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4. 1. 5. 18:42

지난 편에서 여러분은 프로이센이 자랑하는 정예 병력 전체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게, 그것도 단 하루 동안에 완전히 궤멸되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신 여러분은 프로이센 군의 패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  그저 나폴레옹의 천재성에 프로이센 군 전체가 유린된 것이었을까요 ?  아니면 병력 수 자체에 있어서 너무 차이가 컸을까요 ?

 

일단 나폴레옹의 기본 전략이 훌륭했던 것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사실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폴레옹은 큰 오점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헨로헤의 부대를 프로이센 군 본진으로 오해하여, 하마터면 다부의 제3 군단을 사자 아가리 속에 밀어 넣을 뻔 했으니까요.  그 사자 아가리를 완력으로 부러뜨리고 사자를 잡은 것은 순수하게 다부와 제3 군단의 능력이었습니다.  또 전체 병력 수에 있어서도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 군에 비해 적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군의 병력이 2배 가까이 많았던 예나 전투에서도, 프랑스 군의 절반 정도는 머스켓 소총 한 발도 안 쏘고 전투를 끝냈으니, 실제 전투에 참여한 병력은 크게 차이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프로이센 군 전체가 하루 동안에 궤멸된 원인을 보시려면, 먼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의 상황을 보셔야 합니다.  먼저, 전투 현장에서 도주한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에게 '우리 그러지 말고 말로 하자'라는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이는 전투 직전, 나폴레옹이 게라(Ghera)에서 예나로 출발하기 전에 보낸 '나는 불필요한 전쟁은 하고 싶지 않다'라는 편지에 대한 답장 형식이었지요.  그러나 나폴레옹은 '말은 베를린에서 하자'라는 답변을 보냅니다.   나폴레옹은 전투가 끝난 다음날, '이미 비스툴라 (Vistula) 강 서쪽은 우리가 정복한 셈'이라고 선언할 정도로, 프로이센 정복을 자신했던 것입니다.  이어서 빌헬름 3세가 '전사자를 매장하도록 휴전이라도 잠깐 하자'라고 보낸 내용에 대해서는 '죽은 자들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전하께서는 산 자들의 문제에나 신경쓰시라'는 조롱조의 답신을 보냈습니다.

 

 

 

(비스툴라 강은 보시다시피 폴란드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강으로서, 당시는 동프로이센과의 경계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마치 나폴레옹의 호언장담에 맞장구 치듯이, 당장 베를린의 호헨졸레른 왕족들은 레스토크 (Lestocq) 장군이 지휘하는 불과 수천의 병력의 호위 하에 저 멀리 동프로이센의 주도 쾨니히스베르크 (Königsberg)로 피난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무리 프로이센 주력 부대가 이날 전투로 격파되었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죽은 것도 아니고, 또 예비대도 상당수 남아 있는데, 너무 비관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  아니었습니다.  당장 뷔르템베르크 대공 오이겐 (Prince Eugene of Wurttemberg) 지휘 하에 할레 (Halle)에 모여있던 예비대는 베르나도트의 제1 군단의 공격을 받고 너무나 간단히 궤멸되어 버린 뒤 엘베 (Elbe) 강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인 마그데부르크 (Magdeburg) 요새로 패주했는데, 이 요새에는 식량이 비축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란은 데사우 (Dessau)를, 다부는 비텐베르크 (Wittenberg)를 점령하는 사이, 뮈라와 술트와 네이는 이 마그데부르크를 포위 공격했는데, 이 도시는 결국 11월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결정적인 패전으로 인한 병사들의 사기 저하에, 비축 식량까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요.

 

 

 


(프로이센의 성장과정입니다.  애초에 프로이센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와 프로이센 공작령의 결합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이를 '중부 유럽을 관통하는 두개의 평행선'이라고 묘사한 바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분단된 기묘한 모양의 국토 때문에, 프로이센은 역사적 발전에 많은 애로 사항이 있었습니다.)

 

 

(저 지도에서 서부 프러시아니 남부 프러시아니 하는 것은 사실 모두 폴란드 땅입니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의 폴란드 분할에 대해서는 곧 보시게 될 겁니다.)

 

 

이렇게 패전 이후 이런저런 도시와 요새로 도망쳤다가 결국 프랑스 군에게 따라잡힌 후 항복한 것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호헨로헤 대공이 예나 전투에서 그나마 온전히 후퇴시킬 수 있었던 부대는 곧 추격해온 란과 뮈라에게 쫓겨 프렌츨라우 (Prenzlau)로 도망쳐 들어갔다가, 결국 10월 28일에 항복해야 했습니다.  뮈라가 10만 대군이 프렌츨라우 주변을 둘러 싸고 있다고 허풍을 쳤는데, 그 말에 어이없이 속아넘어 갔던 것입니다.  슈테틴 (Stettin)으로 도망쳤던 부대도 광(狂)기병 라살 (Lasalle)이 이끈 기병대에게 10월 30일 항복했고, 뤼벡 (Lübeck)으로 도망쳤던 블뤼허의 부대도 용감한 저항전을 펼치다가 결국 항복해야 했습니다. 

 

왜 이렇게 프로이센 군은 무기력하게 항복들을 해야 했을까요 ?  뭐 예나-아우어슈테트의 패전이 워낙 파멸적이고 충격적이었으니, 기가 꺾여버렸다는 것이 중요 원인 중 하나이겠습니다.  하지만 그 뿐이었을까요 ?  그냥 프로이센 사람들이 유리 멘탈이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프로이센이 삽시간에 궤멸된 사실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  혹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국가적인 차원에서 뭔가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

 

 

 


