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4. 5. 6. 18:06

지난 편에서 우리는 이제 나폴레옹이 진격해 들어갈 폴란드의 슬픈 역사와 그를 대하는 나폴레옹의 태도에 대해 짧게 살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싸우게 될 대상은 폴란드가 아니라 바로 러시아였지요.  러시아는 나폴레옹의 진격에 대해 어떤 태도였을까요 ?

 

예나 전투 이후 프로이센이 지리멸렬 상태가 되자, 러시아의 짜르 알렉상드르에게는 2가지 옵션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그냥 프로이센을 본 척 만 척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록 나폴레옹과 1대1로 붙는다 하더라도 프로이센을 구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패기넘치고 의리으리한 젊은이였던 알렉상드르는 2번째 옵션을 택합니다.  그는 저 남쪽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분쟁이 벌어져 그쪽으로 8만의 병력을 보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무리하여 이미 폴란드에 배치된 병력 외에 약 3만7천의 제2 야전군을 별도로 편성, 이를 프로이센을 향해 보냅니다.

 

 

 

(의리으리한 상남자 알렉상드르는 실제로 무척이나 의협심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틸지트 회담의 내용을 보면 의리는 이익 앞에 한낱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국경선을 넘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다소 망설였습니다.  이 선을 넘는다면 과거 폴란드 영토로서, 러시아의 충돌이 불가피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에도 언급했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와는 구태여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그랑 다르메 (Grande Armee)는 사실상 1805년 울름 Ulm 작전을 위해 프랑스를 떠난 이후, 한번도 프랑스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해외 주둔하고 있어서 병사들의 피로도가 심각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태어난지 얼마 안되는 나폴레옹의 황제 정권도 그리 뿌리가 깊은 편이 아니어서, 그렇게 오래 파리를 비워두는 것이 과연 옳은 판단인지 의심될 정도였습니다.  가령 당시 파리와 프로이센 사이를 잇는 도로 위에는 파리와 나폴레옹 사이를 오가는 서신을 소지한 전령이 거의 항상 말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모든 결정을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였지요.  어느 정도로 심했는가 하면 파리에서 공연되는 연극의 주제 선택까지도 나폴레옹의 의견을 물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나폴레옹의 정권이 오로지 나폴레옹 개인에게 의존하는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는 점과 함께, 나폴레옹은 계몽 군주가 아니라 독재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드러내 주는 일화이지요.

 

 

 

(연극 희곡 선택까지 나폴레옹이 직접 했다니까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나폴레옹은 대단한 연극 애호가였습니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대배우 탈마 Francois-Joseph Talma 가 당시 연극에서 로마인 킨나로 분장한 모습입니다.  나폴레옹은 탈마의 연극 공연을 일반 대중들과 함께 극장에서 즐겨 보았는데, 당시 인기 희곡 중에는 어쩔 수 없이 간혹 가다 독재자를 비난하는 내용의 대사가 나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탈마 본인을 비롯하여 나폴레옹의 측근들은 식은 땀을 흘리며 귀빈석에 앉은 나폴레옹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나폴레옹 본인은 그런 장면에서는 깜빡 조느라 아무것도 못들었다는 듯한 연기를 그럴싸하게 해내는 재치를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러시아 군이 폴란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는, 과감하게 폴란드로 진군을 시작합니다.  러시아와의 충돌은 더 이상 피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지요.  그는 먼저 심리적, 자연적으로 서구와 동구를 나누던 경계선이던 비스툴라 (Vistula) 강을 건너, 과거 훈족과 마쟈르, 몽골의 기병들이 내달렸던 광활한 폴란드의 평원을 가로질러 내달렸습니다.  그러나 과거 훈족과 몽골은 어땠는지 몰라도,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는 '내달렸다'라는 표현이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기동성을 보여주었습니다. 

 

1806년 11월 28일, 러시아 군이 버리고 간 바르샤바(Warsaw)를 폴란드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다부의 제3군단이 무혈 점령하고, 토른 (Thorn)을 포위하고, 비스툴라, 부크 (Bug), 우크라 (Wkra, Ukra), 나레프 (Narew) 등의 여러 강에 다리를 놓는 등 많은 성과를 이루기는 했지만, 그 진격 속도는 몽골 기병은 커녕, 여태까지 나폴레옹의 보병들이 보여주었던 기동성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

 

 

 

 

(이 지도에서 신 동부 프로이센 Neuostpreussen을 찾아보십시요.  이 신 동부 프로이센은 제3차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에 합병된 폴란드 영토로서, 약 90만명의 인구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크게 플로스크 Plozk 와 비알리스토크 Bialystok 의 2지방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1807년 나폴레옹과 알렉상드르가 맺은 틸지트 조약에서, 플투스크가 속한 플로스크는 프랑스의 위성 국가인 바르샤바 공국으로, 비알리스토크는 러시아로 귀속되게 됩니다.  결국 프로이센이 빼앗은 폴란드 땅을 프랑스와 러시아가 나눠가진 셈이 됩니다.  빌헬름 3세와 맹약을 맺은 알렉상드르로서는 의리으리한 일이지요.)

 


일단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했습니다.  프랑스나 독일의 지방 도로들도 당시에는 진흙투성이 비포장 도로에 불과했지만, 부유한 서구에 비해 경제적 문화적으로 열악했던 폴란드의 도로망은 그야말로 늪과 같은 진흙탕이었습니다.  특히 폴란드는 11월이 우기로서, 그렇쟎아도 열악한 도로 사정을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습니다.  병사들의 무릎까지, 그리고 수레의 바퀴축까지 진창 속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군을 괴롭힌 가장 큰 장애물은 식량 부족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과거 이탈리아나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를 누비고 다닐 때 진지하게 식량 걱정을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의 군대가 당연히 'live off the country', 즉 알아서 현지 조달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작전을 짰습니다.  물론 덕분에 병사들은 전투 현장에서는 거의 언제나 배를 곯아야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굶어 죽을 지경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든 오스트리아든 독일이든 모두 어느 정도 부유하고 넉넉한 동네로서, 잘 정돈된 농가들의 창고 문짝을 걷어차면 하다 못해 감자 몇 자루나 밀가루, 포도주 항아리를 얻을 수 있었고, 찬장을 열었을 때 버터와 치즈가 나오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감자는 이때 즈음해서는 동구권에 널리 재배되는 인기 구황작물로서, 나폴레옹 본인을 포함한 프랑스 군이 즐겨먹는 음식물이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예카테리나 대제 등이 앞장 서서 감자 재배를 장려한 덕분이지요.)

 

 

그러나 가난한 폴란드에 와보니 모든 것이 달랐습니다.  일단 황량하고 광활한 대지에 비해 사람 사는 마을이 그리 많지도 않았고, 마을이 나온다 해도 다른 동네처럼 많은 집이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집도 초라했고, 창고와 찬장은 더더욱 초라했습니다.  프랑스 군은 자신들이 해방군이라고 생각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책이 뭔지 신문이 뭔지 몰랐던 폴란드 농민들은 프랑스 군을 그저 또다른 외국군, 그것도 배고픈 외국군이라고 생각할 뿐이었고, 얼마 안되는 비축 식량마저 폴란드 농민들이 이 외국 귀신들에게 빼앗길까봐 귀신처럼 숨겨 놓았습니다.  심지어 이집트 사막에서조차 물 걱정은 몰라도 식량 걱정을 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은 난생 처음으로 병참선 걱정을 해야만 했고, 이런 식량 보급은 열악한 도로와 곳곳에 즐비한 습지와 강, 지류로 인해 더욱 지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안 좋았던 것은, 이렇게 인적이 드물고 황량한 지역에서는 나폴레옹의 눈과 귀 역할을 하던 정찰병과 첩자들의 발도 묶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나중에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의 극찬을 받은 회고록을 쓴 마르보 (Jean Baptiste Antoine Marcellin de Marbot)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이랬습니다.

