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시대

nasica 2016. 4. 24. 21:56

지난 편에서는 베르티에의 실수로 위기에 처한 다부의 제3 군단의 상황과, 그리고 1809년 4월 17일 드디어 바이에른 현장에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나타나는 장면까지를 보셨습니다.

나폴레옹은 저녁 무렵에 프랑스군 임시 사령부가 있던 도나우뵈르트에 도착하여 베르티에가 펼쳐 놓은 프랑스군 배치의 꼬라지를 보고 크게 화를 냈습니다.  이 배치는 마치 다부의 군단을 먹기 좋게 손질해서 오스트리아군 앞에 갖다 바친 꼴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에 대해 화를 내봐야 소용이 없었고, 실용주의자답게 그는 즉각 명령서들을 발부하여 상황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나폴레옹의 명령서는 그가 생각나는대로 막 내뱉는 것을 서기들이 진땀을 흘리며 속기로 받아쓰는 형태였기 때문에 그걸 조각조각 나눠 받는 사람은 상황에 따라서 오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여기저기로 부지런히 날아다닌 명령서들의 취지는 나름 간단했습니다.  레겐스부르크(영어 명칭은 Rastisbon 라티스본)에 있는 다부의 제3 군단과 르페브르의 제7 군단은 즉각 서쪽으로 이동하고, 레흐강 서쪽에 모인 프랑스군 본진은 대거 동쪽으로 이동하여 서로 합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도나우강변에 위치한 레겐스부르크의 모습입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은 상크트 페터 성당입니다.)



4월 17일 저녁에 씌여진 이 명령서를 들고 밤새도록 말을 달린 전령이 헥헥거리며 다부에게 명령서를 전달한 것은 다음날인 18일 아침 무렵이었습니다.  명령서의 내용은 즉각 도나우강 남안으로 도강한 뒤 강을 따라 서쪽으로 전속력 후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부는 당장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군단은 베르티에의 명령에 따라 레겐스부르크로 진격해오느라고 많이 늘어져 있어서, 일부 병력은 아직 레겐스부르크에 도착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바로 남쪽 가까이까지 왔다는 것을 안 상태에서, 출발이 약간 늦어지더라도 모든 병력을 집결시킨 뒤 출발하는 것이 차라리 덜 위험하다고 다부는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다부의 제3 군단은 18일 내내 움직이지 않았고, 병력이 다 모인 19일 새벽이 되어서야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벌어진 토이겐-하우젠(Teugen-Hausen) 전투에서 이 결정이 옳았음이 드러납니다.

16일 가볍게 란츠후트 전투를 치르고 이자르강을 건넌 오스트리아군은 18일 저녁 레겐스부르크 남쪽 불과 25km 정도 남쪽까지 접근한 상태였습니다.  강행군을 할 경우 불과 6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지요.  만약 오스트리아군이 다부의 고립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강행군하여 그의 퇴로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다부의 상황이 오스트리아군에게 넘어가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다부보다 더 서쪽에 있던 제7 군단에서 레겐스부르크로 가던 전령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요격되면서 르페브르가 다부에게 보내는 편지가 카알 대공의 손에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이 편지에는 오스트리아군에게 포위될 위기에 처했던 다부의 절박한 처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즉, 그 편지에서 르페브르는 레겐스부르크 남서쪽 지역인 노이슈타트(Neustadt)와 로르(Rohr) 사이에 1개 사단을 파견하여 유사시 다부를 지원하겠다고 밝히고 있었습니다.  