(본문 중에 언급된 폴란드 출신 츨라포프스키 Dezydery Chłapowski 입니다.  그는 1788년 생으로 이 예나 전투 때는 18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이 그림은 라티스본에서 나폴레옹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적탄에 의한 부상을 입는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 오른쪽에 서있는 폴란드 창기병이 바로 츨라포프스키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10월 25일, 드디어 베를린에 프랑스 군 중 처음으로 입성한 다부의 제3 군단 병사들을 본 프로이센 귀족 폰 엔제 (Varnhagen von Ense)의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표현, 즉 "활기에 넘치고, 뻔뻔스럽고, 고약해보이는 쬐그만 친구들"이라는 말에서 그 일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쬐그만 친구들'이라는 표현은 확실히 당시 프랑스 인들의 키가 북부 독일, 그러니까 프로이센 사람들보다는 작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전에도 언급한 적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어느 폴란드 창기병의 회고록'이라는 책을 쓴 동시대의 폴란드인 츨라포프스키(Chlaspowski)도 동일하게 표현했습니다.  즉, 이 츨라포프스키라는 사람이 본 최초의 프랑스 군대는 아우어슈타트 전투에서 프로이센 군을 무찌르고 (나중에) 폴란드로 들어온 다부(Davout) 원수 휘하의 제3 군단이었는데, 그의 회고록에는 이 프랑스 병사들은 프로이센 병사들에 비해 머리 하나는 확실히 더 작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츨라포프스키의 기록에 따르면, 훨씬 더 크고 튼튼해 보이는 프로이센 군은 엄격한 대오를 갖추고 고작 반 마일(약 800m)을 행군하고는 휴식을 하기 위해 부대가 멈추면 우르르 흩어져 드러누웠던 것에 비해, 프랑스 군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즉, 포젠 (Posen) 시 외곽까지 무려 150 마일을 행군해온 프랑스 병사들은, 겉보기에 무질서하게 흩어져서 도착하더니, 북 소리가 울리자 대오를 바로하고 더러워진 외투를 벗고 모자를 고쳐 쓰고는, 아주 활기찬 발걸음으로 시내로 행군해들어왔습니다.  시내 광장에 집결한 이 프랑스 병사들은 무기를 질서정연하게 쌓아두고는 덤불 부스러기로 군화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더니 농담짓거리를 하면서 노닥거리더랍니다.  별로 지쳐보이지 않더라는 이야기지요.

 

 

 

(1804년 영국 침공을 앞두고 불로뉴 해안에서 단련한 영국 방면군을 사열하는 나폴레옹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  그냥 프랑스 인들의 스태미너가 더 좋았다는 뜻일까요 ?  일단 확실히 그랬을 겁니다.  그랑 다르메 (La Grande Armee)는 나폴레옹이 영국 침공을 위해 불로뉴의 병영에서 무려 2년간 집중 훈련시킨 정예병들로서, 울름과 아우스테를리츠 전투 등을 거치면서 풍부한 경험까지 쌓게 되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전투력이 높은 부대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보다는 포젠 시로 들어올 때의 프랑스 군의 대오 형태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이 더 맞다고 봅니다.  당시 프랑스 군은 대오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시 외곽까지 행군해 들어왔습니다.  이런 무질서한 행군 모습은 프로이센 군에서는 찾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오직 강철같은 군기로 조련된 군대만이 승리를 보장한다고 믿는 프로이센의 귀족 장교들은 무질서한 대오로 행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테니까요.  또, 저렇게 제대로 대오를 갖추지 않고 행군을 하는 경우, 낙오자와 탈영병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다는 점도 프로이센 군이 오로지 엄격한 대오를 갖추는 것에 많은 의미를 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은 달랐습니다.  이렇게 개방형 대오로 자유롭게 행군을 하더라도, 낙오도 탈영도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병사들의 피로도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대오로 행군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왜 프랑스 군은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  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던, 척탄병 쿠아녜의 회고록 중의 한장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실 수 있겠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척탄병 쿠아녜의 모험 http://blog.daum.net/nasica/6862502 참조)

 

 


1800년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생 베르나르 고개를 향해 올라 갈때의 한 장면입니다.  당시 프랑스 군은 대포를 다 분해하여, 부품별로 운송했는데, 청동제의 포신 그 자체는 더 이상 분해가 안 되었으므로 처치가 곤란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 그 속을 파내어 반쪽짜리 파이프처럼 만들고, 그 속에 대포 포신을 넣고 노새로 끌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힘겹게 알프스를 오르던 노새들은 얼마 못 가서 지쳐 쓰러져 버렸으므로, 결국은 덩치 좋은 척탄병 중대의 병사들이 노새를 대신하여 이 포신 통나무 썰매를 끌게 되었습니다.  당시 쿠아녜는 척탄병 중대의 신병으로서, 대포 포신을 끌고 올라가는 그 20명 조의 일원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이 포신 수송조의 책임자는 그 대포를 책임지는 포병장(gunner)이었습니다.  이 계급은 보통 하사 혹은 상병 (corporal) 정도가 맡는 직책이었지요.  이 오르막길은 정말로 험악한 여정이었습니다.  길은 거친 얼음으로 뒤덮혀 있어 빈약한 군화 바닥을 찢어 놓았고, 통나무 썰매가 자주 미끄러졌기 때문에 포병장은 자주 '정지!'를 명하고 포신을 다시 썰매에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음이 아닌, 만년설 지대로 접어들자, 통나무 썰매가 좀더 수월하게 미끄러지며 운송이 쉬워졌습니다.  그러자 사단장이던 샹발락 (Chambarlhac) 장군이 다가와 이 수송조 병사들에게 더 빨리 움직일 것을 명령했습니다.  이건 지친 병사들에게 무리한 지시였고, 또 결과적으로 대포 자체의 안전에도 좋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때, 일개 사병인 포병장이 샹발락에게 대들었습니다.  "이 대포는 내 책임 소관입니다.  저 개인의 책임이라구요.  장군님께서는 가던 길 가시지요.  이 척탄병들은 지금 당장은 장군님이 아니라 제 지휘권 하에 있습니다.  명령은 제 몫입니다."  이런 건방진 말대답에 대해 발끈하여 샹발락이 포병장에게 다가가자, 포병장은 한발짝 더 나갑니다.  "당장 우리 앞에서 비켜나지 않으면 이 빠루 (crowbar, 지렛대가 맞는 표현있게지만 빠루가 더 실감 나는군요)로 갈겨 버릴 겁니다.  갈 길 가세요, 아니면 절벽 아래로 던져 버릴테니까 !"