 

"날씨는 끔찍하고, 식량은 희귀하고, 와인은 아예 없고, 맥주는 형편없고, 식수는 진흙이 섞여 탁하고, 빵도 없고, 숙소라는 것은 소나 돼지와 함께 쓰는 움막이다.  이것이 폴란드다."

 

 


(마르보는 당시 24살의 젊은 장교로서, 제7군단을 지휘하는 오쥬로 원수의 부관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스페인 전쟁과 러시아 원정에서도 활약했고, 워털루 전투에서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것은 주로 그가 남긴 회고록 덕분입니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그의 회고록을 읽고 '최근 4년간 읽은 책 중 최고'라며 극찬했으며, 유서에도 '마르보가 저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10만 프랑을 그에게 유산으로 남긴다'라는 항목을 넣을 정도였습니다.)

 


한편, 나폴레옹이 폴란드의 진흙 속에서 고생할 때 러시아 군도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알렉상드르가 임명한 제1, 제2 야전군의 총지휘관은 카멘스키 (Mikhail Kamensky) 장군이었는데, 이 양반은 이 풀투스크 전투 당시 이 분 연세가 무려 68세로서, 사실 상당한 고령이셨지요.  게다가 원래 이분은 1788년 몰다비아에서 투르크 군과 싸울 때 지휘권에 대한 반발 문제로 강제 보직해임 당한 뒤 한번도 현역을 맡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에게 지휘권을 맡겼다는 것이 당시 러시아 군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지요.  아무튼 카멘스키 장군은 지휘를 맡자, 일단 부크 (Bug) 강을 지키던 베니히센 (Levin August Theophil, Count Bennigsen) 백작의 제1 야전군을 우크라 강까지 후퇴하도록 명령합니다.  짜르 알렉상드르가 보내준다는 제2 야전군과 합류하겠다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실은 맹수같은 나폴레옹과 혼자 싸우려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라고 의심이 들긴 합니다.  알고 보면 제2 야전군 지휘관도 그리 믿음직스럽지는 못했습니다.  아우스테를리츠 전투에서 주정뱅이 짓으로 악명을 떨친 북스게브덴 (Friedrich Wilhelm von Buxhoeveden) 장군이 지휘관이었거든요.  아무튼 약 6만5천에 달하는 제1 야전군과 3만7천 정도의 제2 야전군이 합류하면 글자 그대로 10만 대군이 되므로, 어느 정도 파괴력 있는 병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이십니다.  카멘스키 백작님은 자신의 영지에서도 농노들을 잔혹하게 다루었던 것으로 악명 높았는데, 아니나다를까 풀투스크 전투에서 이탈하신지 3년 후인 1809년 그렇게 학대받던 농노에게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꼴통 노친네가 천벌 받았다고 해야 하나요...)



하지만 일단 후퇴 뒤에 상황을 지켜보니, 의외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은 소문대로 전광석화처럼 치고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처럼 도로망과 보급품 문제 때문이었지요.  이러자 카멘스키 장군은 '내가 공연히 겁을 먹고 광활한 영토를 내버린 꼴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그는 12월 초, 다시 베니히센 장군에게 나레프 강을 향해 진격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12월 10일, 모들린 (Modlin)에서 프랑스 군이 나레프 강을 도하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다시 덜컥 겁이 났던 카멘스키 장군은 다시 우크라 강까지 후퇴를 명했습니다.  이때 공연히 험한 날씨 속에 우크라 강과 나레프 강 사이를 왔다갔다 해야 했던 러시아 군과 베니히센 장군의 좌절감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지도에는 우크라 강의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다만, 우크라 강은 나레프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 중 하나입니다.)

 

 

 

(우크라 강은 보시다시피 작은 지류입니다.)

 

 

카멘스키 장군이 나타나기 전까지 제1 야전군 사령관으로서 최고 지휘관이던 베니히센 장군은 원래 나폴레옹과 한번 제대로 붙어 보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이 양반의 본명은 레빈 아우구스트 Levin August Gottlieb Theophil 로서, 당시 61세의 노장이었습니다.  원래 이분은 러시아 인이 아니라 브라운슈바이크 (Braunschweig) 태생의 독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7년 전쟁 때도 10대 후반에 하노버 군에서 싸웠지요.  7년 전쟁이 끝나자 아버지의 타계와 자신의 결혼 등 가정 문제로 인해, 그는 19세의 어린 나이에 1764년 하노버 군에서 제대했고, 무려 9년 뒤인 1773년에야 러시아 군에 입대를 하여 투르크 군과 싸웠습니다.  그는 이후 러시아 군에서 승승장구하여 오스만 투르크나 페르시아와의 전쟁 뿐만 아니라 폴란드 봉기 진압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소장까지 승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파벨 1세에 의해 군에서 쫓겨나는 봉변을 당했지요.  그런 연유로 그는 확실히 파벨 1세의 암살 사건에 깊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뒤를 이은 알렉상드르 1세가 그를 다시 군에 복직시켜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후 맡은 직책에서 첫번째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임무가 바로 이 1806년 폴란드 방면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이렇게 피끓던 베니히센은 아무 전략도 없이 우왕좌왕하는 상관인 카멘스키 장군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특히 베니히센은 제2 야전군 사령관 북스게브덴과 합류한다는 사실 자체가 싫었습니다.  그는 원래부터 북스게브덴과 무척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베니히센 장군입니다.  이후 다음 해에 벌어진 아일라우 전투에서 사실상 처음으로 나폴레옹의 그랑 다르메를 패배시키기도 했던 그는 원래 하급 귀족 출신의 독일인이었습니다.  나중에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비로소 알렉상드르 1세에 의해 백작에 봉작되었고, 전쟁이 끝난 이후 고향 하노버의 영지에 은퇴하여 81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실은 러시아 군에서 1817년 완전히 은퇴하게 된 것은 워낙 행정 업무 처리가 미숙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한편, 나폴레옹은 늘 하던 대로 러시아 군을 한 방에 일망타진 하기 위해 큰 그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는 러시아 군이 처음에는 포젠 (Posen)을 중심으로 집결하고 있다고 보았으나, 곧 이어 풀투스크 주변이 러시아 군의 중심지라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뮈라의 총 지휘 하에, 다부의 제3 군단, 오쥬로의 제7 군단, 란의 제5 군단과 뮈라 직속의 제1 기병 예비대를 동원하여 풀투스크로 진격하게 했습니다.  한편, 네와 베르나도트, 베시에르 등은 러시아 군의 우익을 북쪽으로 우회하여, 레스토크의 지휘 하에 있는 잔존 프로이센 군을 상대하도록 했습니다. 

 

 

 

(12월 초의 모습입니다.  프랑스 군의 좌익은 레스토크의 프로이센 군을 밀어내고 우익은 러시아 군을 포위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술트의 제4 군단이 레스토크와 베니히센 사이로 신속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인데, 폴란드의 열악한 도로망은 그를 허락하지 않았지요.)

