니다)이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 단어는 스위스 및 알자스 지방에서 생긴 독일어 계통의 단어로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서 영국 쪽으로 전해진 단어입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산 타시는 분 있다면 이런 말씀 하실 수 있겠습니다.  "어, 저거 혹시 비박이란 말 아니야 ?"  맞습니다.  산악인들 사이에서 비박, 비박하실 때의 그 비박이 바로 이 bivouac입니다.  나폴레옹은 텐트는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 병사들에게는 '비박'이면 충분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통 비박을 하게 되면 근처 농가에서 구한 짚단이나 나무 판자 등으로 임시 바람막이를 하고 모닥불을 피우게 되는데, 그것이 더 포근하다는 것이 나폴레옹의 주장이었습니다.  발을 모닥불 쪽으로 향한 채 누우면 더 따뜻하고, 모닥불로 인해서 습한 땅도 빨리 마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은 오직 읽고 쓰고 지도를 봐야 하는 고위 장교들만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나폴레옹의 bivouac 사랑은 끝이 없어서, 텐트의 온갖 단점을 욕하기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나무 그늘이 텐트보다도 햇빛을 가리기에 더 좋고, 아무리 보잘 것 없는 판자때기라도 비를 피하는데 텐트보다는 낫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아마 나폴레옹 자신은 그렇게 노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효용성은 고사하고, 야전에 나가면 그렇게 많은 병사들에게 일일이 돌아갈 나무 그늘이나 판자때기가 충분치 않다는 생각은 안 들었나 봅니다.) 




(병사들을 텐트도 없이 노숙시키고 지는 텐트치고 모닥불 피우고 온갖 X폼을 잡아 ?)



게다가 정보전 측면에서도 텐트는 좋지 않다고 했습니다.  적의 정찰병이 프랑스군 진지 근처에 와서 텐트 수를 세어감으로써 이쪽의 병력 수를 염탐한다는 것이었지요.  사실 개미처럼 꼬물거리며 돌아다니는 병사들의 수를 원거리에서 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에 비해서 텐트없이 bivouac을 하면, 적 정찰병이 세어갈 것은 모닥불 뿐인데, 그것으로는 대체 모닥불 하나를 몇 명의 병사가 공유하는지 알기도 쉽지 않고, 또 깜빡거리는 모닥불 숫자를 세는 것이 쉽지도 않을 뿐더러, 아침 저녁 때 모닥불에서 올라가는 연기는 안개와 구별하기가 어려워 적의 염탐을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꽤 맞는 말 같습니다.  가령 프랑스군이 하루 묵었다가 지나간 진지를 보면, 텐트를 몇개 쳤었는지 그 자국을 세어 봄으로써 병력의 숫자를 짐작하는 것이 쉽지만, 별로 질서 정연하지 않은 모닥불 흔적을 보고 적병의 숫자를 세는 것은 꽤 어려울 것 같거든요.

이렇게 온갖 이유를 들어가며 텐트를 포기한 덕분에, 나폴레옹군은 뛰어난 기동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군에게 텐트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장기간 숙영을 하는 경우에는 나폴레옹군도 텐트를 쳤습니다.  아무래도 (나폴레옹의 주장과는 달리) 노숙을 하는 것은 병사들의 건강과 컨디션 조절에 좋지 않았거든요.  게다가 bivouac를 하자면 꼭 짚단이나 나무 판자 등이 필요했는데, 병사들은 그런 것을 주변 농가나 마을에서 그야말로 약탈을 해서 구했습니다.  멀쩡한 집의 지붕이나 문짝을 뜯어가는 것이 예사였지요. 이렇게 1회용 잠자리를 만들기 위해 희생되는 주변 마을의 피해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라도 장기 숙영 때는 텐트 생활을 했습니다.  특히, 겨울 숙영지에서는 텐트가 필수였지요.




(이 목가적인 노숙 장면 뒤에는 저 바람막이 판자를 위해 집을 뜯긴 근처 주민의 눈물이 숨어있습니다.)