(노이슈타트와 로르, 그리고 란츠후트와 레겐스부르크의 위치를 보십시요.  지도에서 파란 반원형 화살표는 다부의 탈출 경로를, 그리고 빨간 직선 3개는 오스트리아 군단들의 대략적인 진격 방향을 표시합니다.   보시다시피 충돌각이 조금 애매합니다.  생각해보면 16일 저녁에 란츠후트를 통해 이자르강을 건넌 오스트리아군이 무려 2일 뒤인 18일 저녁까지 불과 35km 정도를 전진하여 겨우 로르까지 온 것을 생각해보면, 빨라졌다는 오스트리아군의 행군 속도가 여전히 너무 느렸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18일 밤 이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카알 대공의 원래 계획은 도나우강변까지 똑바로 북상하여 다부의 퇴로를 끊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 내용을 보고 카알 대공은 다소 의외의 결정을 내립니다.  편지의 내용을 읽고는, 다부가 레겐스부르크에서 하루 더 버티거나, 혹은 아예 레겐스부르크에서 농성할 것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좀더 빨리 레겐스부르크로 접근하기 위해 행군 방향을 살짝 우측, 즉 북동쪽으로 틀도록 했습니다.  이 작은 판단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연히 다부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의 군단은 후위대까지 모두 결집하자, 19일 새벽 5시에 일찌감치 행군길에 나섰습니다.  다부는 부대를 총 3개 대열로 나누어 가장 느린 치중대 및 포병대는 모두 맨 우측, 도나우강 남안의 강변길을 따라 행군하도록 했습니다.  중앙은 모랑(Charles Antoine Morand)과 생틸레르(Louis-Vincent-Joseph Le Blond de Saint-Hilaire)의 사단들이 맡았고, 맨 좌측이자 맨 남쪽은 구댕(Charles-Étienne Gudin de La Sablonnière)과 프리앙(Louis Friant)의 사단들이 맡았습니다.  모두 역전의 용사들이자 매우 뛰어난 지휘관들이었지요.  병력은 총 2만 8천이었는데, 그 중 2천명 1개 연대는 루이 쿠타르(Louis Coutard) 대령의 지휘 하에 뒤에 남겨져 레겐스부르크를 지키는 암담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무려 6만의 병력 총 3개 군단을 동원했습니다.  다만 이들은 다부가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여 여유있게 아침 6시가 훨씬 지난 시간에 출발했습니다.  이 3개 군단은 로르(Rohr)에서 출발하여 북동쪽의 레겐스부르크를 향해 천천히 행군했는데, 이들이 조금 더 빨리 출발했거나 혹은 그냥 원래 계획대로 모두 똑바로 북쪽으로 행군했었다면 다부의 프랑스군 제3 군단과 정면 충돌하여 그들을 박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부의 군단은 이미 오전 9시 경에 아슬아슬하게 오스트리아군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최소한 다부의 맨 우측 종대의 치중대는 아무 충돌 없이 빠져 나갈 수 있었습니다. 





(서로 아슬아슬하게 비켜 지나가는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의 상황입니다.  다부의 프랑스군은 남서쪽으로 탈출 중이었고, 오스트리아군은 다부를 잡기 위해 정반대인 북동쪽으로 진격 중이었습니다.)



오전 9시가 되자,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 척후들은 비로소 서로가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옆구리를 맞대며 비켜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부는 즉각 명령을 내려 전군에게 행군 속도를 더욱 빨리 하도록 했고, 모랑과 프리앙의 사단들도 결국 종이 한장 차이로 호랑이 아가리를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피를 흘리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우익 부대들은 프랑스군의 콧배기도 보지 못하고 하루를 허비했으나, 중앙부에서 행군하던 생틸레르의 사단과 오른쪽 구댕의 사단은 결국 오스트리아군의 좌익과 충돌 코스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고작 2개 사단으로 오스트라아군 2개 군단 총 4만 이상을 상대해야 하는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1809년 4월 19일 애매한 충돌각이 빚은 전투, 토이겐-하우젠 전투입니다.)



