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1. 2. 27. 00:19


지난 편에서, 드디어 만토바 요새를 함락시킨 나폴레옹이 드디어 비엔나 침공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1979년 2월 만토바 함락 이후에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은 사실 비엔나 침공을 계획하기에는 너무 약했습니다.  증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5만명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대 오스트리아 항쟁의 주전장인 라인 강 방면에서 그토록 많은 지원을 받은 모로 장군의 공세가 결국은 실패로 돌아간 것에 비해, 별 지원도 받지 못한 나폴레옹이 거둔 승리는 너무나 빛이 나는 것이었지요.   마침내 파리 총재 정부는 전쟁 노력의 우선 순위를 재정립하게 됩니다.  즉, 베르나도트(Bernadotte)와 델마(Delmas) 장군의 사단들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에 배속시켜, 총 병력을 8만명 수준으로 대폭 증강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로써, 프랑스의 대 오스트리아 전선의 주된 전장은 라인강에서 북부 이탈리아로 바뀌게 됩니다.




(베르나도트 Jean-Baptiste-Jules Bernadotte.  앞으로 이 사람을 꽤 자주 보게 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술의 요체는 기동성에 있었지요.  나폴레옹은 이 증원 병력이 다 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폴레옹이 상대하게 된 오스트리아의 젊은 장군 카를 대공 또한 프리울리(Friuli, 북동부 이탈리아) 및 티롤 (Tyrol) 지역에 최소 5만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 병력들은 아직 주요 방어 거점에 집결되지 못한 상태였지요.   나폴레옹은 자신의 병력이 증원되기를 기다리다가는, 적에게 병력을 모을 시간을 주게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당장 가용한 병력 6만명 만으로 즉각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의 공격 계획은 전에 자신을 공격했던 알빈치 및 뷔름저의 것과 겉보기로는 유사했습니다.  즉, 6만명을 한 곳에 집중하여 진격시키지 않고, 2만명은 주베르(Joubert)의 지휘 하에 티롤 지방으로 진격하고, 4만명은 자신의 지휘 하에 프리울리로 진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렇게 병력은 나눈 목적은 알빈치와는 달랐습니다.  알빈치 및 뷔름저의 공격이 2방향으로 나뉜 것은 한쪽의 보조 공격으로 적의 집중력을 떨어뜨린 뒤, 진짜 주력 부대를 이용하여 적을 박살낸다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주베르에게 2만의 병력으로 티롤을 상대하게 한 것은, 방어적 목적이 더 켰습니다.  즉, 프랑스군이 동쪽, 그러니까 프리울리 지역으로 쳐들어간 사이, 티롤 지역의 오스트리아군이 텅빈 베로나 지역을 점령해버리는 곤란한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정말 티롤 지역에서 강력한 오스트리아군이 밀고 내려온다면, 주베르가 전투와 후퇴를 병행하면서 조금씩 후퇴하는 사이, 나폴레옹이 즉각 되돌아와서 트렌트 인근에서 오히려 오스트리아군의 후미를 치겠다는 의도였지요.  이렇게, 나폴레옹은 '전진하기 전에 후퇴로를 확보'한다는 병법의 기초에 충실한 작전 계획을 짰습니다. 

비엔나로 향하는 나폴레옹의 준비는 만토바 요새 함락 이후 약 3주가 지난 2월 말에 시작되었습니다.  마세나와 세루리에, 귀유, 베르나도트의 사단들이 브렌타(Brenta) 강을 건넌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브렌타 강을 수비하던 오스트리아군의 빈약한 수비대는 곧 프라몰라노(Primolano)로 밀려났으나, 여기도 3월 1일에 함락됩니다.   여기서 눈이 녹기를 기다리며 10일을 기다린 나폴레옹은 3월 10일 마침내 오스트리아 원정을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그야말로 전격전... 알고 보면 비엔나가 그리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폴레옹의 공격은 무척 순조로운 편이었습니다.  그 동안 만토바 요새 구원에 병력을 쏟아부었다 다 날린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제 병력이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3월 16일, 귀유와 베르나도트의 사단은 포병대의 강력한 엄호 사격 속에 타글리아멘토(Tagliamento)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 군을 공격했고, 오스트리아군은 500명의 포로와 6문의 대포를 내주고 우디네까지 밀려납니다.  이로써 오스트리아군의 1차 방어선은 맥없이 무너집니다.