 

샹발락 장군은 결국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양반이 나중에 그 건방진 포병장을 찾아내어 무슨 보복 조치를 했는지는 기록이 없는데, 사실 별다른 기회를 못 찾았을 겁니다.   그는 마렝고 전투 때 치열한 전투에 겁을 먹고 도주하는 바람에 이후 종적이 묘연해졌거든요. (척탄병 쿠아녜의 모험 http://blog.daum.net/nasica/6862502 참조) 

 

이렇게 놀라운 하극상의 모습이 보여진 것은 당시가 전시였고, 또 환경이 눈보라치는 알프스 꼭대기였다는 점도 있겠습니다만, 당시 일개 사병들이 가지고 있던 책임의식, 주인의식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프로이센 군이나 러시아 군에서라면 그냥 '장교 나으리들이 시키는 대로 한다'라는 것 외에는 일반 사병들이 가진 생각이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은 달랐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자신보다 더 상급자라고 할 지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명령에 대해서는 대들 정도로 기백이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은 언제든지 자신들도 전공만 세운다면 장교가 될 수도 있고 장군이 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왕후장상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런 양반들도 꽤 있었고요.  저 쿠아녜의 회고록을 보면, 이탈리아의 어떤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패배하여 병사들이 도주하는 와중에, 어느 병사 하나가 '친구들, 돌아서라 !  적에게 등을 보이다니 창피하지 않은가 ?' 라고 외치며 결국 동료들을 돌려 세워 패배를 막아내는 장면도 나옵니다.  나중에 그 모습을 언덕에서 지켜보고 있던 어느 장군이 그 병사를 불러오라고 전령을 보내자, 일단 헌병이라면 질색이던 이 병사는 '난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왜 장군 앞에 끌려가야 하느냐 ?'라며 마구 반발하는 했다가, 그게 아니라 상을 주려고 하시는 거다 라는 설명을 듣자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지'라며 다시 뻔뻔스럽게 장군 앞으로 가는 이야기까지 나오더군요.

 

장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로이센 군은 100% 귀족 출신의 자제들만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이들의 계급은 실력이 아닌 출신 가문과 연공 서열에 의해 결정되었습니다.  프로이센에도 당연히 더 훌륭한 실력을 갖춘 수많은 청년들이 있었겠으나, 그들은 평민이라는 이유로, 가문이 보잘 것 없다는 이유로 요직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 장교들은 거의 대부분이 실력에 의해 발탁된 사람들이었고, 상당수는 일개 사병 출신이었다가 지휘력을 인정 받아 장교로 임관한 경우였습니다.  이렇다보니, 프랑스 군은 지휘관이 쓰러지거나 (심지어 샹발락 장군처럼) 겁을 먹고 도주하는 일이 있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패주하다가도 재집결하여 반격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베리아 반도에서 활약한 어느 사병 출신 영국군 장교의 모험담을 그린 샤프 시리즈 중 Sharpe's  Skirmish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영국군 소령 하나가 프랑스 군에게 포로가 되어 프랑스 군 대위와 대화를 나누는데, 그 영국 장교는 그 자리에 없는 Sharpe 대위에 대해 마구 험담을 늘어놓으며, '그 자식은 사실 제대로 된 장교도 아닙니다, 사병 출신이거든요, 사병 출신이 뻔하지요 뭐' 라고 내뱉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프랑스 군 대위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저도 사병 출신인데요' 라고 말하여 영국군 소령을 벙찌게 만듭니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마을 건물 등의 장애물을 잘 이용하여 엄폐한 상태로도 잘 싸운 것에 비해, 프로이센 군은 허허벌판에서 아무 이유없이 그냥 프랑스 군의 총탄을 뒤집어 쓰면서도 두어 시간 동안 대오를 유지하며 서 있는 장면을 보신 바 있으시지요.  그것도 다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프로이센 장교들은 병사들을 믿지 못해 항상 자신들이 통제하는 대오 속에 가두어두려고 했고, 눈 앞의 프랑스 군이 자유자재로 전술을 바꾸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들의 경직된 전술과 명령 체계에서 빠져 나올 생각을 못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쓰러지자 지휘 체계가 무너져 내렸고, 한번 패주하게 되자 아무도 흩어진 병사들을 재규합시킬 수가 없었지요. 

 

19세기 후반의 미국 역사가인 슬로안 (William Milligan Sloane)의 표현에 따르면, 프로이센에 그 동안 누적된 절대 왕정주의와 군국주의의 폐해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 이후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것 같았습니다.  저 위에 라살의 기병대에 슈테틴 요새가 항복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사실 기병대가 요새를 점령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말이 성벽을 뛰어 넘을 수는 없으니까요.  한마디로, 별로 저항도 안 해보고 항복했다는 이야기지요.  스판다우(Spandau)와 하멜른 (Hameln)의 요새들도 모두 성문을 열고 항복했는데,  이 두 요새들도 프랑스 군의 거센 공격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요새들의 수장들이 정식 항복을 하러 성문을 열고 나올 때, 이들에게 야유를 보낸 것은 프랑스 군 뿐만이 아니라 프로이센 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들은 평소 워낙 부패와 횡포가 심했던 인물들인지라 프로이센 사람들로부터도 원망을 받던 인물들이었던 것입니다. 

 

 

 

 

(이건 작년 가을 제가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앵밸리드에 있는 나폴레옹의 묘이지요.  그 둘레를 감싼 원 가장자리에 그가 거둔 승리의 장소들이 새겨진 것을 보십시요.  여기에도 예나 Iena 라는 이름만 있지 예나-아우어슈테트라고는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항상 아우어슈테트는 무시했고, 항상 예나 전투라는 이름으로만 불렀습니다.) 

 

 

 

 

(앵밸리드 뒤편에는 성 루이 교회 Église Saint-Louis des Invalides 가 맞붙어 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저 군기들은 실제로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탈취해온 그 깃발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구요.  1814년 파리가 동맹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앵밸리드의 깃발들은 적에게 다시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모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산산조각이 나는 프로이센을 나폴레옹은 신나게 질주했습니다.  그는 잠깐 로스바흐 (Rossbach)에 들러, 1757년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곳에서 오스트리아-프랑스 연합군을 산산조각낸 것을 기념한 전투 기념비를 해체하여 파리로 보냈고, 10월 24일에는 호헨촐레른 왕가의 근거지인 포츠담 (Postdam)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무덤을 방문하여 '이 양반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는 여기 오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했지만 사실 말 뿐이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검과 모자, 그리고 허리띠 (sash)를 기념품으로 파리의 앵밸리드 (Les Invalides)로 보내 자신의 승리를 장식하도록 했습니다.  다부가 베를린에 입성한지 2일 후인 10월 27일 나폴레옹은 드디어 베를린에 입성합니다.  이때, 나폴레옹은 생애 처음으로 성대한 행사와 함께 당당하게 승리자로서 적의 도시에 입성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병력을 끌어모으고, 장군들은 물론 병사들에게 가능한 한 가장 좋은 제복을 입혔습니다.  특히, 나폴레옹의 복장이 화제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휘황찬란하게 성장을 한 원수들 사이에서 백마를 타고 입성했는데, 정작 그의 옷차림은 검소하기 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검소한 낡은 코트에 평범한 이각모 (bicorne)를 썼습니다.  그의 옷차림에서 장식품이라고는 이각모에 붙인 프랑스의 삼색 모표 (cockade) 뿐이었는데, 그것도 대충 만든 싸구려임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금실로 수놓아진 화려한 제복과 번쩍거리는 훈장들 속에서 이 검소한 옷차림은 단연 눈에 띌 수 밖에 없었고, 베를린 시민들은 이 프랑스 황제의 모습에 대단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1806년 10월 27일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 모습입니다.  Charles Meynier의 작품이지요.  저 왼쪽의 브란덴부르크 성문의 모습을 보십시요.  저 그림 속에서는 나폴레옹의 이각모에 삼색 모표가 안 붙어 있네요.)