 

 

12월 23일, 다부의 제3 군단은은 끈덕지게 진격하여 작은 전투를 치르고 마침내 우크라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카멘스키는 불과 며칠 전 전진 명령을 내렸을 때의 패기를 전부 잃고 훨씬 북동쪽인 오스트로웽카 (Ostrolenka)로 후퇴를 명령했습니다.  이때 카멘스키는 아예 신경쇠약에 걸렸는지, 병을 이유로 지휘권을 아직 현장에 도착하지도 않은 북스게브덴에게 넘기고 제1 러시아 야전군에서 이탈하여 자기 영지로 되돌아가 버리는 기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베니히센은 아마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러시아 군의 움직임이 전해지자, 나폴레옹은 이것이 전쟁을 끝낼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는 도주하는 러시아 군의 퇴로를 막고 결정타를 먹이기 위해, 란의 제5 군단을 풀투스크로, 다부와 오쥬로를 그 좌측으로 각각 급파했습니다.  동시에 술트도 우크라 강을 건너 오쥬로를 지원하도록 했지요.  하지만 여기서 나폴레옹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베니히센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은 카멘스키의 명령을 혼자서 거부하기로 결심하고, 풀투스크에 남았던 것입니다.  베니히센에게는 4개 사단, 총 4만이 훨씬 넘는 병력이 있었고, 무엇보다 128문의 대포라는 막강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멘스키의 명령에 따라 후퇴한 것은 제1 야전군의 일부에 불과했던 것이지요.  이런 사정을 모르고 이 대군을 향해 단독으로 뛰어들던 란에게는 총 2만의 병력과 38문의 대포 뿐이었습니다.  사실상 승패는 결정된 셈이었지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가에 면해 있는 작고 예쁜 도시로서, 폴란드의 작은 베니스라고 불린다는군요.) 

 

풀투스크는 나레프 강 서안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언듯 보면 왜 베니히센이 하필 여기서 프랑스 군과 싸우려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까딱하면 동쪽으로 후퇴해야 하는 베니히센으로서는 배수의 진이 될 수도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유가 있었습니다.  어차피 이미 남쪽에서 나레프 강을 건넌 프랑스 군은 서쪽이 아니라 강을 끼고 남쪽에서 치고 올라올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대군으로 알려진 프랑스 군에게 포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한쪽 측면이 강으로 보호되는 것이 유리했지요.  하지만 베니히센이 풀투스크를 결전지로 고른 것은 마을 서남쪽에 있는 언덕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곳이 없이 평탄한 폴란드의 대평원에서 이런 나지막한 언덕은 대단히 중요한 군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역전의 맹장 란도 이 언덕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베니히센은 이 언덕 뒤에 중앙군을 숨겨 두었고, 우익은 톨리 (Michael Andreas Barclay de Tolly ) 장군 지휘 하에 인근 모진 (Mosin) 숲에, 좌익은 바고부트 (Karl Gustav von Baggovut) 지휘 하에 풀투스크 마을 자체에 진을 치도록 했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프랑스 군이 보기에는 러시아 군의 좌익과 우익 정도만 눈에 보였고, 정면의 언덕 위에는 약간의 코작 기병대 외에는 관측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언덕과 마을과 숲에 가려 그 뒤에 얼마나 되는 병력이 있는지 알아볼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12월 26일 정오 무렵의 풀투스크 상황입니다.)

 

 

크리스마스 밤을 남서쪽 즈브로스키 (Zbroski) 마을에서 보낸 란의 제5 군단은, 1806년 12월 26일 아침 7시 풀투스크를 향해 행군을 시작했습니다.  거리는 고작 8km였으므로 걸어서 2시간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실제로는 3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이날 겨율 치고는 유난히 날씨가 따뜻하여, 폴란드의 악명 높은 진창길이 다 녹아 있었던 것입니다.  말을 탄 란이 먼저 현장에 도착하여 풀투스크의 러시아 군 진형을 살폈지만, 그는 언덕이라는 장애물 때문에 베니히센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서에 따르면, 러시아 군은 총퇴각을 시작했고, 지금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러시아 군의 후위대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때마침 내리기 시작한 진눈깨비로 인해 시야가 더욱 제한되었습니다.

 

무릎까지 빠진다는 폴란드 진흙길을 헤엄쳐 오느라 기진맥진한 프랑스 제5 군단이 공격을 시작한 것은 도착한지 1시간 정도가 지난 오전 11시부터였습니다.  란은 정석대로, 눈에 보이는 러시아 군 좌우 양익을 향해 수셰 (Louis-Gabriel Suchet)의 전열 보병과 용기병대를 왼쪽으로, 클레파레드 (Claparède)의 경보병과 트레이아르 (Treilhard)의 경기병대를 오른쪽으로 보내 교전을 시작했습니다.  중앙으로는 베델 (Wedell, Vedell)의 지휘 하에 2개 대대의 전열 보병을 진격시켰습니다. 

 

 

 

(수셰는 원래 리옹의 비단 방직업자의 아들로서,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전형적인 시민 계급 출신이었습니다.  유능한 군인으로서 스페인 전선에도 활약한 그는 그 공으로 나중에 공작의 지위에도 오르지요.  루이 18세의 복위 때도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으나,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 편에 섬으로써 모든 것을 잃어야 했지요.)

 

 

모든 전투가 다 그렇습니다만, 전투 자체는 상당히 격렬하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베니히센도 프랑스 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예비대를 투입한데다, 특히 중앙으로 진격했던 베델의 보병대가 우익의 클레파레드의 경보병을 돕기 위해 오른쪽으로 선회하다가 언덕 뒤에서 뛰어나온 러시아 기병대에게 측면을 노출시키면서 프랑스 군에게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게다가 트레이아르의 경기병들이 우익으로 돌격해들어가자, 예상치 못한 강력한 포병대가 산탄 포격을 퍼부어 경기병들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좌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수셰와 함께 란 본인이 좌익의 공격을 지휘했는데, 란이 직접 이끄는 공격답게 처음에는 러시아 군을 숲 속으로 밀어 붙이고 러시아 군의 대포들까지 노획했으나, 숲 속에서 예상보다 엄청난 규모의 러시아 예비대가 반격을 해오자 노획했던 대포를 버리고 다시 숲 밖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가장 황당한 경험을 했던 것은 베델의 뒤를 이어 중앙으로 진격했던 가잔 (Gazan) 장군의 제2 공격대열이었습니다.  언덕의 능선을 넘어서자마자 그들의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웅장한 규모의 러시아 군 본대와, 그 앞에 주욱 늘어선 포병대였습니다.  곧 그 대포들로부터 무시무시한 대포알들이 날아와 프랑스 보병들을 픽픽 쓰러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오후 2시가 될 즈음에 프랑스 군은 거의 무너지기 일보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진흙길에서 3시간 행군하느라 지친 몸으로 공격에 나선 2만 병력이, 128문의 대포를 앞세운 4만에게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더 큰 문제는 여기서 후퇴를 결정한다고 하더라도, 돌아갈 길도 올 때와 마찬가지로 진흙 늪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지요.  특히 러시아 군은 포병과 기병에서도 프랑스 군을 압도했으므로, 이대로 퇴각할 경우 추격하는 러시아 군에 의해 피해가 엄청날 것이 뻔했습니다.