타르비스(Tarvis) 전투에서도 마세나와 나폴레옹의 협격에 걸린 류시냥(Lusignan)은 포위를 피해 산 속으로 도주했으나, 5천명의 포로와 32문의 대포를 남겨두고 가야 했습니다.  또한 베르나도트 또한 동쪽으로 진격하면서 이탈리아 동쪽 끝 도시 트리에스테(Trieste)를 점령, 그곳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막대한 규모의 무기고를 손에 넣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의 주력 공격인 동쪽 방면 뿐만 아니라, 보조 공격 역할이었던 북쪽의 주베르조차도 연전연승하며 티롤을 침공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대로 무너져 내리는 듯 했습니다.

사실 카를 대공은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설 충분한 병력을 아직 모으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각지에 흩어진 병력을 이용하여 한편으로는 싸우면서 조금씩 후퇴하는 전법을 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카를 대공의 대응은 나름 효과가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본토 깊숙히 전진하는 프랑스군의 측면에 어떤 적군이 알프스 산맥 계속 속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나폴레옹은 전진할 때마다 요소요소에 프랑스군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비 병력을 조금씩 남겨 두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방어거점인 클라겐푸르트(Klagenfurt)를 3월 29일에 별 저항도 받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만, 거기서부터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연락선 보호를 위한 방어 병력을 남겨두다 보니, 연전연승하며 전투 사상자도 별로 없었지만 어쨌거나 병력이 부족해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여기서는 다소 모험을 감행합니다.  즉, 작년 이탈리아 북부에서 자신에게 도전해오던 오스트리아 장군들의 패착을 되풀이하지 않고 병력을 집중하기 위해, 아예 오스트리아 침공 본거지를 클라겐푸르트에 세운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각지에 흩어졌던 부하들의 병력을 클라겐푸르트로 모으고, 비엔나 침공을 준비했습니다.  소위 말하는 '게이지를 채웠'지요.



(이 콤보 게이지만 다 채우면...!)



하지만 나폴레옹이 아무리 기다려도, 이상하게 게이지가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나폴레옹 본진보다는 저 멀리 북쪽, 라인 강 방면의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 장군에게 있었습니다.  아무리 힘이 빠졌다고 해도,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타이틀을 고스톱으로 딴 것이 아닌지라, 합스부르크 왕가는 강력한 적수였고 웅후한 무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5만 병력 정도에 무너질 오스트리아가 아니었지요.  결국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 뿐만 아니라, 모로의 라인 방면군도 함께 움직이지 않는다면, 비엔나 공략은 어려웠습니다.  그게 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로는 원래 변호사 아버지가 법률가로 키우려고 법대를 보냈으나, 법보다는 주먹을 배워 학생들의 리더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만 보면 마치 모로가 나폴레옹의 성공을 시기하여 훼방을 놓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실상은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지난 나폴레옹의 교과서 - 리볼리 전투 편에서 언급했듯이, 카를 대공에게 패하여 다시 라인 강 서쪽으로 후퇴해야 했던 프랑스 라인 방면군은, 자금 및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모로도 다시 공세를 펼치려 노력하는 편이었습니다만, 사실 라인 방면군과 이탈리아 방면군의 공조를 깨뜨린 것은 나폴레옹이었지요.  모로의 준비가 끝나기도 전에, 실은 나폴레옹 자신의 준비도 완료되기 전에 나폴레옹은 공세를 서둘러 시작했으니까요.

아무튼 나폴레옹의 전격전은 클라겐푸르트에서 일단 정지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나폴레옹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3월 31일 카를 대공에게 휴전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모로에게 라인 방면군을 움직일 시간을 벌어주자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약하게 보이면 될 일도 안되는 것이 국제 외교인지라, 그동안 채워놓았던 게이지를 이용해서, 좀 무리를 하여 다시 한번 크게 진격을 했습니다.  4월 7일, 마침내 나폴레옹은 클라겐푸르트와 비엔나의 중간 지점인 레오벤(Leoben)을 점령합니다.  그 인근의 젬머링(Semmering) 고개는 해발 1,000m 정도의 높이였는데, 이 곳에 올라선 프랑스군 선발대의 눈에 저 멀리 약 120km 떨어진 비엔나의 탑과 돔 지붕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의 거리였습니다.