 

 

 

 

(삼색 모표 trocolor cockade를 붙인 이각모 bicorne 은 이제 완벽한 나폴레옹의 상징물이지요.)

 

 

 

(영화 레미제라블 속에서도 저 삼색 모표는 혁명의 상징으로 여러차례 나옵니다.  저 모표 cockade라는 것이 원래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밝히기 위한 용도였으니, 뭐 당연한 일이겠지요.  참고로, 저 삼색기는 부르봉 왕정 복고 이후 폐지되었다가, 레미제라블 시대인 1832년, 즉 루이-필립 시대에는 이미 다시 프랑스 국기가 되었습니다.  루이-필립이 속한 오를레앙 가문의 상징이 빨간색과 흰색이어서, 처음부터 저 삼색기는 오를레앙 가문의 상징이라는 의심이 있을 정도였거든요.)

 

 

 

이 입성식에서 눈길을 받은 사람들은 또 있었습니다.  원래 고대 로마 개선식에서는 생포된 적의 포로들도 이 개선식의 일부로서 행진하게 되어 있었는데, 나폴레옹도 그렇게 포로들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행렬에 끌려나오게 된 프로이센 장교들은 나폴레옹에게 제발 그런 치욕은 주지 말아 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무시했지요.  이들은 실제로 초라한 몰골로 말도 타지 못하고 이 입성식 행렬에 끼여 고개를 수그리고 베를린 시민 앞을 걸어야 했는데, 놀랍게도 많은 베를린 시민들은 이들에게 야유를 보냈습니다.  특히 이 포로들 중 일부는 왕실 근위대로서, 바로 몇달 전 베를린 시내의 프랑스 대사관 계단에서 칼을 갈며 도발을 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거든요.  베를린 시민들은 이들의 근거없는 허세와 자신감, 그리고 그에 따르는 필연적인 패배에 대해 야유를 보냈던 것입니다.  

 

베를린 시민들은 이때 나폴레옹에 대해 프로이센 귀족들은 물론 프랑스 군도 놀랄 정도의 환호를 보냈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환호에 대해 '어린애 같은 천진스러운 호기심'의 결과라고 평했습니다만, 아마도 베를린 시민들은 나폴레옹이 가져올 변화와 개혁의 냄새를 맡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계몽사상과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은 이미 국경을 넘어 지식인들 사이에 많이 퍼져 있었고, 프랑스 군이 들어오는 곳에는 나폴레옹 법전도 함께 따라 들어오므로 평민 계급에는 오히려 좋은 일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건 프로이센이 아니라 프랑스 혁명 당시 스위스 취리히의 모습을 풍자한 만화입니다.  당시 프랑스 군은 스위스 내 혁명 세력의 요청으로 스위스를 침공하여 귀족제도를 무너뜨렸는데, 취리히 시민들이 이를 축하하며 혁명의 상징인 소위 '자유의 나무' Arbre de la liberté 주변을 둘러싸고 춤을 추는 동안 프랑스 군은 취리히 시의 보물들을 탈탈 털어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비록 중간에 엄청난 혼란과 파괴를 겪기는 했지만, 평민 계급의 삶이 비약적으로 좋아지기는 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텐느 (Hippolyte Adolphe Taine)에 따르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는 프랑스 농민들은 자신이 거둔 수확물의 19%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세금으로 빼앗겼지요.   14%는 영주에게, 또 다른 14%는 교회에게, 그리고 53%는 국가, 즉 왕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이후, 농민들은 무려 79%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영주와 교회에게 내는 세금이 없어졌고, 국가와 지방 정부에 내는 세금이 21%로 줄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변화는 일단 농토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귀족과 교회의 면세 혜택이 철폐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나폴레옹이 바로 잡은 세금 징수 제도의 합리화, 효율화 덕분이기도 합니다.  전에는 경찰과 민간 세금 징수원이 도중에 착복하는 것이 많았으나, 나폴레옹이 전문 세금 징수원 제도를 운영하면서 그런 부분이 없어졌던 것이지요.  또, 베르사이유로 상징되는 프랑스 절대 왕정의 허세에 낭비되는 돈이 이제는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원래 나폴레옹은 결코 서민층을 위한 군주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소중히 여기는 국민은 세금을 잘 내고 아들들을 군대에 보내주는 중산층들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그도, 가난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세금을 거두는 것은 가능한 한 삼가했습니다.  가령 세수 확대를 위해 길거리에서 채소와 생선을 파는 가판대에 대해서도 세금을 부과하자는 제안이 나오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장은 물처럼 무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소금과 와인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  서민들의 가판대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보다는, 곡물 시장을 중흥시키는 것을 고려하는 것이 더 파리에 어울리는 조치이다." 

 

하지만 베를린 시민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그 국민들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황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이 그를 위해 작곡한 영웅 교향곡을 찢어버렸다고 하지요.  사실 베토벤이 옳았습니다.  원래부터 그런 면이 있었지만, 특히 이때 즈음해서는 나폴레옹은 이미 혁명의 영웅이 아니라 독재자에 더 가까운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헤겔의 초상입니다.  이건 1830년대 그림이니, 나폴레옹과 만날 때의 모습은 이것보다 20년은 젊은 모습이었겠네요.)