저 위 소설 속에 나오는 샤프 대위는 텐트 속에서 잔 적이 없다고 주장을 하지요 ?  실제로 다른 유럽 국가들도 프랑스군의 노숙하는 모습을 보고 텐트를 포기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 소설의 배경인 1813년 정도되면, 프랑스군이 누렸던 거의 모든 전술 상의 잇점은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미 다 보고 배운 뒤였거든요.  고대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신탁으로 전쟁을 즐겨하지 말라고 했었지요.  알고보면 그 이유가, 전쟁을 자주 하면 주변 국가들에게 훈련 경험을 쌓아주게 되어, 결국 스파르타의 군사적 우위가 깎인다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스파르타의 군사적 헤게모니도 그렇게 사라져갔고, 그건 나폴레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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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에서 비박이란 말이 나오길래 1박이나 외박할때 박인줄 알았는데 영어였군요....
하나 배워갑니다 ㅎㅎ;; 근데 겨울엔 아무래도 텐트가 나을듯 싶네요
아직도 비박을 한문으로 알고 계시는 산악인들...더러 있더군요..
언제나 잘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밀리터리 리뷰의 연재분도요.ㅎ
와.. 정말 잘봤습니다..제가 역사 중에서도 전쟁사를 좋아하는데 마땅하게 접할곳이 없어서 -_-

할수있으면 추천 10개라도 찍고 싶네요.
다음view 베스트에 올라간걸 보고 카페로 스크랩해가려는데 괜찮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초급장교한명은 일반병 100명보다 효율적입니다
그래 전군의 간부화를 외친 북한의 군사전략이 있는 이유입니다.
50명 일반병보다 1명의 초급장교 교육받은이가 훨 효율적이거던요
병사는 일반인에서 걍 착출하면 되지만
장교는 학습능력과 이를 통용 리더쉽을 발휘하며
다양한 경우 효율적 명령을 내리는 교육이 수련되고 검증된자만이 가능한 일이니
마치 수백억 전투기보다 빠일로트가 중요한이유죠
.
어케보면 군대는 영원히 민주화가 불가능한 곳이죠
상명하복이나 차별은 민주화의 적이니..(평등의 관점에서)
다만 패자의 변명이 통용안되는 세계이니
그 필연을 인정해야합니다
.
이를 좀더 노골적으로 표현되는게
군 함선입니다
그래 더큰 생사여탈권이 함장,선장에게 있죠
그의 잘못된 판단하나는 전체를 전멸시킬수 있으니
그래 군에서 장교 또는 대표자는 왕대접을 받아도 의미가 있는겁니다
반면 잘못된 지휘로 수많은 병사가 동사,동상으로 발목을 잘리게한 대대장이
사형에 처한경우도 한국군현대사의 가까운시기 기록이죠
.
다만 전범재판에서 일반병을 사형시키는 일은 드물죠
또 군대사회와 유사한 패자의 변명이 통용되지않는 기업사회에서
노동자를 헤드헌팅하는 경우는 전무합니다
.
나폴레옹은 최고급텐트에서 가장 쾌적한 생활을 하는게
대다수 병사를 살리는길입니다
단 쾌적한 환경에서 최고의 전략전술적 영감이 나온다는 전제에서............
.
무튼 신선한 지식 잘 접해봤습니다..꾸벅
서양사 공부 많이 했습니다. 아마도 전쟁사에 관심이 컷나 봅니다.
요즘 블로그에서 처음 보는 멋진 글입니다.
님같은 블로거들이 각광을 받을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요즘 너무나 정치이야기에 신물이 났기 때문입니다.
로마군단과 나폴레옹 군단을 비교하면서 재미있게 엮어가는 이야기솜씨에 반했습니다.
아주 젊은 사람이 구수하게 스토리 텔링 기법이 능숙합니다.
다음글을 기대해 봅니다. 즐겨찾기 해두고 화이팅 !
참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많은 자료를 엮어낸 흔적 인정합니다.
빠진것이 있네요 .로마인 이야기를 읽어보면 캐자르(시이저)는 비박을 많이 했습니다.
대낯에 나무그늘 아래서 배꼽을 들어내놓고 코를 골면서 자면 부하들이 혹여나 잠을 깰까
조용히 하는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던되요 . 나폴레옹보다 오히려 로마군단들이 비박을 많이 했습니다.
그건 한니발이야 이살람님아 ㅋㅋ
청석/ 그건 한니발 이야기고..
역시 전쟁사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흥미로운 이야기 잘 읽고 갑니다. 덕분에 자주 올 것 같습니다^^
중간에 로마군 진지 그림이 이상합니다. 우선 진형이야 그럴듯 하다 치더라도 보병용의 텐트가 1개 군단을 수용하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말씀대로라면 보병용의 텐트는 앞의 기병및 지휘관용 텐트를 제외하고 뒤에 쭈루룩 세워진 텐트일텐데,
개수가 14*10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텐트별로 8명이 숙식한다면 14*10*8해서 겨우 1120명을 수용합니다.