(아름다운 젬머링 고개에는, 역시 아니나다를까 지금은 멋진 스키장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카를 대공도 5일간의 휴전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 몰린 것은 오스트리아 측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확실히 후방과의 연락선을 지킬 병력까지 다 빼내어 이렇게 적진 깊숙이 들어온 것은 잘한 일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주베르가 휩쓸었던 티롤 지방이나, 트리에스테를 점령했던 베르나도트의 병력이 점령지를 다 버리고 클라겐푸르트로 진격하자, 뒤에 남은 티롤과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프랑스군의 뒤통수를 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쌍방이 다 다급한 처지가 되자, 이야기가 서로 잘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양측은 4월 13일, 휴전 기간을 다시 5일 연장하는데 동의했습니다. 

마음이 급했던 나폴레옹은 파리 총재 정부가 보낸 전권 대사 클라르크(Clarke) 장군이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제 맘대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종전 조약문을 4월 16일 오스트리아 측에 제시할 정도로 사정이 안 좋았습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에서는 나폴레옹이 제시한 조건에 움찔하며 망설였습니다.  이제 2일 밖에 남지 않은 휴전 기간이 끝날때까지 오스트리아가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폴레옹은 비엔나로 진격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퇴하기도 아쉬운, 어정쩡한 처지에 빠지게 되는 셈이었습니다. 

하지만 풍운아 나폴레옹의 트럼프 판 마지막에 돌려진 카드패는 역시 나폴레옹 편이었습니다.  모로와 오슈(Hoche)가 지휘하는 라인 방면군이 라인 강을 건널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도착하자, 휴전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4월 17일 마침내 그들이 두손을 든 것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고스(Goss)에 있는 베네딕트파 수녀원에서 나폴레옹과 회담을 하여 벨기에 및 네덜란드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나폴레옹의 철수를 약속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4월 17일 레오벤(Leoben) 평화 조약이었습니다.



(1797년 4월 7일, 레오벤 근처에서 오스트리아 황제의 사절을 만나는 보나파르트, Hippolyte Lecomte의 그림입니다.)



이 조약은 어디까지나 사전 협상의 시작이었고, 실제로 제1차 대불 동맹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캄포 포르미오(Campo Formio) 조약이 서명된 것은 무려 6개월 뒤인 10월 17일이었습니다.  평화의 조건은 대략 이랬습니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로부터 얻는 것은 벨기에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 그리고 코르푸(Corfu)를 포함한 이오니아 해의 몇몇 섬들이었습니다.  또한 라인 강변 좌안까지는 프랑스의 영토임이 확정되었고, 나폴레옹이 롬바르디아의 밀라노(Milano), 볼로냐(Bologna), 모데나(Modena)를 묶어 창시한 프랑스의 위성 국가 시스알파인(Cisalpine) 공화국 및 기존 제노바 공화국의 영토를 재편한 리구리아(Liguria) 공화국도 오스트리아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프리울리(Friouli) 지역을 되돌려 받고, 또 베네치아 공화국의 잔존 영토와 그에 딸린 이스트리아(Istria), 달마티아(Dalmatia)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스트리아는 이탈리아 동쪽에 붙은 작은 반도입니다.  지금은 크로아티아 땅이지요.)




(게다가 이스트리아는 보시다시피 매우 아름다운 도시와 풍경, 알맞은 기후 때문에, 최근에 미국인들에게 '은퇴 후 살기 좋은 해외 명소'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달마티아는 지금의 크로아티아 남쪽 해안 지방을 뜻합니다.)



(예, 달마시안이라는 개는 바로 이 달마티아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결국 이미 프랑스가 점령한 지역 중에서 베네치아 공화국 및 프리울리 지방만 오스트리아가 되돌려 받는 대신, 기존에 프랑스가 점령한 곳은 다 인정해주는 셈이 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뼈아픈 패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도 그렇게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라인 강변 좌안이나 벨기에 지방은, 어차피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공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프랑스의 점령 하에 있던 지방이었습니다.  또, 오스트리아는 이번 조약을 계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완전히 병합할 수 있었습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VERONA라고 표시된 빗살무늬 부분이 다 베네치아 공화국 소속이었으나, 나폴레옹 직전에는 붉은색 부분들만 실질적으로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그 동안 뷔름저 및 알빈치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베로나 및 바사노 등의 도시는, 사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였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전성기였던 15세기에는 3,300 여척의 갤리선을 보유할 정도로 강력하여,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아드리아 해는 물론 발칸 반도와 터키 사이의 이오니아 해 여기저기에 많은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와 맞짱을 뜰 수 있을 정도였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피에드몽을 침공하던 1796년, 이미 베네치아는 과거의 영화를 잃고 갤리선 4척에 갤리엇(galliot)선 7척만을 거느린, 남보기 부끄러운 상태였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과거 아시아와 유럽 사이의 무역이 지중해를 거쳐 이루어질 때는 좋았으나, 포르투갈에 의해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가는 무역로가 개척된 이후로는,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영국이 아시아-유럽 무역의 이익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군대도 없지요.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희망봉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 이미 베네치아 공화국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위 그림이, 아래 그림으로 바뀌면서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운명도 바뀌게 됩니다.)