 

 

 

(오후 3시 경의 상황입니다.  서쪽에 푸르니에 돌탄느의 부대가 나타나 톨리의 부대가 그를 상대하고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하지 못한 구원 병력이 나타납니다.  다부의 제3 군단 휘하 제3 사단 약 6천 병력이 뜬금없이 북서쪽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이들을 지휘하던 푸르니에 (Fournier d'Aultanne) 장군은 원래 다른 러시아 군을 추격하도록 명령을 받고 인근까지 진격했다가, 멀리서 들려오는 포성을 듣고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습니다.  베니히센의 병력은 란의 병력과 푸르니에의 병력을 다 합한 것보다 월등히 많았으므로 이들이 전체 전황을 뒤집어 놓을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특히 푸르니에의 제3 사단은 역시 진흙구덩이를 급히 헤쳐 오느라, 가지고 온 대포는 단 1문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푸르니에의 병력은 란의 숨통을 터주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일단 베니히센은 이 새로운 부대의 출현에 대해 바싹 긴장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병력 규모는 작았지만, 그 위치는 강을 등지고 있는 베니히센을 포위하기 딱 좋은 위치였던 것입니다.   그는 우익의 톨리 장군을 중앙 쪽으로 후퇴시키고 중앙의 예비군을 더 우익으로 투입하여 이 새로운 부대에 대해 응전했습니다.  이에 따라 란에게 퍼부어지던 공격이 반감되었지요.  또 러시아 군 중앙의 강력한 포병대가 서쪽, 그러니까 러시아 군의 우익으로 푸르니에를 상대하기 위해 대거 이동하자, 중앙에 있던 가잔 (Gazan) 장군이 러시아 군의 좌익을 공격할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한때 바고부트 장군의 러시아 군을 밀어내고 러시아 군 대포들을 탈취하기도 했으나, 예비대로 있던 톨스토이 (Alexander Ivanovich Ostermann-Tolstoy) 장군의 기병대가 달려들면서 곧 쫓겨나 다시 대포들을 버리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톨스토이 장군입니다.  이 분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같은 가문 맞습니다.  이 분의 초상화에서 옷깃을 움켜잡은 오른손의 포즈가 좀 오묘한데, 이분은 1813년 프랑스의 방담 장군이 포로로 잡힌 쿨름 전투에서 왼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전후 유럽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인기남으로서 곳곳에 정부와 사생아를 남기셨습니다.  정작 정실부인과는 소생이 없었지요.)

 

 

심한 진눈깨비 속의 이런 악전고투 중 어느 덧 밤 8시 정도가 되자, 어둠을 틈타 프랑스 군의 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선 푸르니에 장군의 제3 사단은 왔던 길을 다시 밟아 다부 원수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후퇴를 시작했고, 란도 오전 10시에 공격을 시작하기 위해 병력을 집결시켰던 위치로 일단 후퇴하여 만신창이가 된 제5 군단을 재정비했습니다.  그는 여기서 더 후퇴하지 않고 밤을 지새웁니다.  왜 란은 더 후퇴하지 않았을까요 ?  프랑스 제1의 맹장이라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둠 속에 그 진창길을 통해 후퇴하려니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어서였을까요 ?  하긴 란 본인을 포함하여, 클레파레드와 베델 등 전투에서 선두에 섰던 지휘관들은 모두 부상을 입을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으니 지치기는 정말 지쳤을 것입니다.

 

 

 

 

(열혈남아 란은 항상 전투를 선두에서 지휘했기 때문에, 많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아스페른-에슬링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의 대포알에 생명을 빼앗기지요.  용기있게 앞장서고, 나폴레옹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던 결과가 그랬습니다.  왠지 씁쓸하군요.)

 

 

란이 후퇴하지 않은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군의 추격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건 사실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군은 공식적으로는 이날 전투에서 700명이 전사하고 1200명이 부상당하는 등, 총 2200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은 당시에도, 또 지금도 많지 않습니다.  아마도 7천, 최소 5천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러시아 군의 피해는 러시아 측에 따르면 포로 1500을 포함하여 3500이었는데, 프랑스 군에 따르면 1800명의 포로를 포함하여 6800에 달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프랑스 군은 사실상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베니히센은 추격하지 않았을까요 ?

 

실은 추격은 커녕, 이날 밤 베니히센은 짐을 싸들고 나레프 강을 건너 동쪽으로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 풀투스크 전투가 러시아 군의 대승이라고 보고하면서, "나폴레옹 본인이 이끄는 6만 대군을 맞아 우세를 점하며 풀투스크를 성공적으로 방어한 뒤, 고립을 피하기 위해 명예롭게 후퇴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던 프랑스 군과 달리, 그는 프랑스 군의 병력을 과대 평가했고 또 그 정도 병력이라면 나폴레옹 본인이 지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성공적으로 한판 떴으니, 이젠 됐다라고 판단하고 부리나케 후퇴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용장 란은 이름 값을 제대로 했습니다.  그와 그의 제5 군단이 너무나 뚜렷한 수적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기 때문에, 베니히센은 프랑스 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란은 현장에 남았지만 베니히센은 후퇴했으므로, 프랑스 군은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전투의 승패는 양측의 피해 규모를 비교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누가 후퇴를 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었으니까요. 

 

 

 

(여기서 어떻게 러시아 군이 700여명의 사상자만 내고 빠져나갈 수 있었는지 지도만 보면 이해가 안되네요.  골리민 전투의 상황입니다.)

 

 

한편, 바로 인근 골리민 (Golymin)에서는 같은 날 다른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뮈라가 지휘하는 3만8천의 프랑스 군이 정반대로 1만7천의 러시아 군에 대해 2대1로 수적 우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뮈라가 러시아 군의 규모를 과대 평가하는 바람에 이 전투도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즉, 소규모 전투 후에 러시아 군이 철수하면서 별다른 전과 없이 끝나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 뮈라는 '난 러시아 군이 5만 정도라고 생각했다' 라고 초라한 변명을 해야 했지요.  

 

나폴레옹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번 작전의 목표였던 베니히센의 러시아 제1 야전군의 포착 및 섬멸에 완전히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아끼는 부하를 거의 사지로 몰아 넣은 셈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비록 다부의 활약 덕분에 대성공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자신의 중대한 판단 착오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 이어 2연타로 발생했으므로, 연전연승을 거듭해오던 나폴레옹으로서는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풀이 죽은 나폴레옹은 폴란드가 자신이 겪어 왔던 그 어떤 전장보다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과, 이런 폴란드의 한겨울 속에서 전투를 계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는 봄이 올 때까지 작전을 멈추기로 결심하고, 각 군단이 겨울 숙영지를 찾아 휴식을 취할 것을 명한 뒤 폴란드의 수도인 바르샤바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기서 그는 뜻밖의 운명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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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흙 투성이의 도로망이 나폴레옹의 발목을 잡았네요.
참고로 폴란드,러시아를 위시한 동유럽지역에섯 겨울이 오기 직전인 10~11월 시기와 봄이온 직후인 3~4월 시기에 도로들이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러시아어로 '라스푸티차'라고 한다네요. 2차대전때 러시아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히틀러의 나치군의 발목을 잡았고, 독소전쟁 때 이시기엔 양군이 전투나 진격을 멈추고, 서로 전열을 재정비하곤 했다네요.