로마군단은 공정때는 동맹국 포함해서 1만명 남짓 공정후반및 제정시기에는 6000명을 유지했고, 그중 보병의 숫자는 5000명 남짓으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5000명을 수용하기에는 텐트의 숫자가 너무 적습니다. 어떻게 된것인가요?
그냥 개략적으로 그린거죠. 애초에 그림속 보병용 텐트 하나에 8명이 자는거 조차 불가능해 보이네요. 본문에도 800여개의 텐트라고 명시돼있구요
링크된 사이트의 원문을 보니까..

These provisional fields during the march, were temporary, built and destroyed daily

그걸 설마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철거하는 것도 본대가 했나요?

네, 철거도 본대가 다 했대요. 로마군 엄청 빡씨네요. 근데 이탈리아군은...?
철거 수준이 아니라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파괴를 했다고...
로마군 백인대가 80명인것은 To때문입니다. 우리가 군인일때 분대와 소대 To와 정확히 맞는 겨웅 별로 없죠. 휴가, 입원, 입창, 탈영, 파견 등이 이유로요. 우리가 쓰는 부대 단윈는 가까이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에게서 , 구스타프국왕느 네델란드의 마우리츠에게서 배워온것을 유럽의 군대가 근대화되어 결국 지금가지 내려온것인데 이것은 로마군단에서 배운것이죠
로마군은 신병모집을 자주하지 않아서 충원이 자주 되지 않았죠
나중에 유ㅜ대전쟁사를쓴(이름이 생각이..) 사람이 자기나라 침략한 로마군대를 세어보고는 그렇게 계사한것이죠. 원주둔지 경계병까지 계산해야 하는데 롬인이 아니니 그런것을 몰랐던거죠. 서류상 백인대는 100명이 맞습니다 .
(빤스지기)
요세푸스 말씀이군요. 사놓기만 하고 아직 읽지는 못했습니다. 그 말씀이 그럴 듯 하네요.
하드리아누스 성벽의 버려진 로마군기지 빈돌란다에서 발견된 편지에 상부에 보고하는 인원표가 남아있는데 총독관저에 백부장 1명 파견, 호위에 몇명 파견, 어디에 몇명 파견, 질환자 몇명 뭐이런 보고서가 발견되었죠. 그래서 실제 전투출정시 백부장이 공석이라서 몇 백인대와 합친 인원2배인 백인대도 존재했구요. 로마군의 인원충원은 필요시 공고하여 어느지역에서 단체로 모집하는데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의 베지티우스는 책에서 농촌지역의 키큰 10대를 선발하는것이 좋다고했죠. 그러나 실제는 당장 돈 필요한 무직자들이 지원해서 애가 있거나 직업이 있던 사람도 지원합니다.

실제로 66년 내전시 로마군끼리의 전투에서 한 군단병이 상대 군단병하나를 죽이고 보니 자기 어릴때 입대하여 다른 지역으로 배치된 친아버지였죠(출처 타키투스의 역사)

나중에 이들이 제대할때 동일시기 입대자들이 한꺼번에 제대하기 때문에 몽땅 끌어다 식민시에 정착시키는것이 가능한거죠
요세푸스는 일개군단병을 5000여명이라고 했지만 내용을 아는 제임스 기번은 그의 책 1권에서 6500여명으로 기록하죠.

유대전쟁에서 판노니아 군단들까지 불러와 전쟁했는데 판노니아 주둔지 기지 잔류병은 빠져있으니 그숫자가 나온거죠.
14년 토이토부르커 발트 전투에서 3개군단들 전체가 과거 시리아 총독이었던 권틸리우스 바루스의 지휘아래 주둔지 이동하러 갈때 완전 주둔지 이동이라 기지 밖의 병사들 가족, 장교들 가족, 상인, 들 까지 몽땅 데려가는통에 후세 역사가들이 이때 죽은 사람들이 3개군단 만칠천 병력이 아니라 2~3만이라고 추정하는 이유가 그런거죠.
강대국의 비밀 을 쓰신 배은숙님에게 이미 이런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어 연락을 주고받기도 했죠
좋은 댓글 고맙습니다.
흥미로운 내용이 많습니다.
1. 나폴레옹의 급속행군에서 텐트 생략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 무척 흥미롭습니다. 가죽으로 된 텐트였다니 이것을 생략하면 확실히 치중대 부담이 줄어들긴 하겠네요.

근데 제가 알기론 보급 간소화를 위해 프랑스 대육군이 현지 조달도 많이 했다고 알고 있는데 이것이 나폴레옹의 급속행군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궁금하네요.

2.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에선 1 중대는 160명, 그외 9개 중대는 80명이였다고 하고 빤스지기님 말씀대로 타 지역에서 조금씩 차출해서 투입한 경우라면 본래 주둔지 경비 병력을 최소한 남겨두고 떠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병력이 원래 군단 병력에서 상당수 축소 편제되었을 가능성도 많았을것 같습니다.