레오벤 평화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 일단락을 찍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관광이나 할 리는 없었습니다. 그는 곧 베네치아 공화국을 압박했고, 캄포 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되기 한참 전인 5월 12일, 나폴레옹에게 포위된 베네치아는 무조건 항복이라는 수치를 당합니다.  원래 베네치아 공화국의 수장은 도제(Doge)라고 불리지요.  당시 도제였던 루도비코 마닌(Ludovico Manin)은 베네치아의 마지막 도제로 기록되었고, 베네치아는 프랑스의 군사 지사의 지배를 받는 일개 지역구가 되어 버립니다.  나폴레옹이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 서명했던 것도 바로 이 마닌의 기존 별장에서였습니다.  캄포 포르미오 조약에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에게 되돌려 준 것은 바로 이 베네치아 공화국이었습니다.  그나마 아디제(Adige) 강 서쪽은 프랑스의 위성국가 시스알파인 공화국에 양보해야 했지요.  오스트리아 손에 들어온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제 독립 공화국이 아닌,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개 지역이 되어 버리는 운명을 겪습니다.




(나폴레옹과 그의 이탈리아 방면군이 오랜기간 본거지로 삼았던 베로나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일부로서 오스트리아에게 양도됩니다.)



그런데, 이 레오벤 협정 이후 캄포 포르미오 조약 때까지의 6개월이라는 시간은, 단순히 평화조약 조건을 흥정하는데 걸린 시간치고는 너무나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  협상 과정을 보면 오스트리아가 협상을 질질 끄는 편이었고, 반면에 나폴레옹은 협상을 빨리 끝내려고 노력하는 편이었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전권 대사들은 정말 말도 안되는 꼬투리를 잡으며 시간을 끌었습니다.  가령 5월에 협상을 진행했던 오스트리아 측의 갈로(Gallo) 후작은 모든 문서에서, 자신을 지칭할 때는 "마르티우스 마스트릴리 각하, 나폴리의 명문이자 귀족, 갈로 후작, 성 야누아리우스 왕립 기사단의 기사, 두 시실리 왕국의 국왕 전하를 모시는 의전관이자 비엔나 궁정에서 전하를 대표하는 대사'라는 긴 호칭을 일일이 다 쓰도록 고집했습니다.  또 캄포 포르미오 조약 때 오스트리아를 대표했던 루드비히 폰 코벤츨(Ludwig von Cobenzl) 백작은 파리 총재 정부의 문서가 전통적인 양피지가 아닌 그냥 서민적인 종이에 씌여 있는다는 이유로 서명을 거부했습니다.




(폰 코벤츨이 트집잡은 것은 양피지 뿐만 아니라, 저 당시 문서를 밀봉하는 저 붉은 밀랍의 크기가 품위없이 너무 작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  그 이유는 프랑스 내부에 있었습니다.  왕당파들의 쿠데타 음모가 파리 내부에서 진행 중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내 왕당파를 은밀하게 지원하던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혹시 그 쿠데타가 성공하면 오스트리아의 협상 위치가 대번에 상승하므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 비해, 나폴레옹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 향상을 위해 빨리 조약 마무리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이 시기에, 모로 장군의 군대는 언제든 라인 강을 건너 오스트리아를 들이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만에 하나, 오스트리아와의 평화 협상이 실패로 끝난다면, 이 긴 전쟁의 영웅은 자신이 아닌 모로가 될 확률이 컸습니다.  이 왕당파들의 음모는 결국 발각되어, 피슈그뤼(Pichegru) 장군과 총재 중 카르노 (Lazare Carnot) 및 바르텔레미(Francois Barthelemy)를 축출하는 것으로 대략 마무리되었습니다. 