라스푸티차 용어 위키피디아 - http://en.wikipedia.org/wiki/Rasputitsa
가만 보면 나폴레옹에게는 동구의 추위보다는 '따뜻한 겨울'이 더 큰 문제였던 듯 합니다.
머지않아 혹독한 아일라우 전투가 다가오겠군요..
어어... 질문좀요..
폴란드가 프랑스보단 아니여도 지역전체를 통틀어보면 인구도 상당하고 식량도 많은 지역으로 알앗는데...(인구가 30년전쟁때 천만이 넘엇다는 걸 본 기억이 잇어서요) 후진지역이긴 해서 도로망이야 미비햇겟지만 식량은 '징발'하려 햇다면 상당량을 긁어 모을수 잇엇을거 같아요.(많은 인구가 사는 지역인데 척박할거같진 않아서요) 그런데 식량자원 징발량이 부족햇다니... 좀 이해가 안 돼요
원래 동부 유럽은 인구 부족으로 시달리는 지역이었습니다. 15세기 경이 되면 서부 유럽에서는 농노제가 사실상 사라지는 것에 비해 동부 유럽은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되어 19세기 후반에야 없어졌던 이유도, 부족한 농촌 인구를 강제로 붙잡아 두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내달렸던 프로이센의 폴란드 분할지역, 즉 '신 동부 프로이센'은 5만5천 평방km에 당시 인구 약 91만명으로서, 평방km당 인구는 17명 정도였습니다. 같은 기간 프랑스는 64만 평방km에 약 3천8백만명... 인구밀도는 폴란드의 4배에 가까왔습니다. 즉, 프랑스보다는 훨씬 황량한 지역인 것은 맞는 듯 합니다. 게다가 신의 축복을 받은 날씨에 땅까지 기름진 프랑스나 북부 이탈리아에 비하면...
제목도, 내용도 의미심장하군요. 당ㅅ에는 폴란드가 꽤나 깡촌이였나 봅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즐겨보는 여행 전문 채널 Channel T에서도 '폴란드의 아름다운 시골 풍경' 같은 것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지금도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별로 볼 것이 없는 것일까요 ?
팔등이다^^
폴란드가 척박했다라기 보다는 장기간의 정치 불안정이 서민들을 궁핍하게 만든 것 아닐까요?
마치 아프리카 기아난민들이 농사흉년 으로인한 기아라기 보다 군벌들 대립으로 인한 황폐화인 것 처럼요.
그때까지 동구가 서구보다 확실히 경제적 문화적으로 낙후된 것은 맞는 듯 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요. 날씨도 대륙성 기후라 별로 안 좋은 듯...

그나저나 저도 항상 궁금했던 점인데, 당시의 폴란드처럼 땅이 척박한 곳에는 인구가 그에 따라 적은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니까 심지어 사막에 사는 부족들도 소말리아처럼 굶는 일은 없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은 그렇게까지 기아가 횡행하는 것일까요 ? 기후 변화 ? 내전 ? 혹은 유럽인들의 식민지 정책 때문에 인구가 확 불어났다가 유럽인들이 물러나면서 경제가 무너지고 그에 따라 인구가 줄어드는 '자연적 현상'일까요 ? 맨 마지막 경우라고 하면 정말 무섭고 가슴 아픈 일이네요...
예전에 그와 관련된 다큐를 본 적이 있는데요. 자연재해도 있지만, 제일 큰 이유가 미국이나 유럽 국가의 농업 보조금 때문에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농사를 지어봤자 미국이나 유럽 제품과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꽃이나 다른 돈 되는 것을 키운다고요. 여기엔 유럽 회사들의 지저분한 로비도 있다고 폭로하더군요.
란을 보면 자꾸 롬멜이 생각나는건 저뿐인가요? 물론 란은 나폴레옹에게 반말을 할수 있는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죠. 폴란드의 진창에서 배고프고 춥고 우울했을 그랑드 아르메를 생각하면 가엾기 그지 없습니다. 다음 편 기다리며 추천- 집에서, 사업장에서, 휴대폰으로 세번 누르고 갑니다^^
어흑... 뭐 추천수 늘어난다고 생기는 것도 없던데...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아무튼 감솨요.
지적생산물을 무임으로 득하는 1인으로서 가능한 모든 추천 드리는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나시카님 그런데 이 글 시리즈가 시간순 나열인가요,주제별 나열인가요?
처음에는 그냥 제 맘대로였다가, 혹시 나중에 책으로 낼 일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시간 순서대로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혹시 출간하게 되면 사주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 ㅋ
한권은 소장용 한권은 감상용 한권은 포교용으로 3권 사겠습니다 ㅋㅋㅋ
나시카님의 글을 한편도 빠짐없이 정독하고 있습니다.솔직히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이 별로 대단할것이 없는거 같습니다.운칠기삼이랄까요.. 제가 그랑다르메를 지휘했다면 우랄산맥까지 진격헀을거 같습니다.
예 ?? 제가 글을 잘못 썼던가, 아니면 님께서 제 글을 오해하셨든가 둘 중 하나입니다. 나폴레옹은 굉장한 군사적, 행정적 천재이자, 무엇보다 성공을 위한 야망과 그 야망을 실천하는 의지를 가진 대단한 사나이였지요.
패기가 대단하신분입니다. 아이디는 그리 남성적이지는 않으신데요. 또 하필이면 우랄산맥입니까? ;;;; 사심없는 농담입니다.
나폴레옹이 언급하기를 꺼렸던 단 하나의 전투가 다가오고 있군요.
바르샤바의 운명이라하면 역시 나폴레옹의 로맨스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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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인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 제1의 인구 대국인데 폴란드 지역의 인구가 이 수준이면 독립을 하고 싶어도 어려움이 많을 수 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한나라도 아니고 세나라한테 갈라졌으니... 유럽 인구의 6분의 1인 정도인 인구만으로도 유럽을 제패한 프랑스와 결국 그런 프랑스를 몰아낸 러시아 같은 인구 대국의 힘을 보면 새삼 중국 같은 초거대 국가의 곁에 있는 우리나 다른 나라들의 앞으로의 운명에 대한 생각도 듭니다. 나시카님 이번 글도 잘 보고 갑니다.
대국은 결국은 대국이지요.
혹시 기회가 되면 란에 대해서 자세히 다루어 주실 계획은 있으신가요? 아우어슈테트 전투의 다부처럼요 ^^ 나시카님의 글을 읽으며 란이 의협심 쩌는 상남자라는 인상을 받아서인지 흥미가 생기네요. 아마 그 정도 가려면 아스페른-에슬링 전투는 되어야 할까요?
저도 란 특집은 아스페른-에슬링 전투 때가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밀댓글입니다
최근 언급한 '밀레니엄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이라는 책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찌라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정당 이름을 지을 떄 항상 자유라는 단어를 넣는다."

님의 글은 무죄추정의 원칙과 기본 인권에 대한 좋은 내용이네요. 그런데 갑자기 왜 뜬금없이 일베 이야기를 여기에...?
일베유저를 일베충이라 부르는 것이나 전라도 사람들을 홍어라 부르는 것이나 피장파장인 듯요.
어익후.. '홍어' '폭동' '땅크' '피떡갈비'등을 이야기 하는 일베들에게 분개하는건 당연하죠. 뭐 그렇게 따지면, 전쟁나기전에 전라도인을 멸종시키자라는 소리를 주워섬기는 일베(혹은 유사일베)유저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 전라도는 사람이 아니라서 용서가 되나요?? 뭐 물론 인터넷 언어의 폭력성에 대해서는 나그네씨의 의견에 어느정도 동의합니다만. 그 언어적 폭력성이 한쪽에서만 발견된다고 생각하시는건 아주 큰 착각에 불과하죠. 나그네씨와 달리 저는 구체적으로 언급해 보도록 하죠. 물론, 개인적으로 '그런 곳'을 일부러 방문하진 않습니다만, 검색하다보면 그런류의 웹문서는 항상 검색이 되더군요. 노노데모나, 가끔씩 나그네씨가 이야기하는 일베라는 곳에서도 '폭력'적인 단어와 타자를 욕보이는 단어를 쓰더군요. 그럼에도 나그네씨는 자기가 속해있는-혹은 호감을 가지고 있는- 진영의 '추악한 면모'는 애써 언급하지 않고, 다른 쪽의 '추악한 면모'만 거론해서 '침소봉대'하는 것이 과연 공정한 주장일까요?? 또한 일베와 전혀 상관없는 포스팅에 이상한 댓글을 다는 것도 뭐 사실 좋아 보이진 않네요.

