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방

상운 2016. 1. 29. 16:16

유랑극단 / 백년설 박영호-작사. 전기현-작곡 [예비음원 (원곡)] 유랑극단 / 백년설 (1960년대 개사 재취입) 박영호-작사. 전기현-작곡 한 많은 유랑극단 우리들은 흐른다 쓸쓸한 가설극장 울고 웃는 피에로 낮설은 타국거리 군악소리 울리면 가리라 정처 없이 가리라 가리라 [눈오는 북쪽 꽃피는남쪽 벌판에서 벌판으로 항구에서 항구로 흘러가는 유람극단 뚫어진 천막 속에 고향별을 바라보면 어머님 야윈 모습이 가슴속에 사무쳐-------] 분바른 얼굴위에 구겨지는 주름살 넋두리 꿈을 파는 포장살이 내 청춘 차디찬 조각달을 마차위에 싣고서 가리라 울며불며 가리라 가리라 열어논 들창마다 손짓하는 아가씨 내 가슴 넘는 정을 바칠 곳이 없구나 오늘은 도미오요 내일밤은 동호제 가리라 한정없이 가리라 가리라
    백년설(白年雪, 1914 ~1980) 일제 강점기에 주로 활동한 한국의 가수로 본명은 이갑용(李甲龍)이다. 경상북도 성주에서 출생하여 성주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학창 시절부터 문학과 연극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일본에서 "유랑극단"을 취입하여 가요계에 데뷔하였고 "두견화 사랑" "마도로스 수기" 등을 연속 유행시켰다. 대표곡은 1940년 발표되어 이후 오랫동안 널리 불린 "나그네 설움"과 "번지없는 주막"이며 이 밖에도 "산팔자 물팔자" "아주까리 수첩 등 히트곡이 많이 있다. 1940년대를 대표하는 남자 가수로 활동하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인기를 모은 남인수, 김정구, 진방남의 목소리가 또랑또랑한 편이라면 백년설은 음정을 흔들어 구수하면서도 듣는이에게 절규하는 듯한 독창적인 호소력이 특징이다. 친근한 맛을 주는 백년설의 창법은 서민적인 취향의 노래와 잘 어울렸다. 1941년 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아들의 혈서"등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독려하는 친일 가요를 불러 친일파논란이 일었다. 당대의 최고 가수였던 백년설은 남인수, 박향림과 이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러나 그는 친일 행위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1958년 대한가수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을 지냈으며 1961년에는 한국연예협회 기획분과 위원장을 맡았다가 1963년에 은퇴했다. 가수인 심연옥과 결혼 한 뒤 여호와의 증인에 귀의 이후 연예계 관련 활동을 전면 중단하고 국제 무역을 운영하다가 1979년에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함께 이민을 갔다. 그후 1980년에 미국에서 사망했다. 고향 성주에 생가가 남아있었으나 지금은 헐렸고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로 시작되는 "나그네 설움"의 가사를 새긴 노래비가 건립되어 있다.