 

 

 

여기서 이야기를 약간 뒤로 되돌려보지요.  10월 13일, 그러니까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가 있기 하루 전날, 나폴레옹이 예나 시내로 들어왔다가, 란드그라펜베르크 고지로 올라가 정찰을 하기 위해 다시 말을 타고 나가는 모습을 길에서 유심히 지켜본 한 시민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헤겔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철학자 바로 본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예나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있었고, 경제적으로 무척 궁핍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헤겔은 유식한 사람이었던지라,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을 보고는 너무나 깊이 감명을 받아 어느 친구에게 "세계의 정신 (World-Soul)이 말 위에 올라탄 모습을 보았다" 라고 감탄하는 편지를 썼지요.  하지만 정작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어디서나 다 그랬듯이 식량과 금품을 약탈하느라 예나 시내를 발칵 뒤집어 놓았고, 이에 겁을 먹은 학생들이 대부분 도망쳐 버리는 바람에 헤겔의 경제 사정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이듬해 3월 결국 그는 밤베르크 (Bamberg)로 떠나야 했지요.  게다가 나중에 그는 그의 동생 루드비히 (Georg Ludwig)가 장교로서 나폴레옹의 1812년 러시아 원정에 동원되었다가 거기서 전사하는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헤겔은 이렇게 나폴레옹을 만났습니다만, 과연 나폴레옹은 헤겔이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할런지...)

 

 

헤겔이 겪은 바가 베를린 시민들, 더 나아가 프로이센 국민들이 겪은 바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나폴레옹에게서 이 경직된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을 개혁해줄 구원자를 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실제로 돌아온 것은 무자비한 철권 통치와 약탈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일찌기 나폴리 왕국을 자기 형에게 주면서 '이탈리아 잡것들에게는 단호한 공포를'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었는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대해서는 나름 예우를 갖추었지만, 2류 국가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그런 예우가 필요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먼저 (이건 비엔나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베를린 시내에서 돈이라는 돈은 박박 긁었고, 또한 그림이나 조각, 서적 등 값나가는 물건들도 모조리 수집하여 파리로 보냈습니다.  저 나폴레옹의 베를린 입성 그림에서도 보여지는 브란덴부르크 성문 (Brandenburger Tor) 위의 4두 전차 조각까지도 뜯어내어 파리로 보냈습니다.  (이 조각품은 1815년 이후 반환됩니다.)  게다가, 프랑스 국민들은 세금이 경감되어 좋았을지 몰라도, 그건 프랑스에 국한된 이야기였을 뿐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집권 이후 프랑스가 재정 안정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나폴레옹이 세수에 맞추어 재정 지출을 했기 때문이었는데, 다만 한가지, 나폴레옹도 전쟁 비용 만큼은 세수 범위 내로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루이 14세나 15세는 그런 전쟁 비용을 무책임하게 국채를 발행해서 메웠으나, 나폴레옹은 적국에게 그 비용을 전가시켜서 메웠습니다.  이제 이 제4차 동맹전쟁의 비용은 모두 프로이센이 부담할 차례였지요.

 

 

 

 

(브란덴부르크 성문입니다.  이 성문을 최초로 개선식에 이용한 것은 나폴레옹이고, 반대로 파리의 에투알 개선문을 최초로 개선식에 이용한 것은 1870년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군이었으니, 참 역사란 아이러니컬해요.)

 

 

 

 

(브란덴부르크 성문 위의 4두 전차 상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저 철십자 독수리 상은 나폴레옹의 입성식 그림에는 없습니다.  이는 1814년 저 동상이 반환된 이후, 새로 디자인하면서 추가된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공포 통치도 시작됩니다.  당시 베를린 시장은 하츠펠트 대공 (Prins Hatzfeldt)이 맡고 있었는데, 이 양반은 쾨니히스베르크로 도주한 그의 친척이자 국왕인 빌헬름 3세에게 너무나 태평하게 '지금 베를린 상황은 어떠어떠한데 프랑스 군은 제 몇 군단이 들어와 있고 어쩌고' 하는 편지를 써서 일반 우편 행낭에 넣어 보냈습니다.  이 편지는 당연히 나폴레옹의 검열에 걸려 들었고, 나폴레옹은 '프랑스 군에 대한 작전 정보를 적에게 몰래 보내려 했다'라며 간첩 혐의를 적용하여 그를 군법회의에 넘겼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로 해될 것도 없는 내용이고, 자신과 베를린의 처지를 잘 이해 못했던 눈치없는 왕족의 실수라고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만, 그 결과는 사형 선고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원했던 것은 '내가 너희들과 노닥거리려고 베를린까지 온 것이 아니다'라는 공포의 메시지를 베를린에 뿌리려는 것이었나 봅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하츠펠트 대공의 젊고 아름다운 부인이 직접 나폴레옹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한 끝에, 미녀에게 약한 나폴레옹이 그 유일한 증거물인 편지를 즉석에서 벽난로 불에 던져 넣음으로써 해프닝으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프로이센의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시작부터 그랬습니다만, 나폴레옹의 군단들은 이때 즈음 해서는 약탈의 귀재가 되어 있었고, 도시의 대저택이든 시골의 농가이든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점잖게 공식 문서로 요구하는 전쟁 배상금과는 무관하게, 철저하게 사적인 약탈이었지요.  다부의 제3 군단은 이런 약탈이 비교적 적은 편이었고, 아마도 그래서 다부의 점령 2일 뒤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에 대해서 베를린 시민들이 열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다부를 제외하고는 다른 원수들은 노골적으로 사적인 귀중품 약탈에 열을 올렸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 '저 친구의 재물 욕심은 정말 못 말리겠다'며 두 손 든 마세나는 물론이고, 비교적 점잖은 척 하던 베르나도트조차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불참한 것에 대해 그토록 엄중한 질책을 당한 상태였는데도 마차를 약탈품으로 가득 채울 정도였습니다.  윗대가리들이 이 모양이었으니 장교들과 일반 병사들도 숙사 할당을 받은 저택과 농가를 마음대로 유린하며 모든 것을 빼앗아갔습니다.  아마 전후 전범 재판이 있었다면 거의 대부분의 프랑스 군 장교들과 병사들이 전범으로서 최소 몇년씩은 형무소 신세를 져야 했을 것입니다.

 

 

 

 

(이 분이 슈타인 Heinrich Friedrich Karl, Freiherr vom und zum Stein 폼 슈타인 자작입니다.  그의 개혁조치는 정신 못차린 프로이센 보수층의 강력한 반발을 받았습니다만, 정작 그가 1808년 프로이센에서 도망쳐야 했던 것은 나폴레옹을 비난한 편지가 프랑스의 비밀 경찰에게 적발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분이 하르덴베르크 Karl August von Hardenberg 입니다.  애초에 하우비츠가 아닌 이 양반을 수상으로 삼았다면 예나-아우어슈테트의 치욕은 면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역사가 뭐 어느 한 사람의 활약으로 바뀌는 일은 별로 없지요.  이 분은 프로이센의 개혁에 지대한 공로를 세웠습니다만, 이후 외교전에서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에게 완전히 발리는 굴욕을 당합니다.)

