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방

상운 2016. 1. 6. 14:59

화류춘몽花柳春夢) / 이화자(李花子) 조명암 작사 / 김해송 작곡 꽃다운 이팔소년 울려도 보았으며 철없는 첫사랑에 울기도 했더란다 연지와 분을발라 다듬는 얼굴위에 청춘이 바스러진 낙화신세 (마음마저 기생이란) 이름이 원수다 점잖은 사람한테 귀염도 받았으며 너젊은 사람한테 사랑도 했더란다 밤늦은 인력거에 취하는 몸을실어 손수건 적신연이 몇번인고 (이름조차 기생이면) 마음도 그러냐 빛나는 금강석을 탐내도 보았으며 겁나는 세력앞에 아양도 떨았단다 호강도 시들하고 사랑도 시들해진 한떨기 짓밟힌 낙화신세 (마음마저 썩은것이) 기생의 도리냐 [예비음원]
    이화자(李花子, 1916년~1950년) 출생지와 학력 정확한 생년 등 개인 신상에 대한 내용이 모두 전해지지 않는 가수이다. 13세 무렵부터 술집에서 작부로 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정식으로 가수가 된 것은 20세 전후이던 1935년이었다. 포리돌레코드의 김용환이 현 인천 부평구 지역의 한 술집에서 노래를 하던 이화자를 발굴하여 신민요 “초립동“ 으로 가요계에 데뷔시켰다. 신민요 장르에 강했던 포리돌 레코드에서 “천리몽”을 발표한 뒤 1938년 오케 레코드로 옮기면서 최고 인기의 가수에 반열에 오르며 김용환 작곡의 “꼴망태 목동”과 “님 전 화풀이”가 대표곡으로 발표되었다. 이화자는 잡가풍의 신민요와 애닯은 트로트에 고루 능하여 많은 인기를 얻었는데 주로 여성 적인 넋두리조로 신세 한탄을 하는 내용의 서민적 노래를 불러 호소력이 뛰어났다. 자전적인 가사를 담은 자서곡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어머님 전 상백”과 기생의 한 많은 삶을 그린 “화류춘몽”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가 종료된 후에는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태평양 전쟁 중에 취입한 친일 가요 “목단강 편지”가 마지막 히트곡이 되었다. 1940년대부터 손을 댄 아편에 중독되어 건강이 많이 상하고 잠깐의 결혼 생활도 실패로 끝나면서 폐인과 같은 생활을 했다. 주로 무대 공연으로 연명하다가 1950년을 끝으로 활동 기록이 없는데 이 무렵 홀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대 그시절 귀한 노래 지금은 어떤 유명가수가 불러서 히트치고 가요계 를 휘젖고 다니는데 이른 개척자의 가수가 있었으니 후대 가수들은 지 노래처렴 힘을 쓰는것 갔다 좋은 노래 남겨주신 이화자 님께 .......?
옛날 여인네 그대로 노래도 숨죽여 하는군요 시대가 그러니까 님의 노래 사랑합니다 님의 명복을 빕니다
옛노래는 언제 들어도 추억이 묻어납니다
대단한 한맺힌 여인의 일생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