물론, 인간이라면 함부로 거론하지 말아야할 그런 폭력적인 언사를 하는 것은 자제해야하죠. 뭐 그런 부분에선 나그네님의 주장에 어느정도 동의를 합니다만, NAZI 와 진보라는 두 집단 사이에서 '내재된 폭력성'의 표출이라는 유사성 이외에 다른 동질성을 발견할수 없음에도 두 집단을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겁니다. 내재된 폭력성은 인류의 보편적 특성중에 하나고, 그 내재된 폭력성을 세련되지 못한 방식으로 표출하는 것을 두고, 두 집단이 동일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심각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뭐 좀더 줄여서 이야기하자면, 그런 폭력적 언사를 키보드로 생산하는 건 나그네씨가 보아온 그런 진보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

물론 얼치기 진보들중에서 '우리'나 '민족'을 주장하며 이들이 과연 진보인가 전체주의자인가 의심이 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만, 대부분의 '진보'는 '우리'나 '민족' 같은 철지난 민족주의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좀더 깊게 파고 들어가자면, 광복이후부터 계속되어온 '민족'과 '국가'를 강조해온 교육의 잔재라고 봐야죠. 아시다시피 ^^ 그런 '민족'과 '국가'는 20세기 이후 지구상의 독재자들이 자기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자주 애용해 왔던는 레퍼토리이기도 합니다.

나그네씨가 진중권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접하는 진보들은 대개 진중권씨와 같이 냉소적이면서, 독재자를 혐오하는 부류죠. 뭐 나그네씨가 발견한 지나치게 폭력적인 어휘를 구사하는 부류도 있겠습니다만, 그들이 진보를 대표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 인류중 일부에게서 발견되는 유사성-폭력적 언사의 표출-을 두고 나치와 진보가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건 정말 지독한 논리적 오류를 범하는 겁니다 ^^
뭐 아무튼 나시카님 글은 늘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
홍어니 어쩌니 하는 애들에게 관심없다면서, 진보 역시나 일부에서 드러나는 문제점을 싸잡아 비판하시는군요 ^^...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다 본인 스스로는 그런 논법을 접하니 나랑 상관없다라고 하시네요. ㅋ 물론 저역시 그런 논리적 오류를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역지사지해보시라고 일베애들의 '일상적인 언어생활'을 소개해드린겁니다. 즉 나그네씨가 NAZI와 닮았다라고 이야기 하는 부분은 진보적인 사람들만이 보이는 문제점이 아니라 얼마든지 자칭 보수계층에서도 나타난다는 겁니다. 물론 저 스스로 보기엔 진보니 보수니 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가 진정으로 진보나 보수인지가 좀 의아스럽긴 합니다만, 뭐 자칭 혹은 타칭으로 진보니 보수니 하니까 그 용어에 대해서 따로 지적하진 않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미군장갑차에 대해서 민족을 끼워넣으려고 하시나 본데 물론 그런 부분에서 민족주의가 다소간 드러난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주의라는것은 '보수'나 '진보'에서 공통분모라는겁니다.-이부분은 우리나라의 교육과 함께 설명을 드렸죠.-또한, 미군 장갑차 사건을 단순히 민족주의적 시각에서만 바라본다면 제대로된 문제제기는 아니라고 볼 수 있지요. 좀 더 다각적인 면에서 바라 보지 않고 단순히 민족주의적 문제에서만 바라본다면 당시 미국과 맺고 있었던 SOFA의 불평등성이나, 미군의 태도등이 당시 촛불시위를 촉발시킨 면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거죠. 단순히 이런사건 하나를 두고 민족주의=좌파라는 동치어를 쓴다면, 스스로 자기 게으름을 자랑하는 것 밖에 되질 않습니다. 뭐 남의 글을 그대로 재활용해서 되지도 않을 억지 논리를 펴는거 보니까 게으르신건 맞는거 같네요..

또 뭐 진보의 공격성+민족주의적 성격이 있으므로 나치다라고 이야기 할거 같아서 한번 더 반박해드리자면, 지나친 공격성을 드러내는 진보는 극히 일부이며, 또한 민족주의적 부분을 강조하는 진보 역시나 극히 일부입니다. 제가 스스로 진보인지 아닌지는 저 스스로도 가끔 헷갈리긴 합니다만, 다른사람이 좌빨이니 홍어니 하는거 보니 진보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생각이 들긴 하네요 ㅋ...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드리자면,

1. 진보만이 그런 지독한 인터넷 댓글을 배설하는게 아니다. 오히려 일베나 이런 계층에서는 더욱 심각한 정도의 욕설과 공격성을 보인다.
2.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진보는 일부이며,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진보 역시나 일부이다.
3. 고로 진보와 나치의 비교는 타당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당신글에 대한 반박을 우째 남의 글을 그대로 활용해서 때우려 하실까?? 좀 성의좀 보이시길 ^^ 남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서 돌려준다고 쓴것은, 본인의 주장이 무엇이며 상대가 상대가 본인의 무엇을 반박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드네요. 글쓴분 글의 논리가 정확하게 무엇이며, 상대가 무엇을 반박하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시고 글을 쓰신다면 상대글을 재활용할 이유가 없지요. 본인이 디디고 서있는 논지와 어울리는 반박도 아니구요. 재반박글 제대로 쓰기 싫으면 쓰지 마시길.. 이정도 수준 노력으로 남의 글을 반박하는 사람을 접하게 되면, 그거 읽는 입장에서 "똥 밟았다"라는 기분이 들거든요.
베충은 유태인이 아니라 나치랑 동류임.
전형적인 베충식 팩트(를 왜곡해서) 끼워맞추기 글을 쓴 걸로 미루어
글쓴이가 베충(=나치)임.