3. 제정당시 로마군이 꽤 안정적인 직업이였던것 만은 사실일듯 합니다. 17세 입대, 30년 복무후 37세 만기 제대, 로마 시민권 부여, 숙련공 임금 보장, 의식주 보장, 퇴직금 보장(이건 당대 오직 로마 군단병만 유일). 그러니 신장 166cm이상의 위너(당시 기준으로 보자면)들 중에서 시력검사, 체력 검사 통과후 라틴어 듣고 말하기 능력, 간단한 산수 능력까지 보고 선발했다하니 당시로서는 무산자라 해도 꽤 고급 인력들 중에서 선발했다고 생각됩니다...
전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면 고대부터 무던히 표현되는 그놈에 '현지 조달'이라는게, 말이 현지조달이지 그냥 약탈입니다.

약탈이라는게 꼭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되듯 탐관오리나 동탁같은 애들의 병사들이 집안에 들이닥쳐 화목한 식탁을 뒤엎고 여자들을 발로차면서 금붙이나 식량을 뺏드는게 아닙니다.

수만명 규모의 군대가 어디에 진주하면 인근 도시나 마을은 알아서 설설기게 되있고, 지도부. 시민대표와 조속한 협상(이라쓰고 일방적 요구,통보라 읽는다) 를 마친뒤 필요한 양식이나 말먹이건초 등을 공출하는것입니다.

제국주의 말기, 즉 나폴레옹시대 다른나라들은 대부분이 자기네들 유럽본국 본토안에 몇십km 간격으로 보급소나 이런걸 준비해두었는데, 당연히 당시 국력이나 산업력 한계상 많은 문제점이 따랐습니다. 충분히 확보도 못했구요.

그래서 다른나라들은 다들 '보급'문제 때문에 대규모, 원거리 원정을 제대로 못했었죠.

어렵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프랑스의 현지조달이 급속행군에 얼마나 기여했나, 너무 지저분하고 거창하게, 겸손하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지극히 간단합니다. 원래는 자국이나 타국의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위해서 100% 군대의 힘으로 빵빵하게 보급해줘야할것들을 현지에서 조달(약탈) 보충 방식을 취하면 행군속도에 당연히, 당연히 '어마어마하게' 도움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걸핏하면 근무 땡땡이치던 장교시절에 역사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등에 관심이 많았고 그 중 카이사르와 로마군에 주목합니다.

카이사르가 본토를 떠나 깊숙한 갈리아지방(훗날의 프랑스 전역) 에서 소위 그 '현지조달'이라는걸로 어떻게 군사들에게 필요한 물자공급을 해결해나가는지를 1800 년 쯤 뒤의 나폴레옹이 주목해서 읽었단 말이죠.

나폴레옹은 고대부터 있다가 유럽문명이 발달하고 좀 신사적 개념이 잡히면서 잠시 사라졌던 현지조달문화를 부활시켰습니다.

총알이나 각종 병기등, 민간에서 수급하기 어려운 꼭 필요한 군장비만 후방에서 자기노력으로 보급하고, 식량이나 건초처럼 꼭필요한건 맞는데 무겁기도 무겁고 부피도 커서 나르기 힘든것들은 현지조달로 엄청난 편의를 누릴 수 있는게 당연합니다.

단순히 100kg 짐을 옮겨야하는걸 근처 도시에서 물자징발로 2~30kg 만 해결하고 자체보급은 70%만 한다고해도 체감 편익은 어마어마하죠. 쉽게, 그리고 당연하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이런 설명을 듣기전엔 궁금해하시는 '급속행군에 얼마나 기여했느냐'가 해결이 안되니까 길게 설명해드렸습니다.
호민관(Tribune)이라 적은 부분은 대대장(Tribunus)입니다.

호민관의 정식 명칭은 Tribunus plebis이지요.

나시카님 블로그의 글은 제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가끔식 실수 하실수도 있지요 ㅎㅎ
좋은글 감사합니다 ^^
... 그런대 위에서 영하 30도 드립치시는 분. 출신이 전경이나 의경입니까? 아스팔트바닥에서 겨우 30분 자다가
일어 나니 옆에 있는 병아리(신병)친구가 입돌아 간거 본적이 있는 사람입니다만? 한겨울의 대리석바닥에서
자보신적 있나 몰라...,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인터넷에선 메너가 우선이라는 걸 몸소 보여주시는 실천성에
한표 던짐 아 그리고 글 잘보고 갑니다.
정말 대단하시군요. 누구신지 모르겠지만, 대단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