(피슈그뤼는 이때 체포되어 프랑스령 기아나로 귀양을 갔는데, 다음해인 1798년 영국으로 탈출합니다.  나중에 프랑스로 잠입하여 올빼미당 카두달과 함께 나폴레옹 암살 작전을 꾸미다가 다시 체포되어 감옥 안에서 의문의 시체로 발견됩니다...)



이 캄포 포르미오는 프랑스와 나폴레옹, 그리고 오스트리아 모두에게 나름 큰 의미를 주었습니다.  프랑스는 드디어 제1차 (그때 당시는 이것이 제5차까지 갈 줄은 몰랐지요) 대불 동맹 전쟁을 끝내게 되어,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일개 군인에서, 공화국을 마음대로 만들고 부수는 정치가의 역할까지 하게 되었고, 특히 쟁쟁한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캄포 포르미오에서 합스부르크의 굴복을 받아냄으로써, 일약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올랐습니다.  이번에는 (앞으로도 반복되겠지만) 나폴레옹에게 쓴 맛을 본 오스트리아도 모든 것을 잃지는 않았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를 합병함으로써, 북동부 이탈리아의 한귀퉁이에 발을 디딘 상태로 전쟁을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즉, 언제든 다시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 다시 한판 붙을 수 있는 발판은 남겨둔 셈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대표들과 캄포 포르미오 조약을 협의 중인 나폴레옹...  그림 왼쪽 하단에 뭔가 깨진 도자기 같은 것이 널려 있는데, 뭔가 그림에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그에 대한 설명은 못 찾겠습니다... 아쉽군요.)



이 평화는 오래 가지 못합니다.  나폴레옹이 뜬급없이 이집트를 정복하겠다고 해외 출장을 간 사이, 결국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와 손잡고 다시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하게 됩니다.  어쨌든 FC 나폴레옹은 빛나는 우승컵을 받아들고 1796~1797 시즌의 이탈리아 대회를 영광스럽게 마무리합니다. 

댓글수 0에 읽는 짜릿함! ^^
이렇게 이탈리아 전역이 끝나는군요. 만화 진정남 나폴레옹에서 감이 잘 안오던 내용이 명확해지네요.
천천히라도 좋으니 앞으로 이집트 전역을 비롯해서 다른 전역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간, 간발의 차이였습니다. ^ ^
시오노 나나미씨가 쓴 여러 작품 중 로마인 이야기는 좀 편파적인 느낌이 많아서 추천하기 뭐하지만, 베네치아 이야기는 정말 재밌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그 내용의 마지막이 바로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점령하는 내용이라서, nasica님이 쓰신 내용이외의 내용도 많이 나오므로 참조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베네치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중앙광장에 해당하는 산마르코 광장에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산마르코 광장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말했다고 하네요. 덕분에 현재의 베네치아 시민들은 나폴레옹은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베네치아 관광홍보 문구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 ^
아 ㅠㅠ 이제 Nasica님 께서 쓴 글을 보는 마지막 기회가 되는군요 ㅠ
아아 앞으로의 나폴레옹 행보가 궁금해지는군요 ㅋㅋ

군대가시는분 너무 슬퍼하실거 없습니다. 전 군생활 2년동안 매주 nasica님 글을 읽고 다녔거든요.

사지방은 할수있는게 인터넷 밖에 없답니다...
측근들이 그냥 아예 이탈리아에서 눌러앉아서 살생격없나고 권유했다던데요 ㅋ
저 그림은 황제 특사인 Louis de Cobentzel 백작 앞에서 나폴레옹이 도자기 화병을 깨는 장면을 묘사한거 같습니다. 오스트리아의 협상 끌기 전략을 알고 있던 나폴레옹이 특사의 방에 들어가서 화병을 들고 "2달 안에 나는 오스트리아를 이렇게 산산조각 낼 것이다"고 하며 대사 앞에 도자기를 던져서 박살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는 나폴레옹을 백작이 쫓아갔다고 하지요. 이 일화는 프랑스 본토에 대한 나폴레옹의 정보 조작 같기는 합니다만...저런 그림이 그려질 정도로 인기 있는 일화였나봐요.
오, 그런 이야기가... 고맙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 고생하셧습니다.
재밌게 잘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에로거북이... 아뒤가 참...
베르나도트 얘기 나와서 하는말인데.. 나시카님 스웨덴 국왕은 현 베르나도트 직계 후손으로 알고있거든요. 나폴레옹 가