 

 

 

이런 봉변을 당하면서, 프로이센 국민들은 나폴레옹의 환상에서 깨어나 점차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또 이때의 경험은 프로이센 귀족들에게도 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지요.  1807년 7월 틸지트 조약 이후 베를린으로 돌아온 프로이센 왕정은 흔히 '10월 칙령' 또는 '슈타인-하르덴베르크' (Stein-Hardenberg) 개혁이라고 불리는 개혁 조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계몽사상에 기반을 둔 개혁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바로 농노제의 폐지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서유럽에서는 이미 13~15세기에 점차 소멸해버린 농노 제도가 라인 강 동쪽에서는 오히려 15세기 이후로 새로 도입되고 강화되고 있었는데, 프로이센은 예나-아우어슈테트 패전의 원인을 그런 중세적인 사회 제도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본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중세부터 내려온 길드 조직에 의한 독점권이 폐지되고 경쟁 체제가 도입되었으며, 귀족들의 특권이 제한되는 등 많은 개혁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우 등의 젊은 군인들에 의한 군 개혁도 함께 진행됩니다.  이러한 개혁 조치가 결국 1870년 보불 전쟁 승리의 초석이 되었고, 결국 독일 근대화와 그에 따른 독일 제국의 성립이라는 큰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806년 10월 17일, 베를린 시민들이 나폴레옹의 입성에 대해 환호했던 것은 적절한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 개혁의 빛을 가져다 준 셈이니까요.  오히려 (광활한 국토와 날씨, 광대한 인구 덕분에) 나폴레옹을 결국 패배시켰던 러시아야 말로, "거봐 무슨 개혁이고 계몽이고, 러시아가 세계 최고라니깐" 하며 개혁의 필요성을 못 느끼다가 완전히 골로 간 나라가 되어 버렸지요.  나폴레옹이 러시아까지 굴복시켰다면 정말 세계 역사는 많이 바뀌었을 것 같습니다.

 

 

 

(레닌만 아니었다면 공산주의 사회가 현실화되는 일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  애초에 러시아 민중의 삶이 그토록 개판이 아니었다면 빨갱이들이 설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의 에필로그 중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베르나도트입니다.  그가 왜 아우어슈테트의 포성을 애써 무시하고 도른부르크로, 이어서 스폴다로 향했는지는 이미 전편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그가 받은 명령서 그대로를 따른다면 사실 그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굳이 책임을 따지자면 애초에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그런 명령서를 보낸 나폴레옹에게 책임이 있었지요.  물론 바로 등 뒤에서 맹렬한 포격 소리가 들리는데도 '난 받은 명령대로 할테다'라고 고집하는 것은 베르나도트에게 너무나도 융통성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과 베르나도트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베르나도트로서도 나폴레옹의 명령서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그의 제1 군단을 다시 뒤로 돌리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이해가 갈 만 한 일입니다.


 

 

 

(박격포 옆에서 포즈를 취하고 계신 베르나도트 원수님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아쉬운 점은 바로 나폴레옹의 태도였습니다.  나폴레옹은 (원래 그런 면이 다분했습니다만) 특히 황제가 된 이후로 모든 공은 자신의 몫이고, 모든 과오는 부하들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부쩍 강해졌습니다.  그는 다부의 제3 군단이 당한 봉변에 대해 베르나도트를 맹비난했고, 까딱하면 그 자리에서 베르나도트의 지휘권을 박탈할 기세였습니다만,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어쨌건 그는 최초 명령서를 보낸 이후, 곧 새 명령서를 보내서 '상황이 발생하면 그에 따라 다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령서는 대육군 기록 보관소에서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뭐 그의 모든 문서가 다 보관된 것은 아니니, 꼭 나폴레옹의 말이 거짓이라고 보는 것은 맞지 않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히, 나폴레옹은 모든 공로를 자신이 독차지하려 했고, 그런 점이 결국 그의 몰락에 일조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부에게 '아우어슈테트 공작'의 지위를 내려 준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름난 전투에 대해서는 모두 자신의 공로라고 해서 작위를 내리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부하들 중 유명한 전투의 지명을 딴 작위를 받은 사람은 다부가 유일무이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질투는 그토록 나폴레옹에게 충성했던 다부에게까지 뻗쳤습니다.  나중에 다부는 바르샤바에 처음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고, 또 오랜 기간 폴란드의 바르샤바 공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여 폴란드 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그런 점이 나폴레옹의 시기심을 건드렸던 것입니다.  그는 다부가 폴란드 왕으로 책봉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다부도 그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러시아 원정 기간 중 다부와 사이가 틀어져 버렸지요.  흔히 징기스칸이 위대한 점으로, 모든 영웅들은 부하들에게 배신을 당했지만 징기스칸은 부하에게 배신당한 적이 없다는 점을 들지요.  진짜 위대한 리더만이 그런 칭송을 들을 수 있는데, 확실히 나폴레옹은 그런 대인배가 되지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부하들은 나폴레옹을 결국 배신했고, 그 원인은 근본적으로는 나폴레옹 본인에게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조차도 그런 점에 있어서는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베르나도트에 대해 이렇게 씁쓸하게 말하며 자신의 과오를 인정했다고 합니다.

 

"베르나도트는 배은망덕한 자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를 배신자라고 부를 수는 없어."

 



 