그러나 뜻 밖에도 프랑스군은 이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매우 잘 싸웠습니다.  아무리 훈련이 잘 된 부대라고 해도 3대 1 이상의 병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이 잘 싸운 것은 먼저 몽브렁(Louis-Pierre Montbrun) 장군의 기병대 약 4천이 교묘하게 로젠베르크(Franz Seraph of Orsini-Rosenberg) 대공의 오스트리아 제4 군단 전체를 집적거리며 요리조리 유인하여 거의 하루 종일 잘 끌고 다닌 것이 가장 컸습니다.  덕분에 로젠베르크의 제4 군단 전체는 이날 사실상 아무 것도 한 것 없이 헛발짓만 한 셈이 되었습니다. 



(로젠베르크 대공입니다.  명문 귀족 가문에 태어났다는 것 빼고는 딱히 큰 일을 하신 분은 아닙니다.  이런 분들이 나폴레옹 휘하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에 맞서 지휘를 해야 했으니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생틸레르의 사단은 호헨촐레른(Prince Friedrich Franz Xaver of Hohenzollern-Hechingen) 대공의 제3 군단을 상대해야 했습니다.  양군은 나지막한 2개의 능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했는데, 여기서는 그야말로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전선이 비교적 좁아서 한꺼번에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없었던데다, 호헨촐레른이 미숙하여 제3 군단 전체 병력을 효과적으로 투입하지 못했던 것이 프랑스군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소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데 매우 익숙한 다부의 제3 군단 병사들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대군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던 이들은, 다부가 친히 지원군을 끌고 현장으로 달려와 힘을 보태주자, 분전 끝에 놀랍게도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고 오후 5시 경에는 오히려 추격에 나섰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버(Josef Bieber) 장군의 여단이 새로 도착하여 반격했고, 또 때마침 몰아친 세찬 폭풍우 덕분에 프랑스군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호헨촐레른 대공입니다.  이분도 역시 태어나보니 귀족 가문이더라는 스토리 외에는 딱히 인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전투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프랑스군이 약 2천5백의 사상자를 낸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약 3천5백의 사상자를 낸데다 전투 현장에서 쫓겨나 굴욕적인 후퇴를 한 것입니다.  이 토이겐-하우젠 전투는 풍부한 전투 경험으로 단련된 프랑스군과 신규 징집된 오스트리아군의 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 지휘관들도 용감하게 제1선에서 싸우느라 뤼시냥(Franz Joseph, Marquis de Lusignan) 후작을 비롯한 많은 고위 지휘관들이 중상을 입었으나, 아무래도 노련한 프랑스군 지휘관들의 솜씨를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뤼시냥 후작입니다.  이 양반은 특이하게도 스페인 귀족 출신으로 합스부르크의 군문에 투신한 인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뛰어난 재주가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고, 1797년 북부 이탈리아 리볼리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이미 크게 혼쭐이 난 것이 주요 경력이었습니다.  그는 이 토이겐-하우젠 전투에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고, 그 결과 군에서 은퇴해야 했습니다.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그의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를 원수 계급으로 승진시켜 줍니다.)



이 전투 결과는 그렇지 않아도 너무 소심하다는 평가를 받던 카알 대공의 멘탈을 산산히 부숴 놓습니다.  그는 다부의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고 자신의 포위망을 보무도 당당하게 벗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19일 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일련의 명령서들을 작성했는데, 그 명령서들은 이미 보헤미아로의 후퇴를 전제로 작성된 것이었습니다.  동일한 시각, 무사히 오스트리아군의 포위망에서 탈출한 다부의 군단이 토이겐에서 야영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나폴레옹도 열심히 명령서를 작성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며칠 동안 이 두 총사령관의 희비는 크게 엇갈리게 됩니다.