는 그냥 단순한 평민?? 인가요? 조카가 다시 쿠데타 황제 된건 아는데 그 후손들은 뭐하는지 궁금하네요;; 언제 이것도

기획하실 생각없으신지;;
현재 보나파르트 가 수장은 나폴레옹의 막내 남동생인 제롬 보나파르트의 후손이고 얼마전에 프랑스에서 지역구 선거에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나폴레옹1세의 유일한 아들인 로마왕(나폴레옹2세)은 나폴레옹1세가 죽고 10년만에 21살로 요절하면서 나폴레옹1세의 직계후손은 끊어졌고...나폴레옹의 혼외자식들이 있지만 혼외라 정식 보나파르트 성은 쓰지못하였죠. 나머지 형제들(조제프,뤼시앵)의 후손도 있는걸로 아는데 자세히는 모르겠군요..아는대로만 답해드립니다...정확한건 Nasica님이 조만간 연재해드리지않을까요?ㅎㅎ;;
어허헣헣 나폴레옹의 원쑤 1호 등장이오...
위에서 2째줄 """1979년""" 이것 잘못된 거죠?
제가 1971년에 태어낫거든요....ㅎㅎ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월요일날의 청량제 같은 글...
오늘도 나이스....
어익후... 그렇군요.
자세한 그림 설명 감사합니다. 지도에 표기를 적극적으로 해주셔서 이해하기가 쉽네요.
사족으로 베네치아의 몰락은 포르투갈 영국등의 아시아 항로 직항 개설 때문이 아니라, 터키에 의한 지중해 공략과 네덜란드의 아시아 향료제도(인도네시아 등등)의 식민화가 더 유력하다고 시오노 나나미의 베네치아 이야기에서는 주장합니다. 뭐 약간의 차이겠지만요.
시오노가 워낙 베네치아 빠라....
마지막에는 나폴레옹에게 베네치아가 저항 가능했다는 식으로 쓴 걸 보고 좀 어처구니 없었습니다.
특히 전열함 시대에 겔리선 많다는 걸로 이런 소리를 하더군요.
솔직히 시오노 책 읽으면 로마나 베네치아나 언제 이렇게 약해진거야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쇠퇴국면에도 찬양만 하다가 정말 쇠퇴국면에서 겨우 약화되고 있다라고 만 언급하니...

그런데 요즘 느낌은 화폐 제도가 바뀐 것도 크지 않을까 합니다. 예전에 북이탈리아 중심의 금융이 스페인 중심으로 넘어 갔을 때 부터 뭔가 베네치아가 망해 가기 시작했죠. 특히 신대륙의 은이...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초반부만 약간 읽어서 뭐라 말씀드리기가... 확실한 것은 희망봉 항로를 개척하지 못했다면 네덜란드가 향료제도에 손을 댈 수는 없었을 겁니다.
새로운 글 감사합니다 꾸벅
아 진짜사나이 라살옹 이야기좀 많이 해주세요 ㅎㅎ
오오옷 오옷 너무 재밌어요 ㅎㅎ
근데요 궁금한게 있는데요. 옛날에 전쟁할 때 시끄럽고 난장판이잖아요. 근데 지휘를 어띃게해여? 후퇴라고 하면 후퇴라는 말이 들리긴 하나요? 마이크도 없이 만명을 어띃게 지휘하는거죠 도대체?
깃발과 고수의 북소리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특히 고수의 북소리는 저주파라서 어지간한 소음 속에서도 들린다고 하더군요. 북을 칠 형편이 안되는 기병대에서는 트럼펫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뭘 쓰더라도 제대로 된 지휘는 어려웠겠지요.
물론 우왕우왕님 의문처럼, 우리나라 사극에서 최수종이 피먼지 뒤집어쓰면서 적 병사 배어넘기고, 동시에 고함 한번으로 일사분란한 지휘까지 하는건 개허구입니다.

지휘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군편제와 전령이었습니다. 그 다음 깃발, 북소리, 각종 악기가 중요했죠. 뿔나팔 등 말입니다.

간단합니다. 총사령관은 일반적으로 절대로 전방에 나가지 않으면서, 가능한 가까운 고지대의 전망좋은 곳에서 전장을 내려다봅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망원경이 발명된 시대라서, 서양화를 보면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나폴레옹의 그림이 많죠.