"각설하고 난 반박을 성의있게 할 용기는 없습니다"
용기(X)==>능력(O).
풉.
일베 유저 수준을 잘 보여주고 있군요. 무례함부터 청순한 뇌세포, 그리고 비겁함까지 ㅋㅋ
미안한 이야기지만 '같은 녀석'은 아니랍니다. 뭐 어차피 그런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이런 류의 해명이 얼마나 먹힐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그리고 상대방이 성의있게 반박을 했으면 그에 대해서 제대로 읽어보시고 반박하시기 바랍니다. 왜 남의 글을 그대로 복붙해서 '그대로 돌려준다'는 식으로 반박을 했나요?? 그부분을 지적하니 뜨끔해서 지우셨던데.. 성의있게 반박하기 위해서 필요한것은 '용기'가 아니라 '노력'입니다. 뭐~ 대단찮은 노력입니다만.. 그런 대단찮은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용기' 운운하는건 좀 뻔뻔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군요.
혹시 다음에 나오는게 마리아 발레프스카 부인인가요? 영웅호색이라면 영웅아닌 남자가 어디있겠습니까만ㅎㅎㅎ
그런데 이렇게 서유럽에 비하면 발달하지 않은 도로와 경제 사정이 나폴레옹의 전투방식을 제약하는 것을 보면 역시 영웅은 때와 상황에 따른 것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까지 행군할수있었던 것은 역시 비범한 군재라고 생각되지만요. 그런데 그렇게나 천재였던 나폴레옹은 아일라우 전투 등을 거치면서 자신의 싸움법이 동유럽이나 스페인과 같은 곳에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힘의 한계점을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인데 왜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계속 전쟁을 벌였던 것일까요? 틸지트 조약 이후에 영국과도 화의를 하는 것으로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는 가능성은 애초에 없었습니까? 그리고 푸셰와 탈레랑은 언제 다루실 생각이신가요?
전 나폴레옹이 서양 역사상 최고의 군사 지휘관이라고 생각하는데, 나시카님의 평가는 어떤가요?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첫째로는 승리할 때 보여준 엄청난 전술/전략적 식견 때문입니다.

3면 포위당한 드레스덴에 도착해 2배의 적을 다음날 반대로 3면 포위해버린 드레드덴 전투.

12만의 프로이센군 한가운데 뛰어들어 3만의 신병으로 4번의 승리를 거둔 6일 전역.

2배의 오스트리아군을 기동전을 사용해 분산격파해 압승을 거두었던 이탈리아 전역 등등.



둘째로는 패배때도 거의 필연적인 이유나 엄청난 전력적 열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이 생애 직접 지휘한 전투 중 패배한 건 아슬링-에스팬, 라이프치히, 워털루 뿐이잖아요. 아슬링-에스팬에서는 1.5배의 적을 상대로 무리하게 다리건너 공격하다 실패, 라이프치히는 압도적인 숫적열세에 독일국가들의 배신, 워털루는 치질과 처방받은 아편, 추가로 부하의 삽질이 있었고요.



셋째로는 역대로 꼽히는 다른 지휘관과의 비교우위 때문입니다.

나폴레옹과 역대급으로 거론되는 지휘관은 알렉산더, 한니발, 카이사르 등이 있는데

카이사르는 보급과 전략적 안목이 뛰어났지만 상대가 주로 야만인이었던 갈리아인이었고, 로마군의 전술/전략/장비/훈련도는 유럽 최고였으므로 사실 카이사르가 전술적으로도 특출났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뛰어난 지휘관이지만굉장히 과대평가되었고 벨리사리우스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알렉산더는 생애 고작 3번의 회전만 치뤘으며, 그중 이수스/가우가멜라 전투는 다리우스 3세의 도주로 승리했지요. 두 전투 다 알렉산더가 헤타이로이의 선두에 서서 페르시아군을 붕괴시켰는데 잘못해서 화살이라도 맞거나 창에 찔렸으면(실제로도 부상당했죠), 혹은 다리우스 3세가 나몰라라 명령도 없이 튀는 대신 징집병들을 투입해 소수의 헤타이로이를 막기만 했어도 페르시아군이 압승할 수 있었으니, 용기/전술/상대의 겁이 전부 조화되어 승리했으므로 나폴레옹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요.

한니발은 자마 이전까지는 거의 완벽했지만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결말짓는 승리를 거두는데 실패하고 16년을 보냈고, 자마에서는 오히려 로마군에 비해 불리하지 않은 전력으로도(질 열세 숫적 우위) 코끼리 사용 미스와 평범한 전술로 스키피오에게 패배했습니다.

반면 나폴레옹은 알렉산더/카이사르와 달리 타 유럽국가들에 비해 기술적 우위나 전술적 우위가 없었음에도 기동력을 극대화한 전략적 움직임으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고, 후반기에 가면 유럽 국가들이 나폴레옹의 전술/전략과 군대 조직을 따라했음에도 프랑스 방어전에서 드레스덴 전투나 6일 전역 같이 여전히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줬습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전투를 60회 경험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다른 지휘관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전투를 치뤘고, 직접 지휘한 전투는 3패에 전부 다 불리한 상황이었으니까요.

전 나폴레옹이 한니발/알렉산더/카이사르/벨리사리우스 등보다 뛰어난 서양사 최고의 군사지휘관이고 생각합니다. 나시카님 포스트에서 나폴레옹이 판단미스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때 당시 위성정보나 실시간 통신이 되는 것도 아닌데, 오류야 신이 아닌 이상 필연이고 오히려 혼란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적 군대의 움직임과 비교해보면 실수를 했음에도 과감성이나 결단력, 전술/전략적 식견이 정말로 뛰어다나는 감상이 들어요.



나시카님은 나폴레옹의 군사적 재능을 순위로 매긴다면 서양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들려주실 수 있나요? 조금 유치한 주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궁금해요. (...)
제가 감히 나폴레옹을 평가하겠습니까마는... 저도 나폴레옹의 천재성은 인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애송이 시절이던 제1차 이탈리아 원정 때부터, 별 경험이 없었을텐데도 보여준 작전 지휘의 탁월함과 과감성을 보면 군사계의 모짜르트가 탄생했다 라고 밖에 설명이 안되지요.

뭐니뭐니 해도, 모든 것이 이미 자리를 잡은 19세기 초반에 개인의 역량으로 황제가 되었다는 경력만으로도 이미 넘사벽이지요.
나폴레옹은 비단 서양사 뿐만이 아니라 동/서양을 통틀어 인류 역사상 최고의 지휘관을 논하는 반열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론하신 장군들은 물론 뛰어난 명장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전술/전략/장비 면에서 동등한 상대와 싸워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흠으로 남아 있지요. 특히 축적된 경험으로 시대가 내려오면서 평범한 장군의 질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 완성형이나 진배없는 18세기-19세기 초에 그토록 신기와 같은 전과를 세웠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역사상 최강의 군대 중 하나로 꼽히는 몽골군조차, 자신들과 거의 전략/전술/장비 면에서 동등한 군대와 싸워서 승리한 것으로 보긴 힘들지요.
러시아원정 이전에 급사했으면(...) 분명 알렉산드로스를 뛰어넘는 서양세계관 no.1 지휘관이었겠죠.
케사르는 전략가이자 유능한 행정가이고 한니발은 일류의 전술가라 할수 있을듯 하네요. 반면 나폴레옹은 전략,전술 및 행정적인 분야에서도 역시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최고의 통치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죠. 순수하게 군사적인 재능만 놓고 보면 유럽쪽은 아니지만 이슬람의 검이라 불리던 왈리드를 역사상 최고의 군인이라 생각하는데...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도 뛰어난 지휘관이지만 저는 나폴레옹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그 예로 왈리드의 가장 뛰어난 전투인 얄무크 전투를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알고 가야 할 것은 과거 전쟁 기록들은 숫자 과장이 너무 심한 감이 있다는 점이지요.