(베르나도트의 인생을 바꾼, 1806년 뤼벡 전투 모습입니다.  이 전투에서 뤼벡 시는 미쳐 날뛰는 프랑스 군의 약탈과 살인/강간에 처절한 피해를 입어야 했습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여야 하겠네요.  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이후, 베르나도트는 블뤼허를 추격하여 뤼벡 전투를 치루게 되는데, 여기서 베르나도트는 뜻하지 않은 횡재수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뤼벡은 사실 중립 도시였고, 그곳에는 동맹국 중 하나였던 스웨덴 군도 일부 있었습니다.  무척 참혹했던 뤼벡 전투 이후, 이들은 베르나도트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이때 베르나도트는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들에게, 특히 그 지휘관이었던 뫼르너 (Carl Carlsson Mörner) 장군과 그 휘하 장교들에게 매우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장교들 중 하나이던 마르보 ( 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 는 '베르나도트가 우리 이방인들에게 자신이 무척 점잖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무척 노렸했다' 라고 기록하기도 했지요.  이때의 인연이 나중에 그를 스웨덴 국왕이 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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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베를린 칙령에 의한 대륙 봉쇄령, 그리고 폴란드에서의 활약상이 그려지고, 결국 아일라우 전투의 참극 이야기가 뒤를 이을 예정입니다.  다만 제가 일하는 회사가 이제 연말 분위기에서 벗어나 다소 바빠지고 있어서, 앞으로는 한두달 정도는 3주 정도에 한번씩 올릴 것 같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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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올해 봄에 서유럽 자동차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나시카님 덕분에 브뤼셀 근처 워털루와 체코 부르노 근처 아우스터리츠 전투 현장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메일로 우편주소 알려주시면 현장에서 기념 책자 사서 부쳐드릴께요^^
kks2127@hanmail.net
으아, 부럽군요. 기념 책자는 마음만 받을께요. 고맙습니다 !
윗 글을 보니 베르나도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아우어슈테트에선 무능했고 나중엔 조국을 배신한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베르나도트의 행동은 순전히 명령서에만 의지하고 있지요... 글에서 말한 프로이센 병사들 처럼요...자기 임의대로 군사를 이동해서 다부를 지원할 생각은 않고... 결국 나중에 나폴레옹에게 책잡히기 싫다... 게다가 상관과 나와의 관계가 나쁘다면 더욱더 상관의 말을 거역하기 쉽지 않겠죠... 결과가 안좋게 나온다면 상관의 질책은 두배가 될테니까요...
결국 전형적인 사이 나쁜 상사-후임 관계네요. 창의성은 기대할 수 없는... 나폴레옹은 정말로 프랑스군이 왜 강한지 몰랐던 건 아닌가요? 모든게 자신의 군사적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실패에 무자비하다면... 수하로 둔 유능한 지휘관들을 잘 활용할 수 없게 되겠죠. 어떤 분이 아우스터리츠의 승리 때문에 나폴레옹의 자뻑이 심해져서 몰락이 시작됐다고 하던데요...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닌거 같습니다.
유럽에서 농업하면 프랑스,프랑스해서 fao(세계식략농업기구)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니까 프랑스 전체 국토면적은 대략 55만제곱킬로미터인데 경작지가 국토의 잘반이상인 29만제곱킬로미터!!! 전체 국토의 52%가 경작지더라고요.
29만제곱킬로미터가 얼마나 넓은지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하면 남북한을 합친 면적이 22만3천입니다. 프랑스는 한반도면적의 130%나 되는 넓은 농지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농지 면적만 넓은게 아니라 단위면적당 수확량도 대단한 수준이더라고요. 대표적인 농작물인 밀의 경우 (출처 - http://en.m.wikipedia.org/wiki/Wheat ) 2012년 프랑스는 중국,인도,미국에 이어 세계 4위의 밀 생산국이었는데 프랑스보다 국토가 수십배 넓은 캐나다,호주,러시아보다 생산량이 많습니다.(물론 이 세나라는 국토만 넓지 실제 경작가능한 토지가 적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웃나라인 영국과 독일의 생산량을 합친것보다 더 많습니다. 이게 유럽 제일의 농업국가인 프랑스의 위엄입니다.
방문하고 갑니다
안녕하세요! 늘 잘 읽고있습니다.
군 시절에 용산역을 배회하는(?) 헌병대대 여러분들 덕분에 아주 즐거운(?)시간을 보낸 기억이 있어서
저도 헌병 참...허허허
그런데 저때도 헌병이 있엇다니 신기하네요. 해군이야 배에서 해병대가 그 역할을 했다지만
육군에서도 그런 조직이 있엇나요? 편제, 복장, 무기 등등 모두 다른 조직이었나요?? (MP 완장을 차고다니지는 않았을텐데..ㅋㅋ)
문득 궁금하네요 ㅋㅋ
교양과 상식의 세례를 받은 느낌입니다.
좋은 글, 늘 감사드립니다. ^^
프로이센은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절한 해법을 찾아낸데다가, 그걸 실행하기 까지 했습니다
예나-아워슈타트의 패배를 보고 프로이센을 비웃어도 되는 걸까요?
체면을 중시해서 결코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따라서 문제를 얘기하거나 해법을 제시하면 좌빨이 되는 나라에 사는 우리가 말입니다
토요타의 대량 리콜을 비웃던 현기차의 모습이 오버랩되네요
그런 대량 리콜을 결정할 능력도 없는 주제에...
그렇게 생각해보면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 같이 진정으로 보수적인 나라는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독일 사람 얘기할 때 실용주의를 거론하는데, 보수적인 통제가 실용적이어서 이용했다가, 효용이 끝난 것을 확인하고는 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말이에요
얘기가 잘 흘러가다가 중간에 이상한 얘기가 나오네요; 뜬금없이 좌빨로 매도한다뇨??
보통 1870 보불 전쟁 때나 이후 12차 대전까지 독일군도 규율이강한 군대로 평가받고 이후 독일을 이끈 비스마르크 몰트게 2차대전 대부분 장군들도 전통적 토지귀족인 융커출신인데 아마 규율과 경직된 사회체게 문제도 잇엇겟지만 지휘관자질이 더 컷지않앗을까요 ? 좀 더 자세한 설명이나 의견 부탁드립니다 ^^;
개개의 전투는 분명히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나 근대 국가간의 전쟁에서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 국가 전체의 역량이지요. 프로이센만 하더라도 독일 통일을 위한 진보주의 학생 운동 영향을 많이 받았고, 전통적 토지 귀족 및 군소 왕족들은 그런 통일 운동에 대해 (기득권을 지키느라)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특히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전쟁 이전 시대의 무지렁이 농노들로 이루어진 이류 국가에서 오늘날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선진국으로 발전한 것은 1848년 혁명을 전후하여 도입된 '헌법'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헌법의 도입은 진보성 개혁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혈재상이자 사회주의 반대론자였던 비스마르크가 노동자들의 노년 연금을 세계에서 최초로 도입한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의 강함은 최고지휘관 몇 명의 우수성이 아니라 참모본부로 대표되는 장교단의 우수성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교단의 우수성은 "인민과의 제휴"의 필요성을 역설한 샤른호르스트나 그나이제나우 등이 '모든 장교는 필요한 지식을 공부하고 시험을 통해서 그 성과를 증명해야만 진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한 이후에 가능해졌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장교들이 정말로 출신과 관계없이 평등하게 임용되고 진급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신분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노력과 능력 없이 높은 계급에 오를 수도 없었고, 장교로 임관된 후에도 지속적으로 '머리를 쓰는' 훈련을 해야만 하는 환경을 만드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이러한 강점은 특히 나폴레옹 3세의 시대에 후장총이 보급되면서 새로운 전투 방식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더 두드러졌는데, 지식과 지성을 갈고닦으며 작전 수립에 열중한 프로이센군의 장교단이 오랜 전투경험을 자랑하고 지성은 비웃는 풍조이던 프랑스군 등의 장교단에 비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특히 엄청난 강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일군이 규율이 강하다는 인상은 주로 병사들에게 적용되는 것이고, 장교들의 경우에는 '임무형 지휘체계'라는 유연한 방식이 적용되었습니다. 이는 장교들이 단순히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전 전체의 의미와 상황을 파악해서 (때로는 상급자의 명령에 불복하더라도) 임무 자체를 달성하는데 최선의 방식을 찾아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능력도 없고 상황도 이해 못하는 자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단순히 콩가루 군대가 될 뿐이겠지요. 문제는 장교단이 얼마나 능력이 있고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느냐에 달렸는데, 독일군은 단순히 장교단이 '우수하다'는 것 이외에도 통신 시스템을 정비해서 정보를 원활하게 공유하는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병사들에게 규율을 강조한 것은 문화적 원인도 있겠지만 그보다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의 다수는 예비군을 소집하여 구성했다는 이유가 큽니다. 프랑스는 징병제라도 사실상 장기복무하는 군인들이 다수를 이루었던 반면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프로이센군 및 독일군은 전시에 다수의 예비군을 소집했기 때문에 병사 개개인의 질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병사 개개인의 판단에 맡기기보다는 일단 지휘관의 말을 잘 듣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블로그 방문하고 갑니다 ㅋ
방문하고 갑니다
2차대전까지의 독일 참모본부와 참모 장교 제도는 사실 봉건적 신분제와 근대적 시대 흐름과의 타협의 산물인 면이 많습니다. 봉건적 제도라는게 결국 연합체적 성격이 강하고 특히 초기 독일제국군은 프로이센과 기타 제후국가들 군대의 연합체 였는데 그 지휘관들(각 제후국들의 왕이나 왕자 혹은 그 친척들)을 바꾸려고 했다간 연합체 자체가 와해될수 있었죠. 그건 각 제후국 국대내에서도 다시 트리구조로 마찬가지고.. 그런 신분으로 지휘관에 오른(무능한) 지휘관들을 보좌하기 위해서 신분과 상관 없이 뽑은 우수한 참모 장교가 보좌 한다 라는개념이 독일의 참모 장교 제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식 제도와 달리 참모 장교로 선발되면 순환 보직이 아닌 계속 참모 장교로 있을 수 있고, 야전 부대의 참모 장교들도 지휘관 지휘권 하에 있다기 보다 참모 본부에서 각 야전 부대로 파견 나간 형식을 취했죠.