총사령관은 막사에있든, 아님 이런식으로 야전에 있든, 어쨌든 '지휘'에 모든감각을 곤두세웁니다.

그러면 전화, 무전기가 없던 시절이니까 말탄 전령 수십명이 발바닥에 불이나도록 왔다갔다 합니다.

몇군단이 어디서 어디로 진격했다느니, 현재 몇군단이 어디에서 무슨 상황에 처해있다느니, 누가 누구를 물리쳤다느니 이런것 말입니다.

총사령관은 그런걸 듣는겁니다. 그리고 가까운 후방에 준비해둔 예비대를 급박한 전선을 향해 구원군으로, 또는 결정타를 날리기위한 마무리로 투입하는겁니다.

그게 다 입니다.

군대에 장교가 왜 있겠습니까? 보병들 2~30명 위에 일부러 벼슬자리 하나 만들어 둘려고?
또는 몇백명 대대급 지휘관 하나 그냥 폼으로?

그게 아닙니다. 장교가 있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병사 30명, 또는 500명 600명을 '사람 한명'으로 만들기 위해서 장교가 있는겁니다.

그거 말고는 아무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상급지휘부에서 명령이 하달되면, 장교가 병사들을 이끌고 지휘부가 원하는 지점으로 이동하거나 공격하거나 퇴각하는것. 그것이 바로 장교의 존재이유 전부입니다.

병사 하나하나한테 전령들이 뛰어다니면서 '얘들아 이리와 이리와! 저쪽으로 저쪽으로!' 할 순 없잖습니까.
장교하나한테 지휘부의 명령을 전달해주면 단숨에 수십명, 수백명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죠.

군대의 계급이라는것도 그래서 있는것입니다. 가능한 수천명, 수만명의 남자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서 있는거죠.

군대를 하나의 생물체로 굴리기위한 관료제도를 '군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근,현대적 개념의 군편제의 어머니가 바로 로마군단입니다.

80명으로 이루어진 '100인대' , 그리고 그 100인대가 6개 모인 '대대' 보통 5~600명, 그리고 이 대대가 10개 모인 '군단, 6000명' 이 있었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시대에는 거의 현대 군체계에 가깝게 굉장히 소규모까지 부대가 쪼개집니다.

어쨌든 우왕우왕님이 원하시는 '일사불란한 지휘'란 군편제에서 나오는겁니다.

거대하거나 화려한깃발은 전장에 흩어진 주력군단이나, 장군들의 상태에 대해서 사령관이나 지휘관들이 쉽게 알아보기 위해 생긴것이구요. 유럽제국주의 말기에 대영제국의 레드코트나 프랑스제국의 퓨질리어 등, 군복이 화려하고 눈에띄게 변화된것도 바로 이 지휘의 편이 때문이었습니다.

기관총이 발명되고 집단보병은 작살이 나기 시작하면서 은폐나 엄폐의 개념과, 주변 자연에 동화되는 오늘날의 어둡고 칙칙한 얼룩군복들이 생겼습니다.
프랑스혁명기랑 나폴레옹시대의 유럽에 관심이 많아서 자주 들러서 보는데 재밌습니다....항상 연재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FC나폴레옹에서 뿜었네요 ㅋㅋㅋㅋ
이탈리아 원정 시리즈는 정말 명작이었습니다. 픽션을 재치있게 엮어내신 것도 그렇고, 첨부한 도표와 시각 자료,발췌와 인용된 자료들도 놀랍습니다. 많은 분들이 너무 재미있고 환상적인 글이였다고 입에 침이 마르고 혀가 타도록 칭송해 마지 않을 듯 합니다. 괜찮으시면 앞으로 마렝고 전투,울룸과 아우스터리츠 전투, 예나와 아우어스테트,아일라우 전투,바그람 전투등 나폴레옹의 주요 전투도 연재해 주신다면 정말 좋겠네요. 늘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나시카 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쓰신 글들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오래 전 쓰신 포스트라서 댓글을 읽으실지는 모르겠지만 도자기 관련해서는 pbs 다큐멘터리 napoleon을 보면 나옵니다. 상당히 고급인 도자기로 된 티세트를 나폴레옹이 박살내버렸다고 합니다. 깨버리면서 이게 오스트리아에 벌어질 일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미친사람 같았다고 하네요ㅎㅎ 유투브에 올라와 있는 다큐멘터리라서 링크 첨부합니다. https://youtu.be/T-DYqs9itbY?t=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