나시카님 늘 블로그 잘보고있습니다.이번에 처음 댓글을써보게되었습니다.나폴레옹 전쟁사를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보기시작하여 어느새 대학교에입학했습니다. 사실 꿈이 군인이었기에 육사를 지원했으나 탈락하게되어 졸업후 임관할수있는 군사학과에지원하여 생활하고있습니다. 사실 군인으로 진로를 확정하는더에도 나시카님의 블로그가적지않게 영향을 주었습니다.덕분에 저도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아직 미숙하지만 열심히공부하여 멋진군인이 되어보고싶습니다. 늘 좋은글 감사합니다. 미세먼지,환절기에 건강조심하십시오.
이런, 육군 사관학교를 떨어지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안타깝네요. 실은 저희 애도 사관학교를 꿈꾸고는 있습니다만, 합격의 길은 험난하여 과연 뜻대로 될지는 미지수입니다. 저희 아이에게 하는 이야기가, 니가 하고 싶은 것이 군인이라면 길은 많다, 능력이 받쳐주면 사관학교 가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 되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ROTC든 학사 장교든, 혹은 아예 부사관으로든 직업 군인이 될 길은 많다고 이야기를 해줍니다.

제가 구민성님의 인생에 대해 조언을 줄 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꿈을 가지고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좋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 뾰족한 꿈이 없이 그냥 세상에 등 떠밀려 산답니다. 그래서 불행하지요. 실은 저도 고3 초까지 해군 사관학교 진학이 꿈이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그냥 대학에 갔었지요. 지금도 가끔 그때 정말 군인의 길을 갔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합니다. 최소한 지금처럼 뚱보가 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은 듭니다 ㅋ

저는 개인적으로 군인 지망생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영화가... 톰 크루즈 주연의 A few good man 입니다. 그와 비슷한 영화로 1954년에 만들어진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흑백 영화 The Caine Mutiny 도 있습니다. 케인 호의 반란은 최근에 케이블 TV에서 자주 방영해주더군요. 둘다 전투 장면은 거의 없지만, 군인에게 명령과 복종, 책임과 명예란 무엇인가를 생각해주는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꼭 찾아봐야겠습니다.나시카님의 자제분께서도 군인이 꿈이라고 하시니 꼭 원하시는대로 이루셨으면 좋겠습니다. 정성스런 답글 정말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ㅎ
늘 댓글 고맙습니다.
나시카님 항상 잘보고 있어요. 몇 번씩 예전 걸 보고 그럽니다.오늘은 너무 보고만 가는 것 같아 댓글남겨요~
부족한 글 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비밀댓글입니다
비밀댓글입니다
역시 대육군을 꺾으려면 한참 멀었군요.
오늘도 잘읽고쉬었다가 갑니다 화이팅
전혀 모르는 전투였는데 이렇게 알게 되네요. 만약 카알이 다부를 포위해 궤멸시켰다면 이후 향방은 어찌 되었을까요? 사기도 오르고 작전 구상도 달라졌겠죠? 아스펜-에슬링이나 최종적으로 바그람까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가능성이 엿보입니다. 구민성님과 나시카님의 댓글이 인상깊습니다. 아주 훈훈한 브로맨스지 말입니다. 추천 꾹 누르고 갑니다.
역시 실전 경험에는 아무리 좋은 가문,배경도 당할 재간이 없군요!
일찍부터 실력 중심의 체계를 구축한 나폴레옹의 나름 훌륭(?)한 점의 하나...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때도 아슬아슬하게 넬슨함대를 피하더니 여기서 이런 행운을 잡네요. 정말 나폴레옹은 하늘이 낸 인물은 인물인가 봅니다.
아니면 이것도 그의 실력이었던 걸까요??
잘 새겨 보고 갑니다.^^
다부는 전투에선 한 번도 패한적 없는 불패 장군 중에 하나라더니 여기서도 또 한 번 혜안을 보여줬군요.

전투에 한정해서 전술적 지휘에선 나폴레옹 보다 다부가 나은거 아니냐는 말도 있던데

나시카님이나 다른 분들은 어찌 생각 하시는지요?
나폴레옹의 위대함은 전투 현장에서의 천재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서 나폴레옹은 위인이고 다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부가 보여준 군단장으로서의 능력치는 정말 존경받을 만하다고 봅니다.
불금날 밤에 다녀 갑니다.
소중하고 값진 자료 고맙습니다.
편안한 밤 누리시기 바랍니다.
군신 나폴레옹의 위력인가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