예를 들면 알렉산더가 이수스에서 상대한 페르시아군은 높게 잡아봐야 8만일 텐데 기록은 20만이라고 하니 2배의 적을 이긴걸 5배의 적을 이긴 걸로 바꿔놓았지요 __;

왈리드의 최고 승리인 얄무크 전투에서 기록에 따르면 40만을 4만으로 격파했다는데, 사실 비잔틴 제국의 당시 총병력이 12만~15만이었고 군을 이루는 13개의 군단 중 7개가 아나톨리아에 있었습니다. 40만은 커녕 낮은 추산치인 8만만 이끌고 왔어도 비잔틴은 아나톨리아를 죄다 비워두고 나왔다는 말이 되지요. 게다가 전투 전 어트리션으로 인한 병력손실도 커다랬으니. 4만 vs 2만 5천 정도의 추산이 가장 신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얄무크 전투의 첫날은 양측에서 전사들이 일기토를 벌였는데 왈리드 쪽이 죄다 승리했고, 비잔틴 군대 사기가 곤두박질 친 상태에서 보병들의 소모전으로 종료되죠.

이틀날에는 비잔틴의 숫적 우세에 왈리드의 양측 날개가 밀려나면서 병사들이 마을로 튀었는데 아내들에게 돌팔매질(...) 당하고 복귀해 양측 날개를 복구하고요.

셋쨋날에는 오른쪽 날개가 밀려났는데 가까스로 막아내고요.

넷째날에는 중앙이 밀려나고 왼쪽에서는 사거리가 떨어지는 활대결에서 패배해 크게 위기에 처하는데 후방에 있던 여자들이 무기를 쥐고 전선에 참여하면서 기적적으로 버텨냅니다.

이때까지도 왈리드의 군대가 질이 우수했고 종교적 열정으로 사기가 충만했기 때문에 다섯째날 역습을 가해 비잔틴의 후방에 있는 강을 건너는 다리를 틀어막고, 비잔틴의 왼쪽 날개를 전 기병을 동원해 후려칩니다. 비잔틴은 기병대를 이날 전선에서 빼서 후방 예비군으로 배치했는데 이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하고 뒤늦게 벌어진 기병전에서 왈리드 경기병의 기동성에 완패, 보병이 측면에서 싸먹히며 대패하게 되죠. 후방의 다리가 점거당해 도망치지도 못하고요.

왈리드의 뛰어난 수비력과 통솔력, 그리고 상황을 판단하는 정확한 통찰력이 있기는 했지만 5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비잔틴은 내내 기병대의 1/3을 예비로 돌려놓고 쓰지를 않았습니다. 중기병이라 돌격력이 있는데 왈리드의 진영이 붕괴 직전까지 가도 예비 기병대들은 놀고만 있었고(...) 운명의 다섯째날은 그 예비 기병대로 무엇을 할려고 했는지 오히려 숫자를 늘렸죠. 결국 기병대가 뭉텅 빠진 상황에서 이미 4일의 전투 동안 왈리드의 군대보다 무수히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보병이 측면을 공략당하며 대패했고요. 숫적 열세라는 점이 있었지만 4일 모두 전열이 무너질 정도로 아슬아슬한 감이 있었지요. 또 후방의 다리를 점거하는데도 비잔틴군이 반응을 안한 건 바한(바진틴군 사령관)의 무능함을 들어내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렇게 빛나는 승리임에도 왈리드의 천재성으로만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왈리드가 생애 50회의 전투를 치뤄 모조리 무패라고 하지만 전적으로 보면 나폴레옹도 3패 빼고 전승일 뿐더러, 아우스터리츠에서 보여준 기만작전, 6일전역에서 4배의 적 포위망 사이로 뛰어들어 기동하며 적을 4번 무찌르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2배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전략, 드레드덴 전투에서 2배의 적에게 4배의 손해를 끼치고 패배시킨 전술 등등 얄무크 전투와 나폴레옹의 승리들을 비교하면 나폴레옹이 더 뛰어난 전술/전략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물어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초강대국이었던 비잔틴,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를 거둔 왈리드는 알렉산더에 준하는 명장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상기 이유로 나폴레옹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병력의 질이나 전술이 같으면 1.5배~2배 이상의 적을 격파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2배의 적을 박살낸 한니발의 칸나에나 알렉산더의 이수스가 칭송을 받는 거고, 중국의 사기를 볼때 5천으로 70만을 격파했느니 3만으로 60만을 격파했느니 하면 '개소리'라고 욺조리며 썩소를 짓게 되는 거고요. (....) 정상적인 명장이라면 그런 전투를 피하려고 할 겁니다. 그런데 왈리드는 생애 치룬 50회의 전투 대부분이 기록에 따르면 압도적 숫적 열세로 치룬 전투들입니다. 페르시아와 로마군이 장비에서 뒤졌을리는 없으니 과장된 숫자들에 대해서 조금 상식적으로 봐야 하는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확실히 왈리드는 분명 대단한 명장이긴 하지만 그 전과에 대한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는다면 왈리드에게 박살난 인명이 페르시아와 비잔틴을 합쳐 거의 100만 가까이 된다는...실제로 무장과 훈련이 제대로 갖춰진 실전투병력을 50만씩 굴리는건 현대국가의 총력전 체제에서도 어마어마함 부담이죠. 더욱이 평시주둔이 아닌 전쟁을 치르고 있는 군대라면 더더욱 돈이 많이 들어가고요. 사상 유례없는 경제대국 미국의 재정부담과 경제위기에 단단히 일조한 베트남전 이라크전의 연평균 파병규모도 40~50만 수준이었다는걸 생각해보면....고대~근대에 이르기까지 일정수준의 무장과 훈련을 갖추고 진짜로 야전에서 기동하는 '실병력'의 숫자는 명백한 한계가 존재하죠. 근대에 이르러 국민군의 효시라는 혁명 프랑스가 가장 많을땐 100만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하지만...이게 절대로 일정수준의 훈련을 마치고 제대로된 무기를 가지고 제대로 보급을 받으며 당장 전투를 치를수 있는 그런 군대가 100만이 있었다는게 아니죠. 거의 반은 걍 징집명부에나 존재했습니다. 하물며 중세기 비잔틴이나 페르시아는....아니 얘네가 아니라 그 머릿수 많다는 중국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죠.
확실히 알렉산더와 비교하자면 알렉산더는 분명 전쟁의 천쟁이긴 했지만 이미 수차례의 실전을 통해 페르시아 보병보다 우수함을 '검증받은' 그리스 중장보병, 그것도 아버지 필리포2세가 더욱 강력하게 개량한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이끌었고 카이사르와 비교해도 마리우스 군제개혁 후의 로마군을 이끈 카이사르가 갈리아 부족들보다 질적으로 우수함을 확보한 상태였다고 볼 수 있지요. 반면에 나폴레옹은 비록 혁명기의 프랑스 또한 그리보발의 포병개혁과 현대적인 사단편제등 혁신적인 면모를 갖췄다고는 하나 아직 이 새로운 전술 혹은 새로운 군대가 기존의 유럽군대보다 우월하다고 확실히 판명나지는 않은, 말하자면 '입스타'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준이었죠. 나폴레옹은 이미 오랜세월 수많은 전투를 거쳐 우월함을 검증받은 그리스 팔랑크스,로마 레기온이 아니라 그 누구도 위력을 제대로 시험해보지 못하거나 이제 막 슬슬 효과를 입증하기 시작하는 단계였던 국민 개병제의 징집병을 이끌고 한니발,알렉산드로스,카이사르가 평생 거둔 승리들을 모두 합친 것과 맞먹는 승수를 쌓았으니, 진정 괴물중의 괴물이요 천재중의 천재라고 아니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우와 정말 글잘쓰네요!저두 나폴레옹에대해관심이많아서우연히 들럿는데 필력이장난아니시네여 ㄷㄷ 실례지만 그냥평범한직장인이신가요 ??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