또 우리 상식에는 이해가 안가지만 히틀러의 개편 이전에는 참모 장교는 "나는 지휘관의 이 지휘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문서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참모장교 요원은 진급등에서 특혜를 봤죠.

이런 독일식 참모 제도를 도입한 또 하나의 군대가 구 일본 육군이었죠
항상 느끼는데 역사상의 인물들을 보면 실책이 정말 많더라고요. 때를 잘 살리고 재능을 빛냈지만 후세의 사람들이 보면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조금 더 이상적으로 행동했다면 몰락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폴레옹도 기존 체제에 편입하기보다 혁명정신을 진짜로 전파해 민심을 얻는데 주력했다면 나중에 몰락기에 줄줄이 배신당하지 않았을수도..... 2차세계대전때 소련군 몰아낸 독일군 환영하다가 인종청소 부대에 영혼까지 털린 후 반나치가 된 동구권 국가들이 생각나네요.

검소한 옷차림처럼 영광도 나누었으면 자신의 부하들의 인기가 충성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지기반도 더 확고히 다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었을텐데..
글좀어서 올려주세요 ㅠㅠ 재밋단 말이에요
2월 7일 금요일 11시 40분에 EBS에서 고전영화로 [해밀턴 부인]을 방송하네요.
원제는 That Hamilton Woman. 우리나라 개봉할 당시엔 [미녀 엠마]였다네요ㅋㅋ
엠마 해밀턴역엔 비비안 리. 넬슨 역엔 로렌스 올리비에이고 1941년 작이랍니다.
이번 주말엔 나폴레옹 시대 영화 한편 감상해 보세요^^
좋은 글 감사드려요. 올라오는 속도로 볼때 나폴레옹의 몰락까지 몇 년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당시의 생활상도 물론 흥미롭지만, 전투/전략에 있어서도 이리 세밀하게 적은 글은 처음 보기에 오히려 이쪽이 저는 더 흥미롭습니다. 지금까지의 전개를 보면 나폴레옹의 천재성에 적군이 우르르 무너지면서도 제가 기존에 생각하던 오합지졸은 아니었던 것 같고, 나폴레옹 후반부에 가면 나폴레옹의 전략/전술을 그대로 카피해낼 텐데 도대체 나폴레옹이 어떤 재주를 부려 6일 전역이나 드레스텐 전투에서 두배가 넘는 적을 패고 다녔는지 너무나도 궁금하네요.
너무 글이 안올라오니 금단현상이 심해지네요..
ㅎㅎ.. 일이 많이 바쁘신가봐요
제가 지금 밥줄이 달린 일 때문에 밤이고 주말이고 시간이 안 납니다... 죄송하지만 앞으로도 몇주간은 새 포스팅이 어렵습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밥벌이 없이 하루 종일 포스팅만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거든요 ㅋ
하루 종일 포스팅이라니 그거 참 바람직... ㅎㅎ 농담입니다.
가족은 먹여살리고 봐야죠. 당분간 여기 안들어오고 저도 제 본업이나 열심히 하고 있는게 맘 편하겠군요 ㅎ
예전에 봤던 전쟁본능이라는 책에서, 전열보병이 쓰인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총의 한계이지만, 동시에 당시 귀족 장교들이 하층민 출신인 병사들이 틈만 나면 도망갈 거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전열에 집착했고, 이 편견에서 프랑스혁명을 거치고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죠.

...엔하위키 전열보병 항목에 이걸 넣었다가 누군가 그걸 완전히 부정하는 수정을 했고, 다시 수정했는데 또 누군가 수정했지만 내용의 선후를 바꾸는 정도라(실제로는 아니지만 장교들의 편견에 인한 삽질이라는 걸 장교들의 편견에 의한 삽질이지만 실제로는 아니라는 것으로) 더 수정 안했었던...
이렇게 훌륭한 글 